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보

 

[image]
성명
강창보(姜昌輔)
생몰
1902년 12월 29일 ~ 1945년 1월 7일
출생지
제주도 제주시 용담동
사망지
대전형무소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강창보는 1910년 9월 16일 제주시 용담동에서 강제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독립운동가 강창거의 형으로,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益)에게 한문을 배운 뒤 서울로 상경하여 청년학관 및 사립 중동학교에서 중등과정을 수학했다. 그는 청년학관을 다닐 무렵 사회과학을 연구했고, 신진 엘리트들을 모아 1921년경 '반역자구락부'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후 1923년 소년선봉대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을 맡았으며, 뒤이어 제주소년연맹의 집행위원을 역임했고 청년동맹에도 가입해 간부로 활동했다.
1924년 제주도에 귀향한 그는 1925년 3월 11일 제주시에 거주하는 송종현(宋鍾炫), 김택수(金澤銖)와 함께 신인회(新人會)를 결성하고 송종현과 함께 교양부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 신인회는 제주도 최초로 공산주의를 표방한 사상단체로, 강령으로 "무산자를 본위로 신사회의 건설"을 내세웠다. 1925년 4월에는 전국적 사회주의단체인 조선사회운동자동맹(朝鮮社會運動者同盟)에 참가하여 일제 식민통치로 인한 민족 모순, 계급모순 해결을 위한 사회주의운동에 전념했다. 그러나 일제는 신인회의 강령이 불온하다고 판단했고, 그는 1925년 4월 17일에 체포되었다. 이후 동년 9월 동지 김택수, 송종현과 함께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 후인 1926년 신인회를 해소시킨 뒤 청년동맹을 결성했으며, 1927년 신간회 제주지회를 조직하는 데 가담했다. 그해 8월에는 송종현, 김택수, 장종식(張鍾植)[1], 오대진(吳大進), 김정로(金正魯), 윤석원(尹錫沅), 김병원(金炳媛) 등과 함께 조선 공산당 제주지부를 결성했고, 1927년 8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8년 9월에는 제주도청년연합회 서무부 상무위원 및 집행위원을 맡다가 또다시 체포되었고, 1930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1931년 1월 출옥한 그는 제주읍에 소재한 부태환(夫泰煥)의 집에서 제주지역 주요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제주도사회주의운동자간담회’를 가져 조직원을 모집했고, 그해 5월에는 청년동맹 출신 신재홍, 이익우(李益雨)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제주야체이카를 결성하고 책임자를 맡았다. 제주야체이카는 사회 각 부면의 청년, 여성, 노동자그룹 등 각 사회계층의 운동을 지도하는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1931년 9월 제주 지역에서 세금 불납운동, 묘목 강제 배포 반대 운동 등 농민운동을 주도했고, 그해 11월엔 3차례에 걸쳐 해녀 항일 투쟁을 지도했다.
그러나 1932년 5월 2일 해녀 항일 운동의 배후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5월 6일 오전 2시에 유치장을 탈출한 뒤 서귀포에 소재한 이도백(李道伯)의 집에 은신했다. 그는 한동안 거지, 엿장수, 미치광이 등으로 변장해 경찰의 추적을 회피하다가 동아통항(東亞通航)조합 제주도출장소장으로 일하고 있던 강병희의 도움으로 짐짝 속에 감춰진 채 배편으로 일본에 망명했다. 이때 강병희는 강창보가 숨은 짐짝을 끈으로 묶고 "복목환 김일성(金一成)"이라고 적어 한 개의 해산물 짐짝같이 포장했고, 순경은 짐짝을 검사하면서도 강창보를 찾지 못하고 한동안 강창보가 숨은 짐짝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고 한다.[2]
강창보는 극적으로 탈출한 뒤 도쿄에서 송성철(宋性徹), 김여환(金麗煥) 등과 비밀리에 접촉해 일본 공산당과 연계하여 전일본 노동조합 전국협의회의 노동 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1939년에 조선문제시국연구회(朝鮮問題時局硏究會)를 조직하고 <조선신문> 발간을 지도했다. 또한 조선공산당 재건을 계획하고 근거지를 흥남의 조선 질소비료공장, 고주파(高周波) 공장, 국경 철도, 세관 등 주요 공장으로 잡고 그곳에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포섭 작업을 실시했다.
그러나 1943년 4월 국내로 잠입하려던 강창보는 도쿄에서 경찰에 검거되었고 국내로 송환된 뒤 1944년 3월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1월 7일에 옥사했다. 그가 어렸을 때 한문을 가르쳐줬던 스승 김석익은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제강창보문(祭姜昌輔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몸은 옥중의 혼이 되고 부모 처자는 따로 흩어졌네. 이게 하늘이 한 일인가! 사람이 한 짓인가! 뉘가 그로 하여금 이렇게 되게 하였소. 그는 바로 "내 스스로 그 길은 취했습니다. 어찌 슬퍼하십니까."라고, 아! 하늘이 꺼지고 땅이 뒤덮이네! 이 분통한 마음 그 뉘 알아주리!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강창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장종식과 동명이인이다.[2] 강병희는 후에 이 일이 발각되어 체포된 뒤 1932년 10월 2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8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8.15 광복 후 서울 조련(朝聯) 연락위원을 맡았고, 대한민국 건국 후 당국의 탄압으로 좌익 활동이 어려워지자 북한으로 망명해 1958년에 그곳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