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카 제국

 




'''타완틴수유'''
'''Tawantinsuyu'''
[1]
[image]
'''국기'''
[image]
'''1438년 ~ 1533년'''
'''위치'''
서남아메리카 대륙 일부
'''수도'''
쿠스코
'''정치 체제'''
군주제
'''국가 원수'''
사파 잉카[2]
'''언어'''
케추아어
'''민족'''
잉카족
'''종교'''
잉카 토속 종교
'''주요 사건'''
1438년 건국
1529년 ~ 1532년 남북전쟁
1532년 카하마르카 전투
1534년 멸망[3]
(1572년 황실 폐지)
'''성립 이전'''
쿠스코 왕국
'''멸망 이후'''
에스파냐 제국의 식민지
1. 개요
2. 역사
3. 사회
4. 종교
5. 기술과 문화
6. 인신 공양
7. 멸망
8. 멸망의 원인
8.1. 전염병과 내부 분열
8.2. 학살과 주변 부족들의 반감
8.3. 잔혹한 풍습
9. 군사
10. 후예
11. 역대 통치자들
12. 그 밖


1. 개요


보통 잉카 제국이라 하나 본래 이름은 타완틴수유로 이는 4방위의 나라란 뜻이다. 잉카는 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 네 개의 수유(땅)으로 이루어져 있다.
'잉카'라는 단어는 이 나라를 다스린 황제의 명칭인 '사파 잉카' 로부터 따왔다. 모든 잉카는 자신들이 태양신 인티의 자손이라 여겼다. 참고로 귀족들은 '오레혼' 이라고 불렀다. 귀에 무거운 장식을 다는 습관에서 유래했는데, 귀가 큰 사람이라는 뜻이다.
수도는 쿠스코로 이곳을 세상의 배꼽이라 생각했다.[4]
케추아족이 잉카를 세웠다고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잉카족이 뒷날 케추아족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일 뿐이며 사실 케추아족 같은 것도 엄밀히 말해선 존재한 적이 없다. 케추아는 지역 특성을 일컫는 이름과 부족명을 헷갈려 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오해해서 붙인 이름을 '케추아족' 본인들이 받아들여버린 것이다.

2. 역사


잉카족의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원래 페루 출신인 토착민이 아니라 볼리비아에서 온 유랑민이라는 설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5] 잉카 제국이 건국된것은 대략 13세기 즈음이다. 이들 잉카족은 15세기 초반까지는 쿠스코와 그 근교지역을 지배하는데 그쳤지만 창카족과의 전쟁을 통해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잉카는 창카족의 침공을 받아 한때 절멸 위기에 몰렸으나 기적적으로 역전해 창카족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시켰다.
이때의 황제가 훗날 파차쿠티로 불리우는 잉카의 첫번째 황제[6] 이며, 파차쿠티의 지휘 하에 대규모 정복전쟁을 단행하여 잉카는 끈임없이 팽창하였고, 15세기 말 경에는 남으로 칠레 남부, 북으로는 콜롬비아 서남부까지 뻗어나가며 서부 남미 일대의 패권을 완전히 장악해나갔고 체계적인 행정제도와 대규모 도로 건설을 통해 지방통치력을 확고히 장악하여, 남미 서부 일대를 거의 통일하기에 이를렀다.[7]
새로 황제가 된 잉카는 법적으로 '고아'가 되어버리고, 또한 그렇게 자신을 떠나보낸 황족에게 이전 사파 잉카의 개인 재산(국가 재산 말고)을 다 물려줬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선 '알거지'가 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그래서 새로운 황제는 정복 사업을 해서라도 자기 땅을 얻어야 했다.
아무튼 이 정책 덕분에 잉카는 새 황제가 즉위할때마다 영토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스페인의 피사로가 정복을 위해 남아메리카의 물정을 탐색하고 있던 시기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에콰도르 지방을 완전 정복하여 잉카 제국의 판도를 최대한으로 넓혔다.
여담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선 잉카가 사실은 둘이었고 잉카 가운데 하나는 쿠스코에 머물고 다른 하나는 지방에 있는 이원제였다는 설도 있다. 잉카 가운데 하나는 하난(Hanan)이라 했고 다른 하나는 우린(Urin)이라 하였는데, 하난은 정복 활동에 종사하고, 우린은 수도에 머무르며 농경 활동에 관련 제사를 맡았다고 한다. 하난과 우린 계승 의식은 틴쿠이(Tinkuy)라 했는데 겉보기엔 전쟁과도 같았고, 승자는 하난이 되었다고 한다.[8]
이 설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자가 아니라 틴쿠이 의식을 통해 결정된 하난 잉카였다. 페루 역사학자 프랭클린 피즈의 간략한 페루 현대사에서는 이런 잉카 이원왕정을 오해 반, 고의 반으로 완전히 왜곡해 버린 게 스페인 측의 식민사학이었다고 하는데... 하지만 역사 연구가 상당수가 그렇듯 아직 다른 의견도 있고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3. 사회


잉카는 시민들을 미타(mit'a)라는 노동력 단위의 세금으로 관리했다. 잉카의 시민들은 1년에 108일 동안 국가에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도로를 닦고, 요새를 건설하고, 신전을 건설하는 등 노동을 해야했다. 또한, 노동을 하는 날짜를 가족들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었는데, 가족이 4명일 경우 1인당 27일을 일하고, 가족이 12명이면 1인당 9일을 일하고, 가족이 54명이면 1인당 이틀을 일한다(15~60세의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잉카의 가족은 대부분 대가족이었다.
잉카 정부는 주민을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리했다. 10개의 푸릭(가구)을 충카라고 불렀으며, 충카의 관리자를 '충카 카마욕'이라 하였다. 그리고 충카 카마욕, 파차카 쿠라카(100명), 와랑가 쿠라카(1,000명), 우누 쿠라카(10,000명)가 각각 10개의 하위 쿠라카들을 관리하였다. 이것이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뜻의 '토코이리콕'이며, 우누 쿠라카와 토코이리콕의 상관이 전국 88개 지방수도를 담당하는 '토크리콕', 토크리콕의 위에는 '아푸'라고 하는 4개의 수유(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를 관리하는, 사파 잉카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최고 귀족들이 존재했다.
잉카의 정복 전쟁은 격렬하고 매우 잔인했다. 하지만 잉카는 일단 정복한 뒤에는 그 지방의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curaca)라는 관리로 인정하여 고향을 다스리게 했다. 가장 작은 행정 단위로는 아이유라는 집성촌 비슷한 것을 만들고 한 사람이 열명씩을 책임지고 이런 책임자 몇몇을 또 다른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식으로 사회를 구성했다. 아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 집성촌 같은 것으로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마을 땅, 종교행사에 쓸 물건을 얻으려고 쓰는 땅, 잉카의 땅으로 나뉘었다.
전쟁에 징병되는 것도 세금의 하나. 잉카는 백성들이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여 엄청 가난한 사람들은 해마다 벼룩을 잡아서 바치게 했다.[9]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늙었거나(50세 이상이 기준) 병든 사람, 과부들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있었다. 어쩌다 가뭄이라도 나면 마을 창고를 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또한 제국차원에서 의료제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어서 평민들도 병이 들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의료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다만 위에 말하는 혜택은 전부 통치자인 쿠스코의 잉카인들에게 해당되는 내용이며, 정작 변방이나 국경 지대의 피지배 부족들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잉카는 아즈텍 제국과 비슷하게 지방 영주들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통치에는 잘 간섭하지 않았다. 각 지방마다 일정한 양의 공물을 정기적으로 부과하였는데 이 양이 너무 막대하고 과중하여 반란의 불씨를 낳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아마존 지방의 부족들에겐 마코앵무새의 꼬리깃을 모아오라는 식으로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품들을 공물로 부과했다. 물론 수확물과 모직물 등 다른 형태의 공물도 꾸준히 받았다.
잉카제국은 또한 마을 주민들의 강제 노동을 이용하여 산비탈을 개간하거나 계단식 밭을 일구어 새 경작지를 만들었고,이 새 경작지는 당연하게 쿠라카나 잉카의 군사 지도자들 혹은 잉카제국에 공을 세운 귀족들에게 돌아갔다.이 사유지들은 아이유 공동제에서가 아니라 야나코나라는 잉카제국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노예 계층에 의해 경작되었다.[10]
복속된 부족들은 미타라는 제도하에서 길을 닦고 관개용 운하나 성채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되고, 광산에서 일해야 했으며, 병사들이나 귀족들에게 입힐 일정량의 옷을 생산하여 바쳐야만 했다.
이런 통치 방식에서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그것은 피지배민족이 아닌 잉카 황족, 귀족, 사제, 전사, 관리를 우대하는 방식이었다. 잉카제국이 한 일은 국가의 땅이나 사원의 땅에서 농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이 창고에 보관된 옷과 곡식은 군대, 황제를 위해 일하는 수공업자, 공공사업을 위해 징모된 노동자, 쿠스코와 그 외 도시에 거주하는 관리들을 입히고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4. 종교


나라 종교로 인티(태양)를 섬겼고 사파 잉카의 형제나 그 밖의 가까운 친척이 대사제 일을 맡아 했다. 라마나 알파카, 그 밖의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동시대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 지역의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만큼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공양도 존재했다.
보통 '황제'로 번역되는 '사파 잉카'의 권한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반면, 그만큼 사파 잉카를 얽매는 풍습도 많았다.
가령 사파 잉카는 태양과 동일시되었으므로, 모든 물건은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버려졌다. 태양이 하루에 한 번 지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파 잉카가 하루 입은 옷은 하루가 지나고 나면 불태워졌으며, 사파 잉카가 신던 신발도 역시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다. 사파 잉카가 한 번 동침한 여자도 마찬가지로 하루가 지나면 그걸로 끝났다. 물론 죽이거나 한 건 아니고, '태양의 처녀'라는 일종의 궁녀 신분으로 만들어 평생 사파 잉카를 위해 이런저런 잡일을 했다. 사파 잉카는 두 다리로 스스로 걸어서는 안 되었으며, 어딜 가든 황금가마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누구든 사파 잉카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차스키(Chasqiy)라고 불린 파발꾼들은 사파 잉카에게 보고할 때 먼저 '대리인'에게 보고했고, 그 대리인이 사파 잉카에게 다시 보고하면, 사파 잉카가 이에 대한 조치사항을 대리인에게 지시하고, 그 대리인이 다시 차스끼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아무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사파 잉카의 얼굴을 직접 보는 행위 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사파잉카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허락이 필요했다.
그 밖에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이 수녀로 잘못 안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아클라(Aclla)라고 한다. 이들은 예쁘거나 핏줄이 좋거나 해서 뽑혔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고급 직물을 짜고, 술을 빚고,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했다. 이 중 일부는 사파 잉카가 후궁으로 삼거나 쿠라카들에게 역시 첩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하렘과는 좀 다른 것이 아클라들이 사는 수녀원(?)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고 잉카라도 마음대로 이 여자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클라를 건드리는 보통 남자는 사형에 처했고,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다. 한 때 이를 중동의 하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잉카가 여성을 매우 억압적으로 대했다는 근거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현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오히려 최근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제국 이전 시기에 존재했던 문명 중 하나인 모치카 문명에서는 여제들도 많았다.
죽은 사파 잉카들은 미라로 만들어 코리칸차 신전에 안치했고, 각종 행사가 있으면 끌어내어 생전과 똑같이 대우하였다. 미라를 불러들이고 생전의 황제에게 하듯이 각종 의식을 시행하고 제물을 바쳤으며 호사스러운 축제를 벌이곤 하였다. 때문에 죽은 황제들에게 공경하느라 들어가는 국가 예산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아타우알파의 이복형인 우아스카르는 이것을 탐탁치 않게 여겨 미라 숭배를 중단시키려다 사제 계급의 미움을 샀고, 내전에서 동생 아타우알파에게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5. 기술과 문화


바퀴를 쓰지 않고(즉, 수레가 없었다)[11] 도 쓰지 않아서 뒤떨어진 문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미 정밀한 태양력을 사용하는 고도의 천문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땅심이 쉽게 빠지지 않는 계단식 밭이나 도시를 흐른 수도 시설, 면도칼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짜맞춘 바위벽[12] 같은 것을 보면 상당히 발달한 기술력을 지닌 문명이었다.
참고로 잉카의 채취 기술은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로도 한참 동안 계속 쓰였고 특히 풍부한 은광이 있지만 산소가 희박한 고산 지대 포토시에서 각광받았다. 당시의 스페인식 기술로는 산소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고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72년 획기적인 수은 아말감법[13]이 개발되면서부터는 잉카의 재래식 은 채취법은 씨가 말라버린다.
타완틴수유 곳곳으로 뻗은 잉카의 도로 역시 유명하다. 마치 로마의 도로들 같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차도 등으로 이용되는 로마의 도로 처럼 잉카의 도로 역시 상당수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14] 그러한 도로들은 산을 오르는 데 가장 효율적인 경사를 따라서 놓였기 때문이며, 해발 4000m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차도는 사치다. 잉카의 다리 제작 기술 또한 대단하였는데 식물섬유를 꼬아서 깊은 낭떠러지나 높은 계곡 사이에 구름다리를 만들수 있었다. 이 들중 상당수가 19세기까지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에도 험준한곳에 자리잡은 시골동네에서는 꽤 자주 보인다. 해마다 다리를 보수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 현대의 다리와 견주긴 뭣하지만 처음 이 다리를 본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에겐 놀라운 건축 기술로 보였을 것이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사이에 어떻게 저런 걸 만들었나 싶었을지도. 무엇보다도 이 다리는 방어에도 효과적이였는데, 외부세력이 침략해올 경우 다리를 끊어버리게되면 상대측 입장에서는 이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리를 새로 구축하려 한다 하더라도 마을에서 견제가 가능할테고.
문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앙아메리카 대륙과 다르게 남미 서부일대에서는 발전된 형태의 문자가 쓰이지 않았고, 그래서 기록물들도 남은것이 없기 때문에 잉카 이전의 역사는 서사시나 설화, 신화나 고고학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하지만 '키푸'라 하여 매듭으로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키푸카마욕이란 관리들이 키푸를 다루었는데 이 방법은 에스파냐의 정복 이후에도 한동안 쓰였고 키푸카마욕들은 지역 정보를 지닌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린 듯하다. 돈 잘 벌어 무역선을 산 사람도 있었다.

6. 인신 공양


잉카는 중미의 아즈텍 제국처럼 대규모까진 아니었지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국가에 닥치는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피지배민족들에게 받는 공물의 리스트에 지배층의 어린아이를 포함시켰다. 잉카는 항상 외부 부족들의 어린아이를 희생시켰다. 이것은 잉카의 지배력과 권위를 각인시키기 위한 방침이었고,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아이를 바쳐야만 했던 지방 영주들에게 악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잉카 제국은 카파코차(capacocha)라고 해서 태양신 인티와 비라코차를 위해 희생시키는 아이들을 1년간 먹이고 재운 뒤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산 위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거나 얼어죽게 방치하는 방법이 대표적이었지만 동굴에 가둬 죽이는 방식도 사용하였다. 흔히 제물들을 현인신으로 여겨 잘 대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아즈텍 제국과 헷갈린 것이다.[15] 그렇다고 해서 잉카가 어린아이들을 학대한 것은 아니었다. 발견된 미이라의 내장을 조사한 결과의 하면 반년 이상은 감자를 먹으며 평민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귀족들이나 먹는 라마 고기 등을 먹였다고 한다. 아마도 잉카가 산제물들을 잘 대접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와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아이들은 1년간 신전에서 집단 생활을 한 다음 각자 출신지로 돌아가 산 정상에서 교살당하거나 둔기로 맞아 사망하거나, 혹은 그냥 얼어 죽게 방치되었다. 또는 동굴에다 집어넣고 문을 폐쇄해 아사 시키는 방법도 썼다. 한 장소에서 2~3구의 미라가 동시에 발견되며, 이런 방식으로 대략 연간 수십명 정도의 어린이를 희생시켰다고 한다. 물론 국가적 재난이나 새 황제의 즉위식, 장례식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수백 단위로 어린이들을 바치곤 하였다.관련 기사
축제 때 황제들의 미라를 꺼내 '''어린이들을 참수하고 그 피로 미라의 얼굴에 표식을 그리거나''', 우상의 주변을 걷게 한 다음 죽이는 일도 있었다.
순장과 인주(人柱) 풍습이 매우 극심하여 주변 민족들의 반발을 샀다. '''신전을 새로 지을 때마다 대량으로 어린이를 죽여 파묻었다.''' 쿠스코에 위치한 코리칸차 태양신전의 건공식에서 잘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교살되어 신전 바닥에 묻혔다. 이 기록은 베르나르데 코보, 베탄소스, 몰리나, 감보아 등의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교차 검증도 가능하다.
파차쿠티 황제의 장례식에는 '''약 1천명의 어린이를 둔기로 때려 죽이고 시체를 파묻었다.''' 고대 중국의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에서 황제에게 봉사하라는 의도로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황제의 명으로 잉카 제국의 전역에서 500쌍의 남녀 어린이를 뽑은 다음 제물로 희생시켰다. 이 기록은 스페인 역사가인 베탄소스의 잉카 제국 연대기에 등장하는데, 베탄소스는 잉카 황실의 황녀와 결혼하여 잉카에 대해 우호적으로 묘사한 역사가이다. 그런데도 이런 기록이 등장했다는 것은 잉카 제국에서 순장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카 제국이 완전히 몰락한 뒤, 망코 잉카 황제와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 스페인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 세운 망명정권인 빌카밤바(에스피리투 팜파) 유적지에서도 어린이 인신공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빌카밤바는 오래 전부터 잉카인들의 성소로 여겨졌고, 이 시기에 망코 잉카는 한가하게 인신공양이나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투팍 유판키 황제 시기에 인신공양된 어린이들의 유해로 추정된다. 물론 강제적인 순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아타우알파 황제가 처형되자 그의 처들도 황제를 저승에서 섬기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사도 있었다고 한다.

7. 멸망


상세한 내용은 프란시스코 피사로 항목과 곤살로 피사로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스페인침략자들쿠바멕시코, 미국 플로리다, 카리브 해 일대 등 북아메리카를 장악한 뒤 눈을 돌린 곳은 광대한 남아메리카 대륙이었다. 이들은 파나마를 정복한 후 그곳을 지나 태평양으로 진출해 잉카 제국으로 들어가는 항구를 확보했다.


앞서 아즈텍을 몰락시킨 에르난 코르테스의 사촌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그 선봉으로, 당시 황제인 아타우알파의 실정, 그리고 몇 차례의 행운과 맞물려 손쉽게 제국을 거덜내버린다.
피사로가 왔을 당시 잉카는 아타우알파가 형 우아스카르를 죽이고 황제로 즉위했으며, 내전이 막 끝나 황제가 귀환하던 중이였다. 황제는 당시 10만 군대를 거느렸는데, 그 때문에 200명에 불과한 이들을 경계하지 않았다. 킴 매쿼리의 저서 잉카 최후의 날에 따르면 아타우알파는 피사로와 만나는 자리에서 굉장히 거만하게 굴었으며, 스페인 사람들을 몇 명만 남기고 모두 죽여버릴 생각이었다고 한다.[16] 반대로 피사로는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즈텍의 황제 몬테수마 2세를 사로잡은 것처럼 잉카 황제를 포로로 잡아 협박과 협상을 통해 이 땅의 통치권을 따내고 최대한 많은 양의 황금도 뜯어낼 생각이었다. 실제로 이 작전은 코르테스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아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황제와 이방인들은 카하마르카에서 마주쳤다. 이들이 회담을 하던 도중, 스페인 인들이 기독교 선교를 위하여 성경을 건넸고 이 성경에 어떤 신령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황제는 귀를 대었으나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땅에 내던졌고 이것을 본 스페인 인들은 황제를 곧바로 사로잡았다.[17] 이 때 회담장 안에 잉카 근위대 6000명이 있었는데 그들의 석기 곤봉과 투석구는 스페인의 강철 갑옷에 통하지 않았고, 숨어있던 스페인 포병의 맹포격과 기병 돌격으로 4000명이 살육되고 황제는 포로로 잡혀버렸다. '''이에 비해 스페인 전사자는 0명이였다.'''
황제는 생포된 뒤 약 8개월 동안 포로생활을 했는데, 피사로는 황제를 죽이지 않고 살려서 저항 없이 순조롭게 통치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그에게 체스를 가르쳐주고 같이 두는 등 그 동안 서로 친해졌다고 한다. 이후 그들에게 자신이 감금된 방을 가리키면서 자신을 풀어주면 그 방을 황금으로 채우겠다고 하였다. 피사로는 이것에 동의하였고 그 이후로 계속 황금을 상납받게 되었다. 하지만 콩키스타도르들 간의 의견차이로[18] 황제를 처형하게 되었는데 카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교수형에 처하게 될것인지, 아니면 개종하지 않고 화형에 처하게 될것인지 선택하게 했으며 황제는 전자를 선택했다.
그렇게 아타우알파를 살해한 다음 그 아우 망코를 괴뢰 황제로 삼았는데 반전이 일어났다. 웬만하면 황제를 잘 구슬려 통치하는 것을 원했던 1인자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신도시 리마 건설로 쿠스코를 비워둔 사이에 눈치 볼 사람이 없어진 피사로의 동생들은 온갖 망나니 짓거리를 해댔고 이런 에스파냐인들의 막장 행각에 망코가 분개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자신의 아내[19]까지 피사로 형제 중에서 막내인 곤살로 피사로에게 빼앗겼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피사로 형제에게 항의했다가 구금당했을 때는 욕을 듣는 것도 모자라 스페인인들이 몸에 오줌을 갈기고 수염에 불을 붙이는 등, 갖은 치욕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는 몰래 빌카밤카로 도주하고는 대규모의 반에스파냐 봉기를 선동했다. 잉카군은 빠르게 집결하여 기록에 따르면 약 10만[20]의 잉카군이 호응하여 3만 명 남짓한 스페인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 3만의 스페인 군은 잉카에 적대하는 부족들로 구성된 원주민 병사들이 약 3만이고, 스페인 정예병들은 아무리 많아봐야 200명에서 700명 남짓한 극소수였다. 잉카군은 수적 우세를 기반으로 스페인군을 곳곳에서 물리쳤고, 한때 쿠스코가 잉카군에게 포위, 함락될 뻔한 상황도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잉카 군대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리마의 피사로가 지원군을 보내고 칠레를 정복하러 나갔던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군대도 돌아온데다, 잉카 내부에서도 수만명이 잉카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며 설상가상으로 전투도 스페인 사상자 5명, 잉카 사상자 4000명을 기록하고 대패해버렸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잉카군의 화공으로 쿠스코는 건물 한채를 빼고는 모조리 불타서 이후 페루의 거점은 스페인인들이 건설한 항구도시 리마로 옮겨졌다.
쿠스코에서 약탈한 부를 이용해 신도시 리마의 건설에 착수하던 피사로는 알마그로와의 갈등 끝에 내분이 일어나고 결국 피사로가 사태를 평정하게 되지만 이후 알마그로의 잔당세력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또한 잉카를 통치하던 그의 형제들도 차례차례 불운을 겪는다. 에르난도는 스페인 감옥에서 징역을 살다가 석방됐고 후안은 망코의 봉기 때 전사했으며, 곤살로는 카를로스 1세가 보낸 총독을 죽인 죄로 처형당했다.
한편 빌카밤바에 잉카 망명정부를 세운 망코는 스페인인 탈영병들[21]을 받아들여 기병화기병을 양성했지만, 자신이 받아들였던 스페인인들에게 암살된다. 아타우알파가 살해되고 망코 잉카가 등극한지 11년째인 1544년의 일이었다.
이후 잠시 잉카는 스페인인들과 화친하지만, 망코 잉카 사후 28년 뒤인 1572년에 전쟁이 재발하였다. 이 전쟁은 2개월 만에 잉카의 패배로 끝났고[22] 이로써 잉카는 완전히 멸망했다.
잉카를 정복한 스페인군들은 이후 일사천리로 남아메리카 전역의 군사력이 약한 부족들을 차례로 짓밟으며 구석구석 쓸고 다닌다. 피사로의 휘하였던 아귀레도 일단의 병력을 끌고 황금이 묻혀있을 남미의 오지를 원정하러 나섰는데, 그 비참한 여정은 영화 아귀레, 신의 분노에 잘 묘사되어 있다.
쿠스코는 에스파냐 양식으로 다시 재건되었지만, 원주민 양식과 에스파냐 양식이 섞여서 상당히 이질감을 준다. 잉카 시대의 석벽 위에 에스파냐 양식의 건축을 지어놓아서 이질적이면서도 독특한 느낌이 든다. 과거 태양신전이었던 코리칸차(Coricancha) 위에는 성당이 들어섰는데, 과거 쿠스코에 지진이 발생했을때 성당은 반쯤 부서졌지만 기단인 코리칸차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었다고 한다. 그리고 쿠스코 근처에는 꽤 유명한 요새인 삭사이와만(Sacsayhuamán=배부른 송골매 요새)이 남아있다.

8. 멸망의 원인


잉카 제국의 몰락 원인은 여러모로 멕시코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 제국과 흡사하다. 중앙정부의 잔인한 학살과 폭정으로 반감을 사고 있던 와중에 스페인인들이 들어와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잉카 제국은 거기다 내전 문제까지 겹쳐 그야말로 망하기 딱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보다 인신공양을 적게 하였으므로 인신공양 풍습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23], 대신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서 모든 남자들을 학살하거나 인구의 절반 이상을 쓸어버리는 등 '''잔인한 보복은 오히려 아즈텍보다 더 심했다.'''

8.1. 전염병과 내부 분열


아즈텍을 멸망시킨 전염병은 이미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잉카 제국의 국력을 깎아놓았다. 아즈텍 제국의 멸망보다도 잉카 제국의 멸망에서 전염병이 차지한 비중이 더욱 컸다. 왜냐면 중앙아메리카에서 서서히 남하 중이었던 천연두가 에콰도르에 도달했고, 마침 이 지방의 반란군을 진압중이었던 선대 황제인 우아이나 카팍을 감염시켜 그를 사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아이나 카팍은 곧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지명하고 죽었으나, 이미 최고 존엄인 사파 잉카까지 감염될 정도로 천연두가 널리 퍼졌는데 다른 황족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장남 니난 쿠요치마저 사망하자, 잉카 제국은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라는 두 황태자 간의 피로 피를 씻는 내전을 맞이하게 된다. 이 내전이 사실 전염병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라 우린과 하난의 계승 의식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전쟁은 매우 치열하고 잔인했다. 같은 잉카인들끼리 서로의 가죽을 벗겨서 인간 북으로 만들거나 해골로 술잔을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처음엔 우아스카르가 유리했으나, 선대 황제인 우아이나 카팍을 따라다니며 군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아타우알파가 이복형을 꺾고 최종 승리를 거며쥐었다. 아타우알파는 끌려온 이복형에게 매우 악랄한 보복을 했는데, 우아스카르를 처형하면서 그가 보는 눈 앞에서 측근들의 두개골을 박살내고 가죽을 벗겼으며, 아내를 한 명씩 죽여서 매달았다. 임신한 아내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고 탯줄로 어머니의 발에 목을 매달아 놓는 인면수심의 짓거리까지 하였다고 한다.[24]
이렇듯 잉카 제국은 피사로가 들어오기 바로 직전에 서로 내전을 하느라고 정예 병력들을 소모한 상태였다. 특히 잔인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던 아타우알파가 보복을 하겠답시고 형을 지지한 도시의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도륙하다보니 증오를 받아 민심이 등을 돌린 것도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게다가 승리 때문에 한껏 거만해진 아타우알파는 자만심에 취해 스페인인들을 자신의 제국에 무혈 입성 시켜주었다. '''한마디로 잉카 제국에 대한 주변 부족들의 반감이 최고조로 올라 있고, 황제 본인은 승리에 취해있으며, 제국은 내전으로 병력을 소진한 환상적인 타이밍에 스페인 군대들이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8.2. 학살과 주변 부족들의 반감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잉카 제국과 주변 민족들의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프란시스코 피사로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순수하게 스페인 콩키스타도르 병력의 힘만으로 잉카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에르난 코르테스와 마찬가지로 원주민 동맹군들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결코 수백의 병력으로 천만의 인구를 지닌 제국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스페인인들을 지원하는 주력군은 언제나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이었다. 이중에서 가장 잉카인들을 적극적으로 배신한 민족은 에콰도르의 카나리족이었다. 이는 투팍 유판키 황제에게 정복당한 과거가 불과 몇십년 전의 일이었고, 피사로가 들어오기 얼마 전에는 투메밤바라는 도시가 아타우알파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당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황제인 아타우알파는 도시 시민 5만명 중 3만 8천 명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사실상 도시 인구의 80%을 한꺼번에 몰살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 밖에도 과거 잉카의 적수였으나 패배해서 정복된 창카족, 우앙카족, 아마존의 차차포야족이 스페인군을 지지하였다. 아마존 부족들은 잉카 황제가 과거 자신들의 족장의 껍질을 벗겨 북으로 만들어버린 원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25] 잉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정복당한 치모르(치무)족들도 스페인군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고 잉카 내부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려줘서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잉카 제국은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탓에 주변 남미 원주민 부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모자랐다. 특히 에콰도르 지방은 투팍 유판키-우아이나 카팍-아타우알파 3대에 걸쳐 끈질기게 잉카에 저항한 탓에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의 호수'''' 사건인데, 1520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카란키 반군을 진압한 다음 이 지방의 모든 남성들을 학살하고 호수에 던져 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전설이다. 이때부터 이 호수의 이름이 Blood Lake라는 의미를 가진 야와르코차 호수로 바뀌었다. 이 학살로 대략 3만에서 5만명의 카란키족 남성들이 살해당했고 이 지방에서 잉카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로 치솟았다.[26]
툼베스를 파괴한 것도 아타우알파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잉카 내전 시기 쿠스코로 가는 요충지에 위치한 툼베스 시는 아타우알파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 피사로가 생존자 소년을 한 명 데려다가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통역관으로 삼았는데, 이 아이의 세레명이 펠리피요였다. 펠리피요는 자신의 고향이 파괴된 복수로 아타우알파 황제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되게 통역했고, 결국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명령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만다.[27]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로 구성된 약 3만 명의 원주민 지원군은 에르난도 피사로와 후안 피사로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군대 200명이 쿠스코에 포위되어 있을 때 봉기한 망코 잉카의 10만의 잉카 대군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가 바로 쿠스코 공방전이다.
참고로 잉카 제국도 흉흉한 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복한 지방의 백성들을 일부 강제 이주시키고, 잉카에 충성스러운 지방 시민들을 채워넣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잉카의 지배가 워낙 가혹했기에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잉카는 정복한 지방을 또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는 일이 상당히 잦았다고 한다. 이 강제 이주 정책은 아시리아와 굉장히 유사하다. 항목 참조.

8.3. 잔혹한 풍습


최근 아즈텍의 실체를 까발리는 여러 사실들이 알려지며 인터넷에서 '잉카 반만 닮았어도 ㅉㅉ' '잉카는 안그랬는데 아즈텍은 ㅉㅉ' 하는 식의 글이나 댓글이 많이 보이는데, 아즈텍이 워낙 독보적이라 그렇지 잉카 역시 아즈텍 제국과 흡사하게 중남미 특유의 잔혹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 북'''(루나 티냐)[28]이다. 잉카 제국에선 사람의 가죽을 그대로 떠서 북으로 만드는 형벌이 있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긴 다음, 그 안에 짚을 채우고 배 부분에 북을 집어넣어 멀리서 보면 뱃가죽이 부풀어오른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다리가 마구 흔들려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형벌은 잉카 원주민 역사가인 펠리페 구아만 포마 데 아얄라나, 가르실라소 데 라 베가처럼 잉카에 대해 우호적으로 서술한 스페인 역사가들의 책에도 등장한다.
잉카는 인간 북을 주로 반란군 지도자나 정복지의 군주들을 처형할 때 만들었다. 에콰도르 카란키족 지도자들, 창카족 지도자, 아마존 부족장들이 이 형벌을 받았다. 나중에 아타우알파는 사로잡은 우아스카르 일당을 처리할때 이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죽은 이의 이빨을 뽑아 목걸이를 만들기도 했고, 인간의 갈빗대에 구멍을 뚫어 뼈 피리[29]를 만들어 의식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해골 술잔을 만드는 풍습도 있었다. 파차쿠티 황제가 창카족 군주들의 해골로 술을 마셨고, 아타우알파의 경우 우아스카르의 최측근인 아토크 장군의 두개골을 도금하여 술을 마시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특히 잉카의 이런 잔혹행위는 주변 부족들이 모두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아즈텍과 달랐다. 예를 들어 인간 북의 경우 오직 잉카 제국에서만 개발된 특수한 처형법으로 인근 부족들 중에서 이런 풍습을 가진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30] 해골 술잔, 뼈 피리, 이빨 목걸이 등도 잉카 제국 이외의 문명에선 흔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런 풍습들은 아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정복당한 민족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실행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31]

9. 군사


[image]
잉카의 군대 모집력은 가히 대단했다. 망코가 봉기를 일으켰을 때, 몇 주 만에 10만의 대규모 전사들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도 앞서 말한 '미타'의 힘이다. 잉카 정부는 시민들을 '미타'로 빠르게 불러모아 무장시켰다.
이렇게 모인 시민군을 루나시미(잉카의 공식언어)로 '와카 카마유크'라고 한다. 와카 카마유크는 투석부대, 투창부대, 그외의 일반 보병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투석부대는 루나시미로 '와라카'라고 불렸다. 와라카들이 사용했던 슬링볼라는 위력이 굉장히 강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철제검을 두동강내버릴 정도라고 했다.[32][33]
투창부대는 아틀라틀과 유사한 투창기를 사용했다. 이들 중에서는 '아이유스'라는 볼라로 무장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 기병 부대였고, 볼라로 기수나 말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보병 대부분은 촌타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곤봉으로 무장했으며 돌도끼나 나무곤봉에 날카로운 청동을 두른 둔기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잉카 군대에서는 궁수를 거의 쓰지 않았다. 궁수들은 안티스(아마존 강 유역 원주민)에서 지원받은 부대로, 극소수였다. 하지만 궁수와 같은 사격 병력이 소수에 불과하니 에스파냐인들한테 큰 피해를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0. 후예


프란시스코 피사로 일당에게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스페인군들의 입성 2년만에 멸망한 아즈텍과는 다르게 쿠스코 점령 후에도 망코 잉카, 투팍 아마루 등의 살아남은 잉카인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항전해서 잉카 전역이 스페인에게 완전히 정복될때까지 거의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스페인 식민지배가 확고해진 18세기에도 투팍 아마루의 후손을 자처한 원주민 독립운동가 투팍 아마루 2세(1742~1781)에 의해 원주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페루와 우루과이에서 투팍 아마루 2세의 이름을 딴 무장단체가 등장하는 등[34] 라틴아메리카에서 투팍 아마루는 해방과 혁명의 상징이다. 이 잉카인들이 숨긴 황금의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라 하고, 이를 찾아 헤매다 하이럼 빙험이 마추픽추를 발견하기도 했다. 근데 정말 숨긴 황금이 있었는지 지금에 와선 알 수 없다[35].

11. 역대 통치자들


파차쿠티 이전에 잉카를 다스렸던 통치자들의 재위기간 및 생몰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부족한 상태이다. 역대 통치자 목록에 니난 쿠요치가 우아이나 카팍, 우아스카르 사이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우아이나 카팍이 죽고 니난 쿠요치는 즉위하기 전에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통치하지도 못했다.
순서
이름
재위기간
생몰년도
비고
01
망코 카팍
Manco Cápac
1200년?~1230년?
? ~ 1230년?
잉카 건국시조
02
신치 로카
Sinchi Roca
1230년?~1260년?
? ~ 1260년?

03
료케 유판키
Lloque Yupanqui
1260년? ~ 1290년?
? ~ 1290년?

04
마이타 카팍
Mayta Cápac
1290년?~1320년?
? ~ 1320년?

05
카팍 유판키
Cápac Yupanqui
1320년? ~ 1350년?
? ~ 1350년?

06
잉카 로카
Inca Roca
1350년? ~ 1380년?
? ~ 1380년?
하난 왕조의 시조
07
야와르 우아카
Yáhuar Huácac
1380년?~1410년?
? ~ 1410년?

08
비라코차
Viracocha
1410년? ~ 1438년
? ~ 1438년

09
파차쿠티
Pachacuti
1438년 ~ 1471년
? ~ 1471년
잉카 제국 성립
10
투팍 잉카 유판키
Túpac Inca Yupanqui
1471년 ~ 1493년
? ~ 1493년

11
우아이나 카팍
Huayna Capac
1493년 ~ 1527년
1468년? ~ 1527년
전염병으로 사망
12
우아스카르
Huáscar
1527년 ~ 1532년
1503년 ~ 1532년
아타우알파에게 폐위됨
13
아타우알파
Atahualpa
1532년 ~ 1533년
1500년? ~ 1533년
카하마르카에서 에스파냐인들에게 살해됨
14
투팍 우알파
Túpac Huallpa
1533년
? ~ 1533년
에스파냐의 괴뢰황제
15
망코 잉카 유판키
Manco Inca Yupanqui
1533년 ~ 1544년
1516년~1544년
에스파냐의 괴뢰황제였으나 에스파냐인들에게 대항하여 봉기한 뒤 빌카밤바에서 망명정부 수립
대립황제
파우유 잉카
Paullu Inca
1536년 ~ 1549년
1518년 ~ 1549년
에스파냐의 괴뢰황제로 망코 잉카 유판키의 빌카밤바 망명정부와 대립함
16
사이리 투팍
Sayri Túpac
1544년 ~ 1560년
1535년? ~ 1560년
빌카밤바를 떠나 에스파냐에게 영지를 받음
17
티투 쿠시
Titu Cusi
1563년 ~ 1571년
1529년 ~ 1571년
의문사
18
투팍 아마루
Túpac Amaru
1571년 ~ 1572년
1545년 ~ 1572년
잉카 제국의 완전한 멸망

12. 그 밖


사파 잉카 가운데 둘은 이름이 참 희한했다. 한 사람은 이름 뜻이 '쓸모없는 놈'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재앙'에 가까웠는데 그렇게 이름이 붙은 사연이 있긴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엔 참 희한해 보인다.[36]
베네수엘라 아야쿠초 전자도서관에서 잉카에 대한 연대기를 내려받아 볼 수 있다. 에스파냐어가 되는 사람은 심심하면 보도록 하자.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황금도시 언급도 나오는 등 번영하고 있다. 영국인들이 여기서 용알좀 사려다 실패했다.
KOEI사의 대항해시대 4의 주인공 티알 와만 챠스카가 멸망한 잉카제국의 왕족으로 등장한다.
페루의 국민 음료수인 잉카콜라가 이 문명에서 이미지를 따온 음료수다. 코카콜라가 페루에서 이기질 못해 결국 생산 회사 지분을 사서 소유해버렸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총,균,쇠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과는 4,200km의 밀림과 고산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고 조선해운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라 서로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남미 지방을 단기간에 석권하였으나 잔혹한 풍습과 피지배민족에 대한 학대로 인해 몰락했다는 점에서 고대 오리엔트의 아시리아와 유사하다. 실제로 주변 민족들에 대한 학살을 자주 저지르고, 저항한 부족의 씨를 말리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 잦았으며, 남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특출나게 잔혹한 풍습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잉카와 아시리아 둘 다 정복지의 반란에 시달리느라 광활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지 못했다는 것도 흡사한 점이다.[37]
현재 잉카 제국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었던 페루는 잉카 제국은 페루의 역사라며 현재까지도 잉카 문명의 적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해외에 페루 관광 홍보를 하면서 잉카 제국과 마추픽추, 쿠스코(페루)와 같은 잉카 제국 시대의 유적지와 유물들을 앞세우며 잉카의 후손이라고 대외적으로 홍보할 정도. 하지만 스페인 침략 이전 페루와 같이 잉카 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던 에콰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콜롬비아가 페루의 이러한 행동에 지금 역사 도둑질하냐며,[38] 잉카는 페루뿐만 아니라 스페인 식민지화 이전 남미 공통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페루의 잉카 제국 적통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39] 해당 국가들 중 특히 잉카 제국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는 볼리비아인데, 볼리비아는 케추아계 및 아이마라계 주민들이 주류인 점에서 페루와 매우 가깝다.
[1] 잉카제국 언어인 케추아어의 한글 및 로마자 표기[2] 케추아어로 대충 '위대한 존재'란 뜻이다.[3] 사파 잉카 황실은 그대로 유지[4] 쿠스코는 케추아어로 배꼽을 의미한다. 관계 없는 이야기일지 모르나 리마(Lima)는 'Rimac'을 스페인인들이 잘못 부른 것이다. Rimac은 '왕들의 도시'란 뜻이었다고 한다.[5] 그래서 현대 볼리비아는 잉카 제국을 아이마라 왕국과 더불어 자국의 양대 전신으로 여기고 있다. 현대 볼리비아인들 중 아이마라족은 아이마라 왕국 계승 의식이 강하고, 케추아족은 잉카 제국 계승 의식이 강하다.[6] 사실상 1대 황제나 다름없다. 그 이전의 잉카 군주들은 잉카 제국의 지도자라기보단 쿠스코의 도시국가인 잉카 왕국의 국왕에 가까웠다[7] 그렇지만 북으로 남으로 쭉쭉 뻗어나갔던 잉카 제국도 현재의 칠레 중남부와 아르헨티나 서남부 일대에 살았던 마푸체족만은 이기지 못한 채 결국 정복을 포기해버렸고 마푸체족은 잉카 제국이 멸망한 직후에도 스페인군에게도 맹렬하게 저항하는 데 성공하여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스페인으로부터 자치권 행사를 보장 받을 수 있었다.[8] 위에서 나왔지만 사피 잉카는 그 지위에 오르면 빈털터리가 되어서 정복을 통해 재산을 모아야 했다. 이러니 하난이 더 좋을 수 밖에[9] 이상해보이겠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벼룩이 많이 꼬이는 건 당연하고 벼룩이 많이 꼬이면 전염병이 퍼지기 쉬운 만큼 벼룩을 바치게 함으로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줄이는 효과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10] 스페인인들에 의해 '영원한 하인'이라고 불린 이들은 아이유 공동체 내에서 차출해서 잉카 지배층에 보내야 했으며 이들은 잉카의 사원이나 궁궐에서 일하거나 개인적인 봉사를 수행했다.[11] 그래서 발빠른 사람을 써서 물자 수송을 했다. 그들을 차스키라 부른다.[12] 한때 마법이나 초고대문명의 기술이니 그랬지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구리나 석재 끌로 깎아내고 모래로 맞춰지는 면을 연마한 거다.[13] 회취법이라고도 하는 이 방법은 사실 잉카인들은 진작에 알고있던 기술이다. 이 방식이 을 제련하는 방법으로는 전통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잉카인들이 이 방법을 안 쓴 이유는 수은 중독을 우려해서였다. 그래서 이 기술이 대세가 된 뒤로는 잉카인이나 스페인인이나 모두 평등하게 수은 중독으로 죽어갔다.[14] 물론 그 모두가 차도로 쓰인다는 것은 아니고 보통 보도로 쓰인다. 로마의 도로는 말, 혹은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다랗게 설계되었지만, 교통수단으로서의 가축이 아메리카에는 없었기 때문[15] 현인신으로 대접받았던 케이스는 아즈텍의 축제인 톡스카틀제에서 희생되는 잘 생긴 젊은이다. 이 젊은이는 외부 부족이 아니라 언제나 아즈텍인들로부터 선발되었으며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져 호사스런 생활을 하다가 제물로 바쳐졌다.[16] 살아남은 포로들은 거세시켜 환관으로 만든 다음 말을 사육하는 사육사로 만들 생각이었다고 한다.[17] 또는 스페인인이 성경을 건네며 '여기엔 하느님의 말씀이 있다'라고 했고, 황제는 그 말씀을 들으려 성경에 귀를 대었으나 들리지 않자 땅에 던졌다는 설도 있다. 사실 이는 황제의 무례한 행동이라기 보다는 나름대로 그쪽의 전통에 의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피사로 항목 참조.[18] 프란시스코 피사로 항목에도 나온 말이지만 그는 아타우알파 처형에는 극렬 반대한 사람이다. 이는 당시 스페인인들의 기록에도 남아있다.[19] 후궁은 많았으나 그중에서 본부인은 따로 있었다.[20] 연대기에 따르면 20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스페인인들의 자신의 승리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두 배로 부풀렸을 가능성은 있으나, 어찌 되었든 상당한 숫자이다.[21] 특히 피사로를 살해하고 도주한 알마그로의 잔당세력들[22] 잉카 제국에 반감이 컸던 지방의 도시들과 부족들이 스페인에 가담한게 큰 원인이었다.[23] 아주 안 된 것은 아니다. 잉카인들이 주변 민족들에게 반감을 사게 된 원인 중에는 인간 제물을 공물로 상납시킨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 제물들은 지배 계층의 어린이에만 한정되었다. 오히려 평민들에게 악감정을 갖게 만든 것은 잔인한 억압과 무거운 양의 공물이랑 강제 노역이었다.[24] 출처 잉카 최후의 날, 킴 매쿼리, 옥당.[25] 출처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카르망 베르낭, 시공사[26] 훗날 호수 바닥에서 진짜로 잉카군에게 살해당한 흔적이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27]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펠리피요가 아타우알파의 통역을 거짓되게 한 이유는 황제의 궁녀와 통정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28] 케추아어로 루나는 사람, 티냐는 북을 의미한다.[29] 퀘냐라고 불리는 페루의 전통 악기[30] 비슷하게 가죽을 전부 벗기는 풍습을 가진 민족이 안데스 지방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뱃가죽에 북을 넣을 생각을 한 것은 잉카가 최초였다.[31] 어린이 학습도서인 앗! 시리즈의 '잉카가 이크이크'(테디 디어리 지음)에서 저자는 잉카인들이 '우리는 너희들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리라. 우리는 너희의 이빨로 목걸이를 만들고 너희들의 뼈로 피리를 불며 너희들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리라' 라는 살벌한 노래를 부르는 대목으로 희화화하였다. 물론 잉카인들이 실제로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들이 적들에게 잉카의 무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이런 인간 공예품을 만들었다는 점은 사실이다.[32] 에스파냐인 병사들이 이 무기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망코의 봉기 당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후안도 이 무기에 의해 사망했다.[33] 훗날 잉카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투팍 아마루 2세가 이끌던 부흥군도 상당수가 이 슬링으로 무장했다. 상가라라 전투 당시 800여명의 부흥군이 교회 안에서 농성을 하면서 슬링으로 토벌하러 온 스페인 전열보병 900명을 거의 전멸로 몰아넣었다. 당시 스페인군 전사자는 무려 578명에 달했다. 그에 반해 부흥군의 사상자는 고작 30여명이었다.[34] 정작 잉카 문명의 영역권이었고 틈만 나면 자국을 잉카 제국의 후예들이라고 자처하는 페루와 다르게 우루과이는 잉카 제국의 일부에 속한 이력도 없다. 다만 우루과이의 옆나라인 아르헨티나는 후후이와 살타 주 등 북서부 일부 지역들이 잉카 제국의 영역권에 속한 적은 있다.[35] 원주민들이 백인들을 얼른 쫓아내려고 "(우리 동네가 아니고)저기 옆 동네에 황금이 많데요"라면서 계속 거짓말을 해서 다른 지방으로 보냈다 는 설이 유력하다.[36] 사실 동아시아도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미신 때문에 아기에게 희한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37] 특히 3대에 걸쳐 잉카에 저항한 에콰도르 북부 지방의 반란이 가장 격렬했다. 게다가 현재에도 잉카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페루와 이웃나라인 에콰도르 역시 사이가 좋지 않은데 스페인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 후에 영토 문제로 전쟁도 벌였었고, 축구 같은 스포츠 운동 경기에서도 양국 간 라이벌 전이 살벌하게 벌어지곤 한다.[38] 물론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 볼리비아에도 푸카라나 잉카피르카, 사마이파타 등 잉카 제국 시대의 유적지들이 더러 있긴 한데 페루의 마추픽추나 쿠스코 등에 비해서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오지 않는다.[39] 심지어 페루와 에콰도르, 칠레와 볼리비아, 이렇게 페루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 후 주변국들과 을 수없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