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푸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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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hapur I'''. 샤푸르 1세는 사산 왕조의 황제로 재위기간은 242-272년이다. 로마 황제를 포로로 잡아들이고 굴복시킨 샤한샤이며 페르시아의 재부흥을 일궈낸 명군으로 평가받는다.
2. 외치
이 시기 사산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과의 전쟁이 지속되었는데, 재위 초기에 군대를 보내 시리아 일대를 공략하였지만 고르디아누스 3세의 선방에 막혀 실패한다.
이후 로마와 한동안 평화를 지속하다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지자 로마 제국의 동쪽 국경을 공격하여 아르메니아를 점령하고, 253년에는 시리아의 안티오크를 약탈하였다. 결국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점령당한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시리아로 향하였다.
그러던 중 260년 에데사에 머무르던 발레리아누스의 군대 내부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전투력을 상실한 로마군은 페르시아군과 휴전협상을 시도하였다. 이때 계략을 사용하여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다.[1][2] 반대로 말하자면 로마 입장에서는 '''역사상 황제가 적국에게 최초로 포로가 된 엄청난 치욕인 셈이다.'''
샤푸르 1세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었는데, 애초에 국력차가 현격한 로마 제국 상대로 수비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고, 그렇다 한들 한번은 시리아와 카파도키아를 성공적으로 공격하여 6만대군을 패배시킨 사례가 있으며, 그 외에도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 여러지역을 공격하고 약탈하여 명성을 드높인 바 있다. 더불어 어린시절에 아버지 아르다시르 1세의 전투에 여러 차례 참여하여 성과를 올렸으며, 로마와의 휴전 기간에는 쿠샨 제국과 중앙아시아를 공략하여 영향권을 크게 넓히기도 하였다.
이후 온갖 능욕[4] 을 다 당한 발레리아누스는 260년 말 무렵에 옥사한다. 샤푸르 1세는 발레리아누스의 시신을 돌려보내거나 안장하지 않고 가죽을 벗겨 주황색 염료로 염색된 상태에서 속에는 지푸라기로 채워서 박제되어 신전에 전시했다. 이는 승리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함과 동시에 로마 사신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용도로 이용되었다. 단, 이것은 과장 또는 날조로 실제로는 홧병으로 사망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상 황제가 그 정도로 가혹하게 당했다면 로마 측에서도 나중에 국가를 재건한 뒤 정식으로 문제 삼든지, 보복할 때 명분으로라도 썼을 텐데 그런 사례가 전혀 없다.[5]
어쨌든 샤푸르 1세는 바위 절벽에 이러한 업적을 기념하는 조각을 새겨넣었다. 이 부조에는 고르디아누스 3세 암살 후 휴전조약을 체결한 필리푸스 아라부스도 비판하고 있다. 참고로 역대 페르시아 황제들이 즐겨 하던 행동으로 큰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러한 부조를 많이 만들었다.
3. 내정
이후 샤푸르 1세는 군데샤푸르[6] 라는 대도시를 수사#s-7 부근에 건설하고 사로잡은 포로를 사역하여, 카른 강을 막아서 유명한 농경용 수리 공사를 완성하였다. 이는 페르시아 관개농업의 기초가 되었다. 외정과 내치면에서 훌륭한 면모를 보여준 사산 왕조의 몇 안 되는 명군이었다.
종교적인 성향으로는 한때 마니교를 비호하기는 했지만 얼마안가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한다.
[1] 당시 경호병력을 최소화하자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이러한 조건을 충실히 이행한 게 발레리아누스에게는 크나큰 실책이였다.[2] 샤푸르가 직접 전쟁에서 승리해서 발레리아누스를 포획했다기 보다는 책략을 써서 잡았다는 의견이 유력하다.[3] 이란 쉬라즈 근처의 나크쉐 루스탐 유적에 있는 다리우스 1세의 무덤 바로 옆에 새겨져 있다.[4] 황제(샤푸르)가 말을 탈 때의 디딤돌로 쓰이기도 했다.[5] 적국 군주로도 지나치게 모욕을 주면 신격화된 고대군주의 특성상 신이 아닌 인간으로 보일 여지를 가지게 되며 이는 귀족들이 도전할 여지를 준다.[6] Gundeshapur. '''군대'''샤푸르가 아니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는 영어식 발음인 준디샤푸르라고 부른다. 뜻은 "샤푸르의 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