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타구치 렌야

 




무타구치 렌야
牟田口廉也 | Mutaguchi Renya[1]

<colbgcolor=#928934><colcolor=#fff> '''출생'''
1888년 10월 7일
일본 제국 사가현
'''사망'''
1966년 8월 2일 (77세)
일본국 도쿄도 쵸후시
'''복무'''
일본 제국 육군
'''복무 기간'''
1910년 12월 ~ 1945년 9월
'''최종 계급'''
중장
'''근무'''
육군 제18사단
육군 제15군
'''주요 참전'''
루거우차오 사건
임팔 작전
'''묘소'''
다마 공동묘지 (多磨霊園)
1. 소개
2. 초기 활동
3. 행보
4. 전쟁 이후
5. 전쟁 범죄에 관해서
6. 창작물에서의 묘사
7. 여담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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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언제까지나 정글 속에 있어봤자 굶어 죽기 십상이지.[2]

일본군 소속의 장성으로 최종 계급은 중장. 일본군 삼대오물대한민국에서는 도미나가 교지,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무능한 일본군 장성으로 유명하다, 중일전쟁의 도화선인 노구교 사건을 일으켰고, 이어진 군부의 폭주로 발발한 태평양 전쟁에서는 임팔 작전으로 수많은 일본군 장병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결국 일본 제국 멸망의 단초와 결말에 다같이 기여한 지대한 공로자. 태평양 전쟁을 패전으로 이끌었기 때문에 일본내의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군 전범들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일본인들에게는 삼대오물이라고 불리며 주된 비난대상이다. 국내에서는 사실상 한국인, 독립운동가 혹은 일본군 내부에 한국광복군이 심은 스파이 등으로 불리며 찬양,조롱당한다. 이처럼 무능함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지만 그나마 '''전쟁 중에도 민간인 학살, 약탈 등 일본의 전쟁범죄에는 가담하지 않았던 드문 일본군 장성이었다.'''

2. 초기 활동


무타구치는 1888년 10월 7일에 태어났고 22세가 되던 해인 1910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1917년 29세의 나이로 육군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시베리아 침공에 참전했고 이후 프랑스에 주재무관으로 갔다. 소좌 계급일 때 캄차카 반도에 잠입하여 홀로 정탐 활동을 벌였다고. 여기까지 보면 그냥 평범한 고급 장교의 경력처럼 보이나...

3. 행보


삼대오물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가 저지른 만행은 현재 한국인들의 입장에서는 독립운동 아니냐며 경탄할 수 있는 수준의 자폭과 삽질이었다. 당연하지만 그는 독립운동가도 아니고 일본을 패망시키려고 의도하지도 않았다. 단지 그의 상상을 초월하는 무능함이 일본군을 파멸로 몰고갔기에 조롱받는 것이다. 시작은 다름아닌 '''중일전쟁''' 이전에서부터였다.

3.1. 중일전쟁 당시 경이로운 일화들


월권으로 루거우차오 사건(노구교 사건) 때 중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 무타구치는 당시 루거우차오에서 연대장으로 복무 중이었다. 훈련 중 휘하 병사 하나가 갑자기 잠깐 동안 사라져서[3] 인원수가 안 맞자 중국의 소행이란 섣부른 보고가 올라왔는데, 사태 파악도 않고 병사를 찾는 데 도움을 주려 했던 중국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하지만 이는 불법전투 개시였다.
워낙 뜬금없는 공격 명령이라 부하들이 "정말 공격해도 됩니까?"라고 되물으며 황당해했을 정도였다.[4] 그리고 '''이 일로 중일전쟁이 일어났다.''' 심지어 이 당시 그는 전쟁을 일으킬 권한이 없는 일개 연대장일 뿐이었다.
사실 이는 당시 일본군 전체에 만연한 분위기와 관련이 깊다. 1931년에 이시와라 간지가 자기 멋대로 만주를 침공하는 행패를 부려놓고도 오히려 승진했고 군 일각이 무단행동을 벌인 결과로 만주국이 덜렁 나와버렸기 때문에, 중앙정부의 명령보다 군 계통을 우선하고 전쟁개시행위를 가볍게 보며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고 여기는 생각이 장교들 사이에 팽배했다. 무타구치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인물이었기에 제대로 건수를 터트린 셈이었다.
그런데 기가 막히게도 정작 노구교 전투에는 코빼기도 안 내밀었던 주제에 작전회의에서는 멀쩡한 팔에 붕대를 감고 나와 '''다친 척'''을 했다. 사실 이건 기자들 앞에서 자신의 '용맹'을 자랑하기 위한 쇼였는데, 서로들 뻔히 아는 작전회의에서 그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임팔 작전 문서에도 있지만 무타구치가 환장하는 세 가지 중 하나가 '''기자'''였다. 이는 <밀리터리 실패열전>(홍희범 저, 호비스트)에서 작전 실패와 관련한 첫 사례로 실렸다.[5]
사실 중일전쟁을 벌인 건 전쟁 확대를 추진한 고노에 후미마로지만[6], 이 사건은 이 사람의 차후 행적을 짐작할 만한 일화였다. 이 사람이 이렇게까지 쇼를 해 가며 자신을 알린 이유는 그가 속한 파벌이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의 주동세력인 황도파였기 때문이다. 사건의 결과로 황도파가 대숙청을 당했고, 무타구치는 간신히 살아남긴 했지만 뭔가 공적을 세우지 못한다면 자동으로 예비역으로 쫓겨날 처지였다. 즉, 자기가 살자고 사건을 부풀리는 데 일조하고 자기 선전까지 한 것이다. 어차피 당시 일본군의 풍조가 민간정부를 무시하는 것이었지만, 무타구치는 그 정도가 심했던 셈이다.
어쨌든 노구교 사건이 없었다면 적어도 우리가 아는 중일전쟁이나 이후 일본군의 역사가 필연적인 결과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임팔 작전을 발안하고 밀어붙인 이유 중에는 자신이 중일전쟁 발발의 방아쇠를 당겼음에 책임감을 느낀 것도 있다고 하니까. 이쯤 되면 진짜 독립군 아닌가 의심이 될 지경.
이 사건 뒤 무타구치는 소장으로 진급했고, 제4군 참모장에 있다가 1939년 육군유년학교의 교장에 올랐다.

3.2. 싱가포르 전투


1940년엔 중장으로 진급했고 18사단 사단장으로 싱가포르 전투에 참전했다. 여기서 무타구치는 수류탄 파편에 맞아 다쳤다. 이 부상을 입은 이유가 꽤나 걸작인데, '''부대에서 술 잔치 벌이다 갑자기 날아온 포격을 피하려고 도망갈 때 하수구를 대피소로 착각해서 숨으려다가 다친 것'''이라고. 그리고 18사단은 싱가포르 함락 뒤 필리핀의 바탄 반도에 갔으며, 1942년 4월에는 버마 전선으로 다시 왔다. 1943년 3월에는 제15군의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이때 대본영의 인도 진공 계획을 충격적이게도 '''밀림과 산악에서는 작전 수행이 어렵다며 바로 반대'''해, 끝내 대본영이 인도 진공을 미뤘다. 여기서 도조 히데키가 이 일을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다"고 극찬했으니 웃기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때는 버마 함락의 후유증으로 인도 국경 쪽 영국군의 상태가 엉망진창이라서 오히려 이때 공격했으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았다. 더구나 아무리 일본군 육군과 해군의 사이가 나빴지만 1943년 당시엔 일본 해군이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의 패전에도 불구하고 부분적으로나마 제해권은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일본군의 바다를 통한 육해군의 보급과 수송력의 실상은 과달카날 전투에서 볼 수 있듯이 시궁창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1944년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이랬던 그가 버마를 지키는 제15군의 사령관이었을 때 인도 제국영국군이 버마를 공격하자, 생각을 손바닥 뒤집듯이 바꿔 도리어 자신이 인도 진공을 추진하게 된다. 조지프 스틸웰이 버마 탈환 노래를 부르며 병력을 모은 인도군, 영국군이 예전과는 달리 전열을 정비했던 상태에서 말이다.

3.3. 어록


제 15군사령관 무타구치 렌야 중장
그 유명한 '''임팔 작전''' 등으로 일본군을 패전으로 몰고간 인물. 파벌과 인맥으로 카스트 제도 같은 계급을 결정하는 일본군 지휘관답게 수많은 실패에도 끝까지 책임을 안 지고 요직에 남았으며 전후에도 잘 먹고 잘 살았다. 아무튼 군사 교리와 병법의 기본마저도 뒤흔드는 정신 나간 말들을 했는데...

'''보급이란 원래 적에게서 취하는 법이다.'''

적의 것을 빼앗아 쓰는 것은 '''고대~중세'''인, 산업화 이전의 전장에서는 주요 수단의 하나이자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하지만 ''''그' 고대'''에서조차 이 방법은 '''기초적인''' 보급수단은 아니었다. 사람이 망언이 너무 많으니 진짜로 어록이 생긴다.
왜 주류가 되지 못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에도 보급완비가 기본이라는 것은 장군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전투만으로도 모든 상대편 병사들이 모랄빵 나서 도망친다면 보급을 많이 얻을 것 같지만, 당하는 상대도 바보는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청야전술이 왜 발달했는지를 생각해보자. 만약 전황이 불리해보인다면 바로 청야전술을 펼치기만 해도 상대가 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방법은 전투 중에 죽은 적군 병사들의 시체에서 보급하는 방법뿐이다.
현지에서 징발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무조건 현지에서 조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을 수는 없다. 징발이나 약탈이 가능한 물자는 거주인구의 규모에 따라 한계가 있고,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힐 경우 부작용으로 현지 물정을 잘 아는 게릴라 등이 양산되거나 적에게 협력하는 수가 있어 최대한 피해야 하는 수단이다.[7]
손자병법에서도 기본적인 보급은 필요하다고 나오는 데다가[8] 19세기에도 프랑스 혁명 전쟁부터 나폴레옹 전쟁 시기를 거쳐서 유럽의 군사 규모가 이전 시대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보급 문제를 풀려고 공모전을 열어 여기에서 병조림, 이어서는 통조림이 나왔다. 나폴레옹이 이렇게 보급 문제를 상당히 신경 썼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의 청야전술로 인해 기껏 모스크바까지 치고 들어가서도 혹한과 보급품 고갈을 극복하지 못하고 패퇴했다는 점에서 보급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9]
당장 전쟁사 관련된 책을 조금만 읽어봐도 보급로 못지켜서 전황이 갈린 전투는 매우 많다.[10] 물론 한니발 바르카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보급로의 역량과 무관하게 강력한 회전으로 결착을 내던 사령관들도 있었으나 저들도 '''현지조달이건 뭐건 일단 보급은 할 수 있도록''' 신경썼다. 심지어 한니발은 본국 카르타고로부터 지속적인 보급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현지 조달을 전제로 이탈리아 원정을 실행하기는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무기나 부품, 탄약 등 '민수용품으로 대체할 수 없는 보급 수요' 의 비중이 근현대보다 훨씬 낮던 <산업화 이전, 고대의 전쟁환경> 이었고, 한니발의 원정 무대인 이탈리아는 '당시로써는 높은 인구밀도와 개발 진척도'로 한니발이 거느린 병력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잉여물자의 확보가 용이한 지역이었으며, 이런 물자를 조달하는 방법 역시 무조건 '뺏으면 된다' 가 아니라 당시의 이탈리아 정세와 로마 연합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이용하여 로마에 반감을 가진 이들(이탈리아의 다른 도시국가 시민들이나 이탈리아 북부의 갈리아 부족 등)에게 그 대안으로써의 자신을 어필하여 로마 지지세력으로부터 이탈시켜 자신을 지지하게 한다는 전략적 구상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정도로 철저한 전략적 구상 하에 2차 포에니 전쟁 초기 로마군을 연이어 비참할 정도로 쳐발라대던 실적까지 보여주고서도 결국 보급 역량의 부족으로 로마에 치명타를 입히지 못하고 전략적 역전패를 당하고 말앗던 것.
카이사르 역시 갈리아 전쟁기 때 베르킨게토릭스의 청야전술에 당해 패퇴 직전까지 몰리던 게 베르킨게토릭스의 오판으로 일어난 회전에서 로마군이 대역전을 벌이고, 이후 일어난 알레시아 전투마저 승리함으로써 승기를 굳힌 케이스다. 그리고 저 카이사르도 보급로 무시하고 생각없이 포위전 치렀다가 제대로 홍역을 치른 전투가 바로 디라키움 공방전. 물론 이쪽은 숫적 열세 등 다소 복합적인 상황이 있는 전투지만 폼페이우스의 보급로 차단 등으로 카이사르군이 고전을 치뤘기도 했기 때문에 아예 무관하진 않다.[11]
게다가 20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전혀 무관한 사항이다. 산업화, 특히 부품 규격을 일정하게 관리한 뒤의 전장에서는 같은 가솔린 연료라도 옥탄가가 다를 수 있고 무장도 탄약을 원활하게 공급하기 힘들게 되었으니, 보급품을 전장에서 조달한다는 개념은 '''더 이상 시대에 맞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아르덴 대공세를 계획할 때 독일군 연료 수급 상황으로는 작전 실행을 거의 못했는데, '''"간단히 풀 수 있다. 연합군 거 탈취하면 그만이다"'''이라고 말했다. 당연히 연합군은 바보가 아니었으니, 독일군이 연료를 못 빼앗게 물러날 때마다 연료를 없앴다. 에르빈 롬멜조차도 청야전술을 하기 전이나 하는 사이 점령하려고 했다.
보급이 부족한 상태에서 작전을 시도했던 경우로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치려고했던 한니발이나 사실상의 타임어택으로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청나라의 예를 들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경우에는 하이리스크를 지는 만큼 하이리턴이 있으며, 가만히 있으면 말 그대로 절망적인 상황에 몰리는 경우였다. 임팔 작전은 성공한다고 해도 연합군의 역습과 제공권과 제해권에 대한 대책이 없던 상황에서 일본에 그나마 전투력이 남아있던 육군을 몽땅 퍼부은 만큼의 이득은 도무지 취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적군도 아군과 판단이 같다면, 이기든 지든 간에 그날 그 전투는 끝장이다.'''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

제군, 사토 군단장은 군명을 어기고 코히마 방면의 전선을 포기했다. 먹을 것이 없어서 전쟁을 할 수 없다며 제멋대로 퇴각했다. 이것이 황군인가. 황군은 먹을 것이 없더라도 싸워야만 하는 것이다. 무기가 없다, 탄환이 없다, 먹을 것이 없다는 것 따위는 싸움을 포기할 이유가 안 된다. '''탄환이 없다면 총검이 있잖은가. 총검이 없다면 맨손으로 싸우는 거다. 맨손도 쓸 수 없다면 발로 걷어차라. 발도 쓸 수 없다면 입으로 물어뜯어라. 일본 남자에게 야마토 정신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라. 일본은 신의 나라다. 신들께서 지켜주신다...'''[12]

[13]

그야말로 '''똥군기 찬양의 극치.''' 직접 전투를 행하는 입장에서야 각오를 다지기 위해 저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보급을 책임져야 할 관리자의 입장에서 저따위로 말하는 것은 단지 무책임한 직무유기일 뿐이다.
전쟁 영화 등을 보면 후퇴 금지 명령 아래 장비 부족에도 무조건 특정 지점을 사수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대다수 군대의 사령부 지침은 전략/전술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곳에서 물자가 떨어지면 인력 낭비를 막기 위해 후퇴해서 보급을 주고 재투입한다. 즉, 후퇴 금지란 어디까지나 무절제한 적전 도주를 금지하는 거지 전략-전술상 후퇴가 필요하거나 사수가 필요하지 않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다.
전쟁영화 등에서 나오는 경우는 상당수가 특정 지점에 고립되어 보급과 후퇴가 불가능한 상황 또는 그 지역 자체가 적에게 넘어가면 전략적으로 큰 문제가 생기는 '''극단적인 곳들만 보여줘서''' 그런 오해를 초래한다. 아무래도 극적인 연출이 필요하기도 하고.
게다가 식량과 무기의 보급이 완전히 끊겨 전투력이 발휘되지 않고 증원조차 불가능한 전멸 상황이라면, 일단 후퇴해 보급을 받으며 재편성을 해서 전투 효율을 높이고 공격을 다시 하는 것이 전술의 기본이다. 작전 상 후퇴도 훌륭한 전술의 하나라는 것을 기억해두자. 근데 이 양반은 후퇴는 무조건 금지이니... 그걸 뿌리부터 뒤흔드는 무타구치의 주옥 같은 발언이다.
영화 같은 가상이면 인력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현실은 인력이 가장 중요한데, 애초에 무기는 어떤 사람이 쓰느냐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전장에서 살아남아서 경험을 축적하고 숙련도를 키운 사람이 무기를 쓰는 것과, 전장에 못 나가 경험이 없거나 숙련도가 없는 사람이 쓰는 것은 당연히 큰 차이가 난다. 그 옛날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소수정예의 위력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인력을 허비하면 인력이 모자라 무기가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당장 현재 러시아 육군이 1만 대가 넘는 전차가 있는데도 실전에서 적게 활용하는 이유는 인력이 모자라서다. 그러니 전장에서는 할 수 있으면 보병들을 최대한 살려야 옳다.
더구나 인력이 남아있으면 상황에 따라 잃었던 지역을 다시 탈환할 수 있는 여력이 있지만, 몽땅 죽어 쓸려나갔다면 인원이 모자라 공백이 생겨 지켜야 할 곳들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적에게 밀려나가게 된다.[14] 물론 임팔 전투에서 대패한 여파로 인해 당연히 이러한 공백들이 생겨 일본군은 완전히 밀려났다.

'''식량은 자동차 대신 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된다.'''

일명 '징기스칸 작전'. 그런데 저 '식량'으로 쓰겠다는 코끼리은 대개 점령지에서 조달했는데, 먹이도 제대로 안 주고 부려먹은 데다가 원래 장거리 이동을 잘 안 하는 종들이라, 먹은 소보다 지쳐서 객사한 소가 더 많았다.[15] 일부는 강을 건너다가 떠내려가거나 산맥을 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거나 포격에 놀라 도망치기도 했다. 거기에 그 동물들이 죽는 바람에 물자와 식량이 함께 날아가, 실제로 무사히 온 개인 탄약의 양은 계획의 절반 뿐이었다. 게다가 지쳐서 쓰러진 가축의 짐은 어거지로 하급 병사들에게 떠넘겨 짊어지게 하고 험난한 정글을 행군하도록 강요해서 부상이나 탈진 등의 비전투 손실을 야기했다. 더욱 후덜덜한 것은 병사들이 최소 40kg가 넘는 무게를 견디다 못해 몰래 조금씩 짐들을 정글에 버리는 통에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과 무기들이 더욱 빠르게 줄어드는 결과까지 야기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수송 수단으로 쓸 가축들의 사료를 마련하는 방안에 대해 질문을 받자 '초식 동물들이니까 풀 뜯어먹으면 되지?'라고 까지 했다. 군용 이나 들은 절대로 무타구치의 말대로 길가에 난 아무 풀이나 뜯어 먹게 두어서는 안 된다. 제대로 된 건초 사료를 먹이는 게 정상이다.[16] 재수 좋게 길가에 마침 말에게 먹이기 좋은 풀이 있다고 쳐도, 수송용 가축이 쓰는 막대한 칼로리를 감당할 순 없기 때문이다.
를 직접 키워 본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소에게 풀을 뜯기려면 적당한 초지에 데려가서 마음껏 먹도록 몇 시간씩 두거나, 새벽부터 푹 끓인 쇠죽을 먹여서 건초를 쉽게 소화하고 영양분을 흡수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그저 사람 밥 먹듯이 하루 3번 20~30분 생풀 뜯어먹게 하면 '''그냥 굶어죽는다.''' 소화기관 등의 차이로 같지는 않겠지만, 사람으로 비유하자면 생이나 를 익히지 않은 상태로 먹도록 하는 것에 비유해 볼 수 있다.
정말 생풀을 먹여서 배를 채워주려면 뜯어먹는 시간 + 되새김질하는 시간이 거의 소가 깨어 있는 시간 전체하고 맞먹을 정도로 길다. 하지만, 1분 1초가 급한 전장에서 쉴 새 없이 짐을 날라야 할 소나 말들에게 하루종일 풀만 뜯어 먹게 놔둘 시간은 없다. 삼국지에서 마초(馬草)[17]가 군량과 함께 중요한 보급품으로 종종 나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현대전으로 비교하면 차량 운용에 필요한 기름이나 마찬가지다. 기병의 군마는 물론이고, 기병이 없어도 군량을 운송하려면 말이 끄는 수레를 써야 하므로 성 안에 틀어박혀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일이 없는 수성전이 아닌 이상 당연히 마초는 필수적이다.
결국, 무타구치는 '''전근대 시절의 장군들보다 무식했던 셈이다.''' 물론 전근대에 가축의 전술적 중요성은 현대보다 훨씬 컸기에 가축에 대한 상식은 전근대의 장수들이 현대의 지휘관들보다 많았을 것이다. 때문에 무타구치 입장에서도 꽤나 억울할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반 지식도 없는 주제에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작전을 세웠으니 문제였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동맹인 나치 독일을 비롯한 다른 추축국은 야전에서 연료를 아끼려고[18] 로 많은 물자를 보급한 반면, 기계화를 잘했고 무엇보다도 자원이 넘쳐나고 지프차가 썩어났던 미국은 험지에선 말도 썼지만 거의 차량으로 보급품을 날라댔다. 추축국은 당연히 미국의 효율성을 못 따라갔다. 통에 든 가솔린만 먹고 움직이는 빠르고 센 자동차와 달리, 가축은 환경 변화에 취약하고 유지 및 보수가 힘든 데다 운반량이 적다. 더구나 길가의 아무 풀이나 먹일 수는 없기 때문에 같은 거리를 가는데 훨씬 많은 부피와 무게의 사료가 필요했고, 이는 후방에서 무기나 필수품에다 많은 양의 사료까지 보내야 한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보내야 할 사료의 양이 늘어나면 사료 자체를 실어나르기 위한 가축이 추가되고, 다시 추가된 가축을 위한 사료가 또 추가되는 식으로 수송대의 규모를 여러 번 다시 계산해야 하는데, 이러다 보면 처음보다 당연히 데려가야 할 가축의 규모가 점점 더 커진다. 경우가 다르지만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는 아무리 작은 전투라고 하더라도 병력이 수천명 이상이 나온 이유이고, 신라선덕여왕을 급습하기 위해 백제에서 꾸려서 보낸 '''작은 규모의 기습군'''이 500명이나 되었던 것도 이런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사료 문제는 전혀 감안하지 않고 가축으로 수송대를 편성했으니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19][20]
다만 처음부터 소와 말로 보급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상부에 요청한 보급 지원 증강이 거절당하자 이런 무리수를 둔 것인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했다면 애초에 이런 작전을 짜지 않았을 것이다.[21]
그리고 그 칭키즈칸의 작전도 상황과 맞지 않은 게, 칭키즈칸 같은 경우 오랫동안 유목 생활로 기마를 매우 능숙하게 다루면서 기동력으로 넓은 들판에서 빠른 속도로 적을 제압하고 나라를 정복하는 전술을 구상했고, 말의 피와 젖을 먹으면서 살아오는 등, 말은 이동수단이자 가축이기 때문에 보급 같은 경우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질 수 있지만, 문제는 임팔 작전 무대가 정글인데 당연히 이런 상황이라면 장기전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서 보급은 확실히 할 필요가 있는데 저런 방법으로 버틸 리가 없다.

'''정글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제1차 세계대전프랑스군에서도 '전쟁에서 비행기를 어디에다가 쓰냐?' 같은 발언이 나온 적이 있었다. 1911년에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는 "비행기는 단지 장난감에 불과하며 군사적 가치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 그러나 이는 비행기가 아직 군사적으로 쓰이지도 않았으며 기술적으로도 대단히 미숙했던 시절에 나왔던 이야기이다. 라이트 형제가 첫 비행을 한 게 1903년이고, 프랑스에 처음으로 동력비행기 공장이 세워진 게 1908년으로 고작 3년 전의 이야기었고 이 당시는 '공군'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몇몇 열강들이 항공대를 창설하기 시작한 상태였으니 회의적인 입장이어도 이상하지 않다.[22] 게다가 그렇게 말한 말한 포슈 본인도 1차 세계대전 때 항공기의 위력을 경험하고 항공 정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생각을 완전히 고쳤다. 그 당시 비행기는 그야말로 신생아 수준이어서, 속도가 느려서 '''병사들이 총으로 쏴서 격추시키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런 생각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고, 이는 시대적 한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항공산업이 발전하고 항공기의 중요성이 이전보다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커진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일례로 영국군은 그 '써먹을 데 없는 항공기'로 일본군이 포위한 진지에 계속 항공 보급으로 각종 물자를 쏟아부어 포위 상황에서도 계속 버텼다. 가끔 운 좋게 일부가 일본군 쪽으로 떨어지면 일본군들은 이것들을 '처칠 급여'라고 부르며 생명줄로 여겼다. 연합국 전투기들도 놀고 있던 게 아니라서, 최전선 병사들의 요청에 따라 근접항공지원을 위해 일본군 진지와 벙커, 참호를 공격하여 제압하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야기했다. 추가로 항공 보급이나 근접화력지원 말고도 네이팜이나 소이탄 같은 걸 끼얹어서 정글을 통째로 태우는 활용법도 있었지만, 네이팜이 실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기 시작한 건 1944년 일본군을 상대로 티니안 전투서 7월 말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으니 일단 임팔에서는 논외로 친다.
일선부대에서 보급품이 모자란다고 하소연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일본인은 원래부터 초식동물이다. 이렇게나 푸른 산에 둘러싸여 있으니,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日本人はもともと草食動物なのである。これだけ青い山を周囲に抱えながら、食料に困るなどというのは、ありえないことだ)'''[23]

일본이 1000년 넘게 육식을 금지한 황당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나온 말일 수도 있지만, 정말 어이없게도 이 인간은 고등교육을 받고 정상적인 진급 코스를 밟아 온 '''정식 육사 출신이다.''' 혈통이나 신분만으로 갑자기 고위직을 차지한 낙하산 인사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외부 보급에서 답이 없으니, 일본인의 특성을 날조하여 정신승리를 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그들이 진군할 정글은 '''녹색 사막'''이라 부를 만큼 생각보다 인구 부양력이 매우 떨어지는 곳이다. 온갖 독으로 무장한 생물들 때문에, 보기와 달리 먹을 것이 심하게 부족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애초에 생태계 전체로 봤을때 인간이 섭취 가능한 식용 식물[24]은 손에 꼽아서 풀을 뜯어먹을래도 태반이 먹을 수가 없는 풀이어서 먹을수가 없다.
게다가 정글은 험난하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므로 일반적인 곳보다 더더욱 잘 먹고 체력을 유지할 필요성이 높은 지역이라 고기를 먹어도 모자랄 판인데, 풀만 먹으라니 이미 전쟁을 포기한 수준이다. 심지어 이들은 일반인도 아닌 군인이다. 군인은 전투력 유지를 위해 여러 장구류를 휴대하고 다니고 강도 높은 훈련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빠져나가는 열량이 매우 높아서 튼실하게 보충해야만 한다. 성인을 기준으로 일반적인 현대인의 하루 권장 섭취열량은 2,000~2400kcal 정도이지만, 육체노동자나 작전 중인 군인은 4,000~7000kcal 정도까지 소모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즉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식사량이 몇 배로 증가하는 것이다. 그 옛날 나폴레옹이 '군대는 잘 먹어야 진격한다'고 말한 것과, 현대 대한민국 육군짬밥을 선택이 아닌 의무로 먹도록 '명령'으로 강제하고 이를 따르지 않을시 '명령' 불복종으로 처벌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억지로라도 먹이려 드는 이유가 바로 이런 까닭 때문이다.
그리고 상기한대로 가축도 마찬가지지만, 독초나 못 먹는 풀들이 무성한 정글에서 함부로 이것저것 뜯어먹다간 독버섯 같은 것에 부대 단위로 중독될 수도 있어서 최하 수십에서 수백 명 이상이 골로 가는 수가 있어서 매우 위험하다. 게다가 사단 수준의 인원이면 최소 몇천~몇만 단위인데 그 숫자가 뜯어먹게 안전한 식물이 충분할 리도 없다.
그 결과로 당시 일본군의 기록을 살펴보면 각종 독초를 뜯어먹고 부대 전체가 쓰러졌다던지, 그나마 먹을 수 있는 , 도마뱀, , 원숭이 등 각종 동물은 물론 벌레까지 잡아먹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돌아다녔다는 증언들이 무수히 많다. 그야말로 수렵과 채집만으로 연명하던 구석기 시절 인류의 재림인 것이다. 물론 저런다고 식량 부족과 굶주림이 해결될 리가 없으니까 결국 부대 체계가 무너지고 각종 전염병이 기승을 부려 일본군의 피해는 더욱 심각했다.

마인칸 교외에서 연합군에 투항해온[25]

일본군의 영양실조는 놀라울 만큼 심했다. 개중에는 문자 그대로 굶어 죽기 직전인 자도 있었다. 먹을 것을 던져 주자 몹시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그것을 받아 먹었는데, 10일이고 1개월이고 아무것도 못 먹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들은 나무 뿌리벌레를 잡아 먹으면서 연명했다고 한다.[26]

장인중(張仁仲)[27]

결국 일본군은 둘러싸여 후퇴로도 보급도 끊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있는 식량을 다 쓰고, 그나마도 없는 벌레나 풀뿌리만 겨우 뜯어먹으면서 쫄쫄 굶으며 뱃가죽이 등에 붙을 지경으로 아사하거나, 급기야는 아군의 시체에 손댈 만큼 막장이었다. 상식적이라면 이러한 상태에서 뭘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다. 최후의 방법으로 둔전이라도 시도할 수도 있지 않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자로 쓸 씨앗도 없었고 충분한 시간과 여유, 알맞은 날씨, 작물을 키울 공간도 없는 상태에서 둔전이 가능할 리가 없다.[28] 더구나 임팔 같은 험한 곳에서 둔전을 하려면 일단 정글을 불태워 화전#s-3을 해서 넓은 공간을 만든 후에나 벼농사 등이 가능한데,[29] 연합군 정찰기들이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과 넓은 지역이 불태워져 밭으로 변한 걸 발견하지 못할 리가 없고, 발견한 후에는 일본군이 식량을 자급하려 일하면서 작물을 관리하는 걸 가만히 놓아둘 리가 없으니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 방침이 얼마나 개차반인지 작전의 계획 단계부터 상급 부대 참모장이 미친 듯이 깠고, 더욱이 삼간사우로 악명 높은 사나다 조이치로 대본영 작전과장조차도 '''"정 보급이 안 되면 해군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하면서 최후까지 태클을 걸었다. 당시 사정을 모르면 '타군의 지원이 필요할 정도로 무리한 작전'이라는 그냥저냥 상식적인 발언으로 들릴 수 있는데, 저 당시의 일본 육군과 해군은 지금의 한국과 일본만큼이나 사이가 흉악하게 나빴다. 어느 정도였냐면은 육군이 해군에게 손 벌리기 싫어서 '''자체적인 잠수정을 개발해서 배치할 정도'''였다.
즉 말이 좋아 육군과 해군이지, 실상은 그냥 '''사이 나쁜 국가가 2개가 존재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즉 조이치로의 해군의 협조를 받아야 한다는 발언은 한국으로 치면 '''자위대의 협조라도 얻어야 한다'''는 수준의 폭탄 발언인 셈이다. 게다가 이 것으로 끝나지 않는게 사나다 조이치로는 무타구치 렌야의 육군대학 10년 후배였다. 파벌과 연공서열을 아주 심하게 따지는 일본군에서, '후배란 놈'이 '10년 선배'에게 저런 식으로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사나다 조이치로 같은 인물마저도 이런 식으로 비판했다는 점에서 얼마나 심각한 사안인지 알 수 있다.

3.4. 임팔 작전


'''군문에 몸을 담은 지 어언 30년. 이렇게까지 필승의 신념이 떠오른 적은 없었소. 영국군은 약하오. 반드시 퇴각할 거요. 보급에 대한 우려는 착각이라 할 수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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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HK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도큐먼트 태평양전쟁 제4부, 책임 없는 전장 버마, 임팔》

이 시리즈는 원래 NHK 스페셜 중 특별기획의 일환으로, 1989~91년 냉전이 붕괴되며 각종 자료가 쏟아지자 그를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당시 총제작지휘를 맡았던 야마모토 하지메(山本 肇, 1940~2006.10.29) CP는 상당히 개념찬 인물로 새로운 자료를 바탕으로 일본군의 무능을 신랄하게 깠다. 그나마 1~3부를 제작하고 몇 달의 텀을 둔 후 4~6부를 제작, 총 6부작으로 완결지었다. 그런데 1, 3, 6부는 NHK 제작 다큐가 아니고[30] 2, 4, 5, 7부만 NHK판이다.[31] 감상시 주의 요망. 참고로 야마모토 CP는 이후 1994년 NHK 시즈오카국장으로 영전되었다.[32] NHK를 퇴직한 후 자신이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교재로 반전 강연 활동을 했다.

2017년 12월 10일에 방송된 '''NHK[다큐] 전율의 기록 - 임팔작전(완전판)'''
추가 생존자 증언과 내용을 30분 추가하여 1시간 40분으로 만들었으며[33]새로 발견 된 일차 자료와 작전을 지휘 한 장군들의 녹취 테이프에서 "일본육군 사상 최악의 작전 '을 알기쉽게 수많은 특종 영상과 새로운 자료, 증언으로 구성된 DVD발매용의 결정판 다큐멘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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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 작전버마에서 아라칸 산맥을 직접 넘어 인도 제국의 북부인 아삼을 기습해 직접 압박한다는 계획이었다. 작전 입안과 강행 자체가 자신의 체면 때문이었다고 주위에서 증언한다. 지형이고 적군 상태고 생각조차 하지않고 개인이 휴대할 만한 최대량의 물자만 감안해서 15일짜리 작전이라고 휘하 부대에 지시하고는, 실제 작전 기간은 3달이 넘어갔다. 그리고 이 작전을 승인한 도조 히데키도 다른 전장의 전황이 나빠서 정권을 유지하러 작전을 인가했다는 증언도 아직 있다. 작전 최종 인가를 '''자기 집 목욕탕'''에서 했다는 점이 웃기다. 이 때문에 임팔 작전의 결재는 ''''목욕탕 결재''''라고도 한다.
영국군과 마주칠 때 병력의 절반 이상이 영양 부족과 피로로 전투가 힘들었지만 그 뒤로도 보급을 제대로 안했다. 임팔 작전에서 굶어 죽어가는 일본군들의 모습을 알려면 <여명의 눈동자>에서 을 산 채로 뜯어먹는 장면을 보자. 그게 바로 임팔 작전의 현실이다. 휘하 부대장이 계속 철수를 요구하고 부하들이 전장에서 뜻없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알면서도 진격하라며 계속 독촉하고선 무타구치 자신은 초조했다. 작전 실패가 확실해서 상황을 파악하러 온 버마 사령관 가와베가 무타구치를 찾아왔지만 둘 다 아무 말도 못했고 달라진 것도 없었다. 그 까닭이 참 어처구니 없었다.

가와베: 무타구치 중장은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무타구치: 나는 가와베 장군의 참된 심중은 작전 지속에 대한 나의 생각을 떠보기 위한 것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래도 그것을 장군에게 실토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먼지투성이인 내 풍모를 보고 장군이 알아차려 주기만을 바랐다.'''

가와베: 나는 랑군으로 돌아왔다. 내 눈에는 귀기 어린 빗속에서 일선을 지키는 장병들, 특히 파렐 전선에서 악수를 나눈 인도 국민군 장병들의 모습이 역력히 떠올랐다. 만일 냉정하게 이 전황을 판단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이미 이때 작전 중지를 결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전에는 나의 생각 이외에 보다 더 큰 성격이 있었다. 어떤 방법이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방법이 단 하나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으로 최후까지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무타구치: 저는 작전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상부에 보고를 할 수 없었기에 작전을 그대로 진행하면서 명령이 하달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후 미군의 심문을 받으면서 진술한 내용)

'''체면 때문에 차마 후퇴하겠다고 말도 못하며 후퇴하라고''' '''말해줄 때까지 기다리다가 끝내 말을 못했다는 엄청난 위대함을 자랑한다.''' 그야말로 다테마에, 눈치껏 알아차리기를 중시하는 일본인 특유의 간접적 의사 소통의 정점을 보여주는데, 문제는 병사들의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에서 저 짓거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진술을 미군 헌병이 듣자 빵 터져서 5분이나 웃어댔다고 한다.
끝내 전투는 참다가, 참다가, 참다가 피골이 상접한 채 자신들의 비관적인 처지를 노래하는 부하들을 보다 못한 휘하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이 독단으로 후퇴를 결정할 때까지 이어졌다. 참고로 이것이 일본 육군 항명 사건 '''1호'''다.[34] 바로 이 사토 중장이 무타구치를 만나러 왔을 때, 무타구치는 자결해버리라며 단도를 남겨두고 정작 자신은 사토 중장을 보기 부끄러웠는지 숨어버리는 추태를 보였으며, 사토는 "이 칼로 무타구치의 배때기를 쑤셔버리겠다"고 이를 갈며 칼을 갖고 나가버렸다고 한다.
당시 31사단장 사토 중장이 얼마나 열받았는지는, 그가 무타구치의 15군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절절히 알 수 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가는 중대요인이 되고 있음. 눈 앞의 본 사단의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이 되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이러한 류의 전문이 계속 날아오자 무타구치의 참모들이 사토 중장을 달래러 찾아왔는데, 오히려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냐. 바로 너희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외치며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찍소리도 못하고 돌아왔다. 게다가 독단적으로 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참모진과 부하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을 만큼 화가 났었다.

지금 우리 사단의 위에는 머저리 집단 셋이 있다. 제15군과 버마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35]

이런 머저리들을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정작 그 뒤에 사토 중장은 일본에서 '''정신병'''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소환되어 연금당해 입막음 당했다. 평소의 일본군이라면 저런 때에는 아무리 장군이라도 불명예 제대 및 군사 재판[36] , 심하면 할복이다. 그나마 저렇게 약한 조치로 끝난 까닭은 군사 재판이 열리면 다른 파벌이나 해군한테 꼬투리를 잡힐 여지가 있어서였다. 그 뒤 사토에 대한 일본군 높으신 분들의 평가는 '임팔 작전의 실패를 가져온 원흉'이었지만 사토의 부하들 평가는 당연히 정반대였다.
반대로 작전 책임자인 무타구치는 15군 총 철수 이전에 '시찰'을 명목으로 먼저 도망간 사실이 드러났지만 겨우 예비역 편입이라는 경미한 징계를 받았을 뿐더러 육군 예과 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되는 걸로 끝났다. 또한 사토가 정신병에 걸렸다고 주장한 사람도 무타구치다.

3.4.1. 관련 일화


아래는 무타구치 렌야가 임팔 작전 당시 어떻게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켜 부대의 80%를 요단강 건너게 만들었는지 보여준다.
  • 임팔 전선의 전황이 나빠지던 당시, 자신은 전선 지휘부 옆에다 기생집을 차린 뒤 무조건 오후 5시 땡~ 하면 업무 마치고 기생집에 들어가서 술 마시며 노느라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전황이 한참 악화하자 전선 지휘도 제대로 안하면서 사령부 옆에다가 제단을 쌓아 신불에게 이기게 해달라고 비느라 그나마 주간에 하던 업무 처리조차 다 뒤로 미뤄버렸다.
  • 임팔 전투가 일어나기 직전에 신문기자단을 모아놓고 그 앞에서 인터뷰를 했는데...
>임팔은 문제 없다. 3주일이면 충분히 뺏을 수 있지. 그러나 그 다음의 문제가 있단 말이야. 임팔 정도로는 만족할 수가 없어. 자동차, 전차, 대포 따위는 적의 것을 빼앗아가지고 우선 브라마푸트라 강으로 나간다. 여기가 브라마푸트라 강이야. 여기서 캘커타로부터 뻗어나오는 벵골 철도와 아삼 철도를 차지한다. 제대로 들어맞으면 레도도 탈취한다. 아니... 델리의 붉은 성벽(城壁)까지 진격하지. 어때, 핫하하.
  • 임팔 작전 도중 어느 작전 참모가 식량과 탄약 보급을 어떻게 하느냐 묻자
>무타구치: 뭐가 문제인가?
>부하: 사령관님. 전체에 돌아가는 음식은 어떻게 운반합니까? 트럭도 없는데...
>무타구치: (걱정 없다는 듯이) 뭐가 걱정인가? 포탄은 자동차 대신 소나 말에 싣고 가다가 포탄을 다 쓰면 필요 없어진 소나 말을 먹으면 될 거 아닌가? 이름하여 징기스칸 전략! 소나 말을 이용해 음식으로 쓰면 되지! 이거 간단한 거 아닌가?
  • 임팔 전투 도중 패색이 너무 짙어지자 철수를 요구한 연대장에게 이렇게 일갈했다.
>작전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는 것은 정신력이 부족한 탓이다.(作戦が上手くいかないのは精神力が足りないせいだ)[37]
  • 임팔 작전으로 병력 9만 2천 명을 전투도 제대로 않고 1만 3천 명으로 줄여버린 팀킬에 성공하자 무타구치 렌야는 자결하는게 좋겠냐는 상투적 발언을 내뱉었다. 그러나 수석부관 후지와라 이와이치(藤原岩市)가 "아무도 없는 데서 하십시오. 누구도 방해하지 않을 겁니다. 이번 패전의 책임 같으면 장군님이 할복하고도 남습니다."라며 조용히 권총을 내밀었다. 당시 부관이 한 말은 이러하다.
> - 원문 -
> 昔から死ぬ、死ぬといった人に死んだためしがありません。司令官から私は切腹するからと相談を持ちかけられたら、幕僚としての責任上、一応形式的にも止めないわけには参りません。司令官としての責任を、真実感じておられるなら、黙って腹を切って下さい。
> 誰も邪魔したり止めたり致しません。心置きなく腹を切って下さい。今回の作戦(失敗)はそれだけの価値があります。
>
> - 번역 -
> 옛부터 '죽어야지', '죽어야지' 하는 사람 치고 죽은 경우를 본 적이 없습니다. 사령관 각하께서 '나는 할복하겠다' 라고 말씀하신다면, 저는 부관으로서의 책임상 우선 형식적으로라도 말리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사령관 각하의 책임을 정말로 실감하고 계신다면, 조용히 배를 가르십시오. 아무도 방해하거나 말리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배를 가르십시오. 이번 작전(의 실패)은 그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이 수석부관은 나중에 미시마 유키오와 알고 지냈다. 미시마와 자위대의 연줄도 후지와라를 통해 성립된 것이며 이후 쿠데타 계획에도 관여했다.
  •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이 간신히 안전지대에 들어오자 장교 전원을 집결시켜 1시간 넘게 훈시하는 바람에 영양실조 상태에 있던 장교들이 쓰러져 기절하거나 심지어 사망한 사례조차 있었다. 아무리 영양실조 상태였다지만 일반 병사도 아니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았을 장교들이... 이때 했던 연설에서 그 "무기의 부족이 패배의 원인은 될 수 없다."라는 발언을 했다.
  • 15사단장도 31사단장과 비슷하게 작전 취소를 건의했다고 경질시켰다. 새로 임명한 15사단장은 장교들의 군도를 검사하고 다 녹슬었다며 화를 냈다. 하지만 장교들은 늘 물이 찬 참호에서 살았으니 당연히 녹이 슬 수밖에. 보급품이 모자라 비가림도 못했다. 녹은 둘째치고 그 물바다 위에서 지내는 건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군의 화기와 끊임없는 항공 보급 앞에서 군도는 차라리 버리는 것이 나을 짐이나 다름없었다.
  • 무타구치가 제31사단 보병 제58연대에 시찰을 나왔을 당시 전투와 질병, 부상으로 쓰러져 있던 병사 한 명에게 "어허!! 자랑스러운 제국 육군 병사가 이 꼴이 뭐냐!? 지금 이걸 보고도 천황 폐하의 자랑스런 제국 육군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런 건 영혼이 아니라 영혼의 껍데기라고 하는 것이다!!"라고 호통을 질렀다. 물론 질병과 굶주림으로 움직이지 못한 상태라 뭐라 대꾸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화가 난 무타구치는 그대로 부대의 대대장을 찾으러 갔다. 당연하지만 보급도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이라 전투와 굶주림으로 누더기가 된 소령을 발견하고는 "귀관은 장교로서 돌격을 해야하는 모범을 보이기는커녕 병을 핑계로 꽁무니 빼기에만 바빴다! 귀관의 부하들은 왜 버리고 가는 것인가?" 라고 힐난하자 그 소령은 매우 힘없이 "부상과 말라리아와 설사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발끈한 무타구치는 "뭐라?! 네 이놈!! 그따위 것은 질병 아니다!! 네놈 같은 나약해빠진 정신력을 가진 놈이 대대장으로 있으니 이 모양 이 꼴이 나는 것이다!! 이 또라이 새끼야!!!" 라면서 지팡이로 그 소좌를 두들겨 팼다. 참고로 근현대전에서는 병사에게 부상과 설사 중 하나만 해당해도 그 병사의 전투력이 반토막 이하로 친다. 하물며 저런 열대 지방에서 말라리아면 전투불능이다.
  • 임팔 전선에 간 부대 가운데는 남태평양 지역, 특히 과달카날 전역에서 굶어 죽을 뻔한 부대도 있었다.
  • 사단장일 때에 다른 사람이 아삼 지역 진공 작전을 계획했을 때엔 무모해 보인다고 반대했다. 그런데 지역 사령관을 하자 임팔 작전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면서 "아삼이나 벵골에서 장렬히 죽고 싶다." 하고 노래를 했다.
  • 무타구치는 죽을 때까지 임팔 작전을 가리켜 "'공격은 최선의 방어'라는 교훈을 얻은 것"이라고 했다. 즉 1944년의 임팔 작전이 없었다면 동남아 전선의 붕괴는 더 빨랐고 더 파멸적이었다는 말씀. 그러나 1945년의 영인군의 버마 진공은 원래 계획에 없었다. 다시 말해 임팔에서 일본군이 말아먹은 정예사단 몇 때문에 진공 계획을 급히 세웠다. 그리고 그러한 약체 일본군의 저항과 우기 우려로 버마 진공 역시 간신히 성공시켰으니, 오히려 임팔 작전 탓에 동남아 전선이 무너졌다.
  • 전쟁 이후 영국군 중령 아서 제임스 바커 (A.J. Barker)는 "델리로의 행진" (The March on Delhi) 이라는 책을 쓰면서 무다구치와 서신으로 교류하며 증언을 구했는데, 이때 "버마 방면군이 공세를 중단하지 않았다면 영국군이 큰 위기에 처했을 것"이라고 썼다. 바커가 임팔 작전의 의도를 크게 평가한 것은 책의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는데, 무다구치는 이를 두고 "영국군이 자신을 인정해주었다"고 생각했다.
  • 한편 무다구치는 이 책의 서문을 써주었는데, 요컨데 이러하다.
>일본에는 패장은 말이 없다는 말이 있어서, 나도 19년 동안 침묵을 지키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번에 귀중한 기회가 왔으니 할 말은 하겠다.
>디마푸르에 대한 공세만 제대로 계속되었으면 나는 이길 수 있었다.
>그런데 방면군 사령관 가와베가 나를 무시하고 사단장 직통으로 작전을 중단시켜 물거품이 되었다.
>반면 영국군은 야전 지휘관에게 작전 기도를 좇을 수 있도록 융통성을 부여했다.
>나를 알아준 바커 중령은 일본의 무사도, 서양의 기사도에 걸맞는 사람이다.
바커 중령은 이걸 그대로 서문으로 실었다. 한국 인터넷에는 바커 중령이 무다구치를 비웃었다는 소문이 퍼져있는데, 보면 알겠지만 바커 중령은 무다구치를 비웃기는 커녕 오히려 침묵을 지키던 무다구치가 설칠 수 있도록 배경을 제공한 최고 원흉 중 한명이다.
  • 다나카 신이치, 가와베 마사카즈와 함께 나란히 인터뷰를 할 때 기자가 임팔 작전의 패전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자 한 답변.
>설령 바커 중령의 증언으로 임팔 작전이 옳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더라도, 수많은 부하를 죽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결단코 지울 수 없습니다. 역시 제 마음은 살아있는 한, 떳떳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만 정말 반성했으면 아래의 유인물은 돌리지도 않았다.
  • 바커와의 서신 교환 이후, 무다구치는 공공연하게 바커의 편지를 내세우며 자신에 대한 비판에 맞서기 시작했다. 이미 망자가 된 사토 중장에 대한 비판과 함께 바커가 쓴 편지 귀절을 담은 유인물을 인쇄하여 자기 부하들에게 보내기도 하였으며, 임팔 전투의 일본군 전몰자 유족들이 위령제를 지낼 때 그 자리에 나타나서 <임팔 전선의 패배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이 잘못 싸운 것>이라는 유인물을 나눠주려다가 물세례를 받았다. 이후로 이 전선에 참여한 부하였던 사토 고토쿠미야자키 시게사부로 같은 옛 부하가 죽었을 때도 장례식에 출몰하여 똑같은 짓을 저지르다가 유족들에게 욕설과 함께 멱살을 잡히고 바깥으로 내쫓겼던 적도 있었다. 심지어는 죽기 전 마지막 남긴 말 역시 압권이다.
>私は悪くない、部下が悪い!
나는 잘못이 없어. 부하들이 잘못한 거야!
그리고 자기 장례식에서조차 유족들에게 위에서 언급한 책임 회피용 유인물을 돌리게 했다고 한다.
  • 저널리스트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는 『쇼와 육군』(昭和陸軍の研究, 1999)에서 임팔 생존병들의 공통된 특징 다섯 가지를 꼽으면서, 그 중 첫번째가 무타구치 렌야에 대한 격렬한 증오감이라고 설명했다. 그 중 한 병사는 아래 인용구에서처럼 매우 격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호사카가 인터뷰한 생존병들은 거의 대부분 무타구치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인격이 변했다 싶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다테마에가 일상인 일본인임에도 이런 반응을 보일 정도라니,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
>제15군 제31사단 소속이었던 병사는 내가 “병사 입장에서 무타구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때까지 온후했던 말투가 일변하더니 “그 사람은 용서할 수 없다. 전후에도 찔러 죽이고 싶었다”며 격분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갑작스럽게 변하는 바람에 내가 공포감을 느낄 정도였다.[38]
무타구치 본인과 일부에서는 임팔 작전이 남방전선의 전면적 붕괴를 막았던 제한 공격전의 성공이라는데 임팔 전투에 간 사단들은 거의 80% 이상 전투 불능으로 바뀌었다. 그나마 살아남은 20%는 앞에서 나온 31사단장 사토의 독단 때문. 바꿔 말하자면 무타구치의 지시에 따른 부대는 모두 전투 불능이었다는 이야기이다. 1945년 초반에 연합군 안에서도 위험하다고 한 미얀마 진공 전격 작전의 성공은 원래대로라면 방어할 만했던 일본군 전력이 임팔에서 고스란히 날아간 것도 주요 원인이다. 아무튼 이 양반 덕에 영국군과 미군은 동남아 지역에서의 전쟁이 거의 예상 작전기간보다 약 8개월 정도 일찍 끝났다.

4. 전쟁 이후


일본 본토에서 패전을 맞이하고 극동국제군사재판에 A급(평화에 대한 죄, crimes against peace)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러나 다른 A급 전범들 대부분이 전범 재판을 거쳐 사형 등을 받았으나 이 사람은 A급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면서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불기소되었다. 국내에선 희화의 극대화를 위해서인지 그가 끝까지 불기소처분을 받아 아예 무혐의로 풀려났다거나[39], 오히려 훈장을 받았다느니 하는 루머들이 돌아다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불기소처분 된 것 까지는 사실이지만, 전범재판을 통해 2년간 감방생활을 하긴 하였다. 덤으로 감방생활 동안에는 대접이 매우 좋았다고. 돌아올 때는 살이 더 쪄서 왔다고 한다.
일본에 돌아와서는 패전 책임 때문에 기도 못 펴고 살며 조용히 보냈다. 그러다 1962년 위에서 언급된 영국 육군 바커 중령과의 에피소드 이후 별안간 목소리를 내면서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으나 주변 사람들의 잘못으로 실패하였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1966년 향년 77세를 일기로 사망했는데, 죽은 뒤에는 일본 도쿄의 공동묘지인 타마레이엔(多磨霊園)에 묻혔다. 참고로 이곳은 일본의 다른 유명한 장군인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도 함께 묻혀있다.
사실 이런 무능한 인물이 중장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실무 능력보다는 학연, 인맥으로 진급을 비롯한 모든 것을 결정하던 일본군 특유의 파벌주의 탓이었다. 무타구치는 당시 군부를 이끌던 우두머리였던 도조 히데키와 같은 육군사관학교-육군대학 파벌이었기 때문이다.

5. 전쟁 범죄에 관해서


알렉산드라 야전병원에서의 환자 학살 논란이 있다. 사건 당시 군사령관으로서 무다구치의 상관이었던 야마시타 대장이 나중에 부하들을 다스리지 못한 죄로 전범이 되어 처형된 것과는 달리, 무다구치의 경우에는 당시 영국군이 알렉산드라 야전병원을 방어거점으로 삼아 일본군에 저항했던 까닭에 기소하기에 불리하다는 정치적 판단과 함께, 증인을 찾기 위해 무다구치의 사진을 영국에 보냈으나 1년이 넘도록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던 점이 고려되어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다.
당시 생존자 증언 중에는 무다구치가 학살극 다음날 직접 병원을 방문하여 전쟁범죄 현장을 확인하고 주범들을 총살시킨 뒤 돌아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무다구치 본인은 학살극 일체를 몰랐다고 주장했다. 거기다 공식적으로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약탈과 학살, 포로학대 등 점령지 민간인과 포로에 대한 학살에 관여하지 않아서 형을 살지 않았다. 당시 나치 독일 못지 않게 학살과 약탈이 일상인 일본군에서는 보기 드문었던 인물.


6. 창작물에서의 묘사


  • 야마오카 소하치의 소설 태평양 전쟁에서는 임팔 진공 자체를 기발한 전략으로 인용하고 몇 건의 사소한 실수, 이를테면 '보급을 깜박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라 나온다.[40] 그럼에도 무타구치가 작전 수립 때 한 실수는 비판한다. 그렇지만 막상 소설을 읽어보면, 임팔 전투 부분은 차마 말할 수 없는 내용이라 우물대며 자세한 설명 없이 얼렁뚱땅 넘어가 버린다.
  • MBC에서 방영한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배우 김기주[41](액션)와 김기현(보이스)이 - 연기한 무타구치는 정말이지 대박이었다. 이 드라마는 후시녹음이었던 덕에 전담 성우를 김기현이 맡았다. 참모장이 그리도 반대하고 우려하던 것을 닥쳐라 무시하며 임팔 작전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던 모습에서는 무타구치의 면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위에서 설명한 무타구치 렌야의 주옥 같은 망언들이 드라마에서는 등장과 더불어 좔좔 나온다. 원작에서도 당당히 임팔 전투와 무타구치의 활약이 나온다. 다만 이 드라마에서는 대머리인 실제 렌야와 달리 머리카락이 있는 중후한 미노년으로 나온다. 성우인 김기현 씨가 직접 맡았으면 외모도 잘 어울리는 역이었다. 여명의 눈동자 제 5회에서 묘사되는 그의 모습. 내용은 참모장이 15사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보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렌야는 "전쟁을 15사단만 하냐?"라며 이를 무시하고 15사단을 바로 투입시키려고 어기장을 부리고 있다.
  • 나 스탈린이 되었다?! 라는 대체역사 소설에서는 일본이 한국의 한 사학도가 빙의한 스탈린에 의해 패망한 이후 분할된 남일본군의 총사령관으로 나온다. 주인공의 행동으로 임팔작전이 일어나지 않고 그다지 큰 전과 기록이 없으며 전쟁 이후까지 자살하지 않은 이유로 뽑히게 되었다고... 참고로 여기서도 보급은 적에게서 취한다는 드립을 치며 주인공은 2차 대전 이후로 독립된 한국[42]에서 빼돌린 정보(남일본으로 수출할 무기를 만들기위해 공장이 풀로 돌아간다는것.)를 들으며 이분이 윗대가리라는 정보를 듣고 어이없어하는 장면이 나온다.
  •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 라는 대체역사 소설에서는, 실제 역사와 비슷하게 임팔 작전이 진행되고, 무다구치 렌야의 명언(..)들이 소개된다. 영국군은 무선 도청에 성공하지만, 도저히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발언들에 '이거 역정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하며,같은 편의 작가의 말에서는 '실제로 한 말임, 진짜로. 작가는 저렇게 참신한 발상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 구 일본군을 미화하는 가공전기들에선 무타구치가 좌천 또는 전사하는 인물의 우선 순위로 자주 등장한다. 이후엔 그 자리를 유능한 장군이 대신 채워서 임팔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는 등 병맛 전개의 3류 줄거리들이 난무한다. 가공전기 만화 몽환의 야마토에서는 츠지 마사노부와 함께 일본 육군 75%를 전사시킨 인물로 나온다.
  • 패러독스 인터랙티브의 게임 하츠 오브 아이언에서 일본군의 지휘관으로 나온다. 능력치는 뜻밖에 평범한 수준이라 숙련도 2에 특기는 없다. 츠지 마사노부도 일본군의 지휘관인데 무타구치 렌야보다도 능력치가 나쁘다. 숙련도 1에 무타구치처럼 특기를 안 줬다.
  • 유녀전기에선 주인공의 입을 빌어 심심하면 까댄다. 무타구치인지 무다구치인지 자주 헷갈리는 모양.

7. 여담


  • 전쟁광똥별인 이 렌야와는 달리 그의 아들과 손자는 철저한 반전주의자들이다.
  • 도쿄 국립국회도서관에 보존된 정치 담화 녹음 중 그의 육성 기록이 남아있다고 한다. 2개가 있는데, 하나는 1963년 4월에 작가, 일본 참의원이었던 야마모토 유조(山本有三)를 청자로 하여 루거우차오 사건에 관하여, 다른 하나는 1965년 2월에 독백으로 임팔 작전에 관해 녹음했다고 한다.
  • 1박 2일 2016년 하얼빈 특집에서 퀴즈를 냈을 때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고르라는 문제에서 보기에 등장했다. 다만 임팔 전선에서의 삽질은 언급되지 않았고 중일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으로만 나왔다.
  • 국방TV에서 제작하는 다큐멘터리인 토크멘터리 전쟁사 11부에서 임팔 작전을 설명하며 렌야의 행적들이 등장한다. 어이없어 하는 윤지연과 기가 막혀서 실소를 터뜨리는 허준의 반응이 볼 만하다.

8. 관련 문서


[1] 모전구렴야. 발음상으로나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으로 보나 '무구치 렌야'가 맞지만 어째 한국에서는 '무구치 렌야'로 알려져 있다. 일본어의 た 소리가 원체 기식이 약해서 '다'로 전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는 '쓸데없는 말'을 뜻하는 '무다구치(無駄口)'라 불러도 할 말이 없는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긴 하다. 일본군 입장에서는.[2] 1942년에 한 본인 발언이 맞다. 출처는 타임라이프 2차 세계대전. [3] 설사 때문에 잠깐 사라졌다는 설이 있는데, 추궁을 하지 않아서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물론 중국은 이 이야기 자체를 '전쟁 일으킬 구실로 지어낸 날조'라고 치부한다.[4] 저 말을 한 대대장이 과달카날 테나루 전투에서 미 해병대랑 맞붙어 삽질한 이치키 기요나와 대좌였다.[5] 츠지 마사노부는 그래도 스스로 직접 뛰기라도 했는데 자세한 사건 진행은 루거우차오 사건 참조.[6] 개전 당시 일본군 참모부는 오히려 겁먹은 모양새였고, 멋모르는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확전을 주창하며 장개석을 상대하지 않는다는 사고까지 쳐 버렸다.[7] 애초에 인공위성이 출현해 전장을 실시간으로 감시 가능하던 시대 이전에 가장 효율적인 현지 정보 습득 수단은 현지에 거주하는 민간인들이며, 인공위성이 떠다니는 현대에도 이는 유효하다.[8] 덤으로 손자병법에서는 민심의 중요성도 강조하고 있다.[9] 최초로 병조림을 만들 정도로 보급에 신경을 썼음에도 당대 프랑스군은 가장 약탈이 심각한 군대로 악명이 높았다. 프랑스군이 한 번 휩쓸고 간 자리는 멀쩡하게 서있는 집조차 없었다고 한다. 집까지 뜯어다 자신들의 숙영지 짓는 데에 썼기 때문이다. 그 때문인지 프랑스는 점령지에서의 민심도 빠르게 잃었다. 이는 당시 프랑스군(프랑스 육군)이 국민개병제를 바탕으로 대육군(Grande Armée)이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이전 시대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전력을 주변 국가보다 한 시대 먼저 갖추었기 때문이었다. 거대한 국토와 인구에서 징병을 통해 확보한 거대한 규모의 육군 전력이 당대 서유럽 최강국이던 프랑스의 국력(특히 군사력) 기반이었지만, 그 거대한 규모만큼 보급 부담도 거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병조림(통조림)과 같은 신기술 개발까지 추진하면서도 그걸로 다 감당하지 못하는 부분은 현지 약탈을 통해 해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10]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고구려 시기에 있던 '''살수대첩'''.[11] 실제로 폼페이우스가 잘 수비하다가 공세를 취한 이유도, 곧 수확철이 다가와 카이사르군이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상황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12] 원문은 "諸君、佐藤烈兵団長は、軍命に背きコヒマ方面の戦線を放棄した。食う物がないから戦争は出来んと言って勝手に退りよった。これが皇軍か。皇軍は食う物がなくても戦い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だ。兵器がない、やれ弾丸がない、食う物がないなどは戦いを放棄する理由にならぬ。弾丸がなかったら銃剣があるじゃないか。銃剣がなくなれば、腕でいくんじゃ。腕もなくなったら足で蹴れ。足もやられたら口で噛みついて行け。日本男子には大和魂があるということを忘れちゃいかん。日本は神州である。神々が守って下さる…"[13] 해당 문장의 출저는 후루카와 사토시의 『葉隠の世界』 304~305p.[14] 마오쩌둥도 "땅을 버리고 사람을 구하면 다시 탈환할 수 있지만, 사람을 버리고 땅을 구하면 둘 다 잃는다"고 했다[15] 인간은 타 포유류들과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순간적인 근력은 후달리지만, 지구력 하나만큼은 탑티어급이다. 수만~수십만년 전의 인간의 동물 사냥 기술은 바로 '''사냥감이 지쳐 떨어질때까지 쫓아가서''' 기초적인 무기를 이용해 잡는 것이였던 점을 고려하면, 소나 말은 인간에 비해 장거리 이동에는 상대적으로 체력이 부족할 수 밖에 없다. [16] 인간이 사육하는 가축들은 오랜 세월 동안 인류에게 길들여지면서 이제는 인류의 손을 타지 않으면 야생에서 스스로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질되어 있기 때문에, 야생에 풀어놓고 아무거나 먹게 하면 탈난다. 그리고 이는 후술할 "일본인은 초식동물"이라는 망언과도 연계가 된다.[17] 말에게 먹일 풀사료. 장군 마초가 아니다.[18] 사실 연료문제도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생산력이였다. 그 공업화로 잘나가던 소련이나 기술력으로 자랑하던 독일, 정예병사를 자처하는 영국군마저 차량화를 완전히 못했고, 종전까지 완벽하게 행군을 자동차 등의 차륜으로 대체한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하물어 자원도 없는 섬나라 일본이 이런 짓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자신들의 상황에 얼마나 무지했는 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아니 심지어 그 일본은 자기네 물주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저질러서 그나마 남아있던 자기 자원줄을 끊어놓기까지 했다.[19] 2차 고수전쟁에서 수양제는 치중대 60만 명을 운영했지만. 한 사람이 나를 수 있는 식량은 1.5석에 불과했는데, 이것조차 길고 험한 보급로 때문에 보급대 자신의 식량으로도 부족했다. 그 때문에 병사들은 자신이 먹을 식량을 들고 행군해야 했는데, 이 무게가 30~50 kg이었다. 식량을 들고 가지 못하고 땅에 묻어 버린 병사가 속출했고, 식량이 떨어진 후에는 전투를 할 수 없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연합군은 쾌속 진격을 했지만, 전선이 길어지다 보니 보급트럭이 전선 근처에 갈 때쯤 이미 실은 유류를 모두 사용해 버렸다. 분명히 노르망디에는 미 본토에서 실어 온 석유가 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최전선에는 석유가 없어 진격이 둔화되어 버렸다.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기 위해 몽고메리 원수는 안트베르펀 항구를 사용해 보급선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전략을 세우는데, 이것이 두고두고 삽질로 까이는 마켓 가든 작전이다.[20] 몽골이 이런 게 가능했던 이유는 평소에 유목 생활을 통해 말의 생태에 익숙했을뿐더러 유목민 생활방식으로 인해 건조식품이라는, 지금도 쓰이는 방식으로 장기보존과 무게 및 부피 축소가 가능한 휴대식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들조차 군용말은 따로 있고, 아무 말이나 주워서 쓰겠다는 발상은 하지 않았다.[21] 더 웃기는 사실은 보급 지원 증강을 거절당한 이유가 이 작전 자체가 현실성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였다. 즉 현실성이 없다고 지원을 거절당하니까 더 현실성이 없는 대책을 내놓은거다.[22] 사실 회의적일수밖에 없는게 저 때의 비행기 성능은 상당히 처참해서 대전 초기엔 그냥 정찰용으로만 활용했고 속력이 심하게 느려서 대공사격이라도 당하면 끔살확정이였다. 그 이후에 기관총을 달아 공중전에 이용하기도 했으나 고장이 잦아 전투하다말고 지급받은 망치로 기관총을 수리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 당시 공군에게는 기관총 수리용 망치 하나와 자결용 권총 한 정을 쥐여줬을 정도로 항공기의 전략적 가치가 미미했던 때였다.[23] 출처 : 태평양 전쟁 - 일본의 패인 4(太平洋戦争 日本の敗因4) 147p[24] 현재 인류가 섭취 가능한 식품들의 절대 다수는, 인류가 오랜 세월동안 품종 개량을 지속적으로 수행해서 인류가 안전하게 먹을 수 있도록 개량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은 원래는 독성이 있는 붉은색 작물이였고, 옥수수는 다 자라봐야 성인 새끼손가락 수준밖에 안자라는 몹쓸 작물이였지만 오랜 개량 끝에 지금의 독성 성분 없는 흰쌀과 성인 팔뚝만한 옥수수가 탄생한 것이다. 말인즉 인류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동식물을 함부로 섭취하면 되려 더 위험해지기 딱 좋다. 일례로 길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많이 먹는 수산물은 길들여지지 않아서 아직도 독극물(예: 복어독, 제철이 아닌 굴 등), 기생충(예: 민물고기, 자연산 연어, 생태 등) 등의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다.[25] 참고로 일본군은 앞뒤 사정 따지지 않고 모든 상황에서 항복과 포로 자체를 대역죄로 여겼다. '''그런데 그걸 무시하고 항복했다.''' 아무리 일본군이라도 '''굶어 죽는 건 아니었나 싶다.'''[26] 게다가 이 사람은 '''중위였고''', 당연히 인육도 먹었다. 결국 분이 안 풀렸는지 전쟁이 끝나고 무타구치의 장례식에 찾아가서 깽판도 부렸다.[27] 중국 중앙일보의 종군기자로서, 무타구치가 있었던 임팔 전투에 있었다.[28] 파푸아뉴기니 지역의 라바울 같은 경우는 둔전에 성공했지만, 여기는 미군이 일부러 우회를 위한 개구리 뜀뛰기 작전의 일환으로 고립 상태의 적이 둔전을 하며 군사력과 체력을 낭비하도록 방치한 경우이다. 아예 둔전하러 가는 일본군들을 공격하지 말라고 미군 조종사들에게 지령이 내려졌고, 나중에 일본 항공기가 라바울에 전무한 상태에선 신참 조종사들을 라바울 위로 날아다니게 하며 실전 훈련까지 시켰다. 사실 라바울은 병력 8만에 유능한 지휘관 이마무라 히토시가 있어 방비가 철저했기에 미국 입장에서도 탈환하기엔 부담스럽긴 했다. 전후 미국 조사단도 라바울을 건너뛴 것은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평했다.[29] 태우지 않으면 이미 훨씬 생명력이 강한 온갖 식물들이 점거한 채라 곡식이 잘 자랄 리가 없다. 토양 자체도 식물에 필요한 게 다 빠져나갔으므로, 식물을 태워서라도 비료를 주지 않으면 농사는 불가능하다.[30] 1, 3, 6부는 '결정판 다큐멘터리 태평양전쟁사' 시리즈로, 1990년에 일본 콜롬비아 회사에서 카와노 야스히코 감독에 의해 제작된 다큐멘터리다.[31] 각각 2부, 4부, 5부, '''6부'''다. 나머지 1부와 3부는 유튜브에 따로 올라와 있다. 1부 3부[32] 일본에서 샐러리맨의 좌천영전의 형식으로 일어난다. 정말 큰 잘못을 하지 않으면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이 보장되는 일본 특성상 어지간히 무능해서는 일정 기간 이상 지나면 무조건 진급을 시켜주는데, 강등이나 진급 제한은 범죄라도 저지르지 않는 한 없다. 따라서 진급은 시켜야 겠는데 아무리 일을 시켜봐도 도저히 쓸데가 없거나 정말 쫓아내고 싶어 미치겠으면 진급은 시키되 한직으로 보내서 우회적으로 이제 너는 회사에 필요하지 않으니 알아서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던가 그럴 자신이 없으면 조용히 지내다가 명퇴하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 다만 보통은 조금 주목도가 낮은 부서에 진급시켜 보내는 식이기 때문에 이 정도 처사는 굳이 비유를 하자면 재벌그룹 회장의 비서실장이던 사람이 어느 날 지방의 조그만 생산공장 사장으로 임명된 셈이다. 명목상으로는 비서에서 한 생산공장의 사장으로 올라간 영전이지만, 그룹 회장의 비서실을 통째로 관리하며 회장의 모든 권력행사를 꿰뚫고 또 마음만 먹으면 이를 얼마든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핵심 요직에서 하루아침에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지방 한직으로 밀려난 것. 물론 필요없는 직원은 일본에서도 한직으로 보내는 게 일반적이지만 이 정도로 철저한 좌천은 아무리 미워도 오랜 기간 회사에 열정페이로 봉사한 사람의 경력만은 존중해 주는 게 원칙인 일본에서 정말 쫓아내고 싶어서 미치기 직전에는 할 수 없는 처사이다.[33] 기존의 8월 25일에 방영한 1시간 10분짜리 영상을 추가 편집하였다.(BS1위성방송용)[34] 게다가 이 항명은 정당한 항명이다. 쉽게 말해 '''내 부대가 다 굶어죽게 생겼는데, 상급부대는 계속 현위치를 고수하고 짱박혀 있으라고만 명령하는 거다.''' 그래서 후퇴결정을 내렸을 때 사토 고토쿠의 부하들은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35] 나중에는 대본영까지 들어가 총 넷이 되었다(...).[36] 정작 더 웃기는 건, 사토 고토쿠는 군사 재판이 열리기만 바라고 있었다는 것. 만약 임팔에서 자기가 독단 퇴각을 결정한 일에, 그 일로 군사재판에 회부되면, 도리어 15군 사령관인 무타구치 렌야가 임팔에서 무슨 짓을 저질러서 15군을 파멸로 몰아갔는지 낱낱이 폭로해버릴 작정이었다고 한다.[37] 밥이 없는데 정신력이 대체 어떻게 생긴단 말인가?[38] 호사카 마사야스, 『쇼와육군』, 정선태 역, 글항아리, 2016, 730쪽.[39] 무타구치의 상관이었던 가와베 마사카즈의 경우 실제로 불기소 후 완전히 석방되었던 것이 와전되었을 수 있다.[40] 물론 보급의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전혀 사소한 실수로 취급할 수 없다는건 잘 알것이다.[41] 1940~2001. 이장호 감독의 '일송정 푸른 솔은(1983)'에서 김좌진 연기.[42] 이 소설에서는 소련의 도움으로 남북이 분할되지 않고 미국의 아시아 방면 정보수집과 소련-미국간 완충지대로서 중립국으로서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