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모토 쿠니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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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가마모토 쿠니시게(釜本邦茂)
생년월일
1944년 4월 15일
출생지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국적
일본
소속 정당

포지션
공격수
신체조건
181cm
소속 팀
얀마 디젤[1] (1967~1984)
지도자
얀마 디젤 (1978~1984)
마쓰시타 전기산업[2] (1991~1992)
감바 오사카 (1992~1994)
국가대표
84경기 80골
1. 개요


1. 개요


가마모토 쿠니시게는 일본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다. 특유의 왼발 중거리슛으로 유명하지만 선수 본인에 의하면 에우제비오 동영상을 보고 많이 연구한 오른발 슛이 더 낫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키는 181CM라고 하는데 이 정도면 아시아 내에서는 최장신급 신장이라 머리도 잘 썼고, 스피드나 순간 속력도 결코 느리지 않았다.
유소년 시절에는 원래 야구를 하려고 했지만, 축구에 재능도 있었기 때문에 축구 지도자로부터 야구를 하면 일본이나 미국 정도지만 축구는 올림픽도 있고 세계적으로 활약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축구로 전향했다고 한다.
가마모토는 유소년 시절부터 그 득점력이 특출났다. 그는 이미 대학교 시절 4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다. 성인 선수가 되고 나서 가마모토는 리그에서 득점왕을 7번, 어시스트왕을 3번 기록했으며, 리그 베스트 11에 14회 꼽혔고, 7차례나 리그 최우수 선수로 꼽혔다. 평생 리그에서 202점, 79어시스트를 거뒀는데 두 기록 다 일본 역대 1위 기록이다.
대표팀에서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일본 대표팀을 이끌고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이끌었으며, 이 대회에서 가마모토는 올림픽 득점왕을 차지했다.
한일전에서도 가마모토는 요주의 대상이었다. 가마모토가 뛰던 시절에도 한일전에서 한국이 일본보다 많이 이긴 편이긴 하나, 그 앞뒤와 비교해 볼 때 가마모토가 있던 시절 한일전에서 일본의 전적 역시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김호가 가마모토를 집중마크했으며, 가마모토는 김호는 자신의 친구가 아니며 자신을 너무 많이 때렸다고 증언한다.[3] 이세연의 경우 가마모토가 한국의 이회택, 차범근보다 뛰어났다고 말하며, 김호 역시 차범근보다 가마모토가 낫다고 말했다.[4] 어쨌건 가마모토가 한일전에서 7골을 넣긴 했으나 다른 경기들과 비교하면 득점력이 저조한 것은 맞다.
은퇴 이후 지도자 생활을 하기도 했다. 81년에 리그 우승을 거뒀고, 83년과 84년에는 J리그컵 우승을 거뒀다.
이후에는 모리 요시로의 스카우트로 자유민주당 참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투신하기도 했다.
대표팀 득점은 84경기 80골이란 설과 76경기 75골이란 설이 있다. 이것은 RSSSF의 경우 76경기 75골로 치고 피파의 경우 84경기 80골로 치는데 어느 경기까지 A매치로 인정해주느냐의 선이 다르기 때문이다. FIFA에 따르기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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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습이다.
[1] 현재의 세레소 오사카 [2] 현재의 감바 오사카 [3] 이 당시 선수인 이차만의 경우 경기장에 못을 가지고 가서 몰래 찔렀다고 하고, 골키퍼인 이세연은 펀칭하는 척 주먹으로 가마모토의 뒤통수를 치는가 하면, 일본 선수들 얼굴에 침을 뱉는 선수도 많았다고 한다.[4] 이 선수들의 경우 대표팀에서 뛰던 시절이 가마모토와 거의 비슷하다. 또, 차범근이 대표팀 초년생 시절 이 선수들은 이미 대표팀 최고참 격이었다. 따라서 가마모토에 대한 인상이 차범근보다 더 강렬하게 남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이회택과의 비교는 흘려듣기 어렵다. 이것을 당시 경쟁팀 일본에 대한 고평가를 하면 수비수 자신들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해서 무시만 하기에는, 가마모토가 나타나지 않았던 시절의 일본은 전적만으로 본다면 한국의 경쟁팀이 아니었고 가마모토가 은퇴하고 난 이후에 또 한동안은 경쟁팀이라고 하기는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