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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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乙密臺
1. 개요
2. 상세
3. 강주룡 을밀대 농성 사건
4. 여담


1. 개요


고구려 시기의 성인 평양성의 누대 중 하나. 현재 북한 평양직할시 중구역 금수산 을밀봉 일대에 위치해 있으며, 북한의 국보 제 19호이다.

2. 상세


을밀대 이름의 유래에는 다양한 설화가 있는데, 옛날에 을밀선녀(乙密仙女)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하늘에서 내려와 놀았다는 설화가 있고, 또 다른 설화로 6세기 무렵 평양성을 세울 때 을지문덕 장군의 아들인 을밀 장군이 이 곳을 지키며 싸웠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이외에도 순 우리말인 '웃미르터' 또는 '웃밀이언덕'을 이두로 음차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1]
그러나 고구려 안장왕과 한주 설화에 의하면 을밀은 고구려 안장왕 시기 인물이며 조의선인 출신이다. 그리고 목천 돈씨 가보에 의하면 고구려 을씨 가문은 을지문덕 시기를 전후로 성씨를 을씨에서 을지씨로 고쳤다고 한다.
구조는 웃밀이언덕 벼랑에 11m 가량의 축대를 둘러 쌓았고 그 위에 정면 3칸(7.46m), 측면 2칸(5.29m)에 팔작지붕을 올린 정자를 설치했으며, 정자 기둥은 1m 정도의 4각 돌기둥을 밑부분에 받치고 그 위에 흘림기둥 이어 세우는 식으로 하여 비바람을 피하도록 했다. 현재의 정자는 조선 숙종 40년(1714년)에 축대를 보수하면서 건축하였고 1960년에 전반적인 보수가 이루어졌다. 또한, 정자 특유의 예서로 쓰인 현판은 조선 말기~일제강점기 서북지역의 서예가였던 호정(湖亭) 노원상(盧元相, 1871~1926)이 쓴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군사적 목적으로 세워진 망루이지만 을밀선녀가 경치에 반했다는 설화로 알 수 있듯이 을밀대 주변의 빼어난 경관을 관람하는 누각의 역할도 맡고 있으며, 특히 을밀대 밑을 흐르는 대동강과 하중도인 능라도[2]의 풍경과 사방으로 트인 평양평야가 매우 수려하다. 그 때문인지 '평양8경' 중 하나인 '밀대상춘(密臺賞春)'[3]으로 꼽히기도 하며 매년 봄마다 아름다운 봄 풍경을 관람하러 오는 관광객으로 붐빈다고.

3. 강주룡 을밀대 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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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대 지붕에서 농성 중인 강주룡 열사 사진.)
한편, 을밀대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도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바로 일제강점기였던 1931년 5월 29일에 강주룡 열사(1901~1932)가 을밀대 지붕에 올라 단식농성을 한 사건이 유명하다. 당시 평양 고무공장의 노동자였던 강주룡 열사는 1930년에 고무공장 사측의 일방적인 임금[4] 10% 삭감에 반발한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해서 사측, 일제 경찰이 폭력적인 방식[5]으로 탄압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을밀대 지붕에 올라 단식농성을 벌였으며, 이는 『동아일보』에 크게 보도되었다. 당시 농성 사실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당시 강주룡 열사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끝까지 임금 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명예롭게 죽을 것이며,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으려 한다"라 밝히는가 하면, 농성 8시간 만에 경찰에 의하여 강제구인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옥중에서도 단식투쟁을 벌이는 등 목숨을 내걸은 의연한 모습을 보였고, 결국 투쟁 끝에 강주룡 열사는 비록 해고노동자가 되었지만 고무공장의 임금삭감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후 강주룡 열사는 잦은 단식투쟁으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져 몇 년 못 가 병으로 사망하고 만다.

4. 여담


21세기 서울 시민들에게는 위 항목의 을밀대 정자 자체보다는 그 이름을 딴 서울의 평양냉면 전문점이 더 유명할지도 모른다. 마포구 염리동에 본점이 있으며 6호선 대흥역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굵고 부드러워 목에 걸리지 않는 메밀면과 연한 육향, 살얼음 낀 육수가 특징인 곳이다.[6] 한때 국회의원들이나 방송국 간부들의 단골 코스 중 하나였다. 이 집 영감님이 돌아가신 후 큰아들은 본점을 물려 받고, 작은아들은 강남구 역삼동으로 분점을 냈다. 이어 경기도 고양시 일산(킨텍스), 성남시 분당 등에도 분점이 생겼다. 아예 육수 공장을 따로 차려서 육수를 확보하고 있는데, 이 공장 때문에 형제끼리 소송까지 간 적도 있었다.[7]

[1]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4 - 평양의 날은 개었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2011에서 인용.[2] 문화어로는 릉라도.[3] 을밀대의 봄 풍경.[4] 당시 약 130~140원.[5] 사측의 대체인력 투입과 용역깡패에 의한 폭력, 경찰의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공산주의자 및 노조 지도부 구속 등.[6] 주문시 거냉으로 달라고하면 살얼음 없는 육수가 나온다.[7] 간단히 요약하면, 육수 대금을 정산하다가 생긴 갈등과 공장 운영을 둘러싸고 형제가 다툰 것. 자세한 사정은이 기사를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