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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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내용
3. 바깥고리
4. 보물 제1870호


1. 개요


慶州 皇龍寺 九層木塔 金銅刹柱本記. 통일신라 시기인 872년, 박거물(朴居勿)이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을 중수하고, 목탑의 건립 내력과 871년부터 872년까지 중수한 과정을 금으로 도금한 동판에 새긴 기록물.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며 보물 제1870호로 지정되었다.

2. 내용


872년에 황룡사 9층 목탑(皇龍寺九層木塔)을 중수하면서 심초석(心礎石) 안에 봉안한 동판 기록물로, 1238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황룡사가 모두 불타 소실될 때 유일하게 화마를 견뎌냈다.
1964년 12월이 도굴꾼이 도굴했지만 1966년에 되찾았다.
동판에 황룡사 찰주본기(皇龍寺 刹柱本記)라는 명문과 박거물의 이름을 새겼고, 황룡사 구층목탑이 조성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또한 탑이 완성된 뒤 90여 년이 지나 기울어지자 871년에 중수를 추진한 배경을 밝혔다. 마지막으로 중수 과정과 함께 찰주본기를 만든 목적을 밝히고 중수에 참여한 관리들과 승려들, 황룡사, 감은사(感恩寺)의 승려들을 나열한 후 마지막으로 이 동판에 글을 새긴 이들을 언급하였다. 기록된 인원은 김의홍 등 관리 12명, 중창 당시 황룡사 주지 혜흥(惠興) 등 승려 16명을 포함하여 모두 56명이다.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는 황룡사 9층 목탑의 건립부터 중수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고대 탑지(塔誌) 중에서 그 가치가 최고이다.

3. 바깥고리



4. 보물 제1870호


황룡사찰주본기는 통일신라 경문왕 11년에 왕의 명에 의해 중심사찰이자 성전사원인 황룡사의 구층목탑을 중수하면서 기록한 실물자료이다. 구층목탑의 건립 과정과 중수 과정을 후대의 역사서(歷史書)가 아닌 중수 당시에 제작된 유물을 통해 생생히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본기는 박거물이 찬하고 요극일이 썼으며 이를 승려인 총혜와 조박사 연전이 전각한 것이다. 특히 황룡사 목탑 건립과 관련하여『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 후대의 史書 기록과 상호 비교 검토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찰주본기의 역사적·기록사적 위치는 매우 크다.

금동사리함의 내외면에 쌍구체(雙鉤體)로 쓴 찰주본기는 9세기대에 주로 쓰였던 서체로 염거화상탑지(廉巨和尙塔誌)(844년), 중화3년명사리기(中和 3年銘 舍利器)(883년) 등과 더불어 이 시기 유행했던 탑지(塔誌)의 서술체계는 물론 서체 등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외에도 사리장치 품목과 안치장소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 탑파의 사리장엄 연구에도 소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사리함의 문비 내․외면에 선각된 신장상은 절대연대(872년)를 가진 유품으로 불교조각사 연구에 기준이 된다. 따라서 이 황룡사 금동사리함은 신라시대의 시대상과 불교사 등 담고 있는 역사적 유물로서의 가치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