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릉

 

건릉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군주의 능호이다.
1. 建陵
1.1. 전량의 초대 황제 장궤가 안장된 황릉
1.2. 당나라 7대 황제 숙종이 안장된 황릉
2. 健陵
2.1. 역사
2.2. 형식
2.3. 정조대왕 초장지 발굴
2.4. 관련 문서
3. 乾陵
3.1. 고려 추존 국왕 안종이 안장된 왕릉
3.2. 당나라 3대 황제 고종측천무후가 안장된 황릉


1. 建陵



1.1. 전량의 초대 황제 장궤가 안장된 황릉



1.2. 당나라 7대 황제 숙종이 안장된 황릉



2. 健陵



[image]
조선 제22대 왕 정조와 그 부인 효의선황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참고로 무덤쪽에들어갈수 없다.

2.1. 역사


[image]
건릉의 1920년대의 모습. (출처 : 조선고적도보)
정조가 1800년(순조 즉위년) 6월 27일에 승하하자, 같은 년도 7월 6일에 묘호 등을 정하면서 능호는 건릉(健陵)으로 정하였다. 이후 그의 유언대로 같은 년도 11월 6일 현륭원(지금의 융릉)의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하였다.[1] 조선왕조실록 기사, "11월 갑신일 자시(子時)를 기해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산등성이에다 해좌(亥坐)로 장례를 모셨는데 거기가 바로 건릉(健陵)이다."
정조가 승하한 21년 후인 1821년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년도 3월 17일에 시호를 올리면서 능호는 정릉(靜陵)이라고 하였다. 이후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즉, 최초의 건릉의 장소인 융릉 동쪽)에 안장하려고 하였으나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건릉이 풍수지리에 좋지 않다고 하자 건릉을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바꿔서 1821년 9월 13일에 효의왕후를 합장하여 매장하게 되었고, 능호를 건릉으로 합하여 현재 상태에 이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기사

2.2. 형식


[image]
전반적으로 조선왕릉의 표준을 따르고 있으며,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융릉과 비교해보았을 때, 융릉이 봉분에 화려한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데 반해서, 건릉은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르고 있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다만, 19세기 조선 후기의 왕릉 형식 답게 석물들이 화려함을 갖추고 있고, 문인석도 금관조복(문무백관들이 국가행사 때 입는 대례복)을 입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또한, 융릉과 같이 정자각 앞쪽을 굉장히 넓게 조성하였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사도세자정조를 황제로 추숭하고 융릉과 건릉을 황제의 릉으로 조성하면서 그 격식에 맞게 꾸민 거라고 한다.
비각에는 1개의 표석이 세워져 있는데, "대한 정조선황제 건릉, 효의선황후 부좌(大韓 正祖宣皇帝 健陵 孝懿宣皇后

2.3. 정조대왕 초장지 발굴


2011년 11월 29일에 정조대왕의 초장지로 추정되는 곳이 발굴 되었다.출처
발굴지에서는 다수의 유물이 출토 되었는데, 백자명기, 백자호류, 칠기함과 궁중제례악에서만 사용하던 편경과 편종이 출토되었다. 이 중 뚜껑이 있는 단지는 18세기 백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형태다.

2.4. 관련 문서



3. 乾陵



3.1. 고려 추존 국왕 안종이 안장된 왕릉



3.2. 당나라 3대 황제 고종측천무후가 안장된 황릉


나란히 안장된 쌍릉이다

[1] 현재 건릉은 융릉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최초의 자리는 융릉의 서쪽이 아니라 동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