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고려)

 


'''고려조 추존 국왕
安宗 | 안종
'''
'''묘호'''
'''안종(安宗)'''
'''시호'''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1]
'''성씨'''
왕(王)
'''이름'''
욱(郁)[2]
'''아내'''
?[3] / [4]
'''아들'''
현종 원문대왕
'''딸'''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
'''부왕'''
태조 신성대왕
'''모후'''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능호'''
효릉(孝陵) → 건릉(乾陵) → 무릉(武陵)
'''생몰연도'''
(937년 ~ 943년) ~ 996.07.24 / 996.07.07
'''태조와의 관계: 여덟째 아들'''
1. 소개
2. 생애
2.1. 고려사 기록
2.2. 현화사비 기록
3. 기타
3.1. 홍경사
3.2. 시호
3.3. 최종 승리자?
3.4. 능호
4. 가계
5.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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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왕조의 추존 국왕. 휘는 욱(郁). 태조 신성대왕과 그의 다섯째 왕후 신성왕태후 김씨 소생의 아들. 태조의 여덟째 아들이다.
신성왕태후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백부인 김억렴의 딸이었으니 그는 고려신라 왕실의 혈통을 동시에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위로 형이 7명이나 있었고 왕위계승권과는 거리가 먼 왕족일 뿐이었다.
혜종, 정종, 광종, 대종의 이복동생인 동시에 경종, 성종, 천추태후, 헌정왕후의 작은아버지이다. 목종에게는 작은할아버지가 된다.
고려사에 의하면 글을 잘 쓰고 고려 지리에 해박했다고 한다. 실제로 본인이 직접 지은 시가 한 수 전해져 오고 아들도 아버지를 닯았는지 절에 머물던 시절에 시를 여러 개 썼다고 한다.
그의 생애는 고려사, 현화사비에 남겨져 있다.

2. 생애


언제 태어났는지 알려져 있진 않지만, 최소 937년에서 943년 사이로 추정된다.[5] 태조는 935년 신라고려에 귀부한 다음해에 신성왕태후 김씨와 혼인했기 때문이다.
신성왕태후 김씨의 아들이지만 일부 기록에서는 이정언李正言의 딸 대량원부인 이씨大良院夫人 李氏의 아들로 나오기도 한다. 오기라고 보는 경우가 많지만, 이원李元의 딸 후대량원부인 이씨後大良院夫人 李氏를 볼 때 대량원부인 이씨 자체는 있던 것으로 보이며 광종도 신명순성왕태후의 아들이지만 신주원부인 강씨信州院夫人 康氏에게 양육되었던 것처럼 모종의 이유로 대량원부인 이씨-후대량원부인 이씨에게서 대량원大良院을 상속받아 오인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안종의 아들 현종의 왕자 시절 명칭은 대량원군大良院君이었는데, 고려 초기 작호명을 보면 실제로 사저를 물려받아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2.1. 고려사 기록


왕욱은 임금이 된 형들을 제외한 왕건 소생의 다른 왕자들과 마찬가지로 사서에 남은 기록이 별로 없다. 하지만 조카인 헌정왕후와 사통함으로써(...) 그 이름을 후대에 남기게 된다.
헌정왕후는 태조의 친손녀이자 경종의 후궁으로 경종 사후 궁에서 나와 절에서 지냈다. 마침 왕욱 역시 개경 왕륜사 남쪽 부근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로 왕래하면서 눈이 맞아 관계를 맺게 된다. 그러다가 헌정왕후가 임신을 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어졌고, 선왕의 왕후랑 사통한 것도 드러나고 만다. 그러나 둘 모두 목숨은 부지했고 출산일만 기다리게 된다.
992년 7월 사통의 죄를 덤터기 쓸까봐 겁난 헌정왕후의 가인(家人) -들이 왕욱의 집에 불을 지르는 등 소란이 커지자, 당시 임금 성종이 직접 왕욱의 집을 찾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는 당부를 한 후 왕욱을 7월 임진일에 사수현(沙水縣)[6]으로 유배보냈다. 자세한 이야기는 헌정왕후 문서 참조.
그리고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에 유배된 왕욱은 자신을 호송한 신하에게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지어 헌정왕후에게 보냈다.

與君同日出皇畿

君已先歸我未歸

旅檻自嗟猿似鏁

離亭還羨馬如飛

帝城春色魂交夢

海國風光泪滿衣

聖主一言應不改

可能終使老漁磯

'그대와 함께 같은 날 황기(皇畿)를 나왔건만

그대는 먼저 돌아가고 나는 돌아가지 못하네.

여함(旅檻)에서는 스스로 원숭이가 사슬에 묶인 듯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서 돌아보며 나는 듯 하는 말을 부러워하네.

제성(帝城)의 봄빛에 혼이 되어 꿈속에서 오가고,

나라의 풍광에 눈물이 옷깃에 가득하다.

성주(聖主)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끝내 물고기 잡는 갯가에서 나이 들게 해주시오.'[7]

고려사 열전 태조 왕자 안종 왕욱(王郁) 中.

이후 유배지에서 조용히 지냈다. 그러다 994년, 모후였던 헌정왕후도 승하하고 사실상 고아가 된 아기 왕순(현종)을 아버지와 함께 살라고 성종이 돌려주면서 2년여간이나마 같이 살게 된다.
허나 사통의 죄로 승하 전까지 결국 개경으로 돌아가진 못했고, 996년 7월 24일 (지금의 사천시 정동면에 있었던 절인) 와룡산의 배방사(排房寺)에서 승하했다.[8]
고려사에 따르면 유언으로 아들에게 자신을 (지금의 사천 구룡산 밑인) 성황당 뒤쪽에 묻되 '''시신을 뒤집어서 묻으라'''고 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아들인 왕순이 왕이 되기를 바란 뜻이었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아들이 즉위해 왕욱에게 묘호 안종(安宗)과 시호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을 올려 종묘에 제사 지내고 현화사에 진영을 걸어두었다.

2.2. 현화사비 기록


현화사(玄化寺)는 재위 12년(1021년)에 현종이 지은 부모를 위한 원찰이다. 현종은 현화사비(玄化寺碑)를 세워 부모의 일대기 등을 적어두었는데, 고려사에 나와있지 않은 내용도 상당해 역사학자들의 이목을 끈다.
문제는 왕욱 일대기의 경우 상당한 미화 혹은 날조가 가미되었다는 것. 현화사비엔 거란이 무도해 아무 죄도 없는 고려를 공격하자[9] 성종이 직접 장수를 이끌고 출진했는데, 왕욱을 아끼는 마음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작은 아버지는 하인과 재산을 줄 테니 가족을 데리고 남쪽에 피신하라고 부탁해서 왕욱이 사주로 내려간 것으로 서술됐다. 사실상 고려사와 반대로 적어놓은 셈. 그리고 이때 현화사비에 의하면 현종은 (고려사 기준 당시 만월대에 있고 갓난 아기인데도) 아버지를 부축하며 내려오는 걸 도왔다.(...) 또 비석엔 왕욱이 사주에 내려와 7월 7일에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은 것으로 적혀 있다.
사실 이런 미화는 현종의 입장을 고려하면 아예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현종 입장에서야 어찌됐든 부모의 명예가 회복되길 바랬을 것이고, 이는 사생아라는 본인의 입지와도 연관되는 생각보다 꽤 중차대한 문제였다. 더구나 현화사는 현종의 부모인 안종 효의대왕과 효숙인혜왕태후를 위한 사찰로 지어졌으니 자신의 부모님을 치켜세우는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 수도 있는 것. 물론 그렇다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그리워한 나머지 사도세자의 부정적인 행적을 사초에서 지워달라고 영조에게 간청한 것도 비슷한 행보로 볼 수 있을 것이다.[10]
참고로 비석엔 고려사에 나오지 않는 현종의 황자(皇姊)[11] 성목장공주(成穆長公主)도 등장하는데, 현종의 누나인데 헌정왕후는 현종만 낳고 죽었으니 장공주는 왕욱이 헌정왕후와 사통하기 전 다른 아내 - 와 결혼해 낳은 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목장공주는 시호이므로 장공주는 최소 동생 현종이 태어난 992년 이전에 태어나 비석이 세워진 1021년 이전에 사망했다고 봐야 할 듯. 이 외 고려사에 등장하지 않는 헌정왕후의 사후 기록도 있는데 기타 내용은 항목 참조.

3. 기타



3.1. 홍경사



현종은 현화사 말고도 안종 한 사람만을 위한 사찰을 세우고자 했는데 이 절이 바로 왕립사찰 '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이다.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가 남아있어 홍경사의 기원을 알 수 있으며 비석의 기록에 따르면 서북면 군단 부원수였던 강민첨이 주도하여 지었고 절은 약 200여 칸으로 안에 약 80여 칸 크기의 휴게소가 있어 이름을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이라 했다고 한다.
비석은 안종을 선황(先皇), 황고(皇考)라 부르며 칭송했다. 또한 현종을 성상(聖上)이라 높히고 현종의 명령을 선지(宣旨)라 했다. '성상이 나라를 다스린지 18년째 되는 해(聖上御國之十八載)'라 하여 비석을 세운 날짜를 기록할 때 북송의 연호보다 현종의 재위기간을 먼저 적어 자주성을 드러냈다.

3.2. 시호


고려사와 현화사비의 시호가 조금 다르다. 고려사에선 현종이 즉위한 후 아버지 왕욱을 왕으로 추존해 묘호를 안종(安宗)이라 하고 시호를 효목대왕(孝穆大王)이라 했다. 후에 효목을 효의로 고치고 시호를 추가해 최종 시호는 ''''성덕헌경효의대왕(聖德憲景孝懿大王)''''이다.
현화사비에는 성덕이 빠지고 고려사에 없는 새로운 시호가 추가돼 ''''헌경영문효의대왕(憲景英文孝懿大王)''''으로 불린다.
봉선홍경사비에서는 시호는 같지만 순서가 다른데, 안종(安宗) '''헌경효의영문대왕(憲景孝懿英文大王)'''으로 나온다.
안종의 대표시호는 효의대왕(孝懿大王)이고 현종이 다시 올린 헌정왕후의 시호는 효숙왕태후(孝肅王太后)이다. 두 사람은 孝 자 돌림 시호를 받게 되었다.
이는 현종이 은근슬쩍 안종과 헌정왕후를 정식 부부로 올려놓기 위한 작업으로 보인다. 고려 왕조는 국왕과 왕후의 시호를 맞추는 전통이 있어 '헌'정왕후는 경종 '헌'화대왕과 맞춰졌다. 이걸 안종과 효 자로 바꿔버리면서 둘은 정식 부부가 된 것.

3.3. 최종 승리자?


안종의 형제인 혜종, 정종, 광종은 모두 대가 끊겼고, 그의 아들인 현종의 계보가 마지막 왕인 공양왕까지 이어져서 훗날 고려 왕조의 중시조가 되었다.[12]
결국 태조 사후 옥좌를 둘러싸고 벌어진 왕실의 골육상쟁에서 살아남은(?) 최후의 승자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본인이 유배지에서 죽었는데 그게 무슨 큰 소용이랴만. 다만 본인이 유언으로 남긴 내용과 그 뜻이[13] 사실이라면 충분히 승리자라 평가할 만은 하다.

3.4. 능호


능호가 두번이나 바뀌었다. 현화사비 기록엔 안종의 능호는 처음 사주에 묻혔을 때 효릉(孝陵), 이후 현종이 개경 금신산에 이장한 뒤 개칭한 건릉(乾陵)이다. 고려사엔 추가로 건릉에서 다시 바꾸어 무릉(武陵)으로 바뀌었다고 기록되있다.
효릉은 안종의 대표시호와 겹치는데다가 능묘를 이장했으니 바꿀 필요가 있었다. 근데 乾 자가 하늘 건 자라 엄청난 우대의 뜻을 가지고 있어 다시 적당히(?) 강한 우대를 나타내는 武 자로 바꾼듯 하다.

4. 가계


  • 아내: ?
    • 딸: 성목장 공주(成穆長公主) - 현화사비 비문에 나오는 존재로, 중기 고려에서 중국의 장공주, 대장공주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공주를 받은 걸 볼 때 현종 즉위 대까지 살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5. 대중매체에서


KBS 사극 천추태후에서 안종 왕욱[14]을 맡은 배우는 김호진. SBS 드라마 달의 연인 - 보보경심 려에서는 남주혁이 맡았다.[15] 그러나 두 사극 모두 나이나 고증 면에서는 엉망인데, 천추태후에서는 경종과 천추태후의 숙부이자 고려 조정의 원로[16]임에도 불구하고 2009년 기준 39세지만 동안인 김호진이 배역을 맡아 미스캐스팅이라는 평이 많았다.[17] 반대로 보보경심 려의 경우는 아직 왕건이 살아있었을 당시 왕욱은 미취학아동 수준의 어린아이였고 이복형인 광종의 즉위 당시에도 많아야 10대 초반 정도에 불과했는데 20대 초반의 어엿한 청년인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천추태후에서 그의 최후는 역사와 다르게 나왔는데, 비극성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김치양 세력의 위협을 받아 아들 대량원군 순을 맡긴 뒤 '''자결'''하는 것으로 연출되었다. 한편 달의 연인에서는 후백제 출신으로 금강의 딸로 설정된 우희와 인연을 맺어 최종적으로 그녀와 혼인까지 약조했지만 그녀는 남은 후백제의 유민들을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 인해 환멸을 느낀 나머지 그 동안 믿었던 왕소의 곁을 떠나게 된다. 드라마 말미에 왕욱의 집에 들렀다가 우희와 비슷하게 생긴 그의 딸을 만나게 되는데, 훗날의 인연을 생각한다면 꽤 의미심장한 부분이다.[18]
[1] 고려사 종실 안종 열전 기준.[2] 대종과는 휘의 한자가 다르지만 둘 다 '욱'으로 발음하므로 보통 추존받은 묘호로 구분한다.[3] 헌정왕후와 사통하기 전 아내. 딸이 하나 있다.[4] 사통이므로 공식적인 배우자가 아니다. 현종은 안종과 헌정왕후에게 孝 자 돌림 시호를 올려 헌정왕후를 안종의 정식 아내로 대우하고자 했다.[5] 그렇다면 헌정왕후와 만났던 시점의 나이가 최소 40대 후반~50대 초반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당시 헌정왕후의 나이가 20대 후반~30대 초반으로 추정되니 대략 20살 정도 차이가 난 셈.[6] 현화사비엔 사주(泗州).[7] 왕욱은 시를 잘 썼는데 그의 재능을 아들 왕순이 물려받았다.[8] 현종이 이곳에서 뱀을 보고 지었다는 시는 현종 항목 참조.[9] 이때 고려거란에 사대를 하고 있었는데도 대놓고 거란이 나쁜 놈이라고 비난하는 제스쳐를 취했다.[10] 물론 정조의 경우 최소 열한 살까지는 사도세자와 함께 살았기에 현종의 그것과는 또 조금 달랐을 것이다. 현종은 모친도 자기가 아기일 때 헤어졌고, 아버지도 두 살에서 네 살까지밖에 같이 지내지 못했으니.[11] 황제의 누나.[12] 현종 → 문종 → 숙종 → 예종 → 인종 → 신종 → ... → 공양왕. 중간에 신종의 형인 명종의 자손들이 강종에서 창왕까지 왕위를 잇기는 하지만 마지막 왕인 공양왕은 신종의 후손이었다.[13] 시신을 거꾸로 뒤집어 매장하라는 유언과 그 이유는 아들이 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는 내용.[14] 작중에서는 경주원군(慶州院君)으로 나온다.[15] 강하늘이 연기한 8황자 왕욱은 황보씨의 아들로 성종천추태후, 헌정왕후의 아버지이자 현종의 외할아버지이다.[16] 상술했다시피 937년~943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996년에 사망했을 때에는 50대 중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7] 참고로 김호진은 경종 역을 맡은 최철호와 '''동갑'''이고, 타임워프 후 천추태후 역을 맡은 채시라보다 '''2세 연하'''이다.(...)[18] 확실히 언급되진 않았지만 분위기를 보아 그녀가 헌정왕후일 가능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