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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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강주룡(姜周龍)
생몰
1901년 ~ 1932년 8월 13일
출생지
평안북도 강계군
사망지
평양직할시 서성리 빈민골 자택
매장지
평양 서성대 묘지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2.1. 초년기
2.2. 고공농성
2.3. 최후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년기


강주룡은 1901년경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4살 때 가난에 쫓긴 가족과 함께 서간도 길림성 통화현으로 이주했다. 그녀는 7년 동안 그곳에서 살면서 농사를 지었고, 20살 때 통화현에 살던 최전빈(崔全斌)과 결혼했다. 그녀는 1931년 7월 5일 <동광>지와의 인터뷰에서 남편과의 결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의 고향은 平北 江界(평북 강계)입니다. 열 네 살까지는 집안이 걱정 없이 지냇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야 내 나히 열 네 살 쩍에 西間島(서간도)로 갓습니다. 거긔서 농사하면서 7년 동안 살앗는데 스므살 나든 해에 通化縣(통화현)에 잇는 崔全斌(최전빈)이라는 이에게 시집갓습니다. 남편은 그때 겨우 15세의 귀여운 도련님이엇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앗다기 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엿습니다. 첫눈에 아조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엇습니다. 부부의 誼(의)도 퍽 좋앗습니다. 洞里(동리)가 다 부러워 하엿답니다.

'乙密臺上의 滯空女(을밀대상의 체공녀), 女流鬪士 姜周龍 會見記(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23호 - 無號亭人

1922년, 최전빈은 대한통의부에 들어가 백광운(白狂雲)이 이끄는 대한통의부 의용군 1중대에 배속되었다. 강주룡은 그를 따라가서 6개월간 함께 지냈지만, 최전빈이 "거치정 거려서 귀찬으니 집에 가 잇으라"고 채근하자 남편의 속 뜻이 정말 귀찮은 게 아니라 고생시키는 게 가엾고 미안해 그러는 걸 눈치채고 본가로 돌아갔다. 그러나 6개월 후, 남편이 병으로 위급하다는 급보를 들은 그녀는 그 길로 남편의 집으로 달려가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이는 등 필사적으로 간호했지만, 1923년 10월 10일을 일기로 결국 남편은 끝내 회생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 후 강주룡은 시집에 가서 남편 최전빈이 병사했다는 소식을 전했는데, 시집에서는 그녀가 남편과 끝까지 함께 있지 않고 떨어져 살았기에 최전빈이 죽었다며 그녀를 "남편 죽인 년"이라며 중국 경찰에 고발했다. 그녀는 일주일간 유치장에 갇혀 지내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시집에서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고, 친정으로 돌아오니 돌봐야 할 부모와 어린 동생을 부양해야 했다. 결국 그녀는 1925년에 조선으로 귀국했다.

2.2. 고공농성


조선으로 귀국한 강주룡은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면에 잠시 정착했다가 이듬해 평양으로 가서 평양 선교리에 있던 평원고무공장에 취직했다. 그러던 1929년 경제 대공황이 발발한 이래 고무 공업이 큰 타격을 입자, 고무공업계는 1930년 5월 2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 고무공업자대회를 통해 임금 인하를 결의했다.이에 8월 7일 5개 고무공장 노동자 1080명의 파업을 시작으로 9일에는 평양 시내 15개 고무공장에 근무하는 1800명이 동맹파업에 착수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은 이들을 강제로 해산시켰고, 임금은 10% 삭감되었다.
1931년 5월 16일, 평원고무공장 조선인 사장은 임금 17% 삭감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이에 평원고무공장 여성 노동자 49명은 5월 17일에 파업을 선언했다. 작년에 노동조합에 가담했던 강주룡도 여기에 동참하여 맨 앞에 서서 파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공장 측이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자, 그들은 5월 28일에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 투쟁에 나섰다. 이에 사장은 다음날 새벽 일제 경찰을 불러 49명의 노동자 전원을 정문 밖으로 내치고 해고를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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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룡은 5월 29일 새벽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정처없이 걸어가다가 무명천 밧줄을 타고 을밀대(乙密臺) 지붕 위에 가까스로 오른 뒤 날이 밝아오자 산책 나온 평양시민들을 향해 연설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賃金減下(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平壤(평양)의 2,300명 고무직공의 賃金減下(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 나는 平元(평원) 고무 사장이 이 앞에 와서 賃金減下(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끗까지 賃金減下(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 노동대중을 대표해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여 나를 여기서 (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웅 우에 사닥다리를 대 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저 죽을 뿐입니다.

'乙密臺上의 滯空女(을밀대상의 체공녀), 女流鬪士 姜周龍 會見記(여류투사 강주룡 회견기)', <동광> 23호 - 無號亭人

그렇게 그녀는 7시간 동안 고용주의 비인도성을 비판하고 노동생활의 참상을 고발하며 노동자들의 권익을 수호해야 한다고 호소하다가 출동한 경찰에 의해 강제로 끌어내려져 평양 경찰서로 끌려갔다. 그녀는 경찰서에서도 5월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풀려날 때까지 단식 투쟁을 벌였고, 풀려난 후에는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했다. 신문들은 이 사건을 앞다퉈 기사로 실으면서 그녀에게 '여류투사 강 여사', '체공녀'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후 강주룡은 동료들과 함께 파업을 지속했고, 6월 7일 공장 측은 마침내 임금 인하를 철회하고 파업에 가담한 노동자 중 절반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강주룡은 공장에 복직하지 못했고, 6월 9일에 5월 4일 정달현의 소개로 '적색노동조합'에 가입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2.3. 최후


강주룡은 체포된 뒤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2년 6월 4일에야 병보석으로 출소했다. 그녀는 출소 직후 평양 서성리 빈민굴[1]에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에 시달리며 몸을 돌봤지만 악화되는 병세를 버티지 못하고 1932년 8월 13일에 병사했다. 향년 31세. 그녀의 유해는 8월 15일 남녀 노동자 100여 명에 의해 장례를 치른 뒤 평양 서성대 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강주룡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정작 그녀가 살았던 북한에서는, 혹부리우스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기념도 하지 않는다. 그녀가 오래 살았으면 북한 정권에서 한 자리 했었을 가능성이 높기에[2] 아이러니한 일이다.

[1] 김동인의 감자에 나오는 그 빈민굴 맞다. 당시 주거환경으로 보아 움막집으로 보인다.[2] 그렇다고 쉽게 고위직이 되기는 힘든 것이 김일성의 빨치산 계열이라면 고위직의 가능성은 있었을테지만, 일제강점기에 노동운동을 했다고 해서 북측에서 중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제시대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북한정권 수립 후 대부분 사태를 읽고 모두 혹부리 찬양으로 돌아섰고 일부 반골만 잡혀 죽거나 남으로 도주하거나 했기 때문에, 그 때까지 살아 있었다면 적지 않은 경력을 더 쌓았을 것이므로 나중 일은 몰라도 일단은 중용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