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Claudius Gothicus, Cladius II
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6대 황제. 갈리에누스 암살 직후 황제에 즉위한 뒤 반역자들을 토벌하고 알레만니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며 나이수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섬멸해 '고트족을 정복한 자'라는 의미로 고티쿠스(Gothicus)라는 존칭이 붙었다. 그러나 고트족을 섬멸한 직후 발생한 전염병에 걸려 재위 2년 만에 병사했다.
2. 생애
2.1. 황제 즉위 전
클라우디우스 2세라고도 불리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전염병에 걸려 사망할 당시, 56살이었다고 하며 동생은 퀸틸루스가 있었고 동생에겐 자녀가 두명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정보 외에는 그가 정확히 어느 곳에서 태어났고 어떤 가문 출신이며 가족관계는 어땠는지 불확실해 알 수 없다. 트렌벨리우스 폴리오가 저술한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그가 플라비우스 일족의 일원으로 4세기 콘스탄티우스 1세(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아버지)와 친척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책은 오늘날 황제들의 일생을 다룬 책 중 가장 오류가 많고, 그 내용도 죄다 아첨과 날조 등이 많아 그가 콘스탄티우스 1세의 친척이라는 주장은 아예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이 황제의 삶에 대해 살펴볼 때 역사가들은 비문, 동전 외에는 보통 조시무스, 조나라스,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등 로마사 사가들의 기록을 참고한다.
클라우디우스라는 성을 사용했고, 즉위 전 풀네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인데다 사람들에게 클라우디우스 2세 또는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불린다. 따라서 얼핏보면 그 유명한 클라우디우스 가문 후손 또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분파 중 어느 한 가문의 클리엔테스 후손이라고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클라우디우스 2세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때 황제인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먼 후손도 아니고[1] , 각 속주에 수 많은 클리엔테스를 거느린[2]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 로마시민권과 성씨를 하사받은 클리엔테스의 후손이 아니다. 또 앞 세대 황제 중 푸피에누스처럼 모계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태생으로 모계가문을 이어받은 이탈리아 혈통의 로마귀족도 절대 아니다[3][4] . 즉, 그는 로마 제국 4대 황제인 클라우디우스나 아피 클라우디우스부터 시작된 클라우디우스 일족 내 분파가문들의 후손도 아니고, 이들과 그의 조상이 어떤 클리엔텔라 관계도 아닌 사람이다.
사실 공화정 말부터 로마인들은 이름을 지을 때 분파 이름을 양자 입적 이후에도 바꾸지 않는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다가 제정이 안정되고 300여년이 훨씬 지난 3세기 클라우디우스 2세가 활동하던 무렵에는 로마화한 야만족들이나 제국 각지의 자유민들은 과거 카이사르 등 해당 가문 수장에게 씨족명을 하사받은 케이스가 아니더라도 로마의 명문가 이름들인 리키니우스, 율리우스, 클라우디우스, , 발레리우스, 아이밀리우스 같은 씨족명을 성씨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 이 당시에는 사라진 왕조 중 기사계급 가문인 플라비우스 등도 성씨나 개인 이름으로 썼기 때문에, 성 만으로 당사자의 신분을 확인하는 건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서로마제국 시대 스틸리코의 일대기를 저술한 이집트 시인 클라우디아누스처럼 로마 귀족들의 성씨나 해당 가문 남성이나 여성들이 사용한 이름을 변형해[5] 자신의 성씨나 이름으로 사용한 경우도 많았고, 원로원 의원 중 속주출신 신참자나 제정 중기 이후 등장한 귀족가문들 중에는 자신의 성씨나 이름에 명문가 이름을 조합해 이를 개인이름과 성씨로 합쳐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다. 또 클리엔테스 후손이어도 진짜 로마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6] . 또 이 시기 성공한 속주 태생 로마인들은 클리엔테스 후손이 아니어도 자신의 풀네임에 있는 유명 성씨를 이유로 본인이 알고 보면 이 가문 후손이라는 말도 했다. 다시 말해, 이 당시 속주출신이나 로마화한 야만족 후손 로마인들 중 명문가 이름을 사용한 이들은 공화정 초기나 왕정 시대에 존재했다가 제정 초기에 사라진 가문 이름이나 있어도 후손이 거의 없는 집안 이름을 성씨나 개인이름으로 많이 사용했고, 일부는 성공 후 아예 족보를 만들어 자신이 그들의 후손이라고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는 235년 멸문한 세베루스 왕조 시대 전부터 나온 현상이었는데, 황제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베루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경우에는 황제 본인이 세간에 레반트인, 시리아인이라고 자꾸 비난받자[7] 자신이 오래된 메텔루스 집안 후손이라며 아예 족보까지 만들게 했다. 또 3세기때 황제로 즉위한 황제 중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처럼 출신가문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 일가에게 로마시민권을 받은 클리엔테스 후손도 이런 모습을 보였는데, 이들의 경우에는 자신의 모친이 그라쿠스 형제의 셈프로니우스 가문 태생이라는 이유로 풀네임 안에 이 이름이 있다는 것을 비문 안에 넣고 내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현대 역사가들은 3세기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역시 로마화한 야만족의 후손 내지 그의 출신지인 오늘날 세르비아에서 살던 농민의 후손으로 보고 있다. 또 카라칼라의 안토니누스 칙령 이후 속주민들이 대부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을 볼 때, 클라우디우스 2세의 가족들은 최소 본인 부모 대에 시민권을 받은 속주 자유민 태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런 출신배경처럼 그가 태어난 곳 역시 논란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이나 모에시아의 나이수스였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아울러 4세기 역사가 카이사리부스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고르디아누스 2세의 사생아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이 기록은 전적으로 믿을 수 없다고 간주하고 있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어린 시절이 어땠는지를 알려주는 사료는 확실히 없다. 다만 성인이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하여 성실과 용기를 보여줘 데키우스 황제의 총애와 신임을 얻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원로원과 민중은 클라우디우스를 장군감으로 지목하고 있었으며 발레리아누스가 그를 연대장급 장교로 내버려둔 것에 비난했다고 한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곧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장군으로 승진시켜 일리리아 방면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 모에시아, 다키아, 판노니아, 달마티아의 로마군을 지휘하게 했고, 그 뒤에는 이집트 사령관과 아프리카 총독으로 임명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발레리아누스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그의 명성을 질투하고 그가 황제가 될까봐 두려워했다고 한다. 하지만 헤로디아누스 등 당대 역사가들의 사료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는 갈리에누스 시대에도 중용되어 갈리에누스가 창설한 기병대를 이끌었다고 한다.
2.2. 황제 등극
서기 260년대의 로마 제국은 대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갈리에누스의 아버지이자 공동황제였던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사산조 페르시아와 맞서 싸우다가 샤푸르 1세의 책략에 휘말려 자신의 근위대장을 비롯한 제국 최고 수뇌부들과 함께 포로가 됐다. 아울러 로마 제국은 이 사건 이후 게르만족과 페르시아의 대대적인 침략과 각지에서 황제를 칭하는 반역자들의 난립에 시달렸다. 급기야 제국 동방에서 오데나투스와 제노비아의 팔미라 제국이 건국했고 갈리아에선 포스투무스의 갈리아 제국이 건국되어 로마에서 떨어져 나갔다. 갈리에누스는 이 난국을 해결하고자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반역자들을 소탕하고 외적과 맞섰지만 역부족이었다.
268년, 그동안 갈리에누스와 함께 반란군을 토벌하던 기병대 사령관 아울레올루스가 자신을 포스투무스 황제의 대리인으로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갈리에누스는 진압에 나섰고 밀라노 근처의 폰티롤로 누에보에서 격전 끝에 아울레올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고 아울레올루스를 밀라노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그런데 그는 포위 공격 도중 부하들에게 살해당했고, 갈리에누스의 동생이자 발레리아누스의 차남 소(小) 발레리아누스까지 암살됐다.
갈리에누스 형제 암살 이후, 병사들은 갈리에누스의 후임으로 암살과 무관해보였던 클라우디우스를 추대해 황제로 선포했다. 이는 클라우디우스가 제위에 오르기 전부터 육체적으로 강건했고, 용감했으며 과감함과 잔인함도 동시에 갖춘 성격 탓에 군대의 지지를 얻었던 이유가 컸다고 하는데, 이 이유 외에도 갈리에누스 암살을 계획한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와 클라우디우스 간의 모종의 관계도 있다는 주장도 있다.
<로마 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갈리에누스는 죽기 직전에 황제의 자주색 의생을 클라우디우스에게 물려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는 당시 파비아 인근에서 독립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는데, 반역자들은 이미 클라우디우스를 황위에 올릴 계획이었기 때문에 갈리에누스의 유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군대는 의심과 적개심을 표시했지만, 1인당 20닢의 금화가 은사금으로 하사되자 곧 사그라들었다.
2.3. 갈리에누스 암살에 가담했는가?
당대 역사가 조시무스와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 암살을 주도한 이는 근위대장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였다. 하지만 조나라스는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한 이가 마르키아누스라고 지목한 반면 조시무스는 갈리에누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라고 지목했다. 헤라클리아누스가 갈리에누스를 암살하기로 결의한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갈리에누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 로마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가족과 그의 지지자들의 처형을 명령했지만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막고 그의 전임자를 신격화할 것을 요구해 승인을 얻어냈다고 한다.
클라우디우스가 반역에 가담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클라우디우스가 갈리에누스를 살해하고 자신을 옹립한 헤라클리아누스에게 자결을 명령했다는 것이다. 그가 전임 황제를 살해한 자에게 정당한 복수를 한 것인지, 헤라클리아누스와 공모해 전임 황제를 암살한 후 자신이 암살에 가담했다는 걸 은폐하기 위해 토사구팽한 것인지는 현재까지도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조나라스가 클라우디우스의 갈리에누스 암살 의혹을 배제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세가 클라우디우스를 존경한다는 걸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2.4. 고트 전쟁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에 오를 무렵, 로마 제국은 고트족의 대대적인 침략에 직면했다. 267년, 고트족은 여러 게르만족과 함께 500척의 배를 이끌고 흑해 연안에 침략해 수많은 해안 도시들을 황폐화시키고 비잔티움과 시지쿠스를 파괴했다. 그들은 수개월 동안 지중해에서 날뛰며 수많은 재물과 포로를 약탈하고 본토로 돌아간 후 이듬 해에 재차 침입했다. 하지만 작년에 고트족 해적들에게 호되게 당했던 로마군은 이번에는 해군을 제때 투입해 그들을 저지했고, 육로로 쳐들어온 고트족 역시 네스토스 강 근처에서 달마티아 기병대의 공격으로 3천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철수했다.
네스토스 전투에서 고트족을 격퇴한 갈리에누스는 아울레올루스의 반란을 진압하러 이탈리아로 떠났다. 그 사이, 고트족은 재차 대규모 침략을 감행해 발칸 반도를 휩쓸며 수많은 인명을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한편 갈리에누스는 암살되었고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는 아울레올루스와 추종자들을 모조리 처형한 뒤 고트족을 토벌하러 발칸 반도로 향했다. 서기 269년, 클라우디우스는 나이수스[8] 에서 기병대를 매복한 후 고트족을 유인한 후 방심한 적을 습격했다. 훗날 로마 제국 황제에 오르는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때 기병대 지휘관으로서 맹활약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고트족 5만여 명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어 노예 시장에 팔렸다고 한다.
살아남은 고트족들은 마케도니아로 탈출했지만 로마 기병대의 끈질긴 추격과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아 여러 병사들이 굶어죽자 하에무스 산맥으로 숨었다. 이에 클라우디우스는 하에무스 산맥을 포위했고, 고트족은 로마군에게 포위된 채 추운 겨울을 보내는동안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린 끝에 대다수가 사망하고 일부 전사들만 살아남아 로마군에게 투항했다. 로마 원로원은 이 승리에 감격하며 클라우디우스에게 '고티쿠스'란 존칭을 바쳤다.
2.5. 사망
클라우디우스는 고트족을 섬멸한 뒤 반달족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고트족을 몰살시킨 전염병은 로마군에게도 퍼졌고 많은 로마 병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급기야 클라우디우스 마저 전염병에 걸려 며칠간 신음하다가 270년 3월 시르미움에서 숨을 거두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사망한 후 원로원은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지만 군대는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두 황제는 제국의 재위를 놓고 대립했으나 곧 퀸틸루스가 사망하고[9]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 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었다.
3. 성 발렌티노와 클라우디우스
5세기 또는 6세기에 출판된 'Passio Marii et Marthae'에 따르면, 성 발렌티노가 269년 2월 14일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의해 순교했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발렌티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었을 때 자신을 감시하는 관리의 양녀가 맹인이라는 걸 알고 이를 치료해주자 관리와 그의 가족이 전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고, 이 소식을 들은 클라우디우스는 발렌티노를 참수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학계는 발렌티노가 실존 인물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으며 클라우디우스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고 본다.
4. 콘스탄티누스 왕조와의 혈연관계?
4세기 이후 등장한 이야기와 믿을 수 없는 기록인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르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는 대제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1세와 친척이었고 대제의 할머니 클라우디아의 큰아버지였다고 한다. 이 믿기 힘든 기록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퀸틸루스 형제에게는 또 다른 남자형제 크리스푸스가 있었는데, 이 사람은 클라우디아라는 딸을 얻었다고 한다. 이후 크리스푸스의 딸인 클라우디아는 성인이 된 뒤 에우트로피우스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즉 콘스탄티누스 1세의 아버지였다고 한다.
즉, 이 기록만 보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 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신의 고향 나이수스에서 고트족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황제의 조카딸이 낳은 손자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주장은 현재 거짓말로 평가받는다. 당장 대제의 아버지 클로루스의 일생만 보더라도 이는 사실이 아닐 확률이 높다고 분석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족벌주의를 바탕으로 한 로마 사회에서 클로루스가 3세기 황제 중 모든 로마인들에게 평가가 훌륭했던 황제의 조카딸이 낳은 아들이라면 콘스탄티우스 1세의 경력 이전에 모든 사서에서 그 이야기가 안 나올리가 없고 본인 역시 이를 내세우지 않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자신의 고향에서 큰 전쟁을 치룬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자신을 연결하려는 의도에서 족보를 세탁했다고 의심받고 있고, 대부분의 학자들 역시 대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주변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든 지어내려고 한 게 아니냐고 말하고 있다.
[1]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후손들과 그 가문(클라우디우스 네로 가,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가와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은 네로 시대 내내 남녀노소 상관없이 죄다 반역죄 같은 죄를 뒤집어쓰고 살해당했다. 그래서 네로 생전 이미 아우구스투스 일가 직계는 네로 외에는 여성황족 일가와 사돈 가문들까지 거진 혈통이 끊긴 상태였다.[2]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오래된 역사와 공화정 이래 최고 명문 중 하나가 된 까닭에 도시 하나가 클리엔테스인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분파 중 하나인 네로 가문의 클리엔테스는 카이사르 암살 직후 벌어진 내전 당시 기록에서 나오듯 스파르타 시 전체가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부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다. 또 로마 제정시대 원로원 의원 명부와 집정관 역임자 기록을 보면 클라우디우스 황제때 시민권과 씨족명을 하사받아 개인이름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라는 것을 붙인 그리스, 소아시아 출신 로마인들도 많이 보이며, 이 가문의 성씨를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신참자 귀족들도 꽤 보인다.[3] 즉위 전 풀네임에 아예 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변형 성씨인 클로디우스를 성에 붙여 사용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의 피를 이어받은 남성들의 전통에 따라 이 가문에서 많이 쓰는 마르쿠스를 프라이노멘으로 사용했다.[4]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푸피에누스가 대장장이 아들로 미천한 가문 태생이라고 했다. 하지만 20세기 이후 연구와 2000년대에 이탈리아 각지에서 나온 유적, 유물 등을 통해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의 아피우스 딸 클로디아 풀크라이고 푸피에누스의 아버지 역시 에트루리아계 세습귀족인 푸피에누스 막시무스 가 출신의 마르쿠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인 것이 밝혀졌다.[5] 사실 -anus라고 붙이는 경우는 양자입적된 남성이 친가 성씨에 붙여 사용해 입적된 뒤 바꾼 이름 뒤에 사용한 이름 중 하나이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외할머니의 남동생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본래 성씨인 옥타비우스를 옥타비아누스로 바꾸고 입양되면서 취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붙여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라는 풀네임을 취했다.[6] 카이사르에게 율리우스 성씨를 하사받은 갈리아 족장 후손 중 이런 경우가 제정 시대에 많았다고 한다.[7] 이 황제의 경우에는 애당초 세베루스 왕조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여동생, 즉 카라칼라, 게타 형제의 이모의 둘째 딸이 낳은 아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창건자와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8]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고향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나이수스에서 클라우디우스 2세가 대승으로 거두고 그 공로로 존칭까지 받은 탓에 콘스탄티누스 1세 생전부터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대제의 가문의 인연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었고 4세기 이후 기록에서는 클라우디우스 2세와 콘스탄티누스의 플라비우스 가문이 친척이라는 주장이 나오게 됐다고 한다.[9] 자살 또는 군인에 의한 암살 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