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례회
1. 개요
침례회는 16세기 영국의 비국교도운동 및 재세례파에 기원을 두는 개신교의 한 교파이다.
세계적으로 약 8천만 명의 교인이 있다. 한국에서는 장로회와 감리회 등에 밀려 교세가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미국에서는 가장 큰(대략 1,600만명) 개신교 교파다. 세계적으로도 기독교 내에서 성공회와 함께 가톨릭, 정교회, 오순절교회 다음으로 큰 교파이며, 개신교에서는 성공회와 함께 오순절교회 다음으로 큰 교파이다.
2. 역사
침례회는 종교개혁의 한 흐름인 재세례파(Anabaptist)로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재세례파는 믿음을 고백한 사람만이 받는 세례가 진정한 세례라고 주장하며, 유아세례를 부정했고, 유아세례 받은 사람들에게 다시 세례를 주었다. 이 당시에는 침례 (Immersion)를 주지 않았으며 기성교회와 같이 세례를 다시 배풀었다. 정치적으로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며 현세의 통치 체계를 부정하였다. 재세례파는 당시 기득권층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았으며, 심지어 종교개혁자들에게도 박해를 받았다. 급진적인 재세례파는 16세기 중반이면 거의 소멸하고, 재세례파의 명맥은 온건파인 메노 시몬스가 이끄는 메노나이트가 이끌게 된다.
침례교와 재세례파 간에 뚜렷한 혈연 관계가 있다고 보긴 힘들지만, 침례회의 주된 특징은 이미 재세례파의 사상에서 찾을 수 있다. 침례회는 비록 재세례를 베풀진 않았지만 교회의 성도는 자신의 신앙을 분명히 공개적으로 고백한 사람들로만 구성되어야 하며,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침례 (Immersion)[4] 를 주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유아세례를 부정하였다.
침례회의 사상은 당시 영국 국교회였던 성공회와 상충되었다.[5][6] 침례회는 불세출의 설교가라 불리는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 목사와 같은 설교가들을 배출하면서 점차 영국 전역으로 확장되었고, 그 세력은 장 칼뱅의 '예정설'을 극단적으로 받아들여 선교가 필요 없다는 기존 영국의 선교사들에 반발, 세계 침례회 선교회(Baptist Missionary Society)를 세워 '개신교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선교사를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21세기 이후 침례회의 기원은 잇달은 연구와 문헌 발굴을 통해 '영국 분리주의자 후예설'과 '아나뱁티스트 영향설'을 종합해서 보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혀져가고 있다.
일부 급진적인 독립침례회/성경침례교 교회들은 '지계석주의(Landmarkism)'이라는 황당한 가설을 펼치기도 한다. 아나뱁티스트 영향설을 더욱 극단적으로 강화하여 아예 '''가톨릭 이전에 침례회가 원조였다'''고 주장하는 이 설은 20세기 초까지는 주류 침례회 교파들에서도 간간히 주장되던 것이었지만 현재는 위와 같은 이유로 사실상 주류 교파에서는 폐기된 가설이 되었고, 같은 독립침례회 교회들 사이에서조차 '''도가 너무 지나친 주장'''이라며 비판하는 곳이 없지 않은 편.
2.1. 기원에 대한 정리
1. 개혁교회와 재세례파
오늘날 침례신학대학교의 신학생들은 다양한 신학을 배울 것이다. 그런데 칼빈과 비슷한 모자를 쓴 교수님 혹은 칼빈주의로 인정 받는 교수님은 '''반드시''' 계실 것이다. 국내 신학교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나 이것이 영국 분리주의자를 설명하는데 연상하기 좋다. 침례회도 분명히 영국 종교개혁의 후예이며, 심지어 재세례파조차 스위스 종교 개혁의 선구자 츠빙글리의 제자들이다. 물론 유아세례에 반대하여 파문된 제자들.
즉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며 구약과 신약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츠빙글리의 뒤를 이어 스위스 종교개혁을 이끈 하인리히 불링거와 장 칼뱅이 취리히 합의를 통해 일치를 이룬 개혁교회가 이들의 조상격이라는 이야기다.
'''2. 영국의 종교개혁과 침례회'''
영국의 종교개혁은 칼뱅의 선배이자 스승 격인 마틴 부처(마르틴 부써)[7] , 칼뱅과 신학적으로 일치한 가톨릭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출신이자 이탈리아에서 라테란 수도원장을 지내다가 개혁에 합류한 피터 버미글리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국왕 헨리 8세와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를 도와 시작한 개혁이 메리 여왕의 가톨릭 복고로 위기를 맞았던 것에서 전환기를 맞는다.
유럽대륙으로 피신한 개혁가들과 그들을 따르던 난민들은 부써가 개혁을 이끈 역사를 지닌 스트라스부르, 칼뱅의 제네바 등에서 개혁파와 교류했고, 사실상 개혁교회, 즉 칼빈주의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성공회 39개 신조에 잘 드러나있는 당시 국교회의 중도적인 태도에 반발했다. 국교회가 가톨릭을 더욱 확실히 배척하지 않는 것이 불만족스러웠던 것. 이들은 청교도의 기원이 되어 스코틀랜드 장로회와 관계를 맺으며 개혁 교회식의 개혁을 주장하게 된다. 이들의 개혁은 곧 내부 분열이 이어지는데, 국교회 내부의 개혁을 주장하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들었던 장로파와, 국교회의 개혁을 포기하고 국교회와 아예 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하며 국교회의 주교제 뿐 아니라 장로회의 어느 정도 권한을 행사하는 총회와 산하 노회(지역회) 그리고 장로가 중심이 된 당회 장로회의 구조까지도 거부하는 '''분리주의자'''들로 나뉘게 된다. 이후 분리주의자들은 다시 개교회의 자치를 강조하는 회중교회파와,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개인의 결심을 주장하는 '''침례파'''와, 교회의 목사 등의 역할 구분 자체를 거부하는 샌디먼 파, 퀘이커 형제회 등으로 나뉘게 된다.
최초의 침례교회는 영국에서 박해를 받아 암스테르담으로 파신했던 일부 비국교도에 의해 1609년에 출현했다. 그리고 일부 침례교인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1611년에 런던 인근에 침례교회가 세워졌다. 곧 이어 1641년경 비국교도들 사이에서 침례를 놓고 큰 논쟁이 일어났고 최초의 독립파 교회였던 제일 회중교회에서 침례를 주장한 침례파 지도자인 키핀 등에 대한 대처가 논의되었다. 그런데 제일 회중교회 담임 목사였던 헨리 제시가 침례교도로 전향함에 따라 논란이 격렬해졌고, 헨리 제시는 다시 침례를 받기에 이른다. 강한 침례파들은 제일 회중교회에서 나가 분리 개척하였고, 제일 회중교회에서는 침례와 세례를 자유로이 선택하도록 하여 일단락되었다. 결국 독립파인 회중교회에서는 부모의 의사에 따라 침례를 원하는 경우 유아세례를 주지 않는 식으로 공존했었다. 미국에서는 존 코튼 등 저명한 청교도 회중교회 지도자들이 침례교도를 핍박하였는데 침례교 신앙을 확신한 로저 윌리엄스 역시 박해를 받았다. 모습을 드러낸 침례파에는 크게는 두 분파, 세부적으로 네 분파가 있었다. 특수침례교인의 선조라 할 만한 칼빈주의 진영의 분리파와 온건파, 제 7일 특수침례파, 그리고 보편구원론(일반구원론)을 믿는 일반침례교인의 선조라 할 만한 보편침례파가 있었다.[출처:] 이 시기에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 등이 일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결국 독립교회 내에서 침례파는 분리되었다. 세례를 인정하는 그룹이 특수침례회, 반대 측이 성서중심주의로 나아가며 합의된 개혁파 교리를 점차 잊어(?)가는 일반침례회의 기원이 되어가는 양상이 된다. 물론 침례파, 퀘이커는 회중교회파와 장로교에게 많은 비판을 받으며 대립하였다.
'''3. 정리'''
이러한 내막이 있기에 마틴 로이드 존스 등의 회중교회 목회자들이 서술한 청교도 역사책에 분리주의자들의 등장 다음 순서로 침례회가 나오는 것. 즉 기원 자체가 개혁교회라 보아도 무방하나, 침례와 그 의미를 주장하여 시작된 다른 칼빈주의파(장로회, 회중교회파)와의 대립으로 인해 강경파와 온건파가 침례회의 두 기류가 되었다. 이로 인해 보수적인 성서 해석 만을 남긴 강경파인 일반 침례회 교인과 개혁 교리를 간직한 온건파 특수 침례회교인이 같은 교단에 있는 것이다. 또한 침례회 최고의 설교가로 평가 받는 찰스 스펄젼 목사가 스스로 칼빈주의자라 말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다.
3. 특징
3.1. 신학적 특성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복음주의 신학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침례회 신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 침례회는 타의가 아닌 본인의 의지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신자들에게만 침례를 주어야 하며, 유아세례를 거부한다.
- 침례회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경향이 있으며,[8] 신앙과 설교에서 성서의 역할을 중시하고 복음주의적이다.
- 침례회는 강단을 중앙에 두고 강대상을 옆에 두는 전통적 교회 건축 양식을 기피한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회중의 주의를 성찬식에 집중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보는데, 침례회는 성경 봉독과 성경에 대한 설교가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 침례회는 고정된 예전에 비판적이다. 예전은 신앙을 틀에 맞추고 정형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을 갖고 있으며,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중시한다.[9]
- 침례회는 성직자를 '목사' 혹은 '목회자'라고 부르며, 신부나 사제라는 말을 거부하고 감독제 교회 정치를 거부한다.
침례교단에서 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침례교단에는 신학이 없다'라고 이야기 하는데 조금 잘못된 표현이다. 성경의 내용을 믿는 게 신앙이고 신앙을 연구한게 신학이므로 어떤 신앙이 있다면 어떤 것이든 일단 신학의 범주 안에 들어있게 된다. 따라서 신앙이 있는 이상 신학이 없을 수는 없고 '신학의 자유'를 추구하기 때문에 교리로 채택하고 있는 '''특정한 신학'''이 없는 거다. 이것을 정확하게 다시 표현하면 '''침례회에는 교리가 없다'''고 서술할 수 있다.
침례회에 신학이 없다는 사람들과 이야기 해 보면 금방 알게 되겠지만 신학이 없다는 그 사람도 어느 특정한 신학을 개인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교리로 채택한 신학이 없기 때문에 교리를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목적인 요리문답도 없으며 신봉하는 핵심 교리를 선언하는 신조나 신경 같은 것은 특정신학을 주입하는 도구로 간주하여 강력하게 배격한다. 따라서 사도신경까지도 권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교리에서 벗어난 신학을 이단이라고 하는데 이단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교의를 매우 소극적으로만 규정하기에 정말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다른 종파에 대하여 논리적으로 이단이라 공격하기는 어려운 편이다.[10] 일례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신학자들과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하는 신학자들이 서로를 이단으로 정죄해 온 역사가 있으며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장로회에서는 지금도 감리회 교리를 이단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침례회에서는 감리회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일반 침례교인이라고 하며 장로회 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을 특수 침례교인이라고 부르며 하나의 교단으로 공존하고 있다.[11][12]
3.1.1. 신앙의 자유
침례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추구한다. 신앙의 자유는 침례회를 침례회로 만드는 핵심사상이다. 침례회 신앙의 다른 특징들은 모두 여기서 파생된다. 신앙의 자유 사상에 입각해서 국가나 가정에서 신앙을 강제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 신앙은 개인의 완전히 자유로운 판단에 따른 진실한 고백에 기반하는 것이지, 가정이나 국가의 전통에 기초를 둘 수 없다고 믿는다.
3.1.1.1. 유아세례 부정
장로회에서는 부모의 신앙 고백 아래에서 믿음으로 키우는 자녀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후손으로 믿고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며 그 유아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는 다시 세례를 주지 않고 문답만을 진행한다. 그러나 침례회에서는 자유의지로 진술한 신앙고백만을 인정하고 세례를 준다.
3.1.1.2. 가장 엄격한 정교분리
가정과 같은 개인적인 집단 뿐만 아니라 국가가 신앙을 국민에게 강제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한다. 그래서 청교도들은 국가가 개인의 신앙을 강제하는 영국의 성공회를 피해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으며 가장 엄격한 정교분리는 침례교의 몫이 되었다.[13]
그리스도의 이름을 정면에 내세우며 정권 획득을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은 침례회 신앙과 정면으로 충돌한다.[14] 전통적인 침례회의 신앙에 따르자면, 정치와 종교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물론, 정치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가장 민감하게 신경을 써야 할 부분이지만, 반대로 정치가 종교에게 무언가를 해주려고 접근하는 것도 철저히 거부해야 하는 것이 침례회의 신앙 자세이다. 오는 게 있으면 당연히 가는 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좀더 속된 말로 하자면,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말이다. 근대 잉글랜드에서 국교회(성공회)에 반대하여 신대륙으로 이주했던 침례회 신앙의 선조들을 기억해보면, 정치가 종교에 피해를 주든 이득이 되든, 종교가 정치에 얽히는 자체에 대해 거부하는 것이 침례회 신자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종교와 정치 관계에 대한 자세는, 16-17세기 종교개혁 시기에 종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소유하며 타락한 천주교도 경험하고, 정치가 종교 위에 군림하여 왕의 명령 하나하나에 교회가 영향을 받는 국교회(성공회)도 경험한 끝에 침례회가 낸 결론이었다.[15] 정치와 종교 간의 관계는 어떤 형태가 제일 옳다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주제이나, 아무튼 침례회의 입장은, 정치는 '인간'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에만 집중하고, 종교는 그 인간이 창조주를 따라 살게 하는 데에 집중하자는 것이다.
3.1.2. 만인제사장 원칙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이러한 구절에 근거하여 침례회에서는 만인제사장설을 가장 강력하게 신봉한다. 즉 모든 신자가 성직자다. 장로회만 해도 목사와 장로는 공식적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특별한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라서 장로와 특별히 목사는 다른 신자들과 차이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침례회에서는 이러한 차이조차 받아들이지 않는다. 모든 신자는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제사장들이기 때문에 일반 신자를 평신도라 부르며 스스로 제사장 행세를 하는 목회자를 정통 침례교인은 매우 싫어한다.[16] 왜냐하면 목사가 성도와 하나님 사이의 중간자인 제사장 행세하는 이러한 행태는 심하게 말하면 예수그리스도의 유일한 대제사장 직분을 참칭하는 적그리스도적인 행동이기 때문이다.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장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느니라
믿음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제사장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만인제사장(universal priesthood)이 아닌, 전신자제사장(the priesthood of all believers)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주장도 있다.
목회자는 남들보다 성경을 더 많이 공부하고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좀 더 잘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 그래서 침례회에서는 개별 교회에서 필요한 목회자는 교회내에서 모범이 되는 신자를 선별하여 자체적 또는 위탁을 통해 교육해서 목회자로 삼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에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 목사가 되기도 한다.
3.1.2.1. 성경 해석의 자유
만인제사장 원칙에 의해 모든 신자가 성소에 출입할 수 있는 제사장이므로 신자들은 말씀에 동등하게 접근하게 된다. 곧 성경을 해석하는데 있어 특정인의 특별한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침례회에서 특정 신학을 채택하지 않는 이유도 침례회의 원칙과 원리가 '성경 해석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침례회에 교리가 없는 것에 대하여 교인들은 '''우리는 교리를 믿지 않고 성경을 믿는다.'''고 이야기한다.
결국 다양한 해석의 공존을 인정하는 것인데, 이는 그 가운데 특정한 해석만을 어떤 신학자들이 선택해서 이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가지고 있다. 성경 해석의 자유라는 대의는 모두 수긍하겠지만 일단 교리라는 것이 혹세무민하는 이상한 성경 해석들로부터 신자들을 지켜내기 위해서 신학자들이 싸우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다른 교단들에서는 이러한 판단을 신자들을 대표해서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해 주는데 침례회의 정책은 이 판단들을 각각의 신자에게 책임 지우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성경 해석의 자유를 거꾸로 본다면 신자 개인이 성경을 깊이 있게 이해해야 하는 무거운 의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침례교회들은 다른 교회들보다 성경 공부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고 한다.[17]
침례교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교리는 마치 정형외과용 깁스와 같다. 교리는 신앙의 기초를 확립하고 성경을 이해하는 안목을 길러주어 연약한 신앙이 튼튼해 지도록 도와주는 부목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다. 그러나 교리에 의존하다보면 교조주의에 빠져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신앙을 갖기 쉽다. 침례교 정신은 교리의 긍정적인 면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웃사랑의 성경정신보다 교리를 우선하게 되는 것을 더욱 심각하게 경계하기에 교리가 주는 이점을 포기한다.
3.1.2.1.1.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멈춘다
장로교와의 가장 큰 차이점을 만드는 원칙이다. 장로교는 성경이 불분명하게 나타낸 부분도 명료하게 만들고자 노력한다.
3층천을 오르며 천국의 비밀을 알게된 사도바울조차도 자신의 지식이 청동거울로 자기 얼굴을 보는 것처럼 불분명하다고 서술한 이 구절에 근거해 성경이 모호하게 말한 것을 절대로 명료하게 만들지 않는다. 만약 침례교에서 이단을 정죄한다면 이렇게 모호한 부분을 명료하게 만들겠다고 인간의 해석을 더하는 사람들일 것이다.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원리 때문에 장로교인이 보는 침례교 신학은 허술하고 느슨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단점이 아니다. 침례교 정신은 성경에서 멈추는 그 곳에서 더이상 나가지 않고 멈추는 것이 올바른 신학임을 주장한다.
3.1.2.2. 민주적 교회정치
만인제사장설에 의하여 모든 신자들이 평등하므로 교회정치 또한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한다. 당회라 소수의 지도층(또는 구별된 사람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거부하고 세례를 받았다면 모든 신자들은 동일한 정치적 권리를 가진다. 이를 회중교회 정치라 한다. 이러한 원리는 조직구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모든 교회들은 정치적으로 평등하다.
장로회는 교회 위에 노회를 두고 감리회는 지방회와 감독을 두어 각 교회들이 이들 조직의 관리를 받지만 침례회는 이런 상위조직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교단이라는 것도 다른 교파들과는 성격이 좀 다른데 타 교파에서는 교단이 총회를 정점으로 피라미드식의 수직적 정치구조 위에서 일사분란하고 통일된 행동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침례회에서는 일종의 연합회 성격으로 개별 교회들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 독립적 권한을 가지며 이를 개교회주의라 한다.
침례회에서는 신학적으로는 여성안수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요 장로회에서 여자가 교회를 다스리는 것을 금지하는 구절에 근거하여 장로와 목사안수를 거부하며 심한 경우는 학생회나 청년회의 회장도 남자만 맡을 수 있도록 규정하지만 침례회의 목사는 교회를 다스리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여성안수가 시행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순수하게 정치적인 판단이다.
3.1.3. 보수적 신학
하지만 이런 배경과는 달리 침례회의 신학은 대체로 보수적이다.[18] 미국에서 보수적이기로 유명한 신학교들은 대부분 남침례회 소속이다.
역사를 보면 진보신학에 대한 반발로 보수적 신학교가 세워지는데,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진보적 신학이 유입되어 이에 대한 반발로 새로운 보수적 신학교가 설립된다. 그리고 진보 신학의 유입과 새 보수 신학교 설립이 반복되어 왔다. 그러나 다양한 신학이 늘상 충돌하고 있는 탓인지 침례회에서는 일관적인 보수 신학이 유지되고 있다. 교리를 거부하는 침례회의 성향은 전술하였듯이 필연적으로 신앙의 혼란을 유발한다. 침례회 신학자들은 구도적인 성경 공부를 통해서 이러한 신앙의 혼란을 극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확신이 남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침례회 신학의 보수성은 이들이 정통 신학에서 신앙의 혼란을 극복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침례회 신학은 초심자는 혼란스럽게 만들지만 혼란의 극복 과정을 통해서 누구보다 확고한 신앙을 선물한다고 정리할 수 있다. 다만 그 혼란을 극복하여 얻은 현재의 자신들의 신앙들이 정말로 진리에 서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이단들 역시 확고한 자신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학문적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자기세뇌를 통한 결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신앙적 의지와 자유, 보수적인 성서 해석을 중시하는 교단이라는 느낌이 강하다. 다만 이것이 거꾸로 작용하여 침례회의 이름을 딴 이단(정확하게는 사이비)들이 나타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구원파 등) 별도의 신학교 출신이 아니더라도 이론상 목회가 가능하기 때문. 다만 한국은 유독 장로회의 교세가 강하기 때문에 장로회의 이름을 딴 이단도 많다
음주나 흡연에 대해서도 매우 보수적이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 리서치센터(Pew Reserch Center)에서 2014년 전화 인터뷰 방식으로 50개 주 3만 5천 여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Religious Landscape Study에 따르면 미국 내 프로테스탄트의 비율은 46%이며, 그 3명 중 1명인 15% 가량이 침례교인이다. 2007년 삶의 길 연구소(LifeWay Research Center)가 실시한 조사결과 미국 내 개신교 목회자와 평신도들이 음주에 대해 관대한 태도를 갖고 있으나 남침례교가 음주에 있어서 다른 교파들보다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남침례교는 2006년에도 주류를 제조 선전하거나 사고 파는 행위 주류를 소비하는 행위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역사적으로도 침례회는 과거 금주법을 지지했던 교단들 중 하나였다.
다만, 위의 설명은 어디까지나 미국 남부와 한국 기준이다. 맨 밑에 하술하듯이 유럽 국가의 침례회나 미국 북침례회(American Baptist Churches)는 대체로 진보적이어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우호적이다.[19] 개인의 성경 해석을 중시하기 때문에 보수적이 될 수도, 진보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조직 면에서는 상반되는 성공회와 교리 문제에서는 묘하게 닮아있다. 둘 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이단을 상대하기에 취약하다는 것! 성공회는 자유주의적인 학풍이 강하여 39개 신조로는 이미 출현했던 방식의 이단을 대처하는 수준이며, 침례회 역시 삼위일체와 이신칭의 정도의 기본 교리만 가지기에 취약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이단은 다들 너무 유명해서 실제 목회하면서 대처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다.
3.2. 조직 특성
침례회의 교회운영은 다른 개신교의 교단과 매우 다르다. 침례회는 감독을 두는 감리회와 주교를 두는 성공회처럼 중앙집권적 체제를 운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장로회처럼 개교회마다 장로 중심의 당회를 두고 교회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다. 침례회는 민주주의적 체제로 교회를 운영하는 것이 원칙이다. 교회의 현안에 대해 모든 세례교인을 대상으로한 회의를 열고, 거기에서 결정된 사안을 교회의 방침으로 한다. 침례회의 중앙 교단인 총회는 '지방회'[20] 에 간섭할 권한이 없으며, 심지어는 개교회에도 간섭할 권한이 없다. 그렇다고 총회가 도·시별 지방회에 아예 간섭 안하는건 아니고, 약간은 큰 틀에서 조언하는 수준이다. 총회는 개교회 목사들이 모여 토의를 통해 교단의 나아갈 방향과 협력을 도모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또한 지방회 역시 소속 교회에 간섭할 권한이 없으며, 지방회 역시 개교회들의 협력을 위한 자치모임과도 같다.
침례회의 직분 역시 특성이 있는데 목사 외에 장로, 권사, 집사등을 두는 다른 개신교 교단과 달리 침례회의 직책은 주로 목사와 집사뿐이다. 그러나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각 침례교회가 장로 제도을 도입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특별히 장로교회의 영향을 받아 집사도 대외로는 장로로 칭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21] 교회의 운영은 당회 혹은 주교회의에서 결정하는 것이 아닌, '사무처리회'라 불리는 전교인 회의를 통해 자유로이 안건을 제출하고 다수결로 결정한다.
또한 목회자가 되는 방식도 다른 개신교 교단과 달리 아무나 신학교에 가는 것이 아니라 개교회에서 필요한 경우 신학공부를 별도로 하게 하여(주로 신학교에 보내는 방식) 필요한 만큼 목회자를 양성하는 것이 원래의 방식이다. 성소가 있는 침례교인이 목회자가 되기를 원할 경우 사무처리회를 통해 교회 교우들의 인준을 받고 나아가 지방회의 최종인준을 통해 신학생이 되는 것이 원칙이다. 최근에는 이러한 인준 절차는 유지되고 있지만[22] 한국의 개신교의 전체적인 하락세로 인해 신학 공부를 마친 전도사(목사 후보생)가 모교회로 돌아와 목회를 하는 경우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기독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성소식별(discernment)는 매우 중요한 대목이지만 침례회에서는 성소식별이 중우정치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비판이 있다. 교단의 성소식별이 중우정치를 통해 이루어지면 신학적 훈련이 부족한 인물에 대한,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목사/전도사 안수의 건이 흔하다.
아무튼 회중교회를 제외한다면 교회론 측면에서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거의 대척점에 있는 교단으로 볼 수 있다.[23]
3.3. 침례
중국과 한국에서는 기성교회의 세례(Baptism)를 침례(Immerision)라고 칭한다. 침례는 기독교의 Baptism(세례)를 2번 번역하여 표준어인 세례(Baptism)를 침례(Immersion)라고 칭하는 것이다.[24] 미국의 Baptist교회는 세례교라고 칭하지만 한국은 침례교(Immerisionist)라고 칭한다. 16세기의 종교개혁을 따르는 기성 기독교와는 달리, 17세기의 급진적 기독교는 물 속에 완전히 잠기는 '침례'라는 의식이 중요시되었다. 그 근거로 예수가 세례자 요한에게서 받은 의식이 '''침수례(Immersion)'''였다고 주장하며(이는 세례의 본래 형태에 기반한다. 세례 항목 참고), 일반적으로 불리는 명칭인 '세례 요한' 대신 '침례 요한'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25]
또한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믿음의 고백이 없는 침례는 의미가 없다고 보고 있다. 침례를 받을 수 있는 나이는 교회마다 다른데 어떤 곳은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만 되어도 '고백'을 할 수 있으니 받을 수 있다고 보는 한편 또 어떤 곳은 세속적 법적 성년기준인 만 17~20세가 되어야 침례를 줄 수 있다고 하는 식이다. 침례 자체가 다른 교파의 '입교'를 겸한다고 볼 수도 있다.
3.4. 일반침례교인과 특수침례교인
일반적으로 침례교 내부에서 공존하는 교인들이지만 구원관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두 부류를 일반 침례교인과 특수 침례교인으로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한 은혜라는 '일반구원론'을 따르는 사람들이 '일반'침례교인이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에 충분하나 결론적으로 하나님이 선택하셔서 예정된 이들만을 구원한다는 '특수한(특별한) 은혜라는 개혁교리(특수은총론)'를 따르는 사람들이 '특수'침례교인이다. 주의할 점은 특수침례교인이라도 결론만 알고 있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예정된 자들만 십자가에서 구원 받았다는 것이 특수은총론이라는 등의 서술... 결론만 아는 것과, 전체적인 맥락을 아는 것의 어감은 전혀 다르다.
현재도 루터파내 강경파, 웨슬리안을 포함한 아르미니우스파, 심지어 강경한 일반침례교인 등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성경을 왜곡한 사람들로 개혁교인과 특수침례교인을 공격하며 매도하는 것은 바로 특수은총론의 결론부 만을 그들이 알고 있거나 의도적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현재 침례교단 내에서도 공존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편구원론(일반은총론)을 강하게 밀고 나갈 경우, 구원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교회 스스로의 직무유기 탓이라는 둥, 행위구원론 논란, 혹은 무능한 절대자라는 등의 비아냥을 피할 길이 없다. 특수은총론을 강하게 밀고 나갈 경우 '''개혁교회 VS 아르미니우스주의 및 루터교 강경파 연합군'''의 논쟁이 재현될 여지가 크다.
3.5. 비판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삼위일체 등의 기독교 핵심신앙을 반박할 수 있다. 기독교는 단순히 성경에 대한 독후감 모임이 아니라 2천년 간 교부들과 교단 소속 선생들이 시대를 건너 서로의 신학을 비판하며 체계화해나간 것이다. 침례회에 전반적인 분위기는 신학 그 자체의 중요성이 무시되는 측면이 있다(그러나 침례교의 철학에 따르면 교단, 전례, 역사 등에는 전혀 무게를 두지 않는것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문제는 이로인해 침례회가 매우 독단적이고 교단내, 그리고 교단간의 교류를 피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침례교의 분위기와 주류 기독교의 분위기 차이는, 의학과 유사의학에 비교할 수 있다. 실증적 실험과 의학자들 간의 상호대화로 인해 건전하고 효과적인 치료를 추구하는 의학과는 달리 유사의학에서는 개인, 혹은 폐쇄적 집단의 신념과 취사선택으로 인해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한다. 치료 + 환자를 복음 + 신자로 바꾸어 생각하면 조금 선명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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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침례교인들)은 논의할 게 없다. (왜냐면) 침례교회는 민주주의, 영성 그리고 신앙의 자유('soul liberty') 측면에서 장로교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기 때문에, 장로교인, 회중교인, 제자회 교인같은 사람들과, 더 유기적인 관계를 추구하자는 주제로 대화하는 것이 시간 낭비이기 때문이다." (Christian Century magazine 1911년 7월호)
그러나 '''책 1권만 읽은 위험한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는 말이 있듯이, 성경 한권에서, 그것도 집단적 독서가 아닌 개인적 독서를 통해 편집적인 신앙을 도출해내는 방식은, 천주교는 물론 대부분의 개신교 주류(mainline) 기독교단에서 침례회를 경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4. 한국의 침례회
여타 한국 기독교 교단이 그렇듯 미국에서 들어왔고, 미국 침례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중이다.
한국의 침례회는 1889년 12월 8일 캐나다 선교사 맬컴 펜윅(Malcolm C. Fenwick)에 의해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대한기독교회'(1921년 '동아기독교회'로 교단명 변경)가 그 기원이다.[26] 펜윅은 한국인의 특색에 맞춘 선교에 집중했으며, 도시보다 산간 및 해안가 선교에 집중했다.[27] 또한 만주까지 선교사를 파송했다. 펜윅의 신학과 성경관은 매우 보수적이었는데, 이러한 특색은 현재의 한국침례회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남아있다.
1949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교단명이 변경되었으며, 미국 최대의 교단인 남침례회 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와 1950년에 제휴하였고 6.25 이후 존 애버내시(John A,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등의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교세를 확장했다.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를 따르는 교인들과 동아기독교회 출신 토착 교인들 간의 신학적 논쟁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일명 포항파. 안대벽 목사 중심)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미국 남침례회 선교사 계열, 일명 대전파. 장일수 목사 중심)로 분열되기도 했으나,[28] 1968년 두 파벌이 합동하였다.[29]
현재의 명칭은 '기독교한국침례회'(약칭 "기침" )이다.
그 외에 1950년 미국 남침례회를 탈퇴한 목회자들이 주축이 되어 설립한 독립적 교회들의 연합단체[30] 인 '성서침례친교회'(약칭 "성침")도 1954년 미국의 아이작 포스터(Isaac Foster, 한국명 표수다) 선교사가 대한민국에 들어와 서울 왕십리에 성서침례교회와 신학교를 설립한 이래 작은 규모이지만, 꾸준히 활동하고 있다.
또한 베뢰아연합을 탈퇴한 교회와 목회자들이 2017년 12월에 미국 북침례회 (American Baptist Churches, ABCUSA)와 신앙과 신학 노선을 함께 할 것을 천명하면서# # ‘한국침례교회연합’(한침)이 설립되었다.
4.1. 교단 신학교
한국의 수많은 개신교 교단이 교단의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여럿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31]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신학교는 1954년 설립된 대전광역시 유성구 소재의 한국침례신학대학교가 유일하다. 1960년대에는 포항파가 설립한 대한침례회신학교도 있었으나 1968년 포항파와 대전파가 합동하면서 침신대에 흡수, 폐교되었으며, 수도권 내의 군소 신학교와 영남신학교 등 침례회 군소 신학교들을 통합하여 1981년 경기도 안성시에 4년제 학력인정 각종학교인 수도침례신학교를 설립하였으나, 2006년 침례신학대와 통합하여 안성캠퍼스로 개칭되었고, 침례신학대로 편입한 학생들을 제외한 수도침례신학교 잔류 학생들이 모두 졸업함과 동시에 2009년 폐교되었다.
한편, 한국성서침례친교회는 1966년 설립되어 2003년 대학원대학교로 개편된 경기도 이천시 소재의 성서침례대학원대학교와, 2006년 설립된 서울특별시 성동구 소재의 성서침례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한국침례교회연합(한침)은 2017년 12월에 설립되었고, 다음 해인 2018년 3월부터 한국침례신학교(www.koreanbaptistseminary.org)를 운영하고 있다.
4.2. 지역 분포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내 5대 개신교 교파'''[32] '''중 지역적 편중(쏠림)이 가장 심하다.'''
교단의 하나뿐인 신학교가 수도권이 아닌 지방(대전)에 있다보니,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국내 5대 개신교 교단이고 총회가 서울 여의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속교회 지역편중이 심각한 수준이다.[33]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한국침례회는 충청권 남부 및 경기도 남부, 전라북도 북부 지역, 부산 및 경상북도 동해안 지역[34] 등에서 교세가 강하다. 특히 '''침례신학대학교가 위치한 대전과 인근 위성도시 지역에 교세가 가장 집중되어 있고''',[35] 그 외에 고양, 수원, 부산, 포항, 문경, 예천, 울진, 울릉도 등지가 침례회의 교세가 강한 편이다. 더욱이 이들 지역으로의 집중은 개교회주의가 강하고 교회 설립이 자유로운 침례회의 특성에 신학교 통폐합이라는 명분을 내세운 지역 거점 신학교의 소멸까지 겹쳐져[36]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다.[37][38]
기독교한국침례회 홈페이지에서 지역별 지방회 목록을 살펴보면 다른 지역은 인구 990만명인 서울만 31개일 뿐 도단위의 경우 잘해야 도시별로 1개, 대도시의 경우는 많아야 4~5개 수준인데 비해 인구 154만 명에 불과한 대전에는 무려 15개의 지방회가 있다. 비슷한 인구수를 가진(151만 명) 강원도만 해도 지방회는 6개에 불과하며, 인접 지역인 충북(159만 명)은 7개, 충남(211만 명)은 12개다. 이를 지역별 인구수 대비로 환산해 보면 서울이 지방회당 31만 9천 명[39] , 강원도는 지방회당 25만 1천 명, 충북은 22만 7천 명, 그나마 밀도가 높은 편인 충남도 17만 6천 명 정도 인구를 커버하는데 비해 대전은 지방회당 10만 3천 명 정도 밖에 커버하지 않아 그만큼 인구 대비 침례교회의 비중이 높다는 결과가 나와 침례회의 지역 편중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다. '''당장 바로 아래 문단에 수록된 국내 침례회 주요교회 명단 중 5개 교회가 대전에 있다!!'''
국내에서 인구 대비 침례회 비중이 대전보다 높은 지역은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인구수 1만 명 남짓에 별도의 지방회가 설치되어 있을 정도로 지역 교회의 절반이 침례교회이며, '리' 단위로 침례교회가 하나씩 있을 정도다.[40][41] 침례회의 교세가 약한 광주광역시, 전라남도와[42] 인천광역시, 강원도, 제주도 등지에서는 침례회를 이단으로 오해하는 사례도 적지 않음을 감안하면 이는 심각한 수준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개교회주의 성향이 강하고 신학교 교수들이나 신학생들의 신학 노선도 천차만별인 침례회의 특성은 교세 집중 지역에 교회가 난립해도 통폐합하기 쉽지 않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43] 교단 내에서도 수도침례신학교 폐교 이후 수도권 신학교의 부재[44] 와 지역 편중의 문제점을 인식하면서 2010년대 들어 동두천 주한미군 기지 캠프 님블 부지에 침례신학대의 수도권 캠퍼스 설립을 추진하여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승인까지 얻었으나 뚜렷한 진전이 없이 계속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승인이 취소되고 말았다.[45]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경우 기독교한국침례회와는 달리 주로 수도권에 교세가 집중되어 있으며, 기침의 중심지처럼 인식되는 대전 지역은 오히려 성침의 교세가 약한 편이다.
4.3. 주요 교회와 목회자
4.3.1. 기독교한국침례회
- 지구촌교회: 최성은 목사(3대, 현 담임), 진재혁 목사(2대, 케냐 선교사 파송), 이동원 목사(원로)[46]
- 수원중앙침례교회: 고명진 목사(현 담임), 김장환 목사(원로)[47]
- 대흥침례교회: 조경호 목사(현 담임), 안종만 목사(원로)[48]
- 갈보리교회: 원재춘 목사
- 늘사랑교회: 정승룡 목사[49]
- 중문교회: 장경동 목사[50]
- 여의도침례교회: 국명호 목사[51]
- 삼호교회: 안종대 목사[52]
- 강남중앙침례교회: 최병락 목사(3대, 현 담임), 피영민 목사(2대), 김충기 목사(원로)[53]
-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54]
- 서울교회: 성도현 목사[55]
- 서울제일교회: 김형윤 목사
- 신촌중앙교회: 정인환 목사
- 빛의자녀들교회: 김형민 목사[56]
- 영통영락교회: 고흥식 목사[57]
- 성광교회: 유관재 목사(현 담임), 유병기 목사(원로)[58]
- 열린교회: 우경수 목사
- 열음터교회: 신광은 목사[59]
- 로고스서원: 김기현 목사[60]
- 포도나무교회: 여주봉 목사[61]
- 은혜드림교회: 최인선 목사
- 부산침례교회: 김종성 목사[62]
- 영안교회: 박정근 목사[63]
- 해운대교회: 안효원 목사(현 담임), 송성구 목사(원로)
- 범일교회: 최재훈 목사(현 담임), 최병산 목사(원로)
- 새밝교회: 강상원·강밝내 목사(공동담임)
-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64]
- 하늘비전교회: 오영택 목사(현 담임), 오관석 목사(원로)[65]
- 함께하는교회: 김요한 목사[66]
- 점촌침례교회: 김위수 목사[67]
- 울산소리침례교회: 진영식 목사
- 생수의강교회: 천명원 목사[68]
- 성림침례교회: 김종이 목사[69]
- 행신침례교회: 김관성 목사[70]
4.3.2. 한국성서침례친교회[71]
4.3.3. 한국침례교회연합
- 진성교회: 김종포목사
- 주영광교회: 김근식목사
- 예수생명교회: 장경남목사
- 평강교회: 박장환목사
- 예성교회: 신용배목사
- 믿음교회: 정금자목사
- 새나라교회: 이순자목사
- 참아름다운교회: 여운이목사
- 신성교회: 차경호목사
- 기쁨가득한교회: 문상호목사
4.3.4. 침례회 출신 독립교회
침례회 소속이었으나 초교파 독립교회를 선언한 독립교회와 목회자 목록.
- 은혜성경교회(윤명길 목사) [74]
4.4. 교단
- 기독교한국침례회(기침): 1889년 맬컴 펜윅이 설립한 원산 소재 동아기독교회를 계승한 교단. 해방 이후 미국 남침례회와 자매관계를 맺고 있다. 1968년 남침례회 제휴파와 구 동아기독교파의 합동 이래 침례신학대학교가 소재한 대전과 그 주변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발전하였고 신학교들을 통폐합하면서 사실상 교권을 잡아 왔기에 대한민국 개신교계에서 대전과 기침 교단을 동일시하는 인식이 만연할 정도로 대전을 중심으로 한 충청권 남동부 지역에서 특히 교세가 큰 편이며,[75][76] 서울, 광주·전남 및 강원도, 제주도 지역은 교세가 약한 편이다. 침례회의 특성인 개교회주의와 자율성, 민주주의의 원칙과 개인 의지에 의한 신앙고백, 유아세례 부정을 충실히 지키는 반면 예배전례는 거의 지키지 않는 교단으로, 목사는 예배시 예복(가운)을 대부분 입지 않으며 침례조[77] 를 제외하면 강단에 성찬대나 십자가, 기타 장식이 없이 매우 간결하고[78] 예배 형식도 매우 자유롭다. 교단 차원에서는 정교분리를 추구한다고 하지만 남침례회의 영향을 받은 교단 특성상 신앙은 물론 정치 성향도 특히 보수적이어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등과 함께 대한민국 기독교 우파의 주축을 이루는 교단 중 하나이다.[79] 다른 교단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열린예배, 신사도운동, 극단적 세대주의에 대해서도 교단 내 대다수의 교회들이 관대하거나 적극 수용하는 편이며, 가톨릭이나 WCC에 대해서는 대체로 비판하거나 적대하는 입장을 보이지만, 한기총에 가입하는 등 보수 성향 교단을 중심으로 개신교 연합활동은 어느 정도 하고 있다.
- 한국성서침례친교회(성침): 1950년 미국에서 남침례회를 탈퇴한 목회자들이 설립한 독립교회 연합단체. 1954년 아이작 포스터 선교사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서울 왕십리에 자리를 잡고 활동하면서 기침과 달리 서울을 중심으로 주로 수도권의 침례교회에 많이 분포한다. 신앙적으로는 기침보다 더 보수적일 뿐 아니라 다른 교단과의 연합활동이나 교류도 거의 없는 편이다. 개교회주의가 강하면서도 어느 정도 교단으로서의 연합성을 가지고 있는 기침과 달리 성침 교회들은 개교회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이 기침보다 더욱 강하고 예배전례 면에서도 매우 자유롭다. 다만 예장고신 등과 마찬가지로 정교분리 원칙에 충실한 성격을 추구하고 있어 정치 활동은 거의 하지 않으며 기침에 비해 교세가 매우 약하여 일반 평신도들 사이에서는 인지도가 매우 낮은 편이다.
- 한국침례교회연합(한침): ‘한국침례교회연합’은 ‘건강한 신약교회’와 ‘역사적 침례교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약 60교회가 참여하여 설립되었다(2017. 12. 12). 이 교단은 미국침례회, 필리핀침례회 등 외국 침례교, 그리고 침례교세계연맹과의 선교 협동을 통해 침례교의 발전에 기여할 계획을 갖고 있다. 교단 설립에 이어서 ‘한국침례신학교’(Korean Baptist Seminary)는 한국침례교회연합 직영신학교로 설립되었다(2018. 3. 1). ‘한국침례교회연합’은 그리스도의 주재권, 지역교회의 자치, 전신자 제사장주의, 민주적 회중정치 등 ‘건강한 신약교회’와 ‘역사적 침례교회’를 구현하고자 설립되었다. 요컨대, 이 교단은 2017년 서울 성락교회 김기동 목사의 비리 사건으로 해산된 옛 기독교베뢰아연합 내 김기동 목사의 퇴출을 주장하던 반대파 목회자들이 정통 침례회 신학으로의 복귀를 선언하며 결성한 교단이다. 미국침례교회(ABC-USA, 북침례회)와 제휴관계를 맺고 역사적 정통 침례교 신학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기존 기성교회들이 올바르고 건전한 신학적 방향으로 이끌어 주기를 바란다고 발표하였다. 관련 기사에 따르면 미국침례회 사무총장도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한편 한국침례교회연합은 수도권에 신학대학원을 개설하고, 이를 바탕으로 이후 역사적 침례교회 신앙과 신학을 갖고 한국 개신교계를 이끌 지도자들을 배출하는 대학교를 세울 비전을 갖고 있다고 한다.
- 독립침례교회: 특정 교단에 소속되지 않으면서 독립적으로 침례회 신학 또는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들. 독립 침례회 자체가 남침례회에서 탈퇴한 목사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고,[80] 침례회라는 특정 교파 신앙을 표방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무교단 독립교회나 초교파 교회들과 구분된다. 미국에나 있을 것 같지만 대한민국에도 소수의 독립 침례교회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경우 세례 대신 침례를 베풀고, 신자 개인의 자율적인 신앙 고백을 중시하며 유아세례를 부정한다는 점에서는 정통 침례회와 비슷하지만, 교단에 소속된 교회들에 비해 근본주의 혹은 공격적이고 강경한 성향이 대다수이며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와 맥이 닿는 경우가 많다. 신학도 정통 침례회(혹은 침례회 정규 교단)와 거리가 멀거나 아예 다른 신학을 가질 수 있고, 일부 독립 침례교회들의 경우 개신교 정통 교단들에 의해 이단으로 정죄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는 서울 성경침례교회와 인천 사랑침례교회가 독립 침례교회에 속하며 고인드립 남발 등으로 많은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도 독립 침례교회에 속한다.
4.4.1. 이단 시비가 있는 교단
4.4.1.1. 명백한 이단 교단
- 성경침례교: 밥존스대학 출신 피터 럭크만이 설립한 펜사콜라 성경신학원의 한국 지부. 1995년 이송오가 창시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송오 목사는 '한글킹제임스성경' 라는 성경번역본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사실 교단보다는 독립교회연합정도라고 보면 된다.
- 대한예수교침례회: 사실 이쪽은 구원파의 한 분파로, 2개의 분파(이요한파, 박옥수파)가 있다. 먼저 구원파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던 '기독교복음침례회' 와는 구분이 된 다른 교단으로서 각각 각자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요한파' 는 거의 기성교회/교단처럼 운영되기도 한다, 심지어 자기네들은 구원파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상시 전도집회를 통해서 교세를 확장시키곤 한다.
- 대한기독교침례회: 대한예수교침례회 이요한파에서 활동하던 구영석이 1980년대 중반 갈라져 나온 분파로, 전라북도 남원시에 총회를 두고 있다. 초창기에는 대한예수교연합침례회 또는 새생명선교회라는 명칭을 썼으나, 2017년 교단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 좋은소식선교회로 변경하였다. 전국적으로 교회 수가 20개 정도밖에 되지 않는 군소 교단이며, 스스로는 모라비아 형제단(Moravští bratři)에 뿌리를 두었다고 주장하나 신학적 성향은 생명의말씀선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 한국킹제임스성서협회: 1978년부터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강서중앙교회 담임목사였던 서달석이 1993년 기성교단으로부터 이단 정죄받고 소속교단으로부터 면직처분을 받고 창설한 자생 모임. 구원파의 구원관 및 킹 제임스 성경 유일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생명의 서신' 이라는 인터넷 서점을 통해서 본인의 번역본 및 저서 그리고 성경강해 시리즈를 제공하고 있다. 서울성경침례교회 이송오목사와는 사이가 매우 좋지 않다.
4.4.1.2. 이단 여부에 논란이 있는 교단
-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기베연): 아래 세베연 설립자인 김기동이 설립한 교단이었다. 1987년경 현재의 기독교한국침례회(위의 주요교회와 목회자에 나온 교회가 소속된 그 침례회)에 소속되어 있던 성락교회와 김기동목사와 관련한 이단시비가 있자 기독교한국침례회를 탈퇴하여 김기동 목사와 뜻을 같이 하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함께 김기동목사가 설립한 교단이다. 초기에는 기독교한국남침례회(미국 남침례회와는 무관)라 불리다 기독교한국침례회연맹(기침연맹)으로 개칭, 이후 기침 측에서 이름이 같다며 항의하자 사도행전 17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에서 따와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으로 바뀌었다.[81] 하지만 이후 장로회 통합측의 사면철회 사건과 SBS 보도사건 이후 성락교회 내에서 김기동 감독을 지지하는 측(원감파)과 비판하는 측(개혁파)의 대립이 발생할때 기베연 내부에서도 그러한 대립이 있게 되자 결국 교단결의를 통해 해산하게 되었다. # 이후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측은 세베연을, 지지하지 않는 측은 한침을 각각 설립하였다. 그리고 성락교회의 개혁파(성락교회 교회개혁협의회)는 세베연, 한침 어느 쪽도 속하지 않고 독자노선을 걷고 있다. 참고로 기베연은 법적·행정적으로 완전히 해산되었고 아래의 세베연과 한침 은 기베연이 해산, 소멸된 이후 설립된 교단이므로 어느 곳도 기베연의 법적·행정적 후신은 아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참조.
- 세계베뢰아교회연맹(세베연): 설립자 김기동 목사.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의 2016년 사면취소 사태와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김기동 목사의 행각이 방영된 이후 성락교회 내부에 김기동 목사를 지지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의 분열이 일어나면서[82] 기존의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기베연)[83][84] 이 해산되면서 새로 설립된 교단이다. 성락교회 사태에서 김기동 목사 입장을 지지한다.
- 사랑침례교회: 정동수 목사가 이끄는 독립 침례교회. 킹제임스 성경 흠정역 번역본을 출간한 교파이기도 하며, 성경침례교와는 적대 관계이지만 기존 개신교 교단들도 자신들과 뜻이 맞으면 인정하는 편이어서 이단 여부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 파리열방교회: 수장인 S목사는 프랑스에서 침례회측의 안수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고 주장하나, 제대로 된 과정을 통해서 목사가 되었는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파리 교민사회에서 한때 영향력이 일각에서 있지만 연이은 성폭력 사건으로 인해 이미지가 실추되어가고 있다.
5. 국외의 침례회
유럽에서는 재세례파와 특수침례회, 일반침례회가 중심이며, 미국의 침례회보다 급진적이며 진보적인 색채가 더 짙다. 물론 유럽에도 미국의 일부 침례교 교단처럼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침례교 교단이 존재한다. 하지만 규모와 영향력 면에서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85]
우리나라는 미국 침례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미국에서는 침례회가 개신교 교단 중 가장 거대하다.[86] 대표적인 교단은 흔히 '바이블 벨트'로 불리는 남부 보수 공화당 지지 기반 지역의 교회들이 중심이 된 남침례회총회(Southern Baptist Convention)이며, 한국의 침례회는 미국의 남침례회와 가깝다. 이 외에는 남침례회총회와 노예 문제로 분열[87] 한 미국침례회총회(American Baptist Convention), 마틴 루터 킹 목사가 기존 침례회 교단을 탈퇴하고 창설한 전국진보침례회총회(Progressive National Baptist Convention)등이 있다.
현재 미국의 침례회 목회자 중 유명한 목사는 순회전도집회로 유명한 빌리 그래이엄, <목적이 이끄는 삶>을 저술하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대표 기도를 한 릭 워렌, 조용기 목사를 비판하여 국내에 더욱 유명해진 존 파이퍼[88] , 급진적인 회심을 강조하는 폴 워셔 목사 등이 있다. 각종 고인드립 및 패드립 남발로 유명한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도 있다.[89]
2014년 9월, 미국 남침례회 소속 캘리포니아의 뉴하트 커뮤니티 처치의 담임목사 대니 코르테스가 동성애자와 동성커플을 교회의 회원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는 이유로 남침례회에서 제명되었다. 대니 코르테스 목사는 자신의 아들 역시 게이었지만, 기독교인이고 목사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으로 그 사실을 숨기고 살아왔음을 깨닫고, 그리고 수많은 성소수자가 이웃으로 존재함을 깨닫고 스스로의 신앙적 양심과 고찰을 통해, 그리고 사무처리회라는 침례회의 절차적 전통을 거쳐서 결정한 것이다. 그럼에도 미국 남침례회는 고수하는 교리를 더 중요시하여 제명한 것이다.[90] 남침례회의 뿌리는 철저한 근본주의임을 다시금 증명한 역사다.
남침례회의 근본주의성은 사회문화적 측면 외에도 미국의 정치적 현실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는데, 남침례회 신학교(Southern Baptist Seminary)의 알버트 몰러 총장[91] 은 조직신학자로서 몰몬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입장을 고수한 인물이다. 심지어는 논문도 썼고 자기 홈페이지에서 까기도 한다. 그러나 보수적인 성향이 너무 강해서인지 2012년 미국 대선에서 밋 롬니가 몰몬교인임에도 불구, 그가 공화당 후보라는 이유로 지지했으며[92] , 롬니의 패배에 대한 논평을 "미국 복음주의자에겐 충격적인 결과", "세속화된 미국에서 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후보의 승리"라며 분통을 터트렸다.[93]
이러면 마치 버락 오바마가 무신론자인 것처럼 보이는데, 오바마는 엄연히 정통 개신교인이다. 당연하게도 오바마가 과거에 속했던 교파인 연합 그리스도의 교회(United Church of Christ)가 대한민국의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대한성공회처럼 사회 참여를 강조하고 동성애자에게 관대한 진보적인 성향을 지닌 교단이다. 그리고 대통령 취임 이후에는 오바마 대통령 가족 모두가 백악관 근처의 침례교회에 등록해서 다니고 있다.[94] 또한 해비타트 운동으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 역시 남침례교인[95] 으로 홍보하다가 지미 카터가 동성애자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발언하고, 남침례회의 여성 목사 안수를 주장하며,[96] 미국의 종교 근본주의를 경고하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이라크 전쟁과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자 남침례회 일부에서 지미 카터를 세속주의에 물든 사람이라며 까고 있다.
하지만 저 남침례회조차 진보적이라며 비난하는 극소수의 극단적인 보수성향 독립교회들도 있다. 이들은 특정한 교단을 형성하지 않고 성향만 공유하는 편이다. 대체로 남침례교인들조차 한 수 접어줄 수준의 과격성을 띄고 있는 교회들이다.
6. 나무위키에 항목이 존재하는 인물
6.1. 목회자
6.2. 평신도
- 권정달
- 김경란
- 김명곤
- 김상민(정치인)
- 김성경, 김성령 자매
- 김연준: 작곡가, 학교법인 한양학원 설립자
- 김진수(코미디언)
- 김진표(정치인)
- 김형규
- 김효진(코미디언)
- 남경필
- 루이 암스트롱
- 루카스 블랙
- 마일리 사이러스
- 마크(GOT7)
- 박세직: 제23대 서울특별시장.
- 박준병
- 버락 오바마
- 벤 조브리스트
- 빌 클린턴
- 사라 본
- 설동호
- 설민석
- 션 리차드
- 손수조
- 손지창, 오연수 부부
- 스티비 원더
- 신세경
- 신수지
- 신현준
- 아레사 프랭클린
- 안민석
- 양승은
- 앨 고어
- 에이브러햄 링컨
- 염홍철
- 우현(배우), 조련(배우) 부부
- 우희진
- 워런 G. 하딩
- 웨스 크레이븐
- 윌 스미스
- 유종근
- 이나영
- 이민정
- 이범래
- 이수영(가수)
- 이재룡
- 이찬열
- 이학봉
- 정옥숙
- 정용기
- 조관우
- 존 데이비슨 록펠러
- 지미 카터
- 채드 브래드포드
- 척 노리스
- 최강희(배우)
- 최준희
- 최진실
- 최진영
- 카를로스 수베로
- 카말라 해리스
- 케빈 코스트너
- 태영호
- 테드 크루즈
- 트레이 힐만
- 패티김
- 하토야마 유키오
- 하토야마 이치로
- 한현민(모델)
- 해리 S. 트루먼
- 허태정
- 황교안
- 황수정
- 황영시
- 휘트니 휴스턴
7. 관련 문서
8. 외부 링크
[1] BWA·Baptist World Alliance[2] 이중 무려 미국인만 약 1,600만 명에 이른다.[3]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특징은 개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방언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성경을 권위가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편, 칼뱅주의를 지니는 교회도 있다. 아울러 축도가 없으며, 폐회기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미국도 자유 의지 침례교회나 성서침례교회, 그리고 독립침례교회의 경우도 동일하다.[4] 개신교의 대부분 교단들은 '세례'라고 칭하지만, 침례회는 그리스어 성서의 βαπτιξω가 '담그다'라는 의미라는 것에서 물에 온전히 들어간 뒤 나오는 '침수례'를 주장하기에 세례가 아닌 침례라고 부른다. 물론 침례회가 아닌 다른 교단들 중에서도 정교회, 재림교회, 오순절교회 등과 같이 약식 세례가 아닌 침례를 주는 교단들이 있다.[5] 성공회는 (모든 국민이 믿어야 하는 국교회로서) 가톨릭/루터교회/장로교회 등 여러 기독교 교파들의 교리를 모두 아울러서(비아 메디아)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수긍할 수 있는 교회가 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런 성공회에서도 포용하기 힘들었던 기독교 교파 중 하나가 침례교였다. 그 가장 큰 이유로는 유아세례를 부정하여 세례를 다시 주어야 한다는 주장 때문이었다. 세례를 2번 주는 것에 대해 신학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성공회 39개 신조 중 38조의 "그리스도인의 부와 재산은 그 권리와 명칭과 소유에서, 재세례파 사람들이 거짓되고 과장하여 말하는 것처럼 공유물이 아니다."에서도 침례회(재세례파)와 성공회 사이에 많은 트러블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알리스터 맥그래스 '한 권으로 읽는 기독교' 참고.[6] 일반적으로 기독교 교파들을 가톨릭주의(보편주의) 교파로부터 개교회주의 교파로 성향에 따라 나열해보면, 가톨릭 - 성공회 - 루터교회 - 감리회 - 장로회/개혁교회 - 침례교회 정도의 순서로 적어볼 수 있다. 요컨데, 침례교회는 가톨릭과 완전히 대척점에 서있는 교회라고 볼 수 있다. 종교개혁 당시 맘 먹고 모든 교파를 포용하려던 성공회가 침례회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던 이유도, 거칠게 생각해보자면 가톨릭과 침례회를 동시에 포용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7] Martin Bucer(Butzer) (1491-1551), 스트라스부르를 중심으로 남부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종교개혁가. 도미니코 수도회 수사 출신으로,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이자 비텐베르크 신학 교수였던 마르틴 루터를 하이델베르크 토론에서 만났고, 종교개혁에 뛰어들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개혁자들의 연합에 힘쓰며 종교개혁을 진행했고, 제네바 1차개혁에 실패한 뒤 추방된 장 칼뱅을 맞아 신학 교수직을 주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칼뱅의 4중직분(목사, 박사(신학교수), 장로, 집사)과 권징을 비롯한 교회론, 이중예정론을 비롯한 구원론, 성찬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후 슈말칼덴 전쟁의 패배로 스트라스부르에 가톨릭화가 강요되자, 영국 대감독인 토머스 크랜머 캔터베리 대주교의 초청에 응하여 영국으로 갔고 성공회 개혁을 도왔고, 영국에서 사망했다.[출처:]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 554-556쪽[8] 미국 (남)침례회는 RSV, NRSV가 자유주의적으로 번역되었다고 해서 채택을 거부하였다. 이래서 생긴 것이 NASB.[9] 침례회에서 인정하는 예전은 '침례'와 '성찬식'(침례회는 주의 만찬이라고 부른다) 뿐이다.[10] 다만 교의 자체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떤 책을 성경으로 여겨야 할지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이 전통적인 권위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침례회 신자가 보는 66권의 성경 중 그 어떤 책에도 나머지 65권의 목록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토마스 복음서 등을 정경으로 주장했다가는 얄짤없이 이단이다. 따라서 교회의 전통적 권위 그 자체에 대하여 완전한 부정은 아무리 침례회라도 힘들며, 성경의 목록 등에 있어서는 교부들의 권위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침례회 신학은 교의 그 자체에 대한 완전한 부정이라기보다는, 교의(혹은 권위)에 대한 매우 소극적인 해석에 가까울 것이다.[11] 이는 재미있는 호칭이다. 애초에 칼빈주의가 웨슬리주의보다 오래되었고, 침례회가 성장하던 시기는 웨슬리가 죽은 뒤인 감리회의 태동기와 겹친다. 또한 찰스 스펄젼은 가장 유명한 침례회 설교자이건만 프랑스 위그노의 후손에 스스로도 칼빈주의자인 청교도라 자처했다. 그런데 감리회 신학을 따르는 자들이 일반 침례교인이라 불리는 것은 재미있는 현상이다.[12] ...고 하지만 현실은 침례회 신학생에게 자신은 반대편 신학을 믿는다고 이야기 하면 싸우자는 걸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 이럴 때는 상대방을 진정시키고 침례회 정신을 잘 설명해 주자. 그리고 신학의 자유 원칙 덕택에 침례회 신학교에서는 학부 때부터 여러가지 신학을 가르친다. 하나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깊은 공부가 필요한데 학부에서 여러가지 신학을 다루려면 어쩔 수 없이 수박 겉핥기가 될 수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신학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것저것 다루다 보니 혼란만 가중될 수밖에 없고 신학 공부가 결국 신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사례가 다른 교단보다 월등히 많다. 이는 결국 신학 무용론으로 이어진다.[13] 그러나 현실은 침례회 신학생들도 배우자 조건을 이야기할 때 신앙의 전통을 운운하며, 침례회 목사들이 기독당 홍보에 누구보다 가장 앞장서고 있다.[14] 어디까지가 정교분리를 어기지 않는 선이냐는 것도 쉬운 문제가 아니긴 한다. 단순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나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하라"와 같은 예수의 말씀에 기반하여 경제나 복지 분야의 정책을 펴는 것은 기독교 민주주의의 범주 안에 든다고 할 수 있다. 한 그리스도인 정치가가 예수의 말씀에 어긋나지 않는 정치 행위를 하려 노력하는 것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예수를 이용하여 (표를 얻든 명성을 얻든) 무언가 덕을 보려한다면 문제가 된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지, 예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아니다.[15] 물론 현재의 천주교는 세속적인 권력과 거리를 두고 있으며, 잉글랜드의 군주가 성공회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 것도 수백년 전의 일이다.[16] 안타까운 것은 유명한 침례교 목사 가운데에도 이렇게 스스로 제사장 행세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교단만 침례교이지 침례교인은 아니다.[17] 예를 들어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어떻게 신앙 생활에 적용할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어떠한 관계인지 등, 절대로 사소하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대목들이 성경에는 분명하게 있다. 이 경우 극단적인 해석으로는 다신교적 결론에 도달할 것이며, 반대쪽으로 극단적 해석을 취한다면 '아버지와 아들'로 분명하게 성경에서 표현되는 관계를 부정해버릴 수 있다.[18] 이와 대조적으로, 개신교 중에서 가장 중앙집권적인 교회 조직을 갖춘 성공회는 정작 신학적으로는 자유주의 편에 속한다.[19] 침례회 역사에 간접적 영향을 끼친 재새례파(메노나이트) 교단도 현대에는 아미시를 제외하면 진보 성향이다.[20] 가톨릭·정교회·성공회의 '교구', 장로회의 '노회', 감리회의 '연회' 개념에 해당하는 것으로 특정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이다.[21] 최근 한국의 개신교의 관습적 절차에 따라 '장로'직책을 두는 침례교회도 늘어나고 있으나, 침례회에서 부르는 장로는 특별한 권한이 없는 '호칭'이다. [22] 개교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침례회의 특성상 원칙적으로 엄격하게 선별되어야 할 신학생의 인준이 형식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다.(교단 헌법(교회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사무처리회 절차가 교회마다 다르며 중앙에서 목회자를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교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소가 없고 은사가 없는 사람이 성적만 맞춰서 신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막기 힘들다. [23] 사람들에게는 흔히 마리아론 정도가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로 인식되지만,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교회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에 있다. 따라서 침례회는 가톨릭과 그 차이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24] 예를 들어서 영문 "I was baptized by immersion"을 한어로 번역하면 "나는 침례를 침례도 받았다" 가 아니고 "나는 세례를 침례로 받았다"로 하는 것이 맞다.[25] 그래서 미국 및 서방 세례(Baptist)교회와는 달리 한국 침례회(Immerisionist)에서는 개역성경에서 '세례(Baptism)'를 모두 '침례(Immersion)'로 변환한 성경을 사용하기도 한다. 성경에 '세례(Baptism)'라는 단어가 나오면 모두 '침례(Immersion)'로 바꾼 것이다. 그 외에는 기존 개역 혹은 개역개정판과 차이가 없다.[26] 선교 초기인 1895년 미국 보스턴 소재 엘라싱 기념 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가 E.C.폴링 선교사 부부를 파송,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의 경계 지역인 강경에 침례교회를 세웠으나 해당 선교회의 자금난으로 이들은 몇 년 못가 철수하였고 펜윅의 대한기독교회로 흡수되었다.[27] 실제 당시 동아기독교 소속 교회들은 경상도와 강원도 동해안 지역에 교세가 집중되어 있었다.[28] 1959년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당시 침례회 총회장이었던 안대벽 목사를 불신임한 것이 분열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29] 사실 이게 말이 좋아서 합동이지, 엄밀히 말해 안대벽 목사가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포항파가 급격히 힘을 잃어 대전파에 일방적으로 흡수당한 것이다. 충청권과 더불어 한국침례회의 2대 중심지격인 영남 지방의 침례회 교세가 오늘날 정체되고 대전 지역에 교세가 심하게 편중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결정적 계기가 바로 이 합동이기도 하다.[30] 교단에 가까운 하나의 조직을 이루고 있지만 소속 교회들이 독립적인 성격이 강한데다 이름에도 '친교회'라는 말이 들어가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교회를 총괄하거나 제재하는 기능은 없으며, 목회자들의 정보 공유와 신학적 동질성을 위한 친목 단체에 가깝다.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에는 개신교 교단으로 등록되어 있기는 하다.[31] 다만 성결교회의 경우 기성, 예성, 나성 등 각 교단별로 신학교가 1곳 뿐이다.[32] 장로회, 감리회, 성결교회, 순복음, 침례회[33] 그나마 국내에서 지역 편중이 심한 교단들로 구세군, 예장재건, 예장고신, 루터교회, 대한예수교복음교회 등이 있는데 이들은 대부분 교단의 태동 또는 총회 소재지가 지방이거나 국내에서 교세가 약한 군소 교단으로 서울에 총회를 두는 대형교단인 침례회와 비교대상이 되지 않는다.[34]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측과 구세군 대한본영의 교세가 강한 영덕군은 제외.[35] 그 이유는, 상술하였듯이 광복 후 재건된 침례회가 1959년 미국 남침례회 선교사들이 주축이 된 대전지역 파벌(기독교대한침례회)과 펜윅의 동아기독교회 출신 교인들이 주축이 된 포항지역 파벌(대한기독교침례회)로 나뉘었고, 1968년 대전파가 포항파를 흡수하는 방식으로 합동하여 지금의 기독교한국침례회가 되었기 때문이다.[36] 1968년 인천 대한침례회신학교 폐교, 2009년 안성 수도침례신학교 폐교.[37] 한 예로, 세종특별자치시 출범 이전 연기군 남면 나성리에 위치하고 있던 한 침례교회는 교회 소재지 일원이 행복도시 예정지에 편입되어 주민들이 이주하게 되자 어떠한 방법으로든 세종시에 정착하여 새로이 유입되는 지역 이주민들을 흡수, 발전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고 오히려 침례신학대학교 인근 대전 유성구 노은동 외곽 지역으로 이주, 그곳에 정착해 흔한 인대전 침례교회가 되어 버렸다. 면소재지인 종촌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통합 교회가 행복도시가 건설되면서 종교용지를 분양받아 새롭게 단장하고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자리잡은 것이나, 인근 송담리에 위치하고 있던 예장합동 교회가 임시로 조치원읍으로 이전했다가 세종시 건설 이후 원래 지역으로 복귀하여 발전한 것과는 대조적이다.[38] 참고로 말하면 대전에 최초의 침례교회인 대전제일교회가 세워진 것은 6.25 직후인 1954년이다. 이는 1907년에 세워진 최초의 감리교회(유성교회), 1919년에 세워진 최초의 성결교회(대전중앙교회), 1937년에 세워진 최초의 구세군교회(대전중앙영문)는 물론 1938년에 세워진 최초의 장로교회(대전제일교회)보다도 훨씬 늦다. 애초에 동아기독교회의 선교구역에 대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 소속의 존 애버내시(John Abernathy, 한국명 나요한) 선교사가 대전에 성서신학원을 세운 것이 대전 지역 침례회 선교의 시초였기 때문이다. 개신교 교단 중 대전에 진입한 시기가 가장 늦은 침례회가 신학교를 등에 업고 대전 지역에서 개신교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아이러니라 할만 하다. [39] 언뜻 보면 지방회 수가 많아서 서울의 침례교회 비중이 가장 높아 보이지만 인구 대비로 계산해 보면 의외로 침례교회 비중이 전국에서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가 서울이다. 그나마 서울 지역의 침례교회는 한강 이남, 특히 서남부권(통칭 영등포권) 및 강남권에 집중되어 있고, 동북부권(통칭 성북권)에는 매우 드물다.[40] 이미 1910년대에 침례회의 모태인 펜윅의 대한기독교회가 울릉도에 상륙하여 교회를 개척하고 선교 활동을 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외에 울릉군보다는 밀도가 낮지만 울진군도 대전보다 인구 대비 침례회 교세가 강한 곳에 속한다. 다만 워낙에 인구수가 적은 오지 지역이다 보니 침례교회 밀도만 높을 뿐 대전처럼 메가처치급 교회를 배출할 정도는 아니다.[41] 물론 시도 단위에서 시군구 단위로 범주를 더욱 좁혀 지방회 소재지에 따른 침례교회 지역 분포를 확인해보면 인구수 대비 침례교회 비율은 단연 대전광역시 유성구가 1위이다. 침신대 인근인 유성구 노은지구 일대만 살펴보아도 개척교회 포함 20개 가까운 침례교회가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42] 전라북도, 특히 대전과 인접한 전북의 전익군 지역은 호남 지역 침례교회의 절반 이상이 몰려 있을 정도로 침례회의 비중이 높다. [43] 예장 통합, 예장 합동이나 감리회의 경우 교회설립의 자유는 보장하지만 교단법을 통해 어느 정도 거리 제한을 두어(통합/합동 300 m, 감리회 200 m 등) 특정 지역에 같은 교단의 교회들이 몰리는 것을 막는 반면 성문화된 교단법 자체가 없는 침례회의 경우 이러한 제한이 전혀 없다. 이 때문에 침례회의 비중이 높은 대전의 경우 같은 동 관내에 불과 50 m도 안 되는 간격을 두고 침례회 개척교회가 몇 개씩 난립하는 현상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곳이 둔산신도시와 노은지구. 심지어는 침례교회가 입주해 있는 한 건물 바로 옆 건물에 또다른 침례교회가 있는 사례도 실제 존재한다![44] 참고로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전체 한국 침례교회의 절반이 수도권에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45] 침신대 동두천 캠퍼스 건설로 인해 침신대의 중추 기능이 수도권으로 옮겨가고 결국 자신들의 입지가 약화될 것을 우려한 대전 지역 교권파 정치목사들이 의도적으로 캠퍼스 건설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로비를 벌여 방해했다는 의혹이 있다.[46] 흔히 옥한흠, 하용조, 홍정길 목사와 더불어 복음주의 4인방으로 불린다. 교계에서 존경받는 원로목회자 중 한명이다. 현재는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하여 원로목사가 되었다. 2대 담임목사였던 진재혁 목사는 2019년 5월 26일부로 담임목사직을 사임하고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9월부터는 타코마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였던 최성은 목사가 3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47] 극동방송의 사장이며, 세계침례회총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다만, 김용민과 김장환 목사는 추구하는 성향이 완전히 다르다 보니 나는꼼수다의 김용민과 마찰이 있었다. [48] 대전대흥침례교회는 새로남교회(장로회), 천성교회(감리회) 등과 더불어 충청권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형교회 중 하나이다. 현재 안종만 목사는 담임목사직에서 은퇴하였고 후임으로 조경호 목사가 시무중이다. [49] 대덕연구단지 연구원 주축의 교회로 성장하다가 유성선병원 옆으로 이전하였는데, 지하에 건축된 예배당으로 일명 '카타콤'교회로도 불리기도 한다.[50] 기독사랑실천당 대표를 할 뻔 했었다. 물론 본인이 안 한다고 해서 해프닝으로 끝나긴 했지만... 베뢰아 아카데미 출신.[51] 고 한기만 목사가 1972년 창립한 교회. 강남중앙교회, 연세중앙교회와 더불어 서울 지역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 교회이다.[52] 서울의 대표적인 침례회 대형교회 중 하나. 1976년, 방배동의 삼호아파트 상가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 본죽 창업주 부부가 집사로 재직중인 교회이기도 하다.[53] 전 담임목사였던 피영민 목사는 본래 침신대 교수로, 칼뱅주의 역사신학자로 유명했다. 장로교의 이재훈 목사가 피영민 목사의 설교를 그대로 베껴서 설교한 것이 드러나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설교 표절의 피해자. 참조.[54] 좀 세기로 말이 많은 목사이다. 수위를 넘나드는 위험한 발언(주로 삼위일체쪽(양태론적이다) 설교 부분)으로 논란이 많다. 그리고 청소년 사역이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강압적이고 비인격적인 방법이라는 비판이 종종 튀어나온다. 2017년 현재 미스바 구국기도회라는, 탄핵반대 태극기집회를 지지하는 정치 개입을 하고있다. 2014년 현재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부회장이자 CBS 법인이사. 이 교회의 특징은 1983년에 발간된 통일찬송가를 불광동 성서침례교회와 더불어 사용한다.[55] 6.25 이후 미국 남침례회가 최초로 설립한 교회로 현재 한국침례회 주류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이다.[56] 2017년 '대학연합교회'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참고로, 담임목사는 이름과 달리 여성이다. 배우 최강희가 다니는 교회로 잘 알려져 있다.[57] 한때 에덴수도원의 후신으로 알려져 이단 논란이 있었던 명인교회 자리에 들어섰다. 고흥식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 경기도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하였다.[58] 1966년 서울 성산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하여 1990년대 고양시로 이전하였다. 유관재 목사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총회장을 역임하였다.[59] 2014년 2월에 한국 개신교의 기형적인 구원관을 비판하는 저서'천하무적 아르뱅주의'를 출판하여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현재 침례신학대학교 신학박사과정 수학중이며, 다수의 신학서적을 번역, 저술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서적이 한국교회의 대형화, 기업화를 비판하는 '메가처치논박'이다.[60] 평신도에게 다가가기 쉬운 다수의 신학서적을 번역, 저술한 작가로 더욱 유명하다. 작가로 더 유명한 김기현 목사와 신광은 목사는 성향상 재침례파(재세례파)에 가깝다.[61] 미국 남침례회 출신이며, 초교파적 연합 선교단체인 새물결선교회의 회장. 그가 담임하는 포도나무교회는 새물결선교회의 집회와 교육 대부분이 이루어지는, 사실상 새물결선교회의 총본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62] 동아기독교 재건의 주역이었던 안대벽 목사가 1951년 설립한 부산 지역 침례회의 모교회. 침례회 분열 시기에는 포항파의 본산 역할을 하였다. 동래구 안락동 동래봉생병원 인근에 있다.[63] 부산에서 가장 대표적인 대형 침례교회. 가야동 본당과 센텀(재송동)에 지성전을 두고 있다.[64] 김성로 목사는 본래 체육교사 출신으로, 뒤늦게 침례회 신학을 공부하여 40대 후반에 목사 안수를 받고 강원대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마음교회를 개척하여 춘천의 대표적인 대형교회로 성장시켰으며, 2013년 7월 대동 · 대한운수 차고지 맞은편에 있던 예배당을 인수, 이전하였다. 그러나 소위 '부활복음'이 지나치게 비성경적으로 강조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어 2016년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을 중심으로 이단성 연구조사가 진행 중이다. 침례회에서는 문제가 있는 부분의 수정을 약속했다며 김성로 목사를 옹호하고 있지만, 예장합동은 김성로 목사의 신학사상을 '다른 복음'으로 규정하고 아예 이단으로 낙인찍으려는 분위기. . 결론적으로는 예장합동 제 104회 총회에서 이단성 없음으로 결론짓고 교류금지를 해제하였다.[65] 서울중앙침례교회 월드비전교회 → 하늘비전교회로 교회 명칭이 변경됨. 참고로 담임목사는 원로목사의 아들이다.[66] '함께하는공동체'를 표방하며 4개 교회의 공동체 모임을 각자 가지며 문화사역에 힘쓰고 있다.[67] 구한말인 1909년 설립되어 110년의 역사를 가진 문경시 최초의 개신교 교회이다. 1957년 석조로 건축된 현 예배당은 문경시내에서 '돌교회'로 유명하기도 하다.[68] 김기동 목사로 유명한 서울성락교회에서 부목사와 베뢰아아카데미 원장 등을 하다 탈퇴를 하고 개척한 교회이다. 초기에는 부천에 있었으나 서울 금천구로 교회를 이전하였다. 기독교 한국침례회에 정식으로 회원가입을 하고 지방회에 소속된 것으로 보아 신학적으로는 베뢰아 요소들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69] 1987년부터 2005년까지 베뢰아 소속이었다. 그리고 2020년 8월 26일 기준으로 해당 교회에서 광주광역시 코로나 집단감염이 추가적으로 발생되었다고 하는데 그 중 한 신도가 광화문 집회 참가했다고 전해진다.[70] 고양시 덕양구 행신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당 지역의 이름을 따왔다.[71]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특징은 개교회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방언 기도를 하지 않는다. 성경을 권위가 있기 때문에 근본주의적인 성격이 강한 편, 칼뱅주의를 지니는 교회도 있다. 아울러 축도가 없으며, 폐회기도로 마무리를 짓는다. 미국도 자유 의지 침례교회나 성서침례교회, 그리고 독립침례교회의 경우도 동일하다.[72] 아이작 포스터 선교사가 세운 한국성서침례친교회의 모교회로 성서침례신학교의 발상지이기도 하다.[73] 그는 1938년생이며, 1961년부터 63년이라는 긴 세월을 거쳐 담임목사로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침례교의 원로인 1934년생인 김장환 목사와도 상당한 친분이 있으며, 그 역시 침례교의 원로라 볼 수 있겠다. 김장환 목사가 기독교 한국침례회의 원로이며, 김우생 목사는 성서침례교회의 원로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불광동성서침례교회는 대한민국 성서침례교회 중 가장 유명한 침례교회이며, 영향력이 제법 큰 편이다.[74] 1979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창립되었으나, 2002년4월 기독교 한국침례회 탈퇴 및 근본주의 독립교회로 가입하였다.[75] 실제 대전의 전체 개신교 교단별 비율은 기침 교단이 압도적이지는 않으며, 기감, 예장통합, 예장합동, 기침, 기성 순으로 특정 교단에 치우침이 없이 고루 분포하는 편이다. 다만 6.25 이후 남침례회 선교사들의 활동과 침례신학대학의 입지 등으로 인해 대전이 기침 교단의 홈그라운드처럼 인식되면서 침례회 개척교회들이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대전에서 심하게 난립하며 지역 내 기침의 개교회 수가 압도적으로 많아졌다. 그리고 이들 교회들은 지역내 개신교 연합행사나 부흥회, 지역사회 봉사 프로그램 등에 활발히 참여하여 명단을 올리며 지역내 다른 교단에 비해 현격하게 눈에 띄는, 사실상의 얼굴마담 노릇을 하면서 "기침=대전"이라는 고정관념이 고착화된 것이다.[76] 이 외에도 원래 동아기독교회의 거점지였던 원산이 해방 후 북한 영토가 되면서 동해안을 중심으로 한 구 동아기독교회 계열 세력들은 기반이 크게 약화된 반면, 엘라싱 기념선교회에서 양수받은 선교지인 충청권 남부지역의 신자들은 원산이나 동해안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관심과 지원 가운데서도 자력으로 지역 내에서 부흥하면서, 해방 이후 남침례회 선교사들의 활동 거점지를 지역 내에 유치하였고 교단이 분열된 후 힘의 균형이 구 동아기독교회(포항파) 쪽에서 남침례회 선교사들(대전파) 쪽으로 기울어 포항파가 대전파에 흡수당하면서 대전 및 충청 출신들이 교권을 장악하고 구 포항파 세력의 거점지였던 영남침례신학교를 폐교시킨 것도 이러한 상황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77] 침례를 베풀 때 목사의 인도에 따라 평신도가 들어가는 욕조.[78] 다만 기침의 경우 예장합동과 달리 교단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것은 전적으로 교회 자율에 맡겨지며, 따라서 개교회 성격에 따라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도 일부 존재한다. 특히 침신대가 있는 대전 지역의 침례교회들 중에 십자가를 강단에 두는 교회가 많다. 물론 전통적인 침례회의 신학 견해상으로는 예배당 강단에 십자가를 두는 것은 십자가를 우상숭배하는 것으로 보아 강단에는 십자가를 두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실제로 동아기독교 출신들(포항파)이 주를 이루었던 경상도 지역의 침례교회들 중에는 부산침례교회 등과 같이 지금도 예배당 내부 강단에 십자가를 두지 않는 교회들이 많다.[79] 개교회주의, 자유주의 성향이 강한 침례회 특성상 2014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진상규명 농성에 참여한 최헌국, 양민철 목사처럼 좌파 성향을 가진 목사들도 있기는 하지만 교단 내 교권파 인사들은 대다수가 기독교 우파 성향이다. 기침 내 교권파 목사들인 윤석전(연세중앙교회), 장경동(중문교회), 김장환(수원중앙교회) 목사 등이 어떤 정치 성향을 갖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80] 물론 모든 독립 침례교회들이 침례회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아니며, 다른 교단 출신 목사나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지 않은 '자칭' 목사들이 임의로 침례교회 간판을 걸고 설립한 독립 침례교회들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장합동 출신인 서울중앙침례교회 서달석 목사.[81] '베뢰아'는 오늘날 그리스의 베리아(Veria)시를 가리킨다. Veria는 영어식 표현이고, 한국 천주교는 그리스어 발음을 존중하여 '베로이아'라고 음역했다.[82] 당시 설립총회장인 김기동 감독을 교단에서 제명하는 결의를 하였는데 당시 결의를 했던 총회장이 성락교회에서 개혁파로 직무를 박탈당한 지교회 목사라서 소속교회에서 파면당한 목사가 교단 총회에서 결의한 내용이 유효한가 논란이 있었다.[83] 1987년경 현재의 기독교한국침례회(위의 주요교회와 목회자에 나온 교회가 소속된 그 침례회)에 소속되어 있던 성락교회와 김기동목사와 관련한 이단시비가 있자 기독교한국침례회를 탈퇴하여 김기동 목사와 뜻을 같이 하는 교회의 목회자들과 함께 김기동목사가 설립한 교단이다. 초기에는 기독교한국남침례회(미국 남침례회와는 무관)라 불리다 기독교한국침례회연맹(기침연맹)으로 개칭, 이후 기침 측에서 이름이 같다며 항의하자 사도행전 17장 11절과 12절에 나오는 "베뢰아 사람"에서 따와 기독교베뢰아교회연합으로 바뀌었다. 기존의 기침교단과 교리는 근본적으로 같으나 귀신론(귀신은 불신자의 사후 영이라는 견해) 부분에서 논란이 된 바 있으며, 일부 신학적인 부분(구원을 받는 것과 성령을 받는 것은 별개라는 견해 등)에서 다소 차이가 있는 부분이 있다. 산하에 신학교인 베뢰아국제대학원대학교가 있었다. 대부분의 개신교인에게는 이 교단과 교단 이름보다는 이 교단 최대의 교회인 성락교회와 김기동 목사 그리고 귀신론으로 더 알려져 있다. 기베연측은 자신들이 개신교의 일부이며 한국교회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하나, 이단 시비로 인해 실질적으로 기침교단 및 다른 개신교단과의 교류는 없는 실정이다. 2016년 9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교단에서는 귀신론 등이 김 목사의 체험을 기초로 한 비본질적인 개인적 의견일 뿐이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인 부분은 기성 교회와 동일하다는 이유로 성락교회를 이단에서 사면하였다. 그러나 불과 며칠 되지 않아 예장통합 총회가 사면을 철회하면서 새로운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84] 그런데 귀신이 무엇인지에 대한 견해가 이단정죄의 이유가 될 수 있는지는 현재도 논란이 많다. 대개 이단으로 분류하는 근거는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에 어긋나는지의 여부인데, 귀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 이 때문에 국외에서도 귀신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학설이 나왔고, 모두 그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가 있으며 그에 대한 비판 논리도 각각 존재한다. 개중에는 한국 교회의 주류 학설인 사탄 및 타락한 천사라는 견해도 물론 해당되며, 불신자의 사후 영이라는 견해도 또한 해당된다. 그러나 한국처럼 주류 학설이 아니라고 이단시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이유는 앞서 서술했듯이 성경에서 명확히 정의하고 있는 부분이 없고, 삼위일체 같은 핵심 교리가 아닌 곁가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장통합 사면위에서 성락교회가 사면 판정을 받은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85] 진보 그리스도교인 일부가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유럽에는 미국이나 한국처럼 보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개신교 교단이 없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이다.[86] 미국의 옛 주류 교단 5곳 중에서 연합감리교UMC를 제외한 나머지 4곳 신자 수를 다 합친다 해도 남침례회 신자 수보다 수가 '''적다.''' 물론 남침례회 신자 수는 연합감리교UMC보다도 2배 많다. [87] 당연히 보수적인 남침례회가 노예제를 찬성했다. 그러나 최근 남침례회는 흑인 목회자를 총회장으로 추대하는 등 변화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88] 참조.[89] 웨스트보로 침례교회는 침례회라는 이름만 쓰는 독립교회이다. 미국의 주요 침례회 교단인 남침례회와 북침례회에게 이단으로 정죄받았다.[90] 참조.[91] Albert Mohler Jr.은 미국의 남침례회 신학자로서 개혁주의와 근본주의노선을 따르는 보수 교의학자다. 그의 대표적인 어록은 다음과 같다 '불교, 힌두교, 이슬람 등의 타 종교는 사탄의 무리다', '천주교'는 가짜 교회다', '요가는 이교적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해서는 안 된다.' 남침례회 신학교는 교단의 근본주의적 노선에도 불구하고 진보적인 신학을 하는 학자들이 다수 존재했는데, 교단의 노선과 입맞에 맞는 몰러의 취임 이후 교수진 역시 철저히 근본주의화 되었다. 미국의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지식인들은 몰러를 알 카에다에 비유하며 까기도 한다.[92] 사실 오바마가 동성애 지지 선언이나, 낙태 찬성 의사를 나타내면서 대다수의 독실한 기독교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한 건 사실이다.[93] 참조.[94] 참조.[95] 남침례회 안수집사장로로서, 대통령 재임 시절에도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학교 교사로 빠짐없이 봉사할 정도이다.[96] 미국 남침례회는 여성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다. 미국 남침례회와 달리 한국의 침례회는 2014년부터 여성에도 목사 안수를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