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18회

19회

20회
1964 도쿄 올림픽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1972 뮌헨 올림픽
1. 소개
2. 특징
2.1. Black Power Salute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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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어 : Juegos de la XIX Olimpiada
Los Juegos Olímpicos de México 1968
영어 : Games of the XIX Olympiad
개최날짜: 1968년 10월 12일 ~ 1968년 10월 27일
개최장소: 멕시코 멕시코 시티
1968년 멕시코에서 열린 하계 올림픽. 미국아르헨티나, 프랑스를 꺾고 개최권을 획득했다.
멕시코 당국은 이 대회를 통해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멕시코가 경제성장과 사회안정을 통해 제3세계를 선도하는 나라가 되었다고 과시하려는 행사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촌향도와 빈부격차, 제도혁명당의 권위주의화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올림픽에 대한 불만이 학생들 사이에서 적지 않았고, 개막식 전날에 반정부 시위를 벌이던 수백명의 학생이 멕시코 경찰에게 숨진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멕시코 현대사의 분수령으로 불리는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사건이다.
그래서 멕시코 내에서는 한창 경제적으로 잘나갔을때 치러진 올림픽이기는 하지만[1] 올림픽 전후에 일어났던 일이나 이후의 멕시코 현대사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생각해보면 차마 웃을수 없는 올림픽으로 기억된다

2. 특징


동독서독이 서로 갈라져서 출전한 최초의 하계 올림픽으로(단, 국기와 국가는 단일 팀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다음 대회부터 각자의 국기와 국가 사용), 이후 동서독 통일이 되기 전까지는 분단해서 출전하게 된다. 이유는 오히려 "동서관계가 호전돼서 단일팀이 필요하고 말고도 없고. 그냥 따로 출전하죠"라는 것 때문. 동독은 아예 서독을 외국 취급하기 시작했고. [2]
성화봉송은 멕시코의 전 육상선수인 엔리케타 바실리오가 맡았다. 여성이 성화봉송을 한 것은 그녀가 최초이다.
멕시코 시티 자체가 높은 고도(2240m)에 있다보니 각 종목 선수들마다 다른 불편함이 나오곤 하였었다. 중, 장거리 달리기 선수들은 산소가 희박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욱 큰 인내력을 요구하여 기록이 늦어지는 등 트랙경기에서는 막장끼가 다분해졌으나, 반면에 산소가 없기 때문에 공기저항도 적어져서 단거리 달리기나 높이뛰기나 멀리뛰기같은 필드경기들의 기록은 상당히 좋아졌다. 특히 멀리뛰기는 금메달을 차지한 미국에 밥 비욘이 세계기록을 55cm이나 경신하고, 2위와의 격차는 71cm로 벌려놓은 8.90m의 신기록으로 우승하게 된다. 이 기록은 23년이 지난 1991년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미국의 마이크 포웰이 8.95m로 경신했다.[3] 100미터 달리기도 10초 벽이 깨졌다. (9초 95. 단, 당시 공식 기록은 소수점 이하 한 자리만 나타냈기에 9초 9).
하지만 높이뛰기에서는 고도의 장점뿐 아니라 새로운 기술도 나왔는데, 딕 포스베리가 선보인 포스버리 플롭(배면뛰기)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뒤돌아서 점프하는 방식. 이 뒤로 이 기술은 높이뛰기에서 주로 사용되는 기술이 되었다.
또한 도핑테스트가 시범적으로 시행된 올림픽으로, 스웨덴의 근대 5종경기 선수인 한스-건너 리젠웰은 알코올 사용이 걸리면서 자격을 박탈당하기도 하였다. 경기 전날 맥주 등을 과음한 탓이었다고.
마라톤에서는 아베베 비킬라의 3연패를 예상했으나 의외로 아베베는 17km 즈음에서 기권했다. 사실 아베베는 이전에 무릎 부상을 당한 것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자 같은 에티오피아 선수인 마모 웰데를 도와주기 위해서 스스로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맡는다. 대회 전까지 자신은 이미 회복되었다며 블러핑을 친 다음 경기가 시작되자 초반부터 의도적으로 싸움을 붙은 것이다. 다른 선수들은 올림픽 2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아베베가 초장부터 강하게 나오자 견제를 하느라 페이스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고, 아베베의 의도를 알고 있던 마모 웰데는 차분하게 페이스를 조절하여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4]
에티오피아의 우승에 가려지긴 했지만 '아름다운 꼴찌' 이야기도 있다. 마라톤에서 맨 마지막에 들어온 선수는 탄자니아의 존 스티븐 아크와리(John Stephen Akhwari)라는 선수였다. 아크와리는 경주 도중 넘어져서 무릎이 탈골되는 부상을 입었다. 의료진은 당장 병원으로 가서 치료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붕대를 감는 응급처치만 한 채 끝까지 마라톤을 완주했다. 결승점인 주경기장에 도착하자 기자들은 왜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달렸는지 질문했다. 그러자 아크와리는 '탄자니아는 참가만 하라고 나를 이 곳에 보낸게 아니다. 탄자니아는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완주하라고 보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전 대회에서 정식종목으로 되었던 유도는 이 대회에서 정식종목에서 제외되었으며, 테니스가 다시 시범종목으로 채택이 되었다.
IOC위원장인 자크 로게요트 종목 대표로 처음 대회에 출전한 대회이기도 하다.
개최국인 멕시코 축구팀은 3, 4위전에 올라가서 일본과 경기를 벌이게 되었는데 모국 관중들의 응원 속에서 멕시코가 이기리라 전망했는데 일본이 2-0으로 이기고 아시아 역사상 첫 축구 메달을 받아버렸다. 당시 멕시코 반응은 월드컵 탈락 수준으로 매우 실망이었다고.[5]

2.1. Black Power Sal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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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200m에서 1, 3위를 차지한 토미 스미스(Tommie C. Smith)와 존 카를로스(John Wesley Carlos)는 메달시상식에서 이 해 4월 4일에 암살당한 마틴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추모[6]와 인종 차별에 항의하는 뜻으로 성조기를 쳐다보지 않고 '''검은 장갑을 끼고 하늘에 주먹질을 한 흑인 인권 세레머니(Black Power Salute)'''를 취했다. 1등 시상대에 올라 있는 스미스는 "우리는 흑인이다" 를 뜻하는 검은색 장갑을 오른손에 끼고, 목에 "흑인의 자부심"을 뜻하는 검은 스카프를 둘렀으며, 왼손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 묘목이 담긴 상자를 들고 있고, 3위인 카를로스 역시 왼손에 검은색 장갑을 끼었고[7], "흑인의 가난"을 상징하는 검정색 양말을 끼었으며, 은색 목걸이에 점퍼를 풀어해쳐서 미국 노동자들의 연대감을 표시하고 있다. 두 선수 모두 운동화를 벗어 그들 옆에 두었으며, 또한 2위를 한 호주 선수 피터 노먼(Peter George Norman)이 미국 선수들의 설명을 듣고는 즉석에서 흔쾌히 시위 참여를 결정, 세 메달리스트 모두가 왼쪽 가슴에 흰 동그란 배지를 달고 있는데 이것은 '인권을 위한 올림픽 위원회(Olympic Committee for Human Rights; OCHR)를 상징하는 배지였다.
이들의 행위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아직 인종차별이 절대악이라는 인식이 확립되기 이전이라 국제올림픽위원회는 '올림픽 정신을 훼손하는 폭력적 행위'라며 이들을 선수촌에서 추방했다. 당시 IOC 위원장이었던 에이버리 브런디지(미국)은 "일부 몰지각한 니그로들의 추태"라면서 격렬히 비난할 정도였으며 이들의 메달을 박탈하는 것까지 고려하였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두 선수는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서 토마토 세례를 받아야 했으며, 백인들의 암살 협박에 시달리면서 오랜 시간동안 자의반 타의반에 의해 은둔 생활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미국에서 흑인의 인권이 신장되면서 이들 선수들은 인종 차별에 반대한 용기있는 행위를 한 선각자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들의 시상식에서의 퍼포먼스는 흑인 인권 운동을 상징하는 하나의 심볼이 되었으며, 이들의 사진은 록밴드 RATM의 싱글 Testify의 표지로 사용되기도 했고, 인종갈등을 다룬 다룬 영화 리멤버 타이탄에서도 이 사진이 나온다. 2005년에 산호세 주립대학교에 이 사진을 모델로 한 동상이 세워졌다. 이 동상에는 피터 노먼이 섰던 2위 자리가 비어있는데 이는 피터 노먼 본인의 요청에 의한 것으로, 자신은 전혀 중요한 사람이 아니며 동상을 본 사람이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할 기회를 가졌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이라고 한다.
피터 노먼 역시 큰 시련을 겪었다. 피터 노먼은 어릴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아버지와 함께 차별받는 유색인종 극빈자들을 위해서 무료급식을 실시하는 등 인권운동에 적극적이었는데, 같이 시상대에 오르는 스미스와 카를로스의 계획을 우연히 알고 그에 감명받아 보트경기에 출전했던 다른 미국인 흑인 선수에게서 OPHR 뱃지를 빌려 착용한 상태로 시상대에 오른 것이다. 당시 호주가 백호주의로 인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과 배척이 어찌나 심각했던지, 피터 노먼은 호주 최초의 육상 메달을 획득한 국민영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올림픽 참가는 커녕 선수자격조차 박탈당했고, 인격적으로도 이단자로 낙인찍혀 매장당해 잊혀지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모욕적인 대우를 모두 감내했고, 스미스와 카를로스를 비난하면 복권시켜주겠다는 제의를 수차례나 받았으나 모두 거절했다. 피터 노먼은 신념을 지킨 대가로 모두에게 잊혀진 채 2006년 쓸쓸히 사망하였고, 스미스와 카를로스는 그의 관을 운구하며 그를 기렸다. 이후 2008년, 그의 조카인 맷 노먼이 'SALUTE'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사람들에게 다시 회자되기 시작했고 마침내 사건 발생 후 44년이나 지난 2012년 호주 의회가 피터 노먼의 퇴출에 대해 고인에게 사과하면서 그의 명예가 회복되었다.

3.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1968년 19회 멕시코시티 올림픽 (1968 Summer Mexico City Olympics)
  • 기간 : 10월 12일~10월 27일
  • 규모 : 112개국 5423(여)명 참가. 
  • 종목 : 근대5종, 농구, 레슬링, 배구, 복싱,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요트,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펜싱, 펠로타, 하키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21명, 선수 55명 참가.(농구, 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역도, 육상, 체조)
  • ▶대한민국 참가 성적 :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 획득. 종합순위 36위.
  • 은메달 : 복싱(라이트플라이급) 지용주
  • 동메달 : 복싱(밴텀급) 장규철
대한민국은 복싱에서 은메달 1개(지용주), 동메달 1개(장규철)를 획득하며 벨기에, 우간다와 함께 종합 36위의 성적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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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멕시코는 현재 멕시코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비록 정치적으로 제도혁명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나라이기는 했어도 경제적으로 수입대체산업화 정책을 바탕으로 매년 7%대의 고도경제성장을 누리던 국가였고, 그래서 '''멕시코의 기적'''이라는 찬사까지 들으며 개발도상국의 모범쯤 되는 나라로 손꼽혔다.[2] 사실 단일팀 시절에도 말만 단일팀이지 실제로는 동-서독 선수와 임원들이 완전 따로 놀았다. 눈가리고 아웅할 바에는 그냥 따로 나가자는 주장이 득세한 이유. 근본적인 이유는 국제올림픽위원회가 이때까지 동독올림픽위원회를 승인해 주지 않았다는 것. 서독의 독일올림픽위원회에 껴서 출전을 시켰기 때문이다. 동독은 올림픽 참가를 포기하든지 서독에 붙어서 나가든지 양자택일을 하다가 이제서야 승인을 받아서 단독 참가가 가능해진 것. 단, 각종 종목 협회에서는 동독을 전부터 인정했기 때문에 세계선수권 등에서 동, 서독이 별개로 참가를 한 경우도 있었다. 축구는 지금의 영국처럼 피파는 별개 가입했으며 올림픽만 단일 팀을 구성했다(그러나 실제로는 양독이 대결하여 이기는 팀이 독일 대표가 됨).[3] 이 기록은 2019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4] 불행하게도 아베베는 이듬해에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가 되면서 평생 마라톤에서 뛸 수 없게 되었고 몇년 뒤 또다시 교통사고로 인하여 뇌사상태에 있다가 1973년에 유명을 달리했다.[5] 그리고 44년이 지나 2012 런던 올림픽 남자축구 4강전에서 다시 재회한 멕시코는 3:1로 일본에게 역전승을 거두면서 설욕하며 결승에 올라가서 브라질 제치고 사상 첫 축구 금메달까지 받았다.[6] 같은 해 6월에는 대선 후보로 유력했던 존 F. 케네디의 동생인 로버트 케네디도 암살되었는데, 그 또한 인권을 중시했던 사람이었다.[7] 원래 둘 다 검정 장갑을 끼고 오기로 계획했으나 카를로스가 깜빡 잊고 장갑을 가져오지 않아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는데 은메달을 딴 피터 노먼이 '그럼 나눠 껴라' 라고 조언해 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