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와베 마사카즈
1. 개요
일본군의 장성.
2. 행적
무타구치 렌야와의 개인적 친분 때문에 임팔 작전을 승인했다. 이 멍청한 행동이 일본군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보라. 게다가 작전이 누가 봐도 완전히 실패한 뒤에도 체면 때문에 무타구치와 책임 떠넘기기를 하느라 철수가 늦어서 더더욱 많은 아군을 팀킬했다. 3이란 숫자가 좋아서 사대오물이 안된것만 같다.
심지어 중일전쟁의 계기인 노구교 사건 당시에도 무타구치의 상관으로서 무타구치가 독단적으로 일으킨 중국군에 대한 공격을 묵인, 방조했다. 게다가 항공총군 사령관시절엔 '''제4항공군 사령관에 도미나가 교지'''를 임명시키라고 조언을 했던 전적까지 있었다. 1945년 12월 2일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짧게나마 감옥살이를 한 무타구치와는 달리 완전하게 불기소 석방되었다.
그러나 자신의 책임을 부하들에게 돌린 무다구치 렌야와는 달리 그는 병사들과 부사관들에겐 아버지같은 존재로 불리웠고, 심지어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가와베 마사카즈는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장례식 때 수많은 장병들과 부하들이 참석했다고 한다. 또한 동남아시아 점령지에 일본군이 철도를 부설할 때, 인명 피해가 우려된다며 기획만 하고 실제 공사를 미루기만 했다. 문제의 철도가 '죽음의 철도'라 불리고 콰이 강의 다리란 영화가 나올 정도로 악명이 높아진 것은 마사카즈의 후임인 기무라 헤이타로 때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