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순

 






'''조선 순조의 장인 | 순원왕후의 부친'''
'''영안부원군 김조순
永安府院君 金祖淳'''

젊은 시절의 김조순 초상.[1]
'''군호'''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시호'''
충문(忠文)[2]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본관'''
안동(安東)
'''이름'''
낙순(洛淳)[3] → 조순(祖淳)
''''''
사원(士源)[4]
''''''
풍고(楓皐)
'''생부'''
김이중
'''생모'''
평산 신씨(平山 申氏)
'''부인'''
청양부부인 청송 심씨(靑松 沈氏)
'''자녀'''
3남 4녀
'''묘소'''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
'''생몰
기간
'''
'''음력'''
1765년 8월 23일 ~ 1832년 4월 3일
'''양력'''
1765년 10월 7일 ~ 1832년 5월 2일
1. 개요
2. 생애
2.1. 알고 보면 음모가?
2.2. 어쨌거나 세도정치를 열다
3. 졸기에 비추어 본 평가
4. 기타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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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후기의 문신. 세도정치의 문을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인격과 능력 면에서 뛰어난 인물인데 후손들의 잘못으로 욕을 먹게 되었다는 평가와 그런 것은 겉보기일뿐 김조순 본인 스스로가 막후 정치를 통해 본격적으로 세도 정치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2. 생애


1765년(영조 41년) 8월 23일에 태어나 1785년(정조 9년)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규장각대교를 지냈고 이조참의, 이조판서, 선혜청제조 등 순탄한 관직살이를 했다.
그의 고조부는 영의정까지 오른 적이 있는 김창집(노론 4대신 중 1명)이고 가문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로 최명길과 대립했던 김상헌[5]송시열의 애제자였던 김수항[6]이 있다. 한마디로 엄청난 명문가 출신으로 오늘날에 비유하자면 집권 여당 집안의 자손으로 직계 조상 중에 이름높은 국무총리 여럿, 김구 수준의 독립운동가[7][8], 대학자가 있다는 것.[9]사돈인 정조와는 외가 쪽으로 6촌 형제간이다.
거기에다 본인의 개인적인 능력도 뛰어나 정조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으며 남인이나 벽파와 달리 자기 이념이 없는 비당파적 당파인 노론 시파였기 때문에 극단에 치우치지 않고 서인남인 양쪽에서 신망이 높았다고 한다. 문장이 뛰어나[10] 많은 저술을 남겼고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죽화도 잘 그렸다. 말년에 정조가 건강이 나빠지자 왕세자 책봉[11]을 하면서 동시에 간택을 추진했는데 이때를 전후해서 정조가 직접 온갖 미사여구를 붙여가면서[12]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감으로 추천해 간택되게 하고[13] 이를 마음대로 바꾸지 말 것을 우회적으로 강요할 정도로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결국 김조순의 딸이 간택되었고 그래서 그의 딸이 순조비 순원왕후가 되었으며 그는 국구가 되어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졌다. 김조순의 아내 청송 심씨 심건지(沈健之)의 딸[14]도 그와 동시에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에 봉해졌다. 아무튼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어 정치적 역량이 떨어져 신하들에게 휘둘릴지도 모를 순조의 후원자로 김조순을 염두에 둔 듯한데 정작 정조 본인도 홍국영의 세도 정치로 골머리를 앓았던 걸 생각하면 아이러니한 일이다.
영조의 계비로, 순조가 즉위할 당시 왕실의 큰어른이었던 정순왕후 김씨수렴청정을 할 때에는 낮은 처신으로 좋은 평가를 벽파로부터 받아 큰 견제를 받지 않았다(김조순은 시파다.). 한때 장용영의 대장에 오르기도 했지만, 얼마 안 돼서 장용영 자체가 폐쇄되었다. [15]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중단하고 사망한 후 벽파가 몰락하자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 '''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전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높은 관직을 선점한 안동 김씨의 수장인데 정작 본인은 판서급 자리 이상의 벼슬에 오른 적이 없었던 것.[16]
게다가 이 사람이 순조의 친정 이후 정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처음 한 일은 바로 신유박해를 저지른 노론 벽파에 대한 치죄였다. 심환지, 김종수 등을 정조의 유지를 거스른 역적으로 정하여 관직과 작위를 박탈하는 등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을 대거 정리했는데, 김조순이 전면에 나섰다기보다는 측근들이 대신 수행하였다.
사실 일반적인 세도정치에 대한 서술을 생각하면 세도정치의 전반 30년을 담당한 김조순이 이렇게 차라리 명신에 가까운 평을 받는 것이 아이러니해 보이며, 이 때문에 "김조순 이후로 진짜 막장 세도정치가 열렸다"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더욱이 안동 김씨는 척화파의 상징 김상헌, 송시열의 수제자이자 전 영상 김수항, 김수항의 아들이자 역시 영상을 지낸 김창집, 그리고 학문으로 명성이 높았던 그의 두 동생 김창협, 김창흡 등 쟁쟁한 후손들로 인해 조선 후반기 최고 명문가였다. 김조순 개인이 어떤 인물이었든간에 안동 김씨 일문이 세도가가 되는 것은 결국 피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2.1. 알고 보면 음모가?


그러나 김조순이 섭정이 된 이후 안동 김씨의 세력이 크게 확대됐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것이 소위 말하는 세도정치로서 조선 후반기의 막장 상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따라서 세도 정치의 효시인 김조순은, 그 개인이야 착하건 나쁘건 어쨌건, 후대의 막장스러운 정치 상황에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비록 김조순이 정순왕후 김씨의 세력, 노론 벽파를 정리했다지만 사실 공격한 것은 소론 시파인 이시수와 이병모 그의 일족인 노론 시파인 김이영 김희순등이 벽파의 주축인 경주김씨인 김귀주 김관주등을 팔자흉언을 이용해 역적의 낙인 찍혀 숙청한 것이다. 한마디로 반대파 세력을 자신의 손으로 더럽히지 않고 차도살인을 한 것 , 정작 이들의 빈자리를 채운 인물들은 안동 김씨에 노론 시파들이었다. 남인? 정약용의 복귀? 그딴 거 없었다.[17][18]
실제로 김조순이 제수받거나 역임했던 관직들을 살펴보면 부제학(副提學)·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훈련대장, 호위대장, 장용영 사령관 같은 하나같이 핵심 요직들로, 문무관의 인사권, 국가 재정, 군 최고 통수권자, 최고위 언관 같은 실세 중에 실세 자리들이다.[19] 또한 김조순이 역임했던 직책 중 흔히 주목하지 않는 것이 비변사 주교사 당상이다. 주교사 당상 직은 한강의 배다리(주교) 설치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배다리 설치를 위해 당대의 한성 근교의 모든 배에 대해 징발 권한을 지니는 등 배의 현황을 파악하고 배의 이동과 한강 수운 등을 감독하는 자리였다. 즉, 주교사의 명목상 업무는 배다리의 건설이었으나 실상은 배를 통해 이루어졌던 당시 상업, 특히 한성 근교 대상인을 관리, 감독할 수 있는 자리였고, 이는 상권의 장악을 의미하였던 것이다.[20] 이렇게 김조순은 너무 튀어보이는 정승직을 맡지 않고도 알짜 요직을 챙겨 정치 경제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무엇보다도 조선 후기에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핵심 정치 기구는 의정부가 아니라 비변사였다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특히 김조순이 죽을 때까지 유지하던 직위가 바로 비변사 제조라는 점은 의미가 크다. 제조는 명목상 도제조에 이은 비변사의 2인자 자리이긴 하지만, 어차피 비변사의 최고위직인 도제조는 전,현직 삼의정들이 '''겸직하는''' 자리였다. 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전직이니 사실상 별다른 실권이 없었고, 현직 영의정, 좌우의정 도제조는 현직에서 물러나면 전직이 되어 실권이 사라진다(..). 따라서 겸직인 도제조보다 명목상 2인자이긴 하지만 상시직인 제조가 실권은 더 강했던 경우도 있다. 실제로 김조순 이후의 세도 정권들은 비변사를 통해 국정을 장악하고, 통치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된다.
따라서 '김조순이 어떤 벼슬에 입문하여 어떤 활약했다더라'는 식의 표면적 기록들은 큰 의미가 없다. 김조순이 죽었을 때 그에 대한 실록의 평가(졸기)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密勿)"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祖淳旣處肺腑, 內贊密勿, 外任彌綸, 殫誠竭忠, 身佩安危者, 三十餘年..,

1832년 순조 32년(청 도광(道光) 12년) 4월 3일 기묘 1번째 기사)

즉, 명목상 높은 벼슬은 하지 않았더라도, 비변사의 핵심 요직을 장악하여 막후에서 정국을 운영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죽고 나서 생긴 묘는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되었다. 신도비는 처음 묘가 생겼을 때에는 없었고 나중에 철종이 지어줬다. 그리고 정조 사당에 배향되었다.

2.2. 어쨌거나 세도정치를 열다


김조순 본인은 굉장히 조심스럽게, 모나지 않게 살아가려 했던 것은 분명하다. 위에서 언급된 요직들도 대부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21] 말년에는 왕의 장인국구에게는 당연직이었던 영돈녕부사(정1품)와 제조직 외에 다른 관직은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22] 물론 위에서 설명했듯이 비변사 제조 자체가 정권 운영의 핵심 요직이었긴 했다.
그밖에 개인 품성 면에서도 별로 거만을 떨거나 부정축재 등으로 지탄을 받는 기록도 없다. [23] 왕이 높은 관직을 제수하거나 상을 내릴 때도 극구 사양해서 받지 않은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24] 뿐만 아니라 과거제의 문란으로 출세길이 막힌 젊은 인재를 등용하고, 현시창 상황의 민생을 왕에게 알리는 것에도 힘을 썼다고. 실록의 기록이나 당시의 역사서에서도 후한 평가를 받았으며, 당장 다른 전문인들의 언급을 참고해도 '그의 혈족과 측근이 권력을 독점하는 안동 김씨 세도 정치의 시발점이 된 인물' 정도의 언급만 나오고 간신이라는 묘사는 없다.
다만 홍경래의 난 당시 반남 박씨 박종경과 더불어 국정을 농단한다고 비판받은 사실이 있어, 이미 당대에도 권신이라는 점은 충분히 알려진 듯 하다.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선 그냥 이름 높은 세도가들은 닥치고 거론된 감도 있는 게 민란들이라... 당장에 박종경은 뭘 제대로 한 게 없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선 처음부터 김조순이 고도의 처세술을 꾸몄다고 보고 있다. 김조순 자신은 명신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실질적인 권력욕을 보이지 않는 척 하면서, 가문 전체의 세도 확대를 꾀했다는 것. 이후 김조순의 자식들이 주요 벼슬자리에 제수된 것으로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김조순이 풍양 조씨, 반남 박씨 등과도 연합하고 다투지 않으면서 최고 가문의 지위를 지켰다고 보고 있다. 그러니까 박시백 작가의 김조순에 대한 평가를 한 단어로 요약하면 '''위선자'''.
덧붙이자면, 세도 정치기의 각종 문제는 정조 시기에도 그 단초가 예고됐다(대표적으로 수령권의 강화와 그로 인한 환곡 폐해와 탐학의 발생). 세도 정치의 기반 또한 규장각, 주교사 등 정조가 설치한 각종 기관들에서 나왔다. 소수 가문들에 의한 과거의 독점 또한 18세기 후반(영조 말)부터 이미 널리 확산된 경향이었으며, 서울 양반과 지방 양반의 분화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울러 18세기 말부터 대외 교역이나 농경지의 확대 등도 정체 혹은 침체에 머물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조선의 쇠퇴를 단순히 세도정치, 나아가 김조순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그러한 쇠퇴 경향에 발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당시의 집권층이 잘했다는 건 더욱 아니지만.
요약하자면 단순히 '명신'과 '간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평가하기에는 참 난감한 인물. 개인의 입장으로는 뛰어난 능력, 인품을 갖춰 그가 살아있을 당시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게 정국을 운영했다. 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는 세도정치가 대폭발, 결국 안동 김씨라는 혈연적 측면과 비변사를 통한 소수 인물들의 정권 독식이라는 정국 운영 방식 측면의 두가지 측면에서 세도 정치를 낳은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버린 인물이다.
어찌보면 당나라 현종 대의 이림보보다도 더 철저하게 무서운 인물. 딸인 순원왕후와 보면 더욱 흥미롭다.

3. 졸기에 비추어 본 평가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명경 왕비(明敬王妃)031) 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 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 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032) 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 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 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협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德)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正宗]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

1832년 순조 32년(청 도광(道光) 12년) 4월 3일 기묘 1번째 기사

대 정치가의 현손자이자, 젊어서 과거 급제를 했고 외모나 능력도 출중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다고 시작하고 있다. 재간택을 받기 직전이 조금 순탄치 못했다고 할 수 있으나 결국 국구가 된 시점부터 사위이자 왕인 순조 뿐 아니라 조정과 재야에서 존경을 받았다고 졸기는 기록한다. 외적인 존경 뿐 아니라 실제로 국가 중대사를 총찰, 즉 모두 주물렀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에서 권신 중의 권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성격이 지나치게 좋다면서 인간관계가 얕고 넓었다는 기록은 그에게 줄을 대는 자가 많았다는 것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또한 적을 만드는 스타일도 아니었던 모양으로 외척으로서의 선을 지켰을 수도 있고[25] 애초에 그런 부류의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소극적인 태도의 소유자로 순상, 그러니까 우유부단했다는 평이다. 겉으로는 우유부단함이라고 가장했다고 볼 수도 있고, 자신의 딸 순원왕후에 대한 평가처럼 무사안일한 유형의 국정을 선호했다고 볼 수도 있다. 공로를 세울 수 있는 일에 먼저 나서지 않았다는 것은, 마찬가지로 호박씨 까듯 한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명예욕이라던지 하는 부문에 욕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종합적으로 정중동하는 일생을 살았다는 평이다. 같은 기사에서 순조는 스승과 같은 장인이라고 평한다. 장서 사이가 편할리가 없는데 스승 같다는 것은 더 멀고 어렵다는 소리.

4. 기타


  • 오대검협전이라는 무협소설(...)을 쓴 적이 있다. 이처럼 소설광이었던 탓에 실제로 젊은 시절 예문관에서 숙직할 때 후배와 연애소설을 나눠보다 정조에게 걸렸고, 정조는 반성문을 쓰게 하는 것으로 처벌을 대신했다.
  • 비슷한 사람으로 이자겸이 있다. 그러나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대놓고 누리고 부정축재에 열심이고 말년이 처참했던 이자겸과 달리 김조순은 종생토록 자기 관리에 철저했고 별다른 구설수가 없던 것이 큰 차이.[26]
  • 삼국지 전종의 행적과도 거의 비슷한 편이다.
  • 드라마 구르미 그린 달빛에서 천호진이 맡은 배역인 김헌의 모티브다.
  • 묘는 경기도 이천시에 위치하고 있다.

5. 둘러보기



  • 세도정치
  • 안동 김씨
  • 이자연[27]

[1] 노년의 김조순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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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족보에 왜 이렇게 시호를 정했는지 기록되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걱정하느라 자기 집은 잊고 살았기 때문에 '충'이라 했고,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여 '문'이라 한 것이다."[3] 본래 이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옛 족보에는 낙순으로 이름이 적혀 있으며, 조순이라는 이름은 정조가 직접 하사했다고 한다.[4] 출처: 《안동김씨족보》 김조순편.[5] 김창집의 증조부[6] 김창집의 부친[7] 조선 시대에 김상헌의 이름값이 이 정도 위상이었다.[8] 하지만 정작 김구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 김자점의 방계후손이니 재미있는 비유가 되겠다.[9] 실제로 순조 1년 벽파권유가 상소를 올리면서 '곡돌사신'이라는 표현을 넣으며 명문거족 중에서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이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이에 대해서 같은 벽파의 수장인 심환지가 "교목세가는 충신과 명신의 자손인데 권유가 말을 좀 심하게 했네요."라고 조사할 것을 청했다. 권유가 겨냥한 것이 그 때는 김조순일거라고 추측만 했지만 후에 권유의 소를 가지고 시파에서 문제삼아 권유를 국문했다. 조사 결과 이 추측은 사실로 드러났다.[10] 소설에 심취해서 오대검협전이란 소설을 짓기도 했다. 이로 인해 소설같은 잡문학을 혐오한 정조에게 반성문을 요구받았는데 반성문으로 오히려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11] 이때 책봉된 세자가 후일 순조가 된다.[12] 심지어 간택을 폐하고 중매를 통해 김조순의 딸과 혼인을 맺자고까지 했다.[13] 다만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중에서 삼간택을 하지 못했다. 때문에 벽파에서는 이를 빌미삼아 김조순의 딸이 왕비가 되지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정순왕후 김씨부터가 정조의 유지를 뒤집을 수 없다는 입장이라서 물 건너갔다.[14] 1766년에 태어나서 1828년 8월 11일에 죽었다. 그녀의 부친이자 김조순의 장인 심건지는 심환지의 6촌형이다.[15] 이를 들어 장용영을 없앤 것은 시파의 힘을 빼기 위한 주장이 있는데 그 김조순을 장용영 대장에 앉힌건 벽파와 정순왕후였다.[16] 조선의 삼정승은 관료들 중 으뜸이라는 지위와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말년에 해먹는 명예직에 가까웠다. 조선은 초기부터 태종의 강력한 왕권 구축으로 재상들이 기를 펴질 못했기에 실상 각 분야의 일을 직접 수행할 수 있는 판서가 더 활동하기 좋은 관직이었다. 하지만 명예직에 불과하더라도 정승이 최고 벼슬인 건 틀림없고, 판서 같은 요직에 심복들을 배치하고 당여의 수장이 정승이 되면 충분히 권력을 가질 수도 있는 일이였다. 김조순 역시 국구의 지위에 있었으니 그럴 수 있음에도 절제한 건 맞다. 이후의 김좌근은 영의정도 역임했다.[17] 다만 정약용이 장기간 귀양을 가게 된 까닭은 당시 좌의정인 서용보 탓이었다. 정약용이 암행어사 시절 연천 현감인 서용보를 탐관오리로 지목하고 파면하였고, 이후 정약용과 서용보는 철천지 원수가 된다. 실제로 김조순과 정순왕후는 정약용과의 사이가 나쁘지 않아 정약용의 귀양을 풀어주려고 노력하였으나 서용보가 극렬히 반대하였고, 정약용은 서용보가 은퇴하고 난 이후에야 귀양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믿기 어렵지만 정순왕후는 수렴청정을 할 때 주도적으로 정약용의 복권을 추진하였으나 서용보를 주축으로 한 신하의 반대로 결국 실패하였고, 막상 정약용을 귀양에서 풀어준 사람도 김조순이였다.[18] 참고로 서용보, 김조순, 정약용 모두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던 신하들이다.[19] 지금 일반인들의 인식으로 훈련대장과 호위대장은 별볼일 없는 자리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당시에는 군 통수권을 갖는 정권의 핵심 요직이다.[20] 국편 신편 한국사 32권, 조선정치사 1800~1863 등 참고[21] 하지만 병권의 핵심 요직인 병조 판서, 훈련대장, 호위대장 직은 받아들였다.[22] 다만 죽은 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23] 사실 김조순 정도 인물이면 해쳐먹어도 무서워서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권력자의 부정 축재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에 남기 마련이다. 당장 김조순의 딸이자 두 번이나 수렴 청정을 하며 위세를 떨친 순원왕후가 부정 축재 한 사례들도 잘만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조순은 진짜 부정 축재를 했다는 기록을 찾기 힘들다. 제대로 된 시장과 화폐경제의 부재로 선물 문화가 단순한 친목이 아니라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대가성만 추가되면 뇌물이 되는) 조선시대에 거물급 고관이면서도 재물 관련 시비 기록이 거의 없는 경우는 상당히 드물다. 기껏해야 정도전, 조영무, 김종서, 황보인, 구치관과 같은 몇몇 정도. 최소한 그 시대 기준으로는 흠 잡힐 만큼 축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24] 관직만이 아니라서 정조의 건릉을 옮기는 것을 추진(김조순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몇 안되는 사례)하여 성공시켰는데 이에 왕이 땅, 노비, 내구마를 하사하고 일가친척들을 등용시켰는데 이것도 사양했다.[25] 정조 재위 기간의 김귀주정후겸, 홍국영 등 부류를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이다.[26] 어느 야담에는 김조순의 정적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술취한 이를 들여보내 행패를 부리라 사주했다. 게다가 그는 다죽어가는 환자여서 매를 치면 죽는 몸이였다. 그러나 김조순은 오히려 그를 거두고 잘먹여 보냈다.[27] 고려시대 문신으로 조선시대의 정조 못지 않은 성군이었던 고려시대 문종 대에 중임된 권신으로 문벌귀족의 시초격인 인물이다. 막상 그는 후손들과는 달리 철저히 신하로서 문종을 보필해 여러 정책에 참여했고 인품 역시 훌륭하였으나 경원 이씨 후손인 문벌귀족들은 이자의이자겸 처럼 국정을 농단하고 왕실을 위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