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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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강원신(康元信)
생몰
1887년 ~ 1977년
출생지
평안남도 평양직할시 영유골
사망지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매장지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 공원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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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원신은 1887년 평양남도 평양 영유골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04년 훗날 대한인국민회 총회장을 역임하게 될 강영승과 결혼한 뒤 1905년 5월 29일 남편을 비롯한 가족과 함께 하와이로 이민갔다. 이후 1913년 경 미국 본토에 이주해 시카고에서 법학박사 과정을 밟는 남편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고자 시누이 강혜원(康蕙園)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역으로 이주하여 포도농장에서 시간당 15센트의 노임을 받으며 일했다.
1919년 3월 2일, 강원신은 다뉴바 지역에서 강혜원, 김경애, 한성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어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을 고취시켰고,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독립운동을 후원했다. 또한 그해 5월 18일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 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키는 한편, 8월 2일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서 미주내 여성단체인 다뉴바 신한부인회, 월로우스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설했다.
이후 1924년 4월 12일부터 1926년 3월까지 제3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을 역임했으며, 1925년부터 1927년 2월까지 샌프란시스코지부 단장, 1928년 3월에는 로스앤젤레스지부 단장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단장으로서 한국에서 재해나 기근이 발생할 때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했다. 그녀가 송금한 금액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1천 달러, 임시정부 공복위로금으로 5백 달러, 상해 독립신문사에 3백 달러, 구미위원부에 군축 선전비로 5백 달러, 신한민보사 식자기 값으로 5백 달러, 간도 동포 기근 구제금으로 67달러, 쑹메이링 여사의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메시코 한인 동포의 하나바 이주비용으로 동정금 40달러, 쿠바 맛단사스 지역 한인 구제금으로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구제금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에 55달러, 황은순고아원에 58달러, 2차 대전시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 출정군인무도회(出征軍人舞蹈會)에 194달러 등 총 46,298달러에 달했다.
한편 그녀는 재미 한인 동포 자녀들의 국어 및 민족 교육에 힘을 쏟았으며, 일본 상품 불매 및 일화 배척 운동을 전개했으며,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중국군 지원 모금 운동에 참여했다. 이렇듯 조국의 독립운동에 힘을 쏟은 그녀는 8.15 해방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77년경에 사망했고 할리우드 포레스트 론 공원에 매장되었다. 이후 1987년에 남편 강영승 역시 숨을 거두었고 그녀와 함께 묻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원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