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나가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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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 일본군의 장성.
무타구치 렌야를 능가하는 무능함으로 유명하다.[1]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함께 삼대오물이라 불리며 수십 년 넘게 욕을 먹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군사적으로 무능했을 뿐, 인격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평가가 180도 달라진다. 무타구치 렌야처럼 자신의 잘못을 부하들에게 떠넘기지도 않았고 하나야 타다시처럼 병영부조리를 일삼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일본군의 장교들과는 달리 오히려 학살을 반대하고 전쟁범죄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 지역의 민간인에게 대민지원을 하고, 학살하러 오는 아군에게 팀킬 선언까지 하면서 격렬히 대립하는 등 최선을 다해서 막았다. 한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데,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일본군 장교'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 똥별 이미지조차도 무타구치가 다 가져가서 그럴지도 모른다.[2]
2. 생애
2.1.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과 낙하산 인사
그의 군사적 역량은 당시 전력이나 다른 부대가 세운 전과를 고려해 어떤 의미로 전설이었다. 하지만 대신 그에겐 하늘이 내린 줄타기 능력이 있었다.
육군대학을 졸업[3] 한 후 도조 히데키 라인을 탄 그는 정계와 군부, 재벌을 잇는 뇌물 셔틀 역할을 하면서 '도조의 돈주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라인을 잘 잡은 덕분에 참모본부 참모와 관동군 보병사단 참모를 차례로 역임했고 요직인 육군성 인사국장을 거쳐 육군 차관까지 승진했다. 그러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8월, 그의 보스 도조가 실각하면서 자리를 내놓았다. 그런데 도미나가의 다음 자리가 문제였다. 도조의 뒤를 이어 육군대신이 된, 같은 삼대오물로 불리는 스기야마 하지메마저도 도미나가가 무능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뒤를 봐주는 세력이 워낙 든든했기에 '이놈을 대체 어디에 배치하나?' 하며 상당히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스기야마는 1944년 당시에 가장 안전한 남방전선을 생각해냈다. 일본군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에 이 사람을 보내라고 조언한 사람은 다름아닌 카와베 마사카즈[4] 였다. 그리하여 1944년 9월, 도미나가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스기야마 하지메가 한 말이 걸작이다.
'''드디어 그 딱따구리를 내 눈앞에서 치웠다.'''
2.2. 카미카제 명령
그런데 도미나가는 항공군을 지휘한 경력이 전혀 없었고, 기본적인 항공전 전략전술조차 하나도 몰랐다. 차라리 무능하면 가만히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항공기를 출격시킬 때마다 중2병마냥 군도를 휘두르며 ''''발진!''''을 외쳤다. 전후 참모들이 회상하기를 '어차피 파일럿들에게는 보이지도 않았는데, 쓸데없이 활주로 바로 옆에 나가서 군도를 휘둘러서 이륙에 큰 방해였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그가 저지른 최악의 실수는 귀중한 육군 항공대 전력을 카미카제로 말아먹은 것이다. 1944년 9월 카미카제 허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토미나가는 줄기차게 특공을 지시했다. 그래서 총 62차례 특공을 시도하여 전투기 400여 기를 내버렸다. 심지어 기체가 고장나서 돌아오거나 간신히 산 대원에게도 충성심이 모자라다며 훈시하고는 다시 전투기에 태워 특공을 보냈다. 이는 비인간적인 전술일뿐더러, 귀중한 항공기와 더 귀중한 조종사를 1회용 폭탄으로 삼아도 10회 중 1회 성공할까 말까 한 전술적/전략적으로 손해인 뻘짓이다. 더군다나 400여 대를 62차례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투입했으니, 피해를 입히기는커녕 날 잡아줍쇼 하는 꼴이었다.
이러한 도미나가의 특공 명령 덕분에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서진하는 미군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었을 육군 제4항공군의 항공전력은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의 수를 생각한다면, 제4항공군이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 본토나 필리핀 탈환전 방위에 나섰으면 미군은 더 심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를 예방했다는 점에서 도미나가가 얼마나 멍청하게 병력을 굴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자에 의하면 특공전이 되면 술 한병을 매달고 나타나서는 훈시를 내리는 능력밖에 없는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공하는 항공대원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자주 이렇게 훈시했다.
그러나 그는 특공혼을 불사르기는커녕 평생 전투기를 한 번도 안 탔다. 더욱 더 황당한 건 이미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2번이나 사임서를 냈었다.제군은 이미 신이다. 제군만 보내지 않는다. 본관 역시 마지막 일전에서 특공혼을 불살라 제군을 따라갈 것이다.
2.3. 적전도주 (敵前逃走)
1945년 1월, 일본의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가장 안전했던 남방전선은 임팔 작전의 대실패로 영국, 인도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공해 미얀마까지 탈환했으며, 태평양의 미 해군은 레이테 만 해전 이후 필리핀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들은 해가 바뀌자마자 이미 마닐라 코 앞까지 와서 해병대의 상륙을 위한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1945년 1월 16일, 도미나가는 위궤양이 악화했다면서 수송기를 타고 타이완의 타이베이 기지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총애하는 기생들을 잊지 않았고 수송기의 남은 공간에는 위스키를 실었다. [5] 즉, 남방전선 전역의 제공권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적전도주한 것이다. 게다가, 레이테 섬을 잃자 제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마닐라를 포기하고 루손섬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지만 "사령관님, 이미 많은 특공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닐라를 포기할 여유는 없으니 여기서 옥쇄를 각오하겠습니다." 하며 허세를 부렸다.
도미나가가 도주하자 제4항공군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2월 13일부로 완전히 해체해 육군 보병 부대에 편입되었다. 필리핀 탈환전은 지상병력이 서로 비슷하고 기동에 필요한 공간이 충분해서 일본군의 전투능력을 확인할 좋은 사례인데, 여기서 40만 대 40만 전투를 벌여 전사자가 미군 1만여 명, 일본군 39만여 명이다. 사령관이 도망간 제4항공군의 대부분이 필리핀에서 뼈를 묻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인원은 육군이 거두어서 전투병으로 써먹었지만, 육군의 주력 전투기 Ki-43 하야부사의 상당수는 조직적인 반격도 한 번 못하고 카미카제에 축차적으로 들어가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이 에이스 칭호를 달기 위한 제물로 쓰였다. 그나마 카미카제에 안 쓴 전투기 500여 대는 고스란히 필리핀을 탈환한 미군 손에 넘어갔다.
그나마, 말레이 반도에서 기동전으로 대활약을 펼쳐 '말레이의 호랑이' 라고도 불린 필리핀 방면군 총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여타 일본군 지휘관들과 달리 군사적 능력이 있어 7개월 가까이 지연전을 해냈다.
그런데 도미나가는 적전에서 도망쳐 온 주제에 대낮에 군용차에 기생을 데리고 다닌 데다, 위궤양이 심하다며 온천을 갔다. 찾아간 곳은 타이베이에 있는 베이터우 온천이 가장 유력하다. 당시 이 지역에 일본군 부상병을 위한 요양소가 있었고 기생관광으로 유명했다. 이런 개념 없는 행동으로 순식간에 대본영 전체에 도미나가의 소문이 쫙 퍼지자 어떤 병사도 그에게는 경례를 안 했다. 주위에서는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최후를 맞으라며 할복을 권유했으나 그는 끝내 거부했다.
사실 카미카제 부대의 지휘관들 대부분은 전후에도 살아남았다. 도미나가는 아예 대놓고 적전도주를 해서 더 까일 뿐이다. 카미카제 부대 지휘관 중 해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이었고 전후 할복 자살한 해군중장 오니시 다카지로 제독을 빼면, 부대원들과 함께 한 사람은 해군 제5항공함대 사령관 해군중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뿐이다.
1945년 2월 초, 그는 위궤양 진단서를 떼서 직속상관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 자기 행동이 적전도주가 아니었다는 인증을 받으러 갔다. 당연히 야마시타 장군은 빡쳐서 '부하를 버리고 도주하는 놈 따위와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며 문전에서 박대해 그의 승인을 각하시켰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의 상당 부분이 미군의 손에 들어가며 영인군이 인도차이나로 밀고 들어오니, 일본 육군은 일개 중장 1명에게 신경 쓸 틈이 없어 군법회의도 어영부영한 끝에 예비역으로 편입했다. 게다가 이미 이자의 상관인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에서 적전도주를 하고도 처벌받지 않은 탓에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도 처벌이 힘들었다.
그러나 일본 육군 본부는 '적이 무서워 적전도주한 놈에게 본토에서 예비역으로 편하게 살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이유로 1945년 7월에 그를 현역으로 전격 복귀시켜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육군 139사단장에 임명했다. 사실상 소련군과 싸우다 잡혀 죽거나 포로 생활을 하면서 고생 좀 해보라는 소리였다. 개념 없기로 소문났고 도미나가의 뇌물을 받아먹고 비호하던 군부에서조차 이런 결정을 내렸다는 건 도미나가의 행동이 일본군의 관점에서도 도를 넘어도 한참 넘어서였다.[6]
그리고 도미나가는 만주 작전을 편 소련군이 만주로 밀고 내려오자 전투에 나섰으나 겁이 나서 싸우지도 않은 채 곧바로 항복해 소련 육군에 체포되었다. 기울어진 전세에 패전이 확실시 된 상황에서 소련군과 일본군의 전력 차이를 생각하면 이것이 인도적인 행동이기도 하다. 이 사람은 겁나니까 무작정 항복한 거였지만, 그만큼 소련군과 그의 부대 모두 무의미한 피를 흘리지 않고 부하들도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전범으로서 재판받아 소련의 수용소에 억류받았고, 하바롭스크의 굴라그에서 10년 가까이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 뒤 소련-일본 간 국교 정상화로 포로 송환을 통해 1955년 일본으로 돌아왔고[7] , 1960년 노환과 포로 수용소 생활의 후유증이 겹쳐 사망했다. 향년 68세.
그런데 유일하게 항복한 장군이라서 대접이 좋았고 좋아하는 위스키를 실컷 마시다 그 후유증인 위궤양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소련 수용소에 갇힌 일본군 포로들에겐 별다른 원한이 없어서 소련도 뜻밖에 (일본 군인들이 각오했던 것보다는) 괜찮은 대접을 했다고 한다.경험자의 그림일기 해당 그림일기를 쓴 주인공도 '''139사단 출신'''이다.[8] 소련인 배신자들 대우가 그야말로 지옥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독일군 포로들도 사망자가 수십만에 이를 만큼 혹독한 대접을 받은 것과 달리[9] 일본군 포로들은 초기 물자가 극히 모자라던 시절 등을 빼면 그래도 좀 나은 생활을 했다. 그렇지만 소련군도 인간인지라 세균전에 가담한 인간 쓰레기들에겐 독일군 포로보다 더 혹독한 대우를 했는데, 731부대 실험 대상으로 러시아인들도 쓰였던 전례가 있어서였다.
3. 후대의 평가
3.1. 군사적 측면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묶여 삼대오물이라 부르고 태평양 전쟁을 패전으로 이끈 오물 취급을 받는다. 그 가운데서도 도미나가는 카미카제로 멀쩡한 항공 전력을 말아먹었고, 무엇보다 군 사령관이 적을 눈 앞에 두고 도망쳐서 남방전선 항공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엄밀히 따지자면 무타구치 렌야는 그보다도 전후에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말한 뻔뻔함 때문에 까이는 게 더 많다.
결정적으로 이 인간은 할 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기본적인 업무소양이나마 있었던 두 사람과는 달리 정말 아무 것도 못했다. 무타구치 렌야는 임팔 작전시 기생집을 차리고 놀았어도 초반에는 정해진 업무 시간에는 그런 대로 일했다지만, 도미나가는 정말 일을 안 했다. 오죽했으면 스기야마 하지메마저도 이 인간을 어디다가 둘까 고민했을 정도. 차라리 도미나가에 비하면 무타구치 렌야와 스기야마 하지메가 유능한 인간으로 보인다.
최후의 순간에 옥쇄나 다름없는 명령을 받아 만주에서 싸우다 잡혔고 죽을 고생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는 싸우긴커녕 소련군 온다는 소식에 바로 항복해 만주 전선을 순식간에 붕괴시켰다. 게다가 애초에 무타구치 렌야는 임팔 작전 수행 도중 도주했다지만 차라리 전선시찰을 명분이라도 삼은 데다가 부하 사토 고토쿠가 멋대로 철수한 전력도 있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 적전 도주였어도[10] 전후관계를 고려하면 사실상 후퇴나 철수에 가까웠다. 애초에 상부도 사실상 실패한 작전 취급했으나 본인이나 직속 상관이나 체면상 철수에 관해 언급만 안했지 어느 정도는 묵인도 했다. 물론 예비역에 편입하는 징계를 먹고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영전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 사람은 일본군 입장에서 싸울 만한 상황[11] 임에도 대놓고 적전 도주를 하여 대본영의 심기를 거슬렸다. 필리핀 탈환전에서는 미군과 일본군의 병력만큼은 서로 대등했으나 질적인 고려는 빼더라도 전차는 3:1,[12] 야포는 2:1 수준으로 미군이 우세했다. 항공기의 경우 육군끼리 비교하면 서로 비슷한 상황이나 필리핀 주위의 항공모함에 배치된 해군 항공대 전력을 고려하면 일본군이 상당히 불리하다. 그나마 이것이 일본군 입장에서는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투입해서 끌어올린 전력이었고 방어전임을 고려하면 지더라도 적에게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위궤양이 명분이라지만 위스키와 기생을 챙겨 도주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매우 떨어지니 대본영의 어그로를 끌 만하다.
3.2. 인간적 측면
'''아군의 민간인 학살을 적극적으로 저지하는 등, 인간으로서는 상식인의 수준을 넘어 '의인'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다.'''[13]
참모본부 제2부장 시절, 중국 저장성의 닝보를 방문하여 세균전을 놓고 이시이 시로와 그 측근들과 토의했을 때 "야 이 미친놈들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거기 있는 민간인들은? 그들은 사람이 아니냐?" 하고 호통을 친 일화가 있었다. 게다가 이는 제4항공군 사령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모든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약탈과 방화를 저지를 때 그의 부대만은 약탈이나 방화, 학살이 없었고 오히려 피난민들과 원주민들의 생활을 지원하면서 대민지원을 했다고 한다.
더불어 마닐라 대학살 때도 기겁하면서 제4항공군이 맡던 지역의 학살을 강력하게 막고 다른 부대가 필리핀 사람들을 죽이러 오자 '''"만약 우리가 점령한 지역에서 너희들이 민간인을 학살한다면 아군이라 해도 거리낌없이 공격할 것"'''라고 엄포를 놓아 못 건드리게도 했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위법행위를 방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일본군은 대본영에서부터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적극 장려할 정도로 막장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의 일본군 장성들도 전쟁 범죄를 당연하게 여겼다. 말할 필요도 없이, 모두가 잘못된 일을 당연하게 여길 때 혼자서 아니라고 외치려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아군과 대립하면서까지 아군의 전쟁 범죄를 막는 일은 더더욱 그렇다.
애초에 이 양반은 뒷배가 워낙 든든해 아군과 대립하더라도 손해 볼 일도 그렇게까지 심하게는 없었다. 육군대신 스기야마조차도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치워버릴 수 있을지 고심하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자. 육군대신도 대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을 현장 지휘관들이 맘대로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 그의 주장이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도미나가 말고도 민간인을 도왔던 일본군은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소수이거나 직급이 낮았던 만큼 뭘 바꿔보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수천 명의 죽음을 막은 도미나가의 선행은 더욱 빛을 발한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정상적인 조직이었고 도미나가 또한 전투지휘가 아니라 점령지 안정화 임무를 맡았다면 크나큰 공을 세웠을 인물이다.
비슷한 예로는 미라이 학살 당시 민간인 구출을 시도한 톰슨 준위가 있다.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고 전범들을 찬양하는 일본 내 극우파들에게는 오히려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내전을 불사하고, 반인륜적인 명령을 거부한 점 때문에 삼대오물이라 불리며 무능한 전범들보다 훨씬 더 많은 욕을 먹기도 한다(...).
3.3.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
도미나가에게는 군인에게 꼭 필요한 가치관인 충성심과 애국심이 전무했다.
그 당시 일본 제국은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직업군인이 높은 대우를 받았고, 퇴역 군인이 되면 나라로부터 많은 연금을 받았으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었는데, 육사 출신이면 우리 나이로 21세, 22세 정도의 나이에 고등관 8등인 소위로 고시 합격자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육대를 나오지 못했어도 근속승진으로 소좌까지는 큰 문제가 없으면 보장이 되었었다. 진급이 안 되고 소좌로 퇴역하는 경우에도 제법 많은 은사금을 받을 수 있었을 뿐더러 고등학교나 전문학교의 교련교사가 되는 경우 학교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리고 고향에서 완장질도 가능했으니 군문에서 출세하지 못했다고 해도 다른 길들이 많이 있었다. 일반행정직 공무원들처럼 비현업 특정직 공무원으로 분류되어서 각종 수당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해경같은 곳은 현업으로 분류되어서 자신이 하는 업무마다 추가수당이 나온다.) 초과근무도 인정받는 시간이 매우적은 등 개차반 대우를 받으며 험한 환경에서 일하다가 기껏해야 50대 초반에 별 의미 없는 직업보도반이나 갔다 나오는 우리 나라의 대대장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의사 도미나가 키치타로는 아들을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구마모토 육군 유년학교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천성적으로 군인으로서 별다른 사명감이나 책임의식을 가지지 못했고, 육군 사관학교 시절 도조 히데키를 만나 그의 눈에 든 이후로는 군 내의 정치질이나 파벌 싸움을 이용해 자신의 이득을 챙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도미나가는 신들린 줄타기 능력 하나로 장성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군 내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꼭 필요한 업무만 관료적으로 처리하면서 황도파와 통제파의 파벌 싸움을 적절하게 이용하여 중간에서 많은 이득을 챙겼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보신주의자였던 도미나가는 오로지 자기 한 목숨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항공군사령관 시절에 보인 수동적인 모습과 위에서 내려온 명령만 기계적으로 처리하는 무사안일주의, 탈영과 적전 도주, 적전 항복이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동네 부잣집 아저씨나 동장, 면장 같은 스타일의 사람으로 한편으로는 어느정도 꼰대스럽고 이기적이나 다른 한 편으로는 인심이나 인간관계도 나쁘지 않으면서도 성격이 소심해서 큰 나쁜 짓도, 크게 인생을 걸 만한 짓도 못 하고 자기 몸 보신에나 힘 쓰는 사람, 단적으로 말해서 지구 어디에서든 '사명감이 있는 장군'과는 절대 맞지 않는 인물이다.
이렇듯 도미나가 교지는 애국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이익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본 일본군 지도부나, 맹목적으로 국가를 추종하여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심취해 온갖 막장 짓을 저지른 전범들과는 달리 군 수뇌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도 일본 제국의 광기에 물들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정상인이었다.[14] 그렇기 때문에 그는 상부의 반인륜적인 명령을 거부하거나 아군의 민간인 학살을 막는 등 끝까지 인의를 지켰던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악행까지 할 만한 속셈이나 악랄함 또한 없었던 것이다.
4. 팔라완 학살 관여 의혹
팔라완 학살 당시 근거가 된 2항공사단 테라다 세이치 중장의 포로학살 명령에 관여하지 않았냐 하는 의혹이 있다. 포로학살 지시를 내리기 전 테라다 중장이 직속상관인 도미나가 교지와 협의했는데, 그 내용이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 때문에 학살 지시를 내렸거나 방조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지만 증거가 없고, 무엇보다 상술했듯 도미나가가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미군이 전범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말 도미나가 교지가 학살에 연루되었다면 소련에게 요청해서 바로 전범재판에 회부시켰을 텐데, 그냥 내버려둔 걸 보면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미나가는 소련에서 풀려나고 5년 뒤에 죽었는데 정말 도미나가의 명령으로 미군 학살이 진행됐다면 5년동안이나 미국이 편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 팔라완 학살을 참고해도 나오지만 미국은 자국군 포로 학살에 대해서 결코 넘어가지 않고 엄벌에 처했기에 최종 책임자로 전범 재판을 받은 테라다 중장을 종신형을 선고하고 간접적으로 참여한 이들까지 싸그리 처벌했는데 도미나가가 관여했다면 결코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애초에 위에서 언급했듯 도미나가는 적어도 자기손으로 전쟁범죄를 저지를 사람은 아닌지라...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도미나가 교지랑 테라다 세이치 중장은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테라다 세이치가 일방적으로 도미나가 교지를 증오했는데, 그 원인이 포로학살 명령을 도미나가 교지가 거역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어쨌거나 도미나가 교지가 학살 관련해서는 해당 사건에 대해 개입한 의혹은 있지만, 도미나가가 제대로 정보를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테라다 세이치가 도미나가와 사무적인 일로 접촉했을 수는 있지만 관련 정보를 공유했을 가능성은 낮다. 결정적으로 도미나가는 전쟁 기간 내내 일본군 내에서 벌리는 학살이나 약탈 당 전쟁범죄에 대해서 결사 반대의 입장이었음을 감안하면, 팔라완 학살 관련해서 도미나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많이 낮은 것 같다.
5. 가족, 친족
- 아버지: 도미나가 키치타로, 의사
- 장남: 도미나가 야스시
- 차남: 도미나가 교지 = 부인: 토미나가 세츠 - 아들 도미나가 야스시
- 삼남: 도미나가 쇼죠
- 사남: 도미나가 켄고
- 처남: 모리타 이타루
- 사위: 카와무라 지로
아버지와는 정반대인 인품의 도미나가 야스시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특공을 나가기 직전에 101항공단의 한 참모에게 격려를 받았는데, 무서워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혼자서만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출격했다. 그가 특공으로 산화한 뒤 그 참모가 "그 용감한 청년은 대체 누구였는가?"하고 물어보니 "'''그 도미나가 장군'''의 아들입니다." 하고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을 듣자 놀라며 이 청년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1] 무타구치는 무능하지만 그나마 뭐라도 하려는 행동력이라도 있었지 이 사람은 무능한데 행동력조차 없었다. [2] 또한 무타구치도 전쟁범죄에선 깨끗하다.학살 논란이 1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혐의 판결 났고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학살극을 한 주범들을 총살하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3] 졸업하긴 했는데, 육사 시절과 육군대학 시절 성적이 형편없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의 성적보다도 낮았다.[4] 인맥과 파벌만 생각하고 '''임팔 작전'''을 승낙한 전적이 있는 인물.[5] 위궤양은 위가 헐어버리는 병이라 술을 마시면 안 된다. 한 마디로 꾀병이라는 것이다.[6] 사실 이건 좀 악의적인 관점으로 쓴거고, 실제로는 본토결전 대비 등의 이유로 당시 예비역들을 대거 재소집하면서 저자도 소집된 것. 관동군으로 간 것도 '싸우다 죽어라.'보다는 본토결전 대비로 정예부대들 빼오면서 폐급들을 관동군으로 보내는 연장선상에서가 아니었나 한다. 이자가 관동군에 부임할 때는 소일불가침조약이 깨지기 전이었으니, 소련과 전쟁이 현실화된다는 상상을 하기야 했어도 그걸 상정해서 옥쇄하라고 보낼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당시 관동군 사령관 야마다 오토조도 예비역으로 있다가 재소집되어 그 동네로 간 케이스이니, 도미나가도 징벌적 의미로 재소집되진 않았을 것이다.[7] 사실 이당시 만주와 북한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은 모조리 굴라그로 끌려가 10년 고생하다가 겨우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8] 원 출처 참조.[9] 사실 이건 독소전 초중반에 잡힌 포로들이 워낙 많이 죽어서 그런것도 있다. 이때는 소련군이 쓸 물자도 부족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활약한 장성급 정치장교조차 병으로 죽어나가는 판국이었으니. 그리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독일이 소련한테 한 짓거리에 비하면 무척 관대했던지라 딱히 독일을 동정할 거리도 못된다. 반면 일본군은 이미 할힌골에서 쓸려나간지 오래라 딱히 소련군에겐 적대심도 없었 기때문에 편안히 생활할 수 있었다.[10] 이걸 걸고 넘어질 수도 있지만 그러면 사토 역시 적전 도주를 적용받는다.[11] 아니, 오히려 저 정도면 다른 나라들도 싸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상황이다.[12] 1944년도 당시 미 육군 '''보병'''사단에는 셔먼 전차가 최소 60대 이상 있었다.[13] 오히려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스기야마 하지메와 무타구치 렌야조차 이 사람에게는 한 수 접고 들어가야 할 정도다.[14]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의 정상인이라기보다는, 보통 사람이라면 으레 생각하는 '쓸데없는 일에 목숨 걸 필요가 없어.' '살 사람은 살아야지.' '죽인다고 좋은 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안 죽여도 내가 크게 피해 볼 일 없는데 다른 사람을 막 죽이는 건 좀 그래.' 정도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정상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15] 아버지인 도미나가 교지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특공으로 산화시켰던 걸 생각하면 이건 운명의 장난이라 해도 무방하다. 도미나가가 자폭으로 수많은 이들을 하늘나라로 신속하게 내보냈는데, 정작 그의 아들도 특공 때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