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주의
1. 개요
경건주의(Pietism)는 17세기 형성된 유럽 개신교회의 종교운동이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유럽 사회는 정치, 경제, 문화에서도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으로 구분되었다. 이 상황에서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유럽사회에서 교인이 교리적으로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매우 첨예화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대립은 점차 개신교회에도 교리적 강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제도중심화 과정을 겪게 하였다. 이런 개신교회의 제도 중심화, 교리 중심화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고, 이 반성은 독일 개신교회인 루터교회의 내부에서 발생하여 점차 전 유럽의 개신교회로 퍼져갔다.
2. 경건주의 운동들의 종류
이 문서에서는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운동들을 소개하며, 한국교회나 미주 한인교회 평신도들이 가장 영향을 받은 운동들이다.
2.1. 퀘이커 운동
2.1.1. 역사적 상황
17, 18세기 영국 교회는 종교개혁을 통하여 교황권으로부터 해방되어 성서로 돌아갔다. 그러나 성서를 신언으로 보장하는 작업을 마치기에는 성서에 대한 해석이 다양했다. 유럽대륙에서는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였다는 것을 영국교회는 참고하여 39개조(1571)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1648)를 작성하여 성서의 권위를 수호하려 했다. 그러나 영국 내에서 다양해지는 신앙생활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성공회에 들어가지 않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주장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는데, 대표적으로 퀘이커 교도들이 있다.
2.1.2. 조지 폭스(George Fox, 1624~1691)
폭스는 기성교회와 신자들이 세속적 생활을 거리낌없이 하는 것과 종교적으로 지도를 받던 교역자들의 외식적인 신앙생활에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
폭스는 그때부터 신자들이나 진리탐구자들을 외부의 세계에서 내부의 세계로,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에게로 성서의 문학에서 창조적 성령에게로 인도하려고 노력했다. 폭스는 또한 이렇게 주장했다."그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나의 사정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에 대한 나의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려 외적으로 나를 도와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졌으며, 내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말해줄 사람이 없었을때, 내가 한 음성을 들었다 : '너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난 그말을 듣고 기뻐서 뛰었다."
이러한 폭스를 중심으로 퀘이커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스스로 "빛의 자녀"요 "친우단"(Society of Friends)이라고 불렀으며, 자신들을 종교개혁의 정신을 이어받은 직계로 자처했다. 영적 체험과 영원한 그리스도를 통한 개인적 중생과, 성서 안에서 그리스도와 성령은 하나라는 것과 또한 신의 빛이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들은 성령의 자유로운 교통에 의한 회개와 중생을 강조했다."성서는 예언자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말이다. 성서가 가르쳐주는 성령에 나아오지 않으면 그것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당신들은 말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이렇게 말했고 사도가 저렇게 말했다고. 그러나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여러분은 빛의 아들이 아니며, 빛 안에서 살지 않았으며, 여러분이 말하는 것이 신이 내적으로 여러분에게 말씀해주신 것이 아닌가?"
2.2. 독일 경건주의 운동
2.2.1. 역사적 상황
17세기 개신교 정통주의(Protestant Orthodoxism)는 점점 교리화되면서 스콜라 주의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성서주의적, 지성주의 교리를 확신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따라서 마르틴 루터가 강조하였던 하나님과 성도 간의 생명력인 관계가 상실되게 되었다. 그래서 경건주의는 교리에 반대되는 '''생명''', 사무적인 것에 반대되는 '''영적인 것''', 경건의 모양에 반대되는 '''경건의 능력'''을 강조한다.
2.2.2.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
슈페너는 '교회 안의 작은 교회운동'을 전개하였다. 1670년부터 주일예배 후에 슈페너는 자신의 집에서 작은 모임을 만들어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는데, 그 주일 설교에 대한 토론과 경건문학 작품을 편집하는 일을 하였다. 1675년 이후부터 그들은 성경에만 집중하여 읽고 기도하며 그들의 우정을 형성하고 경건하려는 운동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운동은 1675년 그가 <경건한 열망>을 세상에 출판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경건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슈페너는 당시 목사들의 설교가 너무나 지적으로 편중되어 있음을 비난하였다. 또한 성만찬의 객관적 효과, 즉 성찬식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신앙적 정성과는 관계없이 효과를 발생한다는 가르침에 반대했다. 그는 평신도를 중심으로 성서연구반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서 신자들의 영적 성장을 시도했다. 그래서 그의 운동은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비난을 피하지 못했다.
2.2.3. 프란케(August Hermann Francke, 1663~1727)
프란케는 기본적으로 루터의 로마서 서문에 나타난 신앙서술에 찬성하였지만 보다 더 영적 경험과 경건을 강조하기에 이르렀다. 1694년 할레(Halle)에 경건주의 대학교인 할레대학교를 설립하였고, 할레시는 경건주의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할레대학을 중심으로 많은 젊은이들이 해외선교 지망생이 되어 18, 19, 20세기 세계 선교에 수만 명의 선교사들로 파송되었다.
2.2.4. 진젠도르프[2] (Nikolas Ludwig Zinzendorf, 1700~1760)와 모라비안주의(Moravianism)
진젠도르프는 경건주의 안에서 자랐다. 그는 프랑케가 세운 고등학교와 할레대학교를 다녔다. 그는 30년 전쟁 때 보헤미아에서 피난온 형제들에게 자기 소유의 땅 삭소니의 헤른후트를 내어주면서 그들과 함께 경건운동을 하다가 이 그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형제들의 출신 지역 모라비아의 이름을 따서 모라비안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들의 신학은 기본적으로 루터의 의인화 신학을 받아들이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받아들인 경건주의자였다. 그래서 웨슬리가 모라비안의 영향으로 거듭남의 체험을 올더스게잇에서 하였지만, 진진도르프 무리들이 사는 헤른후트를 직접 방문한 다음에는 그들의 루터식 경건주의, 정숙주의를 비판하였다.
2.3. 메소디스트 운동(오늘날의 감리회)
2.3.1. 역사적 상황
영국의 상황 역시 위에서 지적한 것과 같이 이성의 시대였다. 따라서 인본주의가 모든 사람들의 사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계몽주의와 과학주의와 낭만주의와 칸트의 비판철학이 종교의 위치를 매우 위험하게 만들었다. 1799년 슐라이어마허가 <종교론>을 써서 종교의 정당성을 변호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18세기의 유럽은 정신적으로 기독교와 멀어져있었던 것이다.
2.3.2.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
존 웨슬리 항목 참조.
2.4. 미국교회의 부흥운동
2.4.1. 역사적 상황
미국의 부흥운동은 1620년 청교도들의 미국 개척에서 1776년 미국 독립에 이르는 이른바 혁명적 시기동안에 일어난 운동이다.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대변혁의 시기를 아울러 영적인 대각성운동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1713년에는 36만명이 이민 왔고, 1760년에는 160만명이 이민왔으며 1776년에는 거의 3백만명이 미국 땅을 찾아오게 되었다. 이렇게 빠른 인구증가는 다양한 민족의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게 되었다. 청교도 정신에 의해 부지런히 정직하게 일함으로써 중산층을 형성하여 자본주의적 개인주의 사회를 만들어 가게 되었다.
2.4.2. 제 1차 대각성운동 : 1720~1740
미국 동부에서 시작한 제 1차 대각성운동은 얼마 안가 모든 교파에 만연되었다. 프렐링포이젠과 테넨트와 에드워드와 화이트필드가 주동 인물들이다. 프렐링호이젠의 설교를 듣고 테넨트가 회개한 후에 부흥사가 되었다. 특히 에드워드는 당시의 죄된 사회상과 교인들의 죄목을 지적하면서 회개와 죄의 용서를 구하도록 촉구했다.
에드워드는 특별한 회개와 중생의 체험을 했다.
제 1차 대각성운동의 결실로 1740~1760년 사이에 뉴잉글랜드(지금의 보스턴)에서만 2만~4만명의 새신자가 생겼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당시 지적인 목사로 알려져 있었으나 목장에서의 신의 임재를 체험한 후부터 그는 매우 감동적이고 개인적이고 위엄있는 설교를 하게 되었다."나는 혼자서 명상을 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목장의 한 조용한 곳을 걷고 있었다. 걸으면서 하늘과 구름을 쳐다보았을 때, 하나님의 너무나도 영광스러운 위엄과 은총의 감미로움이 나의 마음에 들어오는 것을 느꼈으나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몰랐다. 내가 느끼기로는 신의 영광이 온 자연에 차고 넘치는 것 같았다. 나는 때때로 앉아서 달을 계속 쳐다보고는 했다. 그 날 나는 구름과 하늘을 쳐다보면서 그러한 것 안에 신의 아름다운 영광을 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낮은 목소리로 창조자요 구속자를 생각하면서 노래를 불렀다."
이 각성운동은 장로교 목사와 개혁교회 목사가 중심이 된 것이 특징이다.
2.4.3. 제 2차 대각성운동 : 1797~1850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에 제 2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사회상은 제 1차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전의 사회상과 똑같았다. 독립전쟁(1775~1783)을 전후로 하여 미국인의 도덕생활과 종교적 생활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주민대이동이 시작되어 그들은 계속해서 전쟁상태에서 생활해야만 했다. 그 당시의 상황 때문에 반신적이고 반도덕적 자세가 너무 강했고 그렇기에 더 강렬하게 운동이 일어났다.
이 시기에는 세 가지 양태의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⓵ 장로교회 - 회중교회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
이 운동들의 특징은 그들이 세운 대학교를 중심해서 일어났다는 점이다. 버지니아 주에 있는 장로교회가 세운 햄프든-시드니대학과 워싱턴대학과 제퍼슨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특별한 성령의 감동을 받고 회개와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신앙적 노력이 전교생들에게 퍼졌다.
18세기말부터 장로교회 계통의 대학과 회중교회 계통의 대학이 중심이 되어 주로 동부에 있는 지성인들에게 종교적 각성을 촉구했다. 그러나 이들은 제 1차 대각성운동처럼 초교파적 집회를 가지지 않고 주로 자기 교파의 교인들을 상대했다. 이들의 운동은 얼마 안가서 중부지방 특히 켄터키 지방으로 확산되어 캠프집회를 가짐으로써 대성황을 이루었다.
⓶침례교회-감리교회를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의 부흥운동이 대학교가 중심이 되어 회중상류층을 상대로 한 부흥회였다면 침례교회와 감리교회의 부흥회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하였다.
대각성운동의 열기를 통해 새로운 교단적 발전의 도약을 삼게 되었다. 특히 성화된 삶을 강조하던 존 웨슬리와 인간의 전적 타락과 절대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구원을 강조한 침례교인들의 신학이 일치되면서 이 두 교단이 미국의 대표적 교단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⓷피니부흥운동
피니는 집회를 통해 새로운 방법을 사용했다. 그것은 원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이름을 공표하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여자들을 집회에서 공적으로 기도케 하는 일이었다. 피니는 부흥운동이 서부 쪽으로 확산되어가는데 크게 공헌했다.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던 이민을 상대로 하여, 어떤 특정 교파를 중심한 교파확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복음과 신앙의 성장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새로운 안식처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점이 웨슬리의 부흥운동과는 다른 점이다.
3. 여담
제 2차 대각성운동의 세 가지 유형은 후에 한국교회의 부흥회의 모델이 되었다.
4. 관련항목
[1] 원래 발음과 표기는 친첸도르프가 맞지만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이 표기로 널리 알려졌다.[2] 원래 발음과 표기는 '''친첸'''도르프가 맞지만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이 표기로 널리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