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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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노동을 당한 오스트레일리아, 네덜란드 포로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 비견될만 하다.
1. 개요
"죽음의 철도"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제2차 세계대전 도중 일본 제국이 군대와 무기의 수송을 위해 건설한 길이 415km의 철도이다. 당시 태국의 방콕과 미얀마의 양곤을 연결하고 있었으며, 일본 측에서 부르던 명칭은 태면련접철도('''
연합군 전쟁 포로와 끌려온 민간인들의 피와 땀으로 건설했다는 게 과장이 아닐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냈다. 최대 약 25만명 정도로 추정되는 규모의 연합군 포로들은 건설 내내 강제 노동에 시달렸으며, 철도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약 '''10만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상세적인 노선은 태국의 농 플라 둑(Nong Pla Duk)역에서 미얀마의 탄비류자얏(Thanbyuzayat)역까지였다.
2. 역사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이 철도는 태국과 미얀마 사이에 위치한 험한 산지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때문에 난공사 구간이 많았다. 일단은 일본의 설계 상으로는 이 철도는 궤간 1000mm의 미터 궤간에, 최소 곡선 반경이 200m 이며, 최대 구배는 20퍼밀로 상정하고, 기관차는 일본제 C56형 증기 기관차[1] 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제국의 열악한 사정 때문에 설계에 따라 건설되긴 커녕 최소한의 열차가 달릴 수 있을 정도로만 다급히 공사했기 때문에 최급구배 20퍼밀, 최소 곡선 반경 200m로 설계했던 철도가 막상 공사를 완료하고 보니 최급구배는 설계상의 2배인 40퍼밀을 찍지 않나, 최소 곡선반경 또한 설계상에서 더 줄어든 160m 로 부설되었다.
이렇게 굉장히 험한곳을 지나는 철도임과 동시에 일본군 감독관들의 학대 때문에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는데 버마방면군 사령관 기무라 헤이타로의 지휘로[2] 전쟁 포로 6만여 명, 태국·인도네시아·미얀마·말레이시아 같은 아시아에서 끌려온 노동자 20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이 중 11만 6천여 명이 질병·부상·영양실조·과로 등으로 사망했다.[3] 특히 가장 공사 난이도가 높았던 탐파이(Tampii)역과 힌 톡(Hin Tok)역 사이에 있던 암석질 언덕을 절개하여 선로를 낸 구간은 철도 부설 노역자들이 잠을 자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밤에도 모닥불을 피웠던 것에 유래하여 '''지옥불 구간(Hellfire Pass)'''이라는 명칭이 붙을 정도였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뒤에는 개보수 없이는 노선을 이용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애초에 설계상에 따라 공사되지 않았던 부실한 철도가 연합군의 폭격까지 맞았으니 더더욱 개판이 된것.[4] 전 더군다나 전쟁이 끝나자 원래의 목적을 상실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구간은 그대로 폐선되었다. 태국측 철도 중 방콕에 가까운 구간은 전쟁 이후 1957년에 복구되어 로컬 노선으로 활용 중이다. 현재 운행 중인 구간은 130km로 농 플라 둑(หนองปลาดุก)에서 남톡사이요크노이(น้ำตกไทรโยคน้อย)역까지의 구간이다. 원래는 남톡(น้ำตก)까지만 철도가 들어왔는데 인근에 있는 사이 요크 노이(Sai Yok Noi) 폭포가 관광지로 유명해지자 2003년에 기존 노반을 그대로 활용하여 추가로 연장한 것이다. 현재 태국국유철도에서 하루 4회, 왕복 2회 열차가 운행중이다.
3. 복구 논의
1987년에 버마 철도의 폐선 구간을 복구하고 증기 기관차를 달리게 관광 노선으로 부활하게 하려는 계획이 있던 적이 있다. 이 계획은 태국 정부가 일본에게 돈을 받아 복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때 포로로 버마 철도의 건설에 연행된 호주 재향 군인회와 네덜란드의 옛 포로들은 '''"버마 철도의 복구는 아우슈비츠를 유원지로 만드는 것과 같다!"''' 며 엄청나게 화냈다.
그 이후 21세기에 접어든 현재까지 딱히 그렇다 할 움직임은 없다, 그나마 추진이 있는 곳은 2003년 완공된 남톡사이요크노이(น้ำตกไทรโยคน้อย)역까지의 연장 구간 뿐.
4. 미디어에서의 묘사
영화 콰이 강의 다리에서 그 모습이 나왔다. 하지만 실제에 비해 너무나 미화하고 일본군을 정상적으로 묘사했다. 물론 이에 대해 반론으로, 이때 당시 사령관은 미얀마의 도살자이자 미친 악귀 기무라 헤이타로가 아닌 모자라지만 마음씨는 착한 전임사령관이었던 카와베 마사카즈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상적으로 묘사했을지도 모른다.''' 원래 이 영화의 콘셉트 자체가 어떤 의미로는 꼭 닮은 영국군과 일본군의 멘탈 대결이었다. 또한 영화에서 나온 일본군 수용소장의 모델인 부소장 사이토 리사부로 중령은 실제로도 일본군치고는 적군 포로를 정상적으로 대해줬다.[5]
영화 《레일웨이 맨》(2013)에서도 다뤘다. 이 영화는 1995년 출간된 동명의 책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1] 이 중 31호차는 개통식에서 사용되었다는 이유만으로 태국에서 퇴역한 이후 일본 야스쿠니 신사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2] 원래는 전임 사령관 카와베(임팔전투 승인자)가 기획했지만 사람들이 많이 희생될것 같아 기획만 했었다. 멍청하긴 했어도 사람 성격은 좋았었나 보다.[3] 그래서 전임 사령관인 카와베도 이걸 염두하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공사 계획을 중간에 취소했다.[4] 종전 직후에는 폭격에 의해 전복되고 파손된 열차의 잔해들이 연선 곳곳에 널부러져 있었다고 한다.[5] 하지만 이런 이유 덕택에 그는 기무라 헤이타로에게 무지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구타와 욕설을 쉬지 않고 받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