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혜원(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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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혜원은 1885년 11월 21일 평양성내에서 부친 강익보(康翊普)와 모친 황마리아 사이의 2남 1녀 중 맏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남동생 강영승(康永昇) 등 가족과 함께 1905년 5월 도릭선편으로 하와이로 이주했다. 이후 가파올라 사탕농장과 에와 사탕농장에서 노동을 하였고, 1912년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으며, 1913년 12월 9일 대위(李大爲) 목사의 주례로 후일 흥사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을 수행한 김성권(金聲權)과 결혼했다. 그녀는 이후로 남편의 성을 따서 김혜원으로 불렸다.
결혼 후 캘리포니아주 다뉴바 지방으로 이주한 그녀는 동생 강영승의 아내이자 자신의 제수인 강원신과 함께 포도농장에서 일했다. 그러면서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져 1919년 3월 2일 다뉴바 지방에서 강원신, 한성선, 김경애 등과 함께 신한부인회(新韓婦人會)를 결성하여 다뉴바 지방 한인 부녀자들의 민족정신 고취와 미주 항일민족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의 민족해방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또한 동년 5월 18일 미주 각 지역에 산재한 한인부인회의 운동역량을 집중 강화하기 위해 새크라멘토의 한인부인회(韓人婦人會)와 합동발기문을 선언함으로써 각 지역 부인회의 통합을 촉진시켰다.
1919년 8월 2일, 강혜원은 다뉴바의 한인장로교회에서 미주내 각 여성단체인 다뉴바 신한부인회, 로스앤젤레스 부인회 친애회, 새크라멘토 한인부인회, 샌프란시스코 한인부인회, 윌로우스지방 부인회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부인회 합동발기대회를 개최하고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운동기관인 대한여자애국단(大韓女子愛國團)을 창설했다. 그녀는 대한여자애국단 초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었고, 동지들과 함께 매월 3달러의 단비(團費)를 수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송금하여 외교·선전·군사활동을 지원하였으며, 국내에 각종 구호금을 수합하여 송금하기도 했다.
그녀가 대한여자애국단 총단장으로서 1924년까지 직무를 수행하며 송금한 금액 내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1천 달러, 임시정부 공복위로금으로 5백 달러, 상해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에 3백 달러,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군축선전비로 5백 달러, 신한민보사(新韓民報社) 식자기 값으로 5백 달러, 간도(間島) 동포 기근구제금으로 67달러, 중국 송미령(宋美齡) 여사의 군사위로금으로 370달러, 멕시코 한인 동포의 하바나 이주비용으로 동정금 40달러, 쿠바 맛단사스 지역 한인구제금으로 55달러, 수재민 구제금 368달러, 본국 수재민 구제금 172달러, 본국 소년갱생운동에 55달러, 황은순고아원에 58달러, 2차 대전시 미군적십자사에 570달러, 로스앤젤레스 출정군인무도회(出征軍人舞蹈會)에 194달러 등 총 46,298달러에 달했다.
또한 그녀는 1922년에 흥사단에 입단하여 제155번 단원이 되었으며, 1930년 이후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여 대한여자애국단의 사업과 흥사단, 대한인국민회의 민족운동을 후원했다. 그리고 1940년에 대한여자애국단 제8대 총단장으로 선임되어 임시정부와 국민회의 재정을 원조했다. 또한 미주 내 한인 동포 자녀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한편 중일전쟁 발발 후 쑹메이링에게 중국군 솜옷 지원 의연금을 보내고 광복군 후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송금했으며 미국 전시공채를 매입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으로 흡수 통합하자, 그녀는 남편 김성권과 함께 민족혁명당 미주총지부를 결성하여 진보적 노선 편에서 활동했다. 1944년 대한여자애국단 참석 대표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가담하여 임시정부 지원 모금과 재정지원 확보 활동을 수행했다. 8.15 광복 후 로스앤젤레스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1982년 5월 31일 96세를 일기로 사망했고, 그녀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 로즈데일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16년 11월 16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강혜원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