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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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Publius Licinius Valerianus)
'''제호'''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피우스 펠릭스 인비크투스 아우구스투스
(Imperator Caesar Publius Licinius Valerianus Pius Felix Invictus Augustus)
'''생몰연도'''
200년? ~ 260년?
'''재위기간'''
253년 ~ 260년
'''배우자'''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
'''자녀'''
갈리에누스, 소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공동황제'''
갈리에누스
1. 개요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2.2. 황제
2.2.1. 즉위
2.2.2. 협동 황제
2.2.3. 부자의 분투
2.2.4. 기독교 박해
2.3. 포로생활과 사망
3. 영향 및 평가


1. 개요


로마 제국 33대 황제. 공화정 때부터 이어진 명문 귀족 집안 리키니우스 일족 출신.[1] 트레보니우스와 아이밀리아누스 사이에서 내전이 일어났을 때 군사를 일으켜 내전의 승자인 아이밀리아누스를 쓰러뜨리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에는 방어선을 정비하고 장군감인 인재들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데 힘썼으며 [2]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하여 적들의 침략에 대비했다. 또한 그리스도교를 탄압하여 로마 주교(=교황) 식스토 2세와 카르타고 주교 키프리아누스(치프리아노)가 순교했다.

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전


발레리아누스는 195년경 태어났는데, 그는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처럼 오랜 세월동안 원로원 의석을 세습해온 이탈리아 로마귀족이었다. 그의 가문은 공화정 후기 1차 삼두정치로 유명한 크라수스를 배출한 크라수스 가문이 속한, 리키니우스 가문인데 이 가문은 공화정 시대때부터 이어진 로마의 오래되고 유력한 소수의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의 생애 중 즉위 전까지의 삶은 명확하지 않다.
리키니우스 가문은 갈루스 가문처럼 옛 에트루리아의 유력 가문에서 시작된 귀족 가문이기도 했지만, 공화정 시대부터 제정 시대 이후에도 원로원 의원을 대대로 배출했으며 의석을 세습해왔다고 한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 역시 즉위 전까지 오랜 기간 원로원 의원 생활을 했는데, 여러 연구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당시 로마 원로원귀족들의 일반적인 방식처럼 그 역시 10대 중후반의 나이에 성년식을 올리고 결혼했고 일반적인 원로원 의원 자제들처럼 대대장부터 군복무를 했을 거라고 추정된다고 한다. 이후 그는 최소 세베루스 왕조엘라가발루스 또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시대때부터 원로원 의석을 가문에서 이어 받고 경력을 쌓은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발레리아누스는 40대에 접어든 무렵인 230년대에 이르러 집정관까지 지낸 로마 귀족 내 거물 중 한명이었다. 이는 고대 전승 기록 중 하나인 <로마황제열전>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발레리아누스는 “60년간 칭송받을 만한 인생을 살았으며 영예와 관직을 남달리 훌륭하게 지켜왔다”고 한다. 또 그는 세력을 규합해 음모를 꾸미거나, 폭동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자리를 지키거나 영예를 얻은 적이 없고 “오로지 국가에 봉사해온 권리”, 즉 로마인들이 말하는 전 로마시민의 한결 같은 목소리로 영예의 자리(집정관)까지 오르게 됐다고 한다.
오늘날 각종 연구와 고대 기록 등을 토대로 238년 이후 상황을 정리해보면, 발레리아누스는 230년대에 집정관을 지낸 이후 238년 고르디아누스 1세고르디아누스 2세 부자를 강하게 지지하며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와 대립한 전형적인 원로원 의원이었다고 한다. 이는 명백한 사실이라고 하는데, 이후 그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출신 배경이 비슷한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시대부터 계속 고위직을 역임했다. 그리고 데키우스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에게도 신임을 얻어 60이 다 된 나이에는 갈루스를 지지하는 세력의 군사지휘권까지 맡았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갈루스의 명에 따라 도나우 강 상류지역까지 가서 갈루스 군을 규합했다. 그러다가 그는 아이밀리아누스가 갈루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갈루스 부자가 253년 8월 이탈리아 로마 북쪽의 도시 인테람나 근처에서 병사들에게 살해됐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2.2. 황제



2.2.1. 즉위


발레리아누스는 규합한 병사들에게 죽은 갈루스를 대신해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게 한 뒤, 3개월 전인 여름 아이밀리아누스가 그런 것처럼 이탈리아로 서둘러 진군했다. 따라서 아이밀리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한 군을 다시 모아 발레리아누스와 맞붙으려고 했는데, 이때 아이밀리아누스는 절제된 통치를 천명하고 원로원에게 스스로를 “그들(원로원)의 장군”이라고 하면서 원로원과 군대의 지지를 동시에 얻으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밀리아누스는 ‘피의 다리’로 알려진 스폴레토 근처에서 휘하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됐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는 아이밀리아누스와 직접적인 대결도 없이 88일 만에 갈루스의 복수를 하고 제위에 올랐다. 이때 발레리아누스는 58세의 고령이었고 그가 공동황제로 지명한 장남 갈리에누스는 40살이었다.

2.2.2. 협동 황제


즉위 당시 58세였던 발레리아누스는 253년 10월 수도 로마에 들어가자마자 원로원과 로마민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별 어려움없이 황제로 인정받았다. 이때 함께 로마로 입성한 장남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에그나티우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40살의 나이에 공동황제가 됐는데, 발레리아누스는 이 무렵부터 넓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눠서 부자가 최대한 역량을 활용하려고 계획했다. 즉, 공동황제 제도를 일종의 협동황제 개념으로 활용하려고 했다.
이런 계획 때문에 발레리아누스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위협과 공격으로 혼란해진 동부를 맡았고, 장남 갈리에누스에게는 서부 전체의 총괄권을 부여했다. 발레리아누스는 즉위 후 254년, 255년, 그리고 257년 집정관에 올라 자신과 아들의 제위 안정화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또 그는 페르시아의 왕 샤푸르 1세의 침략으로 박살나고 있던 안티오크 등 동방의 시리아 속주 내 주요도시 상황 해결에 매진했다.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254년 서둘러 안티오크에 도착해 동부에서 지내며 이 일대 안정화와 페르시아군 격퇴에 매진했다.

2.2.3. 부자의 분투


갈리에누스는 254년 이래로 갈리아라인강 일대에서 알레만니족과 프랑크족을 상대로 정신없이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그러면서 갈리에누스는 도나우 강까지 넘기 시작한 마르코만니족과 알레만니족까지 상대해야 했다. 이와 동시에 발레리아누스 역시 제국 동부에서 에메사의 성직자 우라니우스 안토니우스 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시작으로 시리아 속주 내 크고 작은 전투를 하면서 속주 안정화에 온 힘을 쏟았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발레리아누스에게 ‘동방의 복구자’, ‘인류의 복구자’라는 존칭을 부여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부터 발레리아누스는 260년 샤푸르 1세에게 생포될 때까지 몇 년동안 계속해서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뤘다. 하지만 이 전투들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257년 승전 내용을 통해 그가 페르시아 상대로 거둔 승리의 대가로 원로원으로부터 ‘세계의 복구자’라는 거창한 칭호를 부여받은 것만 확인해볼 수 있다.

2.2.4. 기독교 박해


발레리아누스는 데키우스처럼 제국 동방에서 지속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했다. 따라서 그는 초기 기독교도 작가들에게 미움을 많이 받았고, 포로생활을 한 뒤 죽은 이후 신이 분노해 수치스럽게 종말한 증거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의 기독교 박해는 전임자 중 한 명인 데키우스와 달리 로마 상류층 사화에서의 기독교 근절을 위한 박해였다는 평이 있다. 왜냐하면 257년과 258년 소위 ‘쌍둥이 칙령’이라고 불린 두 번의 칙령을 통해 로마 사회 내 기독교 근절 및 기독교도 박해를 했기 때문라고 한다.

2.3. 포로생활과 사망


발레리아누스는 아들 갈리에누스와 비교해 눈에 띠는 승리가 적었지만, 동방에서 페르시아를 상대로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60년 초여름, 그는 페르시아 측의 맹렬한 공격으로 다시 치열한 전쟁을 재개했는데, 이때 발레리아누스 휘하 로마군에서는 전염병이 돌면서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병력도 격감했다. 또 에데사는 다시 페르시아군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그래서 발레리아누스는 협상을 통해 군대를 빼내려고 했다. 이때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얼마 안 되는 소수의 수행원만 동반해 직접 대면하는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샤푸르 1세의 계략이었다. 하지만 발레리아누스는 어떤 이유 때문인지 샤푸르 1세의 요구대로 소수의 수행원과 병사만 데리고 나섰다가 그대로 휘하 병사들과 포로가 됐다. 여기에는 황제 외에도 근위대장, 고위 관료, 원로원 의원까지 포함되었다. 이후 발레리아누스는 끝내 풀려나지 못한 채 고령의 나이에 온갖 수모를 겪고 사산왕조 페르시아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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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로 잡힌 발레리아누스 앞의 샤푸르 1세를 새긴 부조[3]
4세기 이후 역사서 기록(특히 초기 기독교도 저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황제는 포로가 되어 지방 곳곳에 끌려 다니며 샤푸르 1세의 승리를 입증하는 살아있는 증거로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었고 그 후로도 샤푸르 1세가 말에 올라탈 때마다 인간 발판이 된다. 결국 로마 제국으로 끝끝내 되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옥사했다. 더 안습한 것은 일부 기독교도 저자들 기록에 따르면 황제가 사망 후 가죽이 벗겨져 그 속은 지푸라기가 채워지고 박제 인형이 되어 샤푸르 1세의 대승을 기념하는 증거로서 신전에 전시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야사에 불과할 뿐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고, 반대로 실제로 그랬을거라는 이야기도 있다. 먼저 실제로 했을 수도 있다는 측의 주장을 살펴보면, 샤푸르 1세와 발레리아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대규모 전투를 치를 정도로 양국 간의 사이가 벌어질 때로 벌어졌으며 로마 제국은 황제가 직접 참전했음에도 전투에서 크게 대패하고 사로잡힐 정도로 과거 주변 국가들에 대해 압도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패권을 누렸던 제국이 더이상 아님이 명백하게 입증되었는데 대규모 전쟁에서 로마군을 갈아버릴 국력을 과시하던 당시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으면 과시했지 필요 이상으로 사이도 안 좋은 적대국에 대해 그렇게 눈치를 봤겠냐는 의견도 존재한다.[4]
그러나 고대 전승기록 중 기독교인 저자들의 주장이나 로마인들 사이에 돈 소문과 달리 발레리아누스의 포로 생활은 그렇게 비참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실제로는 황제가 포로가 된 지 1년여 만에 홧병으로 사망했을 뿐이라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면서 이 주장을 펼치는 측의 현대 연구자들은 발레리아누스의 포로생활이 치욕과 비참함의 연속으로 흘러가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을 하는 대표적인 현대 연구자 중 한 명인, 이란 태생의 저명한 고대사 역사가 새투라지 다야이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에 따르면 사산왕조 페르시아 내에서 발레리아누스와 포로 잡힌 로마인들은 샤푸르 1세에게 풀려나지는 못했지만, 수도 또는 그 근처의 쾌적한 환경의 도시에서 소문과 달리 훌륭한 대우를 받으며 포로생활을 했다고 한다.
다야이 외에도 고대 기록에서의 비참한 포로생활을 반박하는 주장은 여러 정황을 증거로 제기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실상 로마 황제와 로마 제국의 고위층 인사들이 그 정도로 가혹하게 당했다면 로마 측에서도 나중에 국가를 재건한 뒤 정식으로 문제삼든지, 보복할 때 명분으로라도 썼을 텐데 그런 사례가 전혀 없다고 여러 정황을 근거로 추가 제시를 하고 있다. 특히 결정적으로 발레리아누스의 생포 후 그리 머지 않은 39년 뒤의 299년에 동방 부제 갈레리우스가 사산조 페르시아를 물리치고 크테시폰을 일시 점령하였을 때, 로마의 갈레리우스는 위 가혹행위가 실존하였을 경우 이를 명분으로 삼기에 충분했을 텐데 실제로 그러하지 않았다. 또한 사산 왕조 입장에서도 포로가 된 로마 최고위층 포로들을 외교적 문제 때문에 실제로 가혹행위를 해서 좋을 것은 없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3. 영향 및 평가


발레리아누스가 오늘날 대중들에게 한 어떤 일보다도 유명한 사실은, 그가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이다. 그것도 '''로마 역사상 최초로 로마 황제가 적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사례'''였다. 260년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맞붙었는데 상대가 그 '''샤푸르 1세'''였다. 발레리아누스는 샤푸르 1세의 계략에 당해 휘하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고 이 사실이 로마 전역에 퍼지면서 그 영향으로 로마는 팔미라 제국, 갈리아 제국으로 세 조각 나 버린다. 그가 한 어떠한 업적보다도 포로가 된 황제라는 사실만이 역사에 남아버린, 참 뭐라 말 할 수 없는 황제다. 게다가 아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가 남긴 여파에 휘말려서 혼란을 수습하느라고 8년을 부지런히 뛰어다녔으나, 결국 근위대장인 아우렐리우스 헤라클리아누스의 손에 죽었다. 따라서 발레리아누스가 포로로 잡혔다는 것은 황제 개인으로 볼때는 수치와 분노, 그리고 가장 암울한 황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발레리아누스 생포사건은 로마의 위상과 국력이 저하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일대 사건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1]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1차 삼두정치에 참여한 크라수스가 속한 에트루리아계 귀족 가문이다.[2] 이 중에는 나중에 황제가 되는 아우렐리아누스프로부스가 있다.[3] 이란 쉬라즈 근처의 나크쉐 루스탐 유적에 있는 다리우스 1세의 무덤 바로 옆에 새겨져 있다.[4] 사실 군주 입장에선 외국의 군주라도 일단 군주인지라, 가혹하게 다뤘다간 되려 자신이 그렇게 당할 명분을 스스로 남기는 꼴이 되므로 쓸 데 없는 모욕을 알아서 삼갔다. 백제의 성왕이 신라의 포로로 잡혔을 때도, 신라 병사들은 일단 왕이기에 성왕에게 절을 하고 최대한의 예의를 차린 후 처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