RC 석세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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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보컬이자 프론트맨 이마와노 키요시로다.
1. 개요
2. 상세


1. 개요


RC Succession, RCサクセション.
일본의 록밴드. 60년대 후반부터 시도된 일본 록의 태동에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는 그룹이다. 축약어로 RC라고도 불리는 편이다.

2. 상세


고등학교 시절의 이마와노가 학교에서 결성한 밴드 'The Clover'가 전신으로서, 몇 차례의 해체와 멤버들의 탈퇴를 겪은 뒤 최종으로 결성된 이름 'The Remainders of the Clover Succession'이란 이름을 거쳐 이를 줄인 'RC Succession'이란 이름이 이니셜스런 이름의 유래다.
이들이 보여준 파격적인 패션과 무대 퍼포먼스, 특유의 쇼맨쉽과 저항 정신, 그리고 라이브 문화는 현재의 일본 록을 확립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시대의 전설 핫피 엔도라는 밴드는 산뜻한 가사를 지향하는 일본 가요의 서막을 알렸다면, 이들은 반항적인 정신으로 쓰여진 가사로 노래 불렀다는 면에서 차이점이 있다.
유명한 앨범으로는 라이브 앨범인 Rhapsody[1]와 영미권 록을 자신들의(일본적인) 스타일로 편곡하여 수록한 Covers 등이 있다. [2] 음악사적으로 스튜디오 앨범보다 라이브가 중시된다는 점, 음악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꾸준히 표현해왔다는 점에서는 미국의 그레이트풀 데드와도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음악적으로는 초창기엔 포크 록을 지향했으며, 80년대에는 특유의 반항 정신으로 인해 펑크 밴드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블루스와 소울 등의 흑인 음악[3]에 기반을 둔 로큰롤 밴드로 우리가 펑크 하면 흔히 생각하는 섹스 피스톨즈 등의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상적으로는 꽤 영향을 받았다.) 또한 '록의 일본화'를 상당히 중시하여 Covers 앨범에서는 전 곡을 영어가 아닌 일본어로 번안하여 부르는 등 일본적 감수성을 지키려는 면모도 있었다. 이외에도 비주얼적으로는 뉴욕 돌스 등 글램 록과 결합된 형태의 초창기 펑크 뮤지션들을 모방하였다.
실제로 노래를 들어보면 피아노와 브라스 섹션의 비중이 굉장히 크며, 엔카스러운 면모도 곳곳에 드러난다. 지극히 펑크스러운 무대 매너도 엿볼 수 있다.
그들의 음악 스타일이 잘 드러나는 スローバラード와 흑인 음악에서 받은 영향을 드러내는 Sweet Soul Music
그들의 무대 매너를 엿볼 수 있는 SUMMER TOUR - 80년대 전성기에는 TV 생방송에서 카메라에 침을 뱉어 방송 정지를 당하는 일도 있었다.
대표곡 중 하나인 雨上がりの夜空に
그들을 상징하는 요소 중 하나인 라이브 부틀렉 - 라이브의 제왕으로 불렸던 만큼 수많은 곳에서 공연을 치뤘고 그것이 팬들에 의해 상당수 음원 혹은 영상으로 남아 있다. 미국의 '데드헤즈'들을 연상케 하는 부분.
Covers의 첫 곡인 明日なき世界(니코동 영상)
대외적으로 유명한 80년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초기의 RC
그나마 핫피 엔도와는 달리 밴드의 분량은 철저하게 이마와노에게 집중되어있는 독재 밴드였기에 [4] 일본 밴드치고는 수명은 제법 유지된 편. 68년에 결성되어 1991년 활동이 중단되기까지 일본음악사의 산증인을 맡아왔던 밴드라 할 수 있다. 그러다 2009년자로 이마와노가 후두암으로 별세함으로서 밴드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그의 장례식에는 5만명에 달하는 인파가 몰렸는데, 미소라 히바리의 장례식때의 기록에 필적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마와노는 원자력 발전에 반대하는 대표적인 인사였고, 체르노빌 원자력 사고에 충격받아 외국곡을 번안해 'Summertime Blues'라는 노래를 반원전 운동으로 부른적이 있었다.라이브
또한 보컬 이마와노가 더 타이머즈라는 솔로 밴드를 할 무렵, 자신의 곡을 금지시킨 FM 도쿄를 TV 생방송 라이브에서 노래에 비속어[5]를 섞어 비판한 사건도 유명하다. 해당 영상 사전에 합의하지 않은 즉흥적인 개사였기에, 라이브가 끝난 후 MC가 당황하여 수습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반항 정신으로 똘똘 뭉친 그의 일면을 보여주는 부분이다.[6]
덧붙여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평소에 라이브에서 조총련 관련 노래를 부르거나 기미가요를 펑크 버전으로 편곡해서 부른 경우도 있다. 현대에야 기미가요를 부르는 것만으로도 우익 논란에 휩싸이기 충분하지만, 당시에는 기미가요를 펑크같은 경망스런 편곡을 일삼는것을 불경하게 여겼으며 이를 신성시하는 일본 구세대 우익들을 도리어 조롱하는 행동이었다.[7] 이외에도 이마와노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친분이 있어 서로의 앨범에 자주 참여하였고, 둘이서 이케나이 루주 매직이라는 싱글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밤의 히트 스튜디오'에서로 추정되는 라이브 영상
이와마노 키요시로의 사촌 동생은 애니메이션 감독 니시쿠보 미즈호다.
[1] 롤링 스톤 재팬 선정 100대 명반에서 2위를 차지하였다. 당시의 일본 록이 얼마나 거대한 에너지를 표출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앨범이다. 오리콘 최고 순위는 47위.[2] Covers의 경우는 RC의 유일한 오리콘 1위 앨범으로, 발매 전 선행 싱글이었던 Love me tender가 정치적 이유 - 원전 관련 - 를 이유로 발매 중지되었던 사건으로 유명하다.[3] 보컬 이마와노는 자신에게 영향을 준 싱어로 오티스 레딩을 자주 언급하였다.[4] 이마와노 독주 체재로 알려져 있지만 기타리스트인 나카이도 레이치 - 오타쿠들 사이에서 serial experiments lain의 사운드 트랙을 담당한 것으로 유명 - 도 음악적으로 큰 기여를 하였다.[5] 좋게 말해 비속어지 실상은 그냥 상욕 이다(...)[6] 부랴부랴 수습하는 사회자는 보도 스테이션의 간판이었던 아나운서 후루타치 이치로(古舘伊知郎)인데, 훗날 회고하길 잊을 수 없는 사건이라면서 사실 리허설 때 낌새도 이상하고 뭔가 꾸미기는 하는 것 같았지만 설마하니 이 양반들이 저지를 줄은 몰랐다고(...). 그럭저럭 사과하고 넘어간 생방송 상황과 달리, 후폭풍은 다른 포인트에서 터졌는데 이마와노 키요시로와 같은 소속사의 아티스트 중엔 당시 러브송의 대가로 일컫어지던 후배 뮤지션 마츠토야 유미가 앨범을 발표하고 한참 프로모션 중인 상황에서 사건 후 FM 도쿄에서의 프로모션과 선전이 금지되었다(...). 후에 이마와노가 따로 사과했다고..[7] 이마와노 세대 우익들은 오히려 기미가요를 사적인 자리에서 아무렇게나 부르는 것을 비난할 정도로 해당 곡을 (천황과 연관지어) 신성시했다. 이에 관해서 옛 세대의 일본 좌익 가수들은 '기미가요는 원래 단순한 사랑 노래였을 뿐이다'라며 막 부르고 다니는 식의 퍼포먼스를 많이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