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에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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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 아우구스투스
(Publius Licinius Egnatius Gallienus Augustus)
'''생몰 기간'''
218년 ~ 268년
'''재위 기간'''
253년 ~ 268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경력
2.2. 공동 황제
2.3. 전대미문의 위기
2.3.1. 포로로 잡힌 아버지
2.3.3. 이집트의 반란
2.3.4. 게르만족의 대침입
2.4. 군대 개혁
2.5. 암살
3. 평가


1. 개요


로마 제국 제34, 35대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아들로 253년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에 올라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탈리아에 침입한 게르만족을 격퇴하는 등 아버지를 성심껏 도왔다. 그러던 중 아버지가 사산 왕조 페르시야의 샤푸르 1세의 책략으로 포로가 되어버리자, 그는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의 치세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먼저 페르시아와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이 약화된 틈을 타 대대적으로 침략했고, 각지의 로마군 사령관들이 황제를 자칭했으며, 급기야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이 잇달아 난립해 제국이 삼등분 되어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갈리에누스는 이 전대미문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군대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외적과 반란군을 토벌했으나 268년 반란을 성공적으로 토벌하던 도중에 부하들에게 암살당했다.

2. 생애



2.1. 초기 경력


갈리에누스는 공화정 때부터 이어진 명문가문 리키니우스 가문 출신이다. 그는 발레리아누스와 그의 첫 부인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외할아버지는 230년에 집정관을 지낸 에그나티우스 빅토르 마리니아누스이며, 이복동생은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소 발레리아누스)이다. 그가 태어난 날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6세기 그리스 연대기 작가 요한 말라라스는 갈리에누스가 사망 당시 50세였다고 기록했다. 이에 따른다면 갈리에누스는 218년에 태어났을 것이다. 갈리에누스는 황제가 되기 약 10년 전에 코르넬리아 살로니나와 결혼해 세 아들 발레리아누스 2세, 살로니누스, 마리니아누스를 낳았다.
253년 10월 22일, 발레리아누스는 황제에 올랐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게 1세기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루키우스 베루스의 선례에 따라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해 동의를 얻어냈다. 이렇게 해서 아들을 공동 황제에 올린 발레리아누스는 페르시아의 도발을 막기 위해 동방으로 떠났고, 갈리에누스는 라인강과 도나우 강에서 게르만 민족을 격퇴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남았다.

2.2. 공동 황제


갈리에누스는 공동 황제로 즉위한 뒤 253년부터 258년까지 도나우 강 유역과 일리리아 일대를 순방했고 대부분의 기간을 라인 강 국경 지역에서 보냈다. 로마 제국의 역사가 유트로피우스와 오렐리우스 빅토르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이 기간 동안 게르만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라인강을 수차례 건너 게르만 족의 여러 부락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에게 적대적인 당대의 역사가들도 이 시기 라인강 일대의 로마군의 승리는 갈리에누스의 지휘 덕분임을 인정했다. 255년 또는 257년, 갈레리아누스는 집정관에 취임했다. 이 사실은 그가 로마를 잠깐 방문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그는 255년 또는 256년에 도나우 강 국경 지대에 머무르는 동안 발레리아누스 2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258년에서 260년 사이,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의 침략에 맞섰고 갈리에누스는 게르만족의 침략 저지에 몰두했다. 도나우 강 방면군 사령관 잉게누우스는 두 황제가 다른 지역에서 정신이 팔리느라 자신에게 신경 못 쓰는 틈을 타 황제를 참칭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 2세가 도나우 강 유역에서 사망했는데, 기록은 없지만 잉게누우스에게 살해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자신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알바누스, 포스투무스의 지도하에 후방에 남겨두고 260년에 발칸반도를 건너 아우레올루스가 지휘하는 새로운 기병부대를 이끌고 무르사 또는 시미늄에서 잉게누우스와 격돌해 대승을 거뒀다. 잉게누우스는 수도로 정했던 시미늄이 무너진 후 도주하다가 사망했다.[1]
258년~260년 사이, 갈리에누스가 잉게누우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국경 지대의 군대 일부를 차출한 틈을 타, 알레만니족이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라인강 하류 방어선을 돌파해 갈리아를 공격했고, 일부는 스페인 남부까지 도달해 타라고나를 공격했다. 알레만니족은 지나가는 곳마다 약탈과 살육을 일삼고 이탈리아로 진군해 이탈리아 북부의 여러 도시들을 약탈했다. 그러나 원로원이 급히 소집한 로마군의 저지를 받은 그들은 약탈품을 가득 싣고 고향으로 철수했다. 그러던 중 메디올라눔에 이르렀을 때, 갈리에누스가 친히 이끄는 로마군의 공격을 받았다. 알레만니족은 메디올라눔 전투에서 대패했고 일부 병력 만이 알프스 산맥을 간신히 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후 알레만니족은 10년간 로마 제국을 침략하지 않았다.
이렇듯 갈리에누스는 제위 내내 숱한 반란과 외적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성공적으로 수습해 자신이 황제로서 충분한 역량을 갖췄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260년, 그는 로마 제국 역사상 유례없는 위기에 직면한다.

2.3. 전대미문의 위기



2.3.1. 포로로 잡힌 아버지


260년 초, 발레리아누스는 전염병이 창궐해 전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로마군을 이끌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왕중왕 샤푸르 1세의 침략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로마군은 에데사 전투에서 패배했고 발레리아누스는 포로로 잡혔다. 샤푸르는 여세를 몰아 실리시아, 카파도키아 등 36개 도시를 급습했다. 이에 동부의 잔여 로마군대를 지휘한 풀비우스 마크리아누스는 재정관리인 칼리스투스와 팔미라 기병 지휘관 오데나투스와 함께 샤푸르를 상대로 맞서 싸워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그러나 마크리아누스는 자신의 두 아들을 황제로 선포하고 갈리에누스로부터 독립했다.
아버지가 포로로 잡히고 동방의 잔여 군대마저 반란을 일으킨 초유의 사태에 직면한 갈리에누스였지만, 당시 그는 잉게누우스의 반란과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수습하느라 동방에 갈 여력이 없었다. 게다가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발칸 반도 주민들이 동요한 나머지 현지 사령관 리갈리아누스를 황제로 옹립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리갈리아누스는 수개월 동안 황제를 칭하고 적의 침략에 용감하게 맞서싸웠으나 결국 록솔라니족에게 패해 살해당했다.[2]
261년 봄, 갈리에누스는 아울레올루스를 동방으로 파견해 반란군을 진압하게 했다. 그는 261년 봄 또는 초여름에 알리리쿰에서 반란군과 맞붙어 대승을 거뒀고 마크리아누스의 두 아들은 살해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갈리에누스는 더이상 동방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 반란에 가담했던 오데나투스를 사면하고 그에게 dux Romanorum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오데나투스는 갈리에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여전히 그에게 적대하는 반란군을 토벌했다.

2.3.2. 갈리아 제국


260년, 갈리아 방면군 지휘관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침략한 알레만니족을 물리치고 그들의 전리품을 빼았았다. 그는 이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에게 나눠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또 다른 지휘관 실바누스는 전리품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게 맞는다며 자신에게 보내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포스투무스의 병사들은 분노하여 포스투무스를 황제로 옹립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그들을 이끌고 쾰른을 포위했고, 쾰른 시민들은 몇 주 후에 실바누스와 갈리에누스의 아들 살로니누스를 넘겨주고 항복했다. 포스투무스는 즉각 두 사람을 처형했다.
갈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자신의 아들이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갈리에누스는 포스투무스와 맞서기 위해 군대를 모집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 게르만족의 침략이 거셌기 때문에, 그는 몇 년간 갈리아 반란 진압에 나서지 못했다. 그러다가 263년, 갈리에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갈리아로 진격해 포스투무스를 어느 알려지지 않은 도시에 가둬놓고 포위 공격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전투 도중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고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자,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을 일단 용인해주기로 하고 포스투무스가 이탈리아로 공격하지 않고 갈리아에 쳐들어온 게르만족을 대신 격퇴하는 조건하에 그가 갈리아 제국 황제를 칭하는 것을 묵인했다. 이후 포스투무스는 로마의 정치 제도를 본따 제 나름대로의 제국을 운영했다.

2.3.3. 이집트의 반란


262년, 루시우스 무시우스 아이밀리아누스 이집트 총독은 알렉산드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갈리에누스는 로마의 귀중한 곡물창고인 이집트가 상실당할 위기에 처하자 그의 장군 테오도투스를 급파해 아이밀리아누스를 토벌하게 했다. 262년 3월 30일, 테오도투스는 테베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아이밀리아누스를 생포한 뒤 곧바로 처형했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에 거주하던 디오니시우스 주교는 이 당시 외적의 침략, 내전, 역병, 기근으로 인한 이집트의 참상을 상세하게 기록한 서신을 남겼고, 이는 이 시대의 혼란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소중한 자료로 다뤄지고 있다.

2.3.4. 게르만족의 대침입


267년, 고트족을 비롯한 여러 게르만족이 로마 제국을 대대적으로 침략했다. 그들은 처음에 흑해를 건너 발칸 반도를 유린하고 아테네, 스파르타 등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함선을 구성해 지중해의 여러 해안 도시들을 약탈했다. 로마 해군은 이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고 그들이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챙긴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걸 막지 못했다. 이듬해, 훨씬 더 많은 침략군들이 해상을 통한 침략을 개시했다. 하지만 갈리에누스는 지난해에 맛본 쓰디쓴 패배를 잊지 않고 해군을 제때에 투입해 트라이스 해전에서 적을 격파하고 침략자들을 몰아냈다. 하지만 육상에서는 수적으로 너무도 열세였기에 고전을 면치 못했고, 고트족은 발칸 반도를 초토화한 후 갈리아, 이탈리아로 진군했다.

2.3.5. 팔미라 제국


267년, 갈리에누스로부터 동방 속주 전역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오데나투스고트족과의 승전을 기념하는 연회에서 조카 메오니우스에게 암살당했다. 그의 아내 제노비아는 즉각 메오니우스를 처형한 뒤 동방의 권력을 이어받아 오데나투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바발라투스를 오데나투스의 후계자로 세우고 자신은 뒤에서 실권을 잡았다. 제노비아는 페르시아의 침략으로부터 동부 속주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시리아, 팔레스티나, 이집트 등의 속주를 침공해 점령했다. 또한 그녀는 바발라투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팔미라 제국 건국을 선포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은 갈리아 제국, 팔미라 제국의 난립으로 인해 3등분되고 말았다.

2.4. 군대 개혁


갈리에누스는 갈리아 제국과 팔미라 제국의 난립과 외적의 침략, 반역자들의 창궐로 인한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고대 역사가들에게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그를 좀더 긍정적인 시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갈리에누스는 자신에게 닥친 전대미문의 위기를 어떻게든 극복하기 위해 제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사력을 다했고 몇 가지 유용한 개혁을 실시했다.
먼저, 그는 제국의 어느 곳에서나 신속하게 배치될 수 있는 기병조직을 창설했다. 이 기병대는 변경에서 떨어진 후방 기지에 주둔하고 있다가 변경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접하는 즉시 출격해 현장으로 달려가 적을 무찔렀다. 이 기병조직은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은 군인 황제들에게 유용하게 사용되어 로마 제국을 전란에서 구해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리고 전방에 있는 군단에서 병력을 차출하여 제국 요충지(시르미움, 밀라노등)에 배치하고 그 도시를 요새화 하였다.(이제 야만족들은 도나우강 근처의 군단기지 뿐만 아니라 요새화된 도시까지 뚫어야 했다) 또한 갈리에누스는 원로원 의원들이 군 사령관이 되는 것을 금지[3]했고 문관과 무관을 엄격히 구분했다. 그 결과 외적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할 군 사령관들은 군사 전문가들이 전담하게 되었고 원로원 의원들의 권력은 약화되어 황제에게 감히 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물론 원로원 속주의 총독은 원로원 의원들이 계속 차지했다. 즉 군사관련 분야만 전문가인 군인출신의 기사계급이 맡았다)
한편, 그는 아버지 발레리아누스가 주도했던 기독교 탄압 정책을 중지하고 기독교에 관한 최초의 공식 관용 선언을 발표해 예배 장소와 묘지를 복원하게 했고 교회의 재산을 인정해줬다. 하지만 이 칙령이 기독교를 공식적인 종교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후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이렇다할 탄압을 가하지 않았고, 기독교는 군인황제 시대 동안 급격하게 성장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 시기에 로마 제국인의 10%를 신자로 삼는 거대 종교로 성장했다.

2.5. 암살


268년,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했던 기병대 지휘관 아울레올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자신을 포스투무스의 대리인으로 칭했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울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울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갈리에누스는 포위 공격 후 승리를 앞둔 시점에 자신의 장교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은 모두 갈리에누스가 중용했던 일리리아계였는데, 어떤 이유로 갈리에누스를 암살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런 이유 탓에 다양한 가설들이 나오는데 대체로 나오는 분석에 따르면, 크리스트교 확산 방지를 위해 그리스-로마 전통 종교와 신플라톤 철학 등을 적극 후원하면서 반감을 사고 있던 갈리에누스가 제국의 중요한 방어선인 도나우 방어선과 그 일대 국방 문제에 큰 힘을 쏟지 않는 것에 대해 그를 지지해주던 일리리아계 장군들마저 불만을 품었고, 그 결과가 불신임의 의사표시인 암살이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아울레올루스가 황제의 휘하 장교들을 황제가 처단할거라는 위조 문서를 황제 진영에 넘어가게 해서 이에 격분한 장교들이 황제를 살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기서 음모를 주도한 사람은 아우렐리아누스라고 한다.
한 기록에 따르면, 달마티아 사령관 세크로피우스가 아울레올루스의 군대가 밀라노를 탈출해 도주하고 있다고 보고했고 갈리에누스는 경호원을 대동하지 않은 채 급히 자신의 장막을 떠나 평상복 차림으로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려 했다가 세크로피우스에게 살해됐다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침상에서 자던 중에 살해당했다고 한다. 또 에우트로피우스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밀라노에서 암살될 당시에 황제의 동생인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도 같이 살해됐다고 한다. 반면 조나라스의 기록에서는 황제와 달리 황제의 동생은 로마에서 살해됐으며, 이때 갈리에누스의 막내아들이자 황태자였던 마리니아누스도 같이 살해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당대 역사가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을 주도한 이는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조나라스는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한 이가 마르키아누스라고 지목한 반면 조시무스는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지목했다. 헤라클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의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막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할 것을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물론 가족은 살해 당했다) 갈리에누스의 무덤은 로마 남쪽의 비아 아피아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3. 평가


갈리에누스는 당대 로마인들의 평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와 3세기 이후의 전통적인 로마사가들의 기록 모두로부터 지극히 무능하고 모든 것이 부정적인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고대 기록들은 갈리에누스가 통치술이 무능한 황제일 뿐만 아니라 아버지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회심의 미소를 지을 정도로 비양심적이었으며 부친의 죽음이 전해진 날에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오락에만 치중한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그가 잔인한 품성과 기회주의적인 모습들을 보여준 황제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전통적 사가 중에서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적국의 포로로 잡히는 굴욕, 연이어 터지는 황제 참칭자들의 등장과 음모, 계속해서 침공해오는 이민족들, 3분할 된 제국의 상황, 최악의 자연재해와 계속되는 기근 등으로 정신없던 상황들은 모두 그가 무능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단언하고, ‘3세기의 위기’를 갈리에누스의 탓으로 모두 돌리면서 268년 벌어진 암살이 긍정적이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설령 갈리에누스가 개인적으로는 군사적 재능과 통치술이 기민했던 부친 발레리아누스보다는 우유부단하고 부족했다고 하더라도, 개인적인 불운한 상황과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8년간 동분서주한 갈리에누스의 부단한 노력과 군제 개혁 등은 긍정적인 측면에서 재평가받고 있다.
[1] 일부 기록에는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했다고 하고 다른 기록에는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한다.[2] 일부 사료에는 리갈리아누스의 반란을 진압할 여력이 없었던 갈리에누스가 록솔라니족을 꼬드겨 그를 공격하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이 사료의 신빙성은 거의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3] 정말로 금지를 시키는 법 또는 황제령을 발표 했는지는 불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