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베루스

 


'''로마제국 제16대 황제
루키우스 베루스
Lucius Verus
'''

<colbgcolor=#BA0E09><colcolor=#FCE774> '''출생'''
130년 12월 15일
로마 제국 로마
'''사망'''
169년 1월 23일(향년 39세)
로마 제국 본국 이탈리아 알티눔 로마군 숙영지
'''능묘'''
하드리아누스 영묘
'''공동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년-180년)
'''재위'''
'''로마 황제'''
161년 3월 7일 ~ 169년 1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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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A0E09><colcolor=#FCE774> ''''''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17]
Lucius Ceionius Commodus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18]
Lucius Aelius Aurelius Commodus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19]
Imperator Caesar Lucius Aurelius Verus Augustus
'''개선칭호'''
아르메니아쿠스(164년), 파르티쿠스 막시무스(165년), 메디쿠스(166년)
'''가문'''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부모'''
친부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20]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
모친 아비디아 파울티아
'''황후'''
루킬라(164 결혼)
'''자녀'''
이름미상의 딸 외 2명

1. 개요
2. 황제가 되기 전 생애
2.1. 출생과 본가
2.2. 입양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
3. 황제 즉위
4. 황제로서의 치세
4.1. 파르티아 전쟁
5. 사망
6. 외모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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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오현제 중 마지막을 장식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생[1]이자 공동황제, 조카는 로마 역사상 최악의 황제로 악명을 떨친 콤모두스다. 하지만 형, 조카와 달리 인지도는 그리 높지 않다.[2] 황제로서의 이름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루키우스 아우렐리우스 베루스 아우구스투스. 재위기간은 161년 3월 17일부터 169년까지였다.

2. 황제가 되기 전 생애



2.1. 출생과 본가


오현제 중 한 명인 하드리아누스의 양아들이자 후계자 겸 공동황제였던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아들로 130년 12월 15일 태어났다. 본명은 증조부, 조부, 아버지와 같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이며, 본가는 에트루리아에서 시작된 오래된 명문가였다. 그의 어머니 역시 로마시대의 그리스인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를 후원한 옛 에트루리아 지방의 로마귀족 가문 출신으로 친부모 모두 오래된 이탈리아 가문 사람들이었다.
루키우스 베루스의 본가는 친가, 외가 모두 이탈리아 귀족이었고 모두 그 역사가 상당했다. 본가인 케이오니우스 씨족 내 콤모두스 가문은 에트루리아 시대때부터 내려온 유서깊은 씨족 내 분파가문으로 같은 뿌리에서 시작된 분파가문들(루푸스, 알비누스[3] 등)과 달리 로마 편입 이후에도 가장 성공한 씨족 분파 집안이었다. 특히 제정시대 당시 이 집안은 2세기 무렵부터 잘 나가기 시작한 알비누스 가문보다 먼저 원로원 의석을 대대로 세습했을 뿐만 아니라, 집정관까지 루키우스 베루스 직계에선 무려 2번이나 연속 배출했다. 베루스의 직계 중 증조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는 78년 집정관을 지낸 인사로 이 무렵 이탈리아 내 에트루리아 혈통 귀족 중 영향력이 상당한 원로원 의원이었고, 자신의 부친과 이름이 똑같은 친할아버지 루키우스 케이오니우스 콤모두스 역시 106년에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친아버지는 하드리아누스의 양자로 입적된 공식후계자에 올랐으며 공동황제이기도 했다. 외가를 살펴보면 이 집안도 대단했는데 어머니 아비디아 파울티나는 티베리우스 황제시절 집정관까지 지낸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페트로니우스 폰티우스 니그리누스의 직계후손이었다. 하지만 루키우스 베루스의 외조부는 하드리아누스에게 찍힌 나머지 원로원에서 제명되는 흑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8세가 되던 해인 138년 아버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가 사망했는데, 그의 양할아버지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새로운 후계자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선정해 그와 입양관계를 맺었다. 이때 그는 안토니누스에게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4]와 함께 루키우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의 양아들로 함께 입양할 것을 약속받았으며, 안토니누스는 이런 하드리아누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었다.

2.2. 입양과 안토니누스 피우스 시절


양할아버지 하드리아누스 황제 사망 직전, 황제는 자신의 친구이자 인척 안니우스 베루스[5]의 사위 안토니누스를 양자로 받아들이면서 여러가지 조건을 붙였고, 이를 강요했다. 이때 본래 루키우스 베루스의 약혼녀로 내정된 사람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이었던 안니아 갈레리아 파우스티나(소 파우스티나)였다. 그러나 이 약혼은 약혼이 예정된 소 파우스티나가 10살 가까이 많을 정도로 연상인데다, 로마 상류층 남녀의 초혼 적령기상 문제가 많았다. 아울러 안토니누스가 황제가 됨에도 불구하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자입적 조건은 지나칠 정도로 후임자에게 불리해 수정이 불가피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드리아누스가 죽고 난 이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즉위한 이후 심사숙고 끝에 하드리아누스의 기본 계획인 “하드리아누스의 다음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그 다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는 큰 틀만 유지하고 루키우스 베루스와 자신의 딸 간의 약혼은 파기했다. 이 결과, 트라야누스의 피를 자신의 외할머니를 통해 이은 소(小) 파우스티나는 큰외삼촌의 아들로 트라야누스의 누나 피를 물려받은 고종사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약혼 후 결혼하였다. 그런데 이 결혼은 신랑과 신부 모두 결혼적령기가 비슷한 나이 대라서 문제도 없었고, 당시 로마에서는 고종사촌 간의 근친혼도 많았던데다 아들이 없는 친척이 조카나 처조카 등 친인척을 사위로 삼아 그를 양자로 삼고 자신의 지위를 물려주는 일은 흔했다.[6]
이와 동시에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루키우스 베루스의 누나 케이오니아 파비아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136년 약혼한 사이였던 것을 신랑 아버지 자격으로 138년 취소했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 결혼적령기가 안 된 케이오니아 파비아의 혼처를 다시 구해, 집정관을 배출한 원로원 귀족 가문 중 하나인 플라우티우스 가의 자제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와 결혼시키고 그를 후원해 159년 집정관에 오르게 해줬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그의 두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가 명분과 실리를 모두 얻게 한 결정이었는데, 실제로 이런 계획 변경은 안토니네 황실의 우호귀족 가문을 늘려준 조치가 됐다.
소년 시절의 루키우스 베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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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되기 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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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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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베루스
즉위 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의 처조카이며 사위이자 실질적인 후계자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역대 로마 황제 중 어떤 사람보다 일찍이 제왕교육을 시켰고 고위직을 맡기며 자신의 일을 돕게 했다. 아울러 그는 두 양자 중 자신의 아내 대(大) 파우스티나의 친조카였던 마르쿠스를 의심의 여지 없이 더 총애했는데, 그럼에도 안토니누스는 마르쿠스보다 9살이나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 역시 사랑했고 자신의 차남으로서 훌륭히 키웠다.
안토니누스가 어린 루키우스 베루스에게도 공식적인 제왕수업을 뒤늦게나마 시켰다고 해도, 진심으로 루키우스를 아꼈고 그가 자신의 후계자, 로마최상류층 일원으로서 자라길 바랬다. 하지만 루키우스는 하드리아누스 사망 당시, 18살이었던 마르쿠스와 달리 10살도 안 된 어린 소년이었다. 그래서 안토니누스는 그가 고위직을 맡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판단해, 우선 어린 베루스의 기본적인 예절과 기초적인 교양 교육에 신경썼다[7]. 따라서 루키우스는 황제의 실질적인 후계자인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직접 선정해 뽑은 스승 마르쿠스 코르넬리우스 프론토에게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당대 최고의 명사이자 웅변가, 문법학자였던 프론토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는 동안, 안토니누스는 두 아들의 교육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는데 프론토에게 어린 루키우스는 예의바르고 시를 쓰는 능력과 웅변에 훌륭한 학생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이런 교육과 별개로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나이가 제법 있던 상황상 확실히 완성된 후계자인 마르쿠스만을 단독황제로 생각하는 듯 했다. 그래서 그는 루키우스에게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린 로마 엘리트 공직코스를 두루 거치게 한 것은 자신의 둘째아들이 24살이 된 해 부터였다.
이는 황제가 루키우스 베루스의 형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보다 무려 6년이나 더 늦은 나이부터 제왕교육이 이뤄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런 모습처럼 실제 안토니누스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뒤 마르쿠스에게만 전권을 이양했을 뿐 공동집정관 신분의 루키우스에게는 자신의 권한을 내리지 않았다. 즉, 그는 생전 루키우스 베루스를 아꼈음에도 자신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거나, 안 좋은 일이 터질 경우 즉위할 차차기 황제로 생각해 그를 교육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키우스 베루스는 안토니누스와 마르쿠스가 자신을 친아들, 친동생으로 대우하고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던 것을 알았다. 그래서 진심으로 아버지와 형을 사랑하고 존중했다. 아울러 루키우스는 본인 스스로도 제위에는 큰 욕심이나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힘들고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공직보다는 그저 아버지와 형을 곁에서 도우면서, 여유롭게 사는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차남으로서 삶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즐겼다. 때문에, 그는 이에 대해 불만을 품는 등의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베루스는 23세에 회계감사관을 시작으로 24세의 나이에 첫 번째 집정관을 지냈는데, 느긋해보이고 철이 없어도 늘 예의바르고 맡은 일은 최선을 다해냈다고 한다. 그래서 양부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자신이 사망한 161년, 차남 루키우스에게 차기황제이자 사실상 공동황제였던 장남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파트너로 삼아 두 번째 집정관을 지내게 해주며, 루키우스에게 마르쿠스 다음 황제로서의 제왕교육을 시작했다[8].
루키우스는 안토니누스 생전동안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황제가 되기 전까지 이탈리아 반도를 벗어나 생활한 적도 없었고, 군단 경험이나 해외여행 같은 가벼운 출장경험조차 없었다. 왜냐하면 아버지 안토니누스가 두 아들을 지나치게 아끼고 잠시라도 떨어져 지내길 진짜 싫어할 정도로 팔불출인데다, 본인과 자신의 두 아들이 이탈리아와 캄파니아 외의 다른 지역으로 여행을 가거나 공무를 위해 떠난다면 속주들 입장에서는 상당한 부담이 돌아올 것을 걱정한 복합적인 이유 때문이다.

3. 황제 즉위


본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자신의 후계자이기보다는 넘버3로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후계자로 생각했고, 자신이 고령이 된 뒤 마르쿠스의 제위등극이 임박해진 직후에야 명예로운 경력의 끝인 집정관 직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파트너 집정관으로 추천해 제왕교육을 강화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죽던 해,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루키우스에게 마르쿠스의 세번째 집정관 파트너로 삼으면서 갓 30에 접어들 루키우스가 고령인 자신이 죽을 경우 40대에 접어든 마르쿠스의 차기황제로 확정되었음을 원로원에게 알렸다.
아울러 안토니누스는 소(小) 파우스티나와 루키우스가 파혼한 이후에도 31세가 될 때까지 다른 신부감을 정해주지 않았는데, 이는 이 당시 마르쿠스와 소 파우스티나의 장녀 루킬라가 아직 결혼적령기가 안 된 소녀인 탓에 미뤄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루키우스는 아버지 안토니누스, 형 마르쿠스 부부와 함께 늘 황궁과 안토니누스 사유지 내 시골별장을 오가며 생활했고, 독신으로 자유롭게 살았는데 이는 그가 현직황제의 둘째아들, 차기황제의 동생이라는 타이틀과 그의 출신내력, 잘생긴 외모 등으로 인해 미혼 로마여성들의 인기를 높이는 이유가 됐다.
상술했듯이 루키우스의 성격은 본래 선량한 성격인데다 유쾌하고 뛰어난 교양을 갖추고 있었고, 솔직하고 개방적인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진지하고 학문을 좋아하며 장남같은 묵직한 성격을 가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대비되었다. 또한 본인이 아버지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차별받는다고 생각하며 원망과 증오심을 갖기보다는, 형이니까 당연하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자유로운 상황을 즐기며 낙천적으로 살았다. 그리고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도 사이가 아주 돈독하여 피를 나눈 형제보다도 우애가 깊었다.
161년 3월 6일, 로마 근교 별궁에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노환으로 잠자듯 편안하고 조용히 세상을 떠나자 형 마르쿠스와 함께 국장을 함께 치뤘다. 이때 원로원에서는 그를 단순한 넘버2이자, 아들로서 해야할 행동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유해가 시신 상태로 관에 담겨 영묘에 안치된 뒤[9]에는 이 모습이 자신들의 예상과 달랐음을 알게 되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신격화가 통과된 이후, 원로원 회의장에서 거행된 황제 취임식에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황제 취임을 요청받은 것은 본인뿐만 아니라 동생 루키우스도 함께라고 발표했다. 이에 원로원에서는 40세의 마르쿠스와 31세의 루키우스 베루스의 황제 취임을 요청했고, 이들은 관례대로 선(先) 사양, 후(後) 승인 형식대로 요청을 받아들여 공동황제로 즉위했다[10].

4. 황제로서의 치세



4.1. 파르티아 전쟁


161년, 즉위한 해부터 흉작을 경험하여 밀 생산 및 공급, 포도와 과일, 채소 재배에 있어서의 타격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거기에다 가을부터는 테베레 강이 범람해서 홍수까지 심해서 더 힘든 상황에 파르티아가 아르메니아를 침공하며 전쟁도 준비해야만 했다.
둘 다 군대 경험도 없었고 이탈리아 밖을 나간 적도 없는 상황에서 맨먼저 한 것은 파르티아의 공격으로 1개 군단을 잃고, 패배의 책임을 지고 자결한 카파도키아 속주 총독의 후임을 지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두 명의 황제가 한 행동이 최악이었던 것은 브리타니아 속주 총독이자 이곳의 방어선을 지키는 책임자를 카파도키아로 보내 구멍을 막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리스쿠스의 후임을 다시 지명해야만 했다. 이때 마르쿠스는 칼푸르니우스 아그리콜라를 임명하고 고지 게르마니아 방어선을 담담하는 속주총독에는 아우피디우스 빅토리누스를 임명해 공백을 메꿨다.
그런 상황에서 파르티아 군을 이끌고 있던 볼로가세스3세는 목표를 시리아 속주로 바꿔 공격했다. 이에 총독인 코르넬리아누스가 반격에 나섰지만 패배하여 퇴각하는 소식이 전해졌다. 뒤이어 동방의 동맹국들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는 보고가 전해졌다. 그래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파트너이자 31세의 젊은 루키우스 베루스를 동방 전선에 파견했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입장에선 나름 현명한 판단이었다.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대로 "루키우스는 육체적으로 튼튼하고 나이가 젊어서 전선을 지휘하기 적합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는 완전한 오판이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를 떠난 건 162년 초여름이었는데, 이마저도 반도 끝 브린디시로 가는 도중 루키우스가 카누시움에서 병으로 쓰러져 늦어지고 말았다[11]. 다행스러운 것은 병의 원인이 너무 놀아서 피로가 쌓였기 때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루키우스 베루스는 4일 동안 푹 쉰 다음 함대의 호위를 받으며 동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마저도 루키우스 베루스가 안티오키아로 직행하기보다는 그리스 반도의 코린트에 상륙하여 아테네로 향하며 더 늦어지고 말았다. 그 결과, 루키우스 베루스는 32세의 생일을 아테네에서 편안하게 보내고 에게 해 일대의 섬들을 관광하며 느긋하게 소아시아 해안가의 에페소스, 밀레투스를 거쳐 겨울이 돼서야 안티오키아에 도착했다.
루키우스 베루스가 시간을 질질 끌며 여행을 느긋하게 즐기는 동안, 새로운 총독 시타티우스 프리스쿠스는 서둘러 영국에서 터키 동쪽 끝까지 최대한 빨리 도착해 패잔병들을 다독이고 전력을 재정비했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루키우스 베루스였다. 그는 온갖 환영식을 참석하고 제국 동방을 여행하며 늦게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이후에도 일처리가 매끄럽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장군들과 가진 회의에서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해서 루키우스 베루스와 신임 총독 리보 사이에 의견차이마저 생겨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루키우스 베루스는 시리아에서 새로운 애인을 만나 연애를 즐기느라 일찌감치 작전회의에서 제외되고, 총독 리보마저도 시리아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건강을 해치고 말았다는 것이다[12]. 이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보낸 수행원들은 황제와 총독을 제외시키고 재빨리 작전회의를 진행해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키우스가 노는 사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사망한 총독 리보의 후임으로 율리우스 베루스를 임명하여 파견하고 반격을 펼쳤다. 그 결과, 프리스쿠스의 반격을 시작으로 하여 로마군은 163년 봄부터 공세를 펼쳐 아르메니아 수도까지 진격하여 파르티아군을 쫓아내고 파르티아가 앉힌 파코루스 왕자를 쫓아내고 소파에무스를 왕위에 앉혔다. 그리고 163년 말에는 완전히 파르티아 군을 내모는 데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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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레디에이터에서도 나오는 콤모두스의 누나이자 루키우스 베루스의 아내 루킬라
전쟁이 2년째 접어든 164년 루키우스 베루스는 배를 타고 이오니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에페소스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의형제이자 공동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14살 된 큰 딸 루킬라와 결혼식을 올렸다[13]. 결혼과 동시에 루키우스 베루스는 언제 그랬냐는 듯 동방에 왔을 때 사귄 그리스 미녀와의 관계를 끝내고 결혼생활을 별 문제없이 이어나갔다.
결혼 이후 루키우스 베루스는 1년차 전쟁 때와 달리, 황제임을 내세워 전략에 참견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장군들에게 파르티아와 강화를 맺자고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전쟁도 이기고 있고 장군들이 반대했기에 결국 그 제안은 쏙 들어가고, 새로이 국경강인 티그리스 강을 넘어서 파르티아 영토를 공격하고 철수하는 전략으로 수정되어 실행에 옮겨지게 된다. 특히 이때 시리아 출신의 장군 아비디우스 카시우스가 맹활약해서 파르티아에 큰 피해를 입혔다. 이것으로 파르티아 왕국은 전력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고, 60년 뒤 파르티아보다 강적인 사산조 페르시아 대두의 원인이 되고 만다.
166년 10월, 전쟁이 끝난 뒤 루키우스 베루스는 아내 루킬라와 귀국하여 파르티아 전쟁 승리 기념 개선식을 올렸는데, 이는 49년 만에 열린 개선식이었다.

5.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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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우스 베루스의 도안이 담긴 금화
파르티아 전쟁 이후 2년(166 ~168)까지는 로마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게르마니아 전쟁이 발발하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함께 도나우 강 전선으로 향했다. 이들은 168~169년에 걸친 겨울동안 아퀼레이아에 머물렀다. 당시,황제 일행이 겨울에 도나우 강 전선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역병이 만연해있어 황제들이 역병에 감염될 것을 막아야했기 때문이었다[14].
169년, 봄이 되자 루키우스는 수도 로마로 향하게 되었다. 황제 일행이 100km 떨어진 알티눔에 온 무렵, 루키우스 베루스는 갑자기 병에 걸려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고는 이틀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가 39세의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 도나우 전선에 퍼져있던 역병에 감염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뇌졸중을 의심하고 있다[15].
루키우스 베루스는 아내 루킬라와의 사이에서 3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1명의 딸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었다. 그런데 유일하게 살아남은 딸 역시 콤모두스 시대때 어머니 루킬라와 공모해 자신의 사촌오빠, 외삼촌 콤모두스 암살에 가담해 유배 후 처형됐다.

6. 외모와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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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左)와 루키우스 베루스(Lucius Verus). 루키우스 베루스는 당시 미남으로 추앙받았다.
즉위 당시 30대에 갓 접어든 독신황제였기에 로마에서 인기가 상당했는데,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잘생긴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외모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고 한다. 당대 기록들에 따르면, 비록 좁은 이마를 가지고 있는 게 흠이었고 갸름한 얼굴을 가리기 위해 수염을 턱 전체를 걸쳐 길렀지만, 당대 미남이라고 불린 친아버지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유전자를 이어받아 큰 키에 갸름한 얼굴, 섬세한 이목구비, 금발머리에 파란 눈을 가지고 있어서 그 후광이 더 돋보였다고 한다.
루키우스 베루스는 자신의 조카 콤모두스와 마찬가지로 본인의 풍성하고 매력적인 금발머리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굉장한 멋쟁이였다. 그래서 자신의 금발머리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머리에 금가루를 뿌렸다고 하며, 패션에도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 따라서 진지하고 사색적인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이런 측면에서 많이 대비됐는데, 이는 그가 현직 황제의 차남이라는 타이틀과 제위계승 넘버2의 멋쟁이 미남 황족이라는 지위 때문에 상당히 오해를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특히, 이런 외모적인 자부심은 원로원 의원들과 일부 로마인들에게는 외모에 대한 지나친 자존심이 쾌락과 경박함의 증거로 많이 오해를 받았다. 그래서 일부 후세 로마인 저자들에게 그는 조카 콤모두스처럼 축제와 사냥에 열중한 나태한 군주로까지 묘사했고, 그를 자신의 형 후광에 기댄 무능하고 쾌락에 찌든 황제로 평가했다[16].
하지만 이런 후대의 기록과 달리 루키우스 베루스의 성품은 조카처럼 폭군도, 형처럼 성군도 아닌 평범한 군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당대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악덕도, 덕목도 많지 않고 본성이 착한 사람임에도 행동이나 말을 보거나 들어보면 다소 철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이런 루키우스의 철없는 행동은 그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 형 마르쿠스조차도 그 천성은 종종 형으로서 자제력을 요구했다. 따라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자신의 저서 <명상록>에 이런 심정을 솔직 담백하게 기술했다.
그럼에도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의 솔직한 기술내용처럼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착한 사람이라서 공손함과 애정, 그리고 형과 가족에 대한 따뜻함을 지녔고, 어떤 책임을 맡을 때나마 형 마르쿠스의 말을 부관이 총독의 말을 그대로 따르듯 충실히 따르면서도 최선을 다했다. 또 그는 나태해보여도 의외로 상당히 유능한 능력도 갖췄고, 경박해보이는 듯 해도 실제 모습은 예의와 도덕심을 잃지 않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베루스는 즉위 전부터 원로원에게 경박하고 화려하지만 본성은 착하고 예의가 바르다고 평판을 얻었고, 사람들에게 품성과 행동을 이유로 미움을 받지 않았다. 이는 공동황제였던 그의 형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마르쿠스는 자신의 일기를 통해 자신의 삶에서 일평생동안 이런 베루스를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동생"이라고 말할 정도로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꼈다.

[1] 안토니누스 피우스에게 어린 시절 입양관계를 통해 역시 입양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형제지간이 되었다.[2] 성군으로 이름을 날린 형과 폭군(...)으로 이름을 날린 조카에 비해 평범한 사람이라 묻힌 케이스라 볼 수 있다. 공동황제 시절에도 사실상 전권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있었고, 루키우스 베루스는 마르쿠스의 정책과 전략을 그대로 실행에 옮긴 일종의 대리이자 부황제에 가까웠다.[3] 나중에 포스투무스라고 불리기도 했으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최후의 라이벌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를 배출했다.[4]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본명[5]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아버지로 아내는 트라야누스 황제 누나의 외손녀였다.[6] 안토니누스 피우스 역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가 사별 직후 재혼하자, 아들이 없는 외조부 손에서 자랐고 외가를 물려받은 케이스였다.[7] 로마에서 10살도 안 된 어린 아이에게 제왕교육을 시키는 경우에는 당시 기준으로도 파격 수준을 넘을 정도로 이른 방식이었고, 멀쩡한 후계자가 있는 안토니누스 입장에서도 급할 일이 없는 당연한 결정이었다.[8] 이때 마르쿠스는 3번째 집정관 경험이었다.[9]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장례식 기록에 따르면 “성대하게 장례식을 거행한 뒤 그의 두 아들과 아내 곁에 시신상태로 매장됐다”고 한다. 즉, 그는 화장되지 않고 매장됐는데, 이는 당시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로마의 새로운 장례풍습을 황제가 거의 최초로 치룬 국장이었다고 연구자들은 말한다.[10] 이 사건은 로마 제정 역사상 최초였다. 그래서 이를 예상하지 못한 원로원은 당황했다.[11]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동생을 아피아 가도의 중간 지점인 카푸아까지 동행했지만 이 보고를 받은 뒤, 말을 타고 카누시움까지 내려가야만 했다.[12] 리보는 결국 현지에서 얻은 풍토병으로 병사하고 만다.[13] 이 결혼은 정략결혼인 동시에,피 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삼촌과 조카의 결혼이었다.[14]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루키우스 베루스가 로마로 돌아가고 싶어했기 때문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루키우스 베루스를 붙잡기 위해 차선책으로 제시했다고 한다.[15] 실제 루키우스 베루스의 생활은 화려하고 굉장히 불규칙했다고 한다.[16] 당연한 이야기인데, 이런 후세의 비뚤어진 평가와 묘사에 결정적인 한 방이 된 것은 루키우스의 조카였던 후임 콤모두스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