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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隆陵
1. 개요
2. 역사
3. 형식
4. 여담
5. 관련 문서


1. 개요


융릉(隆陵)은 조선 정조의 아버지인 장조의황제(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헌경의황후 홍씨(혜경궁 홍씨)의 합장릉이다.
수원 고을의 진산이었던 화산 아래에 조성된 능이라 하여 '화산릉'이라고도 불린다.

2. 역사


융릉은 조선왕릉 중에서 유일하게 조선왕릉의 3대 분류인 묘(墓), 원(園), 능(陵)을 모두 겪은 왕릉이다. 무덤의 주인만큼 무덤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사도세자가 승하하고 정조를 비롯한 그의 후손들이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과정과 맞물려 있다. 그 역사는 대략 아래와 같다.
사도세자를 추숭하는 작업은 대한제국이 세워진 이후에도, 호적상 사도세자의 현손자가 되는 고종에 의해서 계속된다.
  • 1899년(광무 3년) 9월 1일, 사도세자가 왕으로 추존되어서 장종(莊宗)이란 묘호를 올리고 현륭원도 왕의 예에 따라 융릉(隆陵)으로 격상되었다.
  • 1899년(광무 3년) 12월 7일, 사도세자의 묘호가 다시 장조(莊祖)로 바뀌면서, 융릉은 황제의 릉이 되었다.

3.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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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분에는 모양을 잘 잡기 위해서 인석(引石)을 봉분 중간중간에 박아 두었는데, 그 인석 끝부분에는 연꽃 봉오리를 화려하게 새겨 놓았다.
융릉의 특징으로는 일반적으로 왕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봉분은 일직선으로 배치되기 마련인데, 융릉은 정자각과 봉분의 축이 약간 틀어져서 배치되어 있다. 이는 지금 봉분 자리가 좀더 명당이라서 방향을 틀어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또한, 건릉과 같이 정자각 앞쪽을 굉장히 넓게 조성하였는데, 이는 1900년 이후 사도세자정조를 황제로 추숭하고 융릉과 건릉을 황제의 릉으로 조성하면서 그 격식에 맞게 꾸민 거라고 한다.
비각에는 1개가 아니라 2개의 표석이 세워져있는데, 하나는 융릉이 능이 아니라 현륭원이었을 때의 표석이고, 하나는 융릉으로 격상된 후의 표석이다. 현륭원의 비석에는 "조선국 사도장헌세자 현륭원(朝鮮國 思悼莊獻世子 顯隆園)"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리고, 융릉 비석에는 "대한 장조의황제 융릉 헌경의황후 부좌(大韓 莊祖懿皇帝 隆陵 獻敬懿皇后 附左)"라고 새겨져 있으며, 제작년도는 광무4년(1900년을 의미)이라고 되어 있다.

4. 여담


한국전쟁 막바지이던 1953년 초에 미군 장교가 찍은 사진이 남아있다. #

5. 관련 문서


[1] 정조가 즉위한 것이 1776년 3월 10일이었는데 불과 10일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