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왕국

 



'''와가두 제국'''
'''Wagadu, Ghana'''

[image]
존속기간
? ~ 1235년
위치
현재 모리타니말리
수도
쿰비살레
성립 이전
소닝케족 공동체
멸망 이후
말리 제국
1. 개요
2. 애매모호한 형성시기
3. 역사
3.1. 황금과 무역
3.2. 쇠퇴
3.3. 멸망
4. 기타


1. 개요


서아프리카에 첫 역사적 서술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왕국. 와가두[1] 제국 또는 가나 제국이라고 한다.

2. 애매모호한 형성시기


언제 성립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서아프리카 지역에 대한 역사적 서술은 기원후 8세기 아랍인들에 의한 서술로 시작된다. 이슬람이 최초로 북아프리카를 점령한 지 얼마 안되어 아랍의 지리학자인 알-파자리(al-Fajari)의 저서 알-마수디에서 서기 773년 모로코에서 사하라 사막을 지나면 황금의 나라로 불리는 가나가 있다고 기술했다. 이것으로 보아 최소한 8세기 이전에 형성된 걸로 추측할 수가 있다.
이렇듯 전반 역사적 사료가 부족한 주 이유는 북아프리카나 이집트 주변 지역들, 에티오피아 등을 제외한 나머지 아프리카 지역에는 대부분 문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는 아랍인이나 유럽인들이 관찰한 기록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초기 역사의 기록은 상당히 부실한 상황이다.

3. 역사



3.1. 황금과 무역


앞서 말했다시피 가나 왕국은 서기 8세기경 부터 역사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고 외부와의 관계도 이후에 형성됐다. 9세기경 저술가 알-야쿠비는 가나는 매우 강력한왕이 있고 주변의 왕국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포함한 전영토에서 수많은 황금들이 나온다고 기술되었다. 주변의 왕국들은 카우카우, 카넴, 말렐[2] 등이 있다고 전해졌다.
이븐-호칼(Ibn Hawqal)이라는 상인이 10세기 후반에 남긴 기록에 의하면, 사하라 횡단하는 무역에서 거래되는 금액은 그 당시로도 상당한 액수에 달했다고 한다. 사하라를 횡단하는 대상들은 사막의 유목민이면서 모로코 원주민에 동화된 베르베르인으로서, 산하자라고 불리는 부족으로 구성돼 있었고, 그들의 주된 교역로는 모로코 남부의 시질마사에서 가나의 북부인 아우다고스트(Aoudaghost)[3]에 이르렀다. 사하라 횡단 무역에서 거래되는 물건의 수집이나 분배는 산하자족이 거주하는 마을에서 행해졌는데 산하자와 가나는 이 무역으로 양쪽 모두 큰돈을 벌어들이게된다.
이븐-호칼은 언젠가 아다고스트의 상인이 시질마사에 있는 거래상인에게 보내온 거래장부를 보게 되었는데, 그 액수가 40,000 디나르에 달했다고 한다. 이 금액은 대단히 큰 액수로 1968년 기준 25만불의 수준이라고 한다. 일개 상인 하나의 거래량이 이정도니 전체적으로 보면 그 규모가 정말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가 있다. 가나의 주된 산출품은 역시나 황금이고 이덕에 가나는 부유한 왕국이 될 수 있었다.

3.2. 쇠퇴


이렇듯 가나는 무역으로 잘나가는 부유한 왕국이였지만, 오직 수출과 수입에만 전력을 기울였고 결국 쇠퇴와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가나가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1054년 가나가 아우다고스트에 있는 남부 산하자의 무역 거점을 정복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사막 무역상들과 가나의 왕 및 상인들 모두가 무역을 통해 최대한 이득을 보기 원했다는 상호 이해관계는 긍정적이였지만, 한편이 다른 편을 일방적으로 지배하려고 하거나 최대한의 이익만을 탐하게 되면 자연히 문제가 발생되기 마련이다. 갑자기 독자적인 행동을 하게된 가나는 그들이 산하자에게 팔아먹던 금이나, 산하자로부터 수입해온 소금을 직접 자신들의 손으로 취급하려고 했고 산하자의 지도자들은 이를 저지하여 기존의 이권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산하자족은 하나로 통일 되어있는 민족이 아니였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는 노력에 행동통일을 이룰 수가 없었다. 산하자족은 렘투나와 고달라 등의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각 부족장들은 모두 왕을 자칭하면서 주도권을 다투고 있었다. 이런상태에서 가나가 아다고스트를 정복하자 산하자족은 더욱 심한 분열을 일으켰고, 이는 렘투나 등의 일부 부족들이 부족장을 가나의 왕으로 대신 한것 등에 있어서도 큰 반발이 생기게 되고 만다. 결국 이러한 행위들은 가나의 연방제를 붕괴시키는 길로 가게 만들었다.
그러다 고달라족의 부족장 이븐 야신이 렘투나 부족의 추장계에 속하는 야히와와 아부바크르라는 두 형제를 포함한 소수의 개신 무슬림들과 함께 리바트라고 불리는 군사훈련소를 세네갈강의 하구에서 가까운 섬에다 세운다. 이 라바트는 비록 소규모이긴 하나, 매우 훈련이 잘된 열성적인 신자들로 구성된 군대로서 이들은 알 모라비드 왕조라는 나라를 세운다.
알모라비드, 즉 무라비트 왕조는 당시 사하라에서 남북으로 나뉘어 아직도 다투고 있던 산하자의 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이들을 통일시키는 데 성공한다. 결국 1054년 가나로부터 아다고스트를 뺏었으며, 1076년에는 아부바르크가 이끄는 알모라비드 군대에 의해 수도를 뺏기게된다. 그러나 알모라비드는 몇 년 안가 가나지역에서 물러났는데, 그 이유는 부유했던 가나에 대한 전리품 가지고 서로 내분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결국 소닌케의 가나 왕국은 알모라비드를 쫏아내고 왕국을 재건하게 된다.

3.3. 멸망


알모라비드로 부터 수도를 수복하고 재건되었지만, 가나는 과거 산하자를 지배하던 시절에 비해 보잘 것이 없었다. 알모라비드가 사하라 남북을 공략한 이래 타필랄트로 가는 서부 서하라의 무역로도 붕괴되었다. 또한 그들의 약탈로 가축 사육에 필요한 목초지 요구는 사하라 사막 인근에서 농업에 종사하고 있던 가나인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땅은 점차 황폐해지고 우물들이 마르게 되며, 식물들이 성장 할 수 없는 환경이 돼버렸다. 기거이 가나 왕국은 1235년 케이타족의 지도자인 순디아타가 이전 가나 왕국의 지역에 대한 패권을 장악하게 되어 완전히 멸망하고 만다.

4. 기타


현재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가나 공화국이 가나 왕국에서 국명을 따오기는 했지만 역사적으로 연관은 없고, 역사적인 종주권은 모리타니와 말리가 가지고 있다. 가나 왕국의 주요 유적은 전부 모리타니와 말리에 걸쳐 분포되는데 수도였던 쿰비살레는 거의 발굴되지 않았다.
스페인의 무슬림[4] 지리학자인 알-바크리는 1067~1068년에 걸쳐 가나에 대한 정보를 기록했었는데, 그 기록에 따르면 가나라는 명칭은 원래 국명이나 수도가 아니라 국왕을 지칭하는 단어라는 것이다.[5] 본래 그들만의 언어로는 와가두라고 불렸다고 한다.

[1] 실제 국명[2] 말렐의 경우 정확한 소재지를 알 수는 없으나, 후일 가나를 멸망시킨걸로 알려진 말리인들의 일종으로 보고있다.[3] 현재 모리타니 남부에 위치한 오아시스 도시로, 서부 사하라의 황금과 소금 무역로로 번영한 도시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4] 당시 이베리아 반도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대부분 무슬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5] 이것에 대해서도 확실치 않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