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관순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관순은 1909년 4월 8일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연평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28년 제주공립농업학교(濟州公立農業學校)를 졸업한 뒤 영명의숙 교사로 재직하면서 계몽극을 만들어 공연하고 야학에서 문명 퇴치 운동을 전개했다. 1931년 3월, 그는 조선공산당원 신재홍, 오문규(吳文奎), 문도배(文道培), 김시곤(金時坤), 김성오(金聲五) 등과 함께 사회주의 단체인 혁우동맹(革友同盟)을 결성했다.
1931년 6월, 강관순은 신재홍의 권유로 '제주도 야체이카'의 당외(黨外) 기관원으로 가입했다. 또한 김성오와 함께 고자화(高子華)의 집에서 고봉준(高奉俊)[1] , 고원한(高元瀚)과 의논하여 적(赤)이라는 당외 기관을 만들었다. 당시 강관순은 연락부원, 김성오는 청년부원, 고원한은 여성부원, 고자화는 농민부원을 맡았다.
1932년 1월, 제주도 야체이카는 구자면 등지의 해녀들을 상대로 항일 시위를 벌이게 했다. 이리하여 구좌읍에서 일어난 해녀들의 시위가 삽시간에 제주 각 지역으로 확산되자, 일본 경찰은 수사에 나서 제주도 야체이카를 적발했다. 결국 강관순은 김성오, 신재홍 등과 함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1933년 2월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항소한 뒤 1933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면서 <해녀의 노래>를 작사한 그는 출옥 후 가족을 데리고 제주도를 떠나 함경북도 청진으로 이사갔지만, 옥중에서 받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투병 생활을 이어가다가 1942년 8월 6일 3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강관순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