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신라

 



'''신라[1]
新羅 | Silla
'''
[image]
'''668년[2] ~ 698년[3] (32년) 또는 676년[4] ~ 900년[5] (224년)'''
'''시대 구분'''
사로국
삼국시대
신라

통일신라
후삼국시대
신라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진한'''
'''고려'''
'''통일'''
676년 음력 11월
'''위치'''
한반도 중ㆍ남부 및 부속도서[6]
'''수도'''
서라벌
'''행정구역'''
9주 5소경
'''종족'''
신라인[7]
'''언어'''
신라어 (고대 한국어)
'''문자'''
한자(이두, 향찰, 구결)
'''종교'''
교종[8]선종[9]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왕)[10]
매금지존
'''주요 군주'''
태종 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성덕왕
열조 원성왕
경덕왕
흥덕왕
진성여왕
'''국성'''
(金)[11]
'''현재 국가'''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 개요
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
3. 정치
4. 영토
4.1. 만주 영토 상실 논란
5. 화려한 불교 문화
6.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7. 역사
7.1. 초기(중대)
7.2. 중기(하대)
7.3. 후삼국시대
8. 역대 군주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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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통일신라(統一新羅)는 삼국시대의 한 축이었던 신라삼국통일전쟁 끝에 한반도 역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뤄 한반도 중북부를 지배했던 시기, 또는 그 시기의 신라의 국체를 오늘날에 이르는 말이다.
태종 무열왕부터[12] 진성여왕에 이르기까지의 약 220여 년간 존속했으며,[13] 시대는 크게 화려한 전성기를 구가했던 중대[14]와 귀족간의 치열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진 하대[15]로 분류된다.[16] 나당전쟁이 끝나는 676년 시점을 기준으로 삼국시대 때의 수백 년간의 끝없던 전쟁이 사라지고 한반도의 정세가 안정화되며 옛 고구려계, 백제계와 말갈계 등 다양한 종족집단이 신라 내부에 공존하고, 이를 통합하기 위한 정책을 하고, 또한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체제적인 성격을 띠는 등 이전 삼국시대 세 나라 중 하나이던 신라 시절과는 근본적인 국가 성격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구한말 때부터 이 시기를 한정해 부를 때 시대구분을 위해 통일신라로 분류해 부르기 시작했다.[17]
조선 후기 실학자들과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남북국시대론이 부상하면서 통일신라라는 용어는 비판 받았고, 과거에는 통일신라'시대'로 불렀던 것을 21세기에 이르러 대세는 시대는 주로 남북국시대, 그 시대의 두 나라 중에서 왕조명은 주로 통일신라로 두 용어가 혼재된 상태이다. 아직까진 두 설 중 하나가 확실하게 유력한 상황은 아니며 두 의견 모두 일리 있기에 둘 중 하나가 무조건 옳다고 치부하는 것은 좋지 않다.
한국사의 최초 단일국가이며, 한국 고대 국가의 성격과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중세 국가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이 앞 시대 삼국시대는 고대로, 이후인 고려중세로 의견이 일치하지만 가운데 이 시대를 고대로 분류할지 중세로 분류할지도 학계에서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이런 고대 국가적 요소의 예시로 폐쇄적 골품제가 있었고 결국 지방의 저항을 받아 처절히 몰락하는 계기가 된다.

2. 시대 구분과 명칭에 대해


'''세계의 신라 국호'''
한국어
'''신라(新羅)'''
의미는 '덕업일'''신''' 망'''라'''사방 : 德業日'''新''' 網'''羅'''四方’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말 뜻은 다음과 같이 풀이된다.>四年, 冬十月, 群臣上言, 始祖創業已來, 國名未定, 或稱斯羅, 或稱斯盧, 或言新羅, 臣等以爲, 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之義, 則其爲國號宜矣, 又觀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二世, 但稱方言, 未正尊號, 今群臣一意, 謹上號新羅國王, 王從之">(지증왕) 4년 10월에 군신(羣臣)이 말하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세운(創業)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치 아니하여 사라(斯羅), 사로(斯盧), 신라(新羅)라 하였으나, 신(臣)들은 생각건대 '신'(新)은 덕업(德業)이 날로 새로운 뜻이요, '라'(羅)[18]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이므로, 그것으로 국호(國號)를 삼는 것이 좋을 듯하오며, 또 생각건대 자고로 국가를 가진 이가 다 제왕(帝王)이라 칭하였는데 우리 시조가 건국한 지 지금 제22대에 이르도록 단지 방언(邦言)으로 칭하여 존호(尊號)를 정하지 아니하였으니 지금 군신(羣臣)은 한뜻으로 삼가 신라국왕(新羅國王)이란 존호를 올리옵니다"고 하니, 왕이 거기에 좇았다.>>{{{#!wiki style="text-align:right"金富軾, 三國史記 卷4 新羅本記 第1 智證麻立干다만 실제로는 '신라'라는 이름은 그 이전부터 존재하였다. 고구려와 함께 '신라'가 전진에 377년과 381년에 <자치통감> 등에서 기록되어 있고, 당대 사료인 광개토왕릉비에도 신라가 이미 등장하고 있다. 이 의미 풀이는 원래 존재하던 고유어를 한자로 표기하려는 과정에서 음도 의미도 적절한 한자를 찾아서 유교적인 해석을 끼워 맞춘 것이고 이전부터 사용되던 '신라'라는 이름을 유일한 공식 명칭으로 규정한 것으로 추정되며, 지증왕 대에 국호를 통일하기 이전까지는 사로, 사라 등 다른 표기를 혼용했다.

신라 이전에 불렸던 이름들은 시라(尸羅), 사라(斯羅), 시림(始林), 유계(有鷄), 계괴(鷄怪), 계림(鷄林)[19], 서야벌(徐耶伐), 서라벌(徐羅伐), 유잠국(有蠶國) 등으로 불렸는데, 이들 모두 가운데 일부가 누에치기와 관련된 이름들이라는 특이점이 있다. 일본에서 발견된 민정문서에서도 유달리 뽕나무 재배 수량이 많아 신라가 전통적으로 누에치기와 관련이 컸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에 관한 이름도 많은데 실제로 신라 건국설화에는 계룡이 등장한다. 불교계 일부에서는 신라가 계(戒)를 나타내는 시라(Sila)에서, 서라벌을 부처님 당시 코살라국의 수도였던 슈라바스티(Sravasti)에서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사료가 부족한 고대사의 특성상 어느것이 맞다 아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병도나 환빠들이 그렇듯 성운의 유사성을 가지고 하는 주장은 딱히 근거랄게 없으며 억지스러운 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근거라고 내미는 것이 도올 김용옥의 뇌피셜이다.신라의 또 다른 이름으로 걸의식국(乞衣食國)이 있다는 정보도 인터넷상에서 많이 떠도는데 이는 중국의 기담집 유양잡조(酉陽雜俎]) 방이 설화의 한 구절을 띄어쓰기가 없는 한문을 제대로 끊어 해석하지 않고 오역한 것이다. '(방이가) 옷과 음식을 빌어먹고 살았는데(乞衣食), 나라 사람들(國人) 중에 남는 땅을 주는 사람이 있었다'에서 걸의식과 바로 뒤에 나오는 국인의 국을 '걸의식국'이란 한 단어로 오역한 것이다.
중국어
'''신뤄(Xīnluó)'''[20]
일본어
'''시라기(しらぎ) 혹은 신라(しんら)'''

초기부터 일본과 거리가 가깝고 서로 많이 얽혔던 관계라 백제를 쿠다라로 읽는 것과 같이 신라를 읽는 법이 따로 존재한다. 시라기는 일본서기의 훈을 따른 것이다. 때론 しんら, 즉 한국어 독음과 유사한 '신라'로 읽기도 하는데 이건 한자 新羅를 현대 일본어식으로 음독한 것으로 다만 한국어에서 신라를 읽을 때는 자음동화 현상으로 실제로는 저절로 '실라'라고 읽게 되지만 일본어로 しんら를 읽을 때는 실라가 아닌 '신'라 그대로 읽는다. 신라에 대해서는 新羅라 적고, "シラギ(< シラキ)"(시라기/시라키)로 읽는데, 이건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신라의 본래 이름인 斯羅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은 シラ에 キ(城의 뜻)를 더한 것이다. 마쿠라고토바에서는 "栲衾新羅(タクフスマシラキ)"(타쿠후스마시라키)라고도 하는데, 이는 특산물인 종이의 원료 "닥(タク(타쿠))"과 "シラ"에서 연상되는 백색의 이미지가 이불(フスマ(후스마))과 연상되어 이루어진 명칭이다.
아랍어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21]
페르시아어
'''베실라(Beshilla), 바실라(Bashilla)'''

통일 신라 시기에는 아랍페르시아 사람들이 신라를 찾은 이후 아랍 문헌에선 신라의 국호가 '알실라(Alshillaالسيلى)', 페르시아 문헌에선 '베실라(Beshilla)' 등으로 표기됐다. 2010년 말 한국에 그 정체가 알려진, 신라에 관한 내용이 풍부한 페르시아의 대서사시 쿠쉬나메( کوش نامه, Kush Nama)에선 신라의 국호가 '신라(Shilla)' 또는 '바실라'라고 나타난다.
영어
'''SILLA'''/'''SHILLA'''
라틴어
'''SELLA'''[22]
인도
'''구구탁예설라(矩矩托禮說羅)'''
만주어
'''샨로(Siyan lo),'''
영어권 국가
Later Silla / Unified Silla[23]
한자권 국가
統一新羅[24]
한반도 국가
통일신라 / 후기신라 / 신라
신라라는 국호는 삼국시대부터 사용했던 국호다. 지증왕 이전에는 신라 외에 다른 음차서라벌(徐羅筏), 사로(斯盧), 사라(斯羅), 시나, 시라 등의 국호가 병용되었다.[25] 이들은 당시 신라어상 같은 이름을 한자로 음차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방식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탈해 이사금 시기에는 계림(鷄林)을 국호로 정하기도 했는데 이는 나중에도 별칭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러다 '''504년에 지증왕이 '신라'를 공식적인 유일한 국호로 정했고, 그 이후로는 국호를 바꾸지 않았다'''.
''''통일신라'라는 명칭은 신라 당시에 사용된 이름은 아니고 근현대 사학자들이 676년 이전의 신라와 구분하기 위해 만들어낸 시대구분 명칭'''이다. 이를테면 백제를 시기별로 한성백제, 웅진백제, 사비백제 등으로 구분하는 관행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다른 예시로는 동로마 제국이란 나라는 존재하던 당시에는 그냥 로마 제국이라 불렸지만, 근세 사학자들이 동서분열 이전의 로마 제국과 구분하기 위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을 만들어 시대 구분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사실 676년 이전의 삼국 중 하나인 신라와 이후의 신라는 무열-문무-신문왕 시대의 여러 급진적 개혁과 넓어진 영역 등 국가운영 양상이 여러모로 차이가 있기에 둘을 구분하지 않고 '신라'라는 용어로 퉁치려면 상당히 불편하다는 점에서 명칭구분 자체는 편의적인 측면도 있다. 한 예를 들어 미술사 등에서 부연설명 없이 '신라 양식'이라고 한다면 백제, 고구려 양식과 대비되던 삼국 시절을 말하는 것인지, 백제, 고구려 양식과 일체화된 676년 이후의 양식을 말하는 것인지도 모호할 것이다.
다만 통일신라라는 용어 자체는 후대 사람들의 편의적 구분이지만 당시 신라인들이 삼국을 통일했다고 자부했던 것은 사실인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청주시운천동사적비,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 등에서 일통삼한과 같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말하는 당대 기록이 다수 남아있다. 신라 나름의 민족 융합 정책도 추진되었는데, 옛 고구려, 백제 출신 귀족들에게 신라의 관등을 일률적으로 주었고[26] 옛 3국에 각각 3주씩 행정 구역을 균분한 점이나 역시 수를 균등히 맞춘 중앙군 편제 등 다방면으로 당시 신라의 통합 노력은 파악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인의 임시정부로 시작했던 보덕국[27]을 신라가 흡수한 것도 신라가 고구려를 관념적으로 통합했다고 인식한 근거였다는 주장도 있다.[28]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서도 신라의 통일론은 인정을 받았고 부정하는 의견이 21세기에 들어서 생겨들면서 통일신라시대와 남북국시대 두 가지 의견이 나뉘어게 되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신라의 세력권은 8세기 중엽 이후에서야 대동강 이남 지역에 진출하는데,[29] 때문에 백제는 그렇다 쳐도 고구려와는 완전히 통합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것이 신라의 삼국통일 부정론의 주요 골자이며,[30] 정작 북방은 당나라[31] 또는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가진 발해가 차지해 옛 고구려 영토를 반분한 형세였기에[32] '통일'신라라는 명칭이 합당한가에 대한 반대론이 조선 후기에도 있긴 했다. 현재는 이 시대를 '발해고'에 나오는 남북국이라는 용어에서 비롯된 남북국시대라고도 부르는 편이다.
고구려 북방 영토의 불완전성을 근거로 신라의 삼국통일론이 공격 받고 있음에도 여전히 '통일신라'나 676년에 있었던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용어는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당장 이걸 부정해버리면 통일된 국가의 맥은 최소 고려시대부터 시작해야 하며, 고려조차도 고구려 북부 고토까지 전부 회복하지 못한 건 신라와 마찬가지라는 한계도 따른다. 교과과정에서 표현은 위와 같고, 역사학계에서는 삼한 유민 통합을 '시작'[33]한 신라의 삼국통일과 '완성'[34]한 고려의 후삼국통일 모두 의의가 있는 중요한 사건으로 보는 편이다. 소련먼저 우주에 사람을 보냈고 미국달에 사람을 보냈는데 둘 중 하나만 중요한 사건이 아니고 둘 다 중요하듯 시작된 것과 완성된 것 둘 다 중요한 것이다.
다른 분류명을 더 들어보자면, 1000년이나 지속된 세계적으로도 손에 꼽을 왕조이므로 전 삼국 구도가 무너진 시기를 '후기 신라'라는 용어로 말하기도 한다.[35] 그러나 비슷한 예로 장수왕 때에 고구려가 국호를 고려로 바꾸고 '고려'라는 국호의 사용 빈도가 훨씬 높았음에도 이후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편의상 고구려라고 통칭하는 중이며, 고조선도 원래 조선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이성계가 세운 훗날의 조선과의 구별을 위해 그냥 고조선이라고 부르듯[36], 그리고 발해도 당초 진(대진국)이라는 명칭으로 건국했으나 역시 '발해'로 뭉뚱그려 부르고 있듯이 여러 가지 편의성 면에서 그냥 '신라'로 용어 통일이 이뤄졌다. 신라 또한 초창기에는 '사로국'이라는 생소한 이름을 가지고 지증왕 때에 들어서야 신라라는 이름과 왕호를 갖추지만 그전 시기까지도 다 신라로 퉁치고 내물왕이니 눌지왕이니 하며 지증왕 이전의 지도자들까지 왕호를 붙여주기도 하는 실정이다. 다만 676년 이전과는 달리 신라한반도의 지배권을 가져갔으니까 이전보다는 품격을 높여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일신라로 부르는 것이 옳다는 주장도 있다.[37] 발해사 연구자들의 경우 한규철은 신라가 당병과 함께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부터 발해가 개국되는 698년까지 '''30년이라는 좁은 시간에 한정해''' 통일신라라는 국호를 사용해도 무방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시간 동안에 한반도와 요동 일대에 신라 외에 통일된 왕조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발해가 세워진 698년 이후에는 '통일신라'라는 호칭에 대해서 반대한다. [38]

3. 정치


통일 직후[39]에는 신문왕의 대대적인 공신 숙청을 거치면서 나름 꽤 강력한 왕권을 자랑했으나, 국가의 재정비 및 절대 왕권 확립 과정에서 귀족들의 반발이 일어나 절대 왕권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고, 이후 신라 하대에 들어서는 너도나도 왕위를 노리고 반란쿠데타를 일으킴에 따라 차츰 혼돈 국면으로 치닫게 된다. 그럼에도 신라는 바로 무너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반란을 진압하고 나서 일부 지역에 면세의 혜택을 줄 만큼 지방까지 행정력이 미칠 역량이 충분했고 200여 년 이상 통치를 이어갔다. 신라가 통일 왕조로서 멀쩡히 한반도를 지배한 기간만 떼놓고 따지면 676년~900년 정도인데, 224년이면 중국 역대 왕조와 비교하면 청나라, 당(통일왕조), 명나라 다음으로 꼽힐,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의 장수 왕조로,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신라 중대~하대의 정치가 보편적 시각으로 보았을 때 마냥 혼란하고 취약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후대 고려 초 중기보다 더 지방 통제력이 강한 중앙 집권적 국가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40] 그러나 오랜 기간 골품제 등의 고대 국가적 병폐가 쌓인 끝에 9세기 후반에 이르면 일개 지방의 독립 선언도 못 막고 세금도 못 걷는 궁색한 지경으로 전락하였고 그 이후엔 다들 잘 아시다시피 서기 935년에 마지막 왕인 경순왕 김부가 나라를 바치는 것으로 그 왕조의 문을 닫게 된다.
하지만 국가 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모든 지역의 종교를 국가가 주관하는 등 한민족으로서의 인식이 자리잡혀가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다.[41] 다만 골품제가 아쉽긴 한데, 그걸 두고 신라가 태생부터 악하거나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곤란. 사실 어떤 사회든 신분제가 제대로 개혁되려면 머리 꼭대기부터 한 바탕 뒤집어져야 하므로, 골품제는 결국 신화로 기억되는 고대부터 국가를 쭉 유지했던 신라 천 년 역사의 정체성이자 어쩔 수 없는 멍에였다..[42] 후세의 우리가 아는 이것을 신라왕들이 몰라서 훗날 후삼국 시대가 온 게 결코 아니었다. 적어도 신라 왕실은 그 기능을 유지하는한 진골층의 억제와 지방민 위무를 포기한 바는 한번도 없었다. 그러나, 골품제의 근본적 개편을 끝까지 거부해서 신라왕들의 꾸준한 개혁을 모조리 좌초시켜버린 진골층이 큰 문제였음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국가 체제에 대해 더 설명하자면 당시 동아시아 각지에는 당나라의 새로운 행정 체계인 율령제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율령제는 신라에도 영향을 주긴 했으나, 견당사를 통해 급격히 중국화한 일본이나 당의 행정 체계를 거의 본뜨다시피 한 북쪽의 발해 등과 비교해볼 때 신라는 당이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구축한 통치 체계를 꾸준히 계승하고 있었다. 하대에도 계속된 이 같은 전통의 고수는 신라의 정부 체제가 기존의 갑절 이상 넓어진 영토에서도 충분히 기능할 정도로 높은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끝내 골품제 혁파 등 구습 혁파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을 수 밖에 없다. 골품제가 신라 고대부터 이어진 것이라 완전히 바꾸지 못한 것이 아쉽기는 하나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다 좋은데 유독 정치판의 막장급 다툼을 오점으로 평가하며 신라를 깎아내리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왕위쟁탈전은 어느 나라든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군주제 국가에선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도 모두 겪었고, 특히 김주원, 김헌창, 김범문의 3대 연속 반란고려 무신정권 이전까지 한국 반란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나마 한국사에서 왕위쟁탈전이 많이 사그러든 왕조가 조선이었다.[43] 삼국사기에서도 4명의 왕이 반역자라며 정치판을 막장으로 만들었다고 김부식이 혜공왕 시절 때 정치적 상황이나 반란을 평가하기도 했다. 해구‧연신의 난[44]이나 간주리의 난도 막판에 고려가 낫다고 했다. 그런데 이건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거나 옆나라 당과 일본(헤이안시대)과 비교해도 딱히 큰 차이는 없다.[45] 오히려 마지막 결정타인 후삼국시대 개막하는 부분을 제외하면 다음 시대인 고려 초 중기에 비해 정치는 안정적이었던 측면도 있는데, 김헌창의 난 등 수도 외부에서 주도해 일어난 반란이 서라벌을 뒤집어버린 경우는 후삼국시대 이전까지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지 신라 자체의 역사로 한정지으면 통일신라의 최후반 100여 년간은 그 전대와 비교해 집권 귀족 세력 간의 권력 다툼에 다소 심하게 치중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거기서 그대로 망하지 않고 재도약을 꾀할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었으나 막판의 반란이 너무 대규모라 이겨내질 못했다.
그리고 갈등의 과정이 오히려 제도의 개혁으로 이어져야 하나 제도의 개혁과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점도 있었다. 당장에 문무왕에서 신문왕으로 이어질 때 많은 반란들이 일어났으나 녹읍이 폐지되고 관료전이 지급되어 대토지화를 차단한다거나 독서 삼품과를 넘어 과거제가 자리잡는다던가 하는 것이 800년대 신라 말에는 없었다. 이는 고구려의 5부 귀족과 백제 8성씨 귀족들의 잦은 반란으로 개혁이 안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자면 고려말 엄청난 정파 갈등 속에 위화도 회군을 시작으로 고려 말은 온갖 폐단을 다 정리하게 되는데 사전 혁파와 과전의 시행과 부곡민 체제 폐지와 군현 체제 정립과 그리고 무과의 도입 등 온갖 제도를 도입했으나 결국 고려는 문을 닫고 조선이 세워진다. 그야말로 정쟁이 있는 곳에 다툼이 있다는게 마냥 옳으면 위와 같은 개혁도 없이 무의미하게 진행되는 후삼국시대와 무신정권과 임오군란도 옹호받아야 한다. 악습이 계속해서 이어지는 상황에서 혼란의 상황만 반복하면 그야말로 자멸일 뿐이다. 세습과 추천이 남발되어 능력이 높다거나 혹은 전공을 세우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혁을 하고 의견의 대립을 하면 모를까, 한번 자리를 먹기 시작하면 계속 먹거나 입맛에 맞는 사람들을 계속 뽑고 기분에 따라 보기 좋아하는 사람들 혹은 말과 행동을 마구 바꾸는 사람들의 대립과 싸움은 그야말로 무의미한 대립과 싸움일 뿐이고 파괴일 뿐이다.
800년대 신라의 정치적 혼란에 대한 비판은 삼국사기가 부각시켰는데, 이는 고려가 전조인 신라와 차별화를 두기 위한 것으로, 전 왕조의 실정을 부각시키고 그 몰락을 앞당겨야 현 왕조의 정통성을 높일 수 있어서였다. 이후 조선 왕조가 들어서자 800년대 정치적 혼란은 문성왕 시기부터 헌강왕 시기를 마지막 치세로 두어 지적을 하지 않다가 오히려 후삼국시대가 시작하고 최치원이 등장하기 시작한 900년대를 정치적 대혼란기와 몰락으로 삼았다. 이는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좀 깎아내리기 위한 것이고 신라를 재평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 왕조도 고려 왕조의 무신정권 시절을 난신적자가 판치는 대혼란기로 여겼다. 그러나 현대에는 무신정권 시절보단 원 간섭기 시절을 몰락의 시점으로 본다.
당시의 임금과 인물에 대해서는 신라/왕사, 신라/인물 참조고 해보는것이 좋다. 여담이지만 통일신라 중기 무열왕 직계 국왕들(무열왕~혜공왕)의 수명들이 하나같이 짧은 편이다. 50대에 사망한 무열왕(59세), 문무왕(56세)를 제외하고 신문왕부터 혜공왕까지의 무열왕 직계 국왕들은 50세를 넘기고 생존한 임금이 없다.[46] 그래서 조선후기대에도 비슷한 이유로 왕손이 적어진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4. 영토



[image]
통일 신라 시대의 행정 구역도.
새로이 편입한 구 고구려령에 대해서는 9주 5소경 중 고구려 멸망 전의 영토를 삭주(朔州), 명주(溟州)로, 고구려 멸망 후의 영토를 한주(漢州)로 이름하여 복속시켰다.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의 경우 초기에는 당이 안동도호부를 세워 차지하다가 나당전쟁 때 신라가 고구려 유민과 함께 축출시켜 편입하기도 했고, 뒤에는 발해의 관할로 들어간 듯 한데, 그럼에도 이들 남북국에서 평양 일원은 국경으로 밀려난 변방이 되어 중요성이 퇴색되었다. 발해는 평양이 폐허가 될 때까지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고, 신라도 옛 고구려의 수도인 이 지역의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자 2정을 설치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지만 수도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계가 있어 이 지역의 중요성을 재인식한 고려 때까지는 말갈족 등 이민족들이 기승을 부렸다는 기록이 있다.
다만 최근에는 황해도의 재건 및 평안남도 지역으로의 진출 등이 패강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이전까지 발해가 점령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평양 지역이 실제로는 고구려 멸망 당시 황폐화되었고, 신라대동강 이남 지역의 개발을 통해 서서히 평양 방향으로 영향을 넓혀나갔다는 주장. 특히 이러한 개발의 중심이 되는 예성강 ~ 대동강 구간은 고려 태조 왕건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일단 왕건의 전임자인 궁예가 자리잡은 곳이 개성이다. 어느 정도의 경제 & 사회적 기반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일.

4.1. 만주 영토 상실 논란


고구려 북부였던 만주 영토를 한국사에서 제외시켰다는 이유로 폄하되는 의견도 많은 편이지만 발해가 있어서 미묘하다. 고구려 북부 영토는 발해가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만주가 한국사에서 이탈한 것은 거란의 침입과 발해의 멸망 때문이지 그 과정에서 신라는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 물론 신라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할 생각이 희박했다고 비난할 수는 있겠다. 한반도를 정복하기 위해 고구려, 백제와 심심하면 전쟁을 벌인 것에 비하면 신라와 발해는 서로를 무시하고 지냈다. 그래서 발해가 거란에 망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통일이 되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일단 모든 영토를 빠짐없이 차지해야 진정한 통일이라는 것은 현대인의 잣대이고, 고대세계에서는 변방영토보다는 수도로 대표되는 핵심영토와 왕족과 천명 등 명분론적 정통성의 확보가 더 중요했다. 그런 측면에서 신라는 고구려인이 직접 추대한 안승보덕국 흡수로 명분을 챙겼고, 나당전쟁 전개 과정이나 9서당 배분 기준을 보면 상당한 숫자의 고구려 유민까지 흡수해 모양새를 갖추었다. 만약 전왕조의 최대판도를 전부 회복해야만 진정한 통일이라면, 신라 이후 고려나 조선, 대한민국도 만주까지 차지하진 못했으므로 한국사는 통일이란 게 이루어진 적이 없는 역사가 되는 셈이다. 신채호도 통일이 현대까지 한 번도 된 적이 없다며 이와 같은 지적을 하였다.
그러나 남북국시대는 신라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는 고대에 과연 지금과 같은 한민족 개념과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
사실 고구려를 살피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남쪽으로 영토를 팽창하며 획득한 이들을 한인(韓人)과 예인(穢人)이라 지칭하고 있고 충주 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 매금이라 여기고 있다. 삼국지 동이전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와 비슷하며 예국과 옥저는 고구려와 비슷하지만 한(韓)과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다.[47] 특정 시각과 달리 서로 다르게 봤다는 여지도 있는 셈이다. 즉 5세기 고구려인들은 한반도 남쪽에 사는 사람들을 동질적인 동족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구분짓고 있었고, 그러므로 한민족 통일 같은 건 안중에 없었다.
더구나 신라도 삼한일통을 주장하긴 하였으나 고구려의 나머지 영토를 정복 혹은 회복할 생각이 사실상 없었다. 오히려 정복한 고구려 영토도 당나라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자 버려버리고 방어선을 구축한다.[48] 사실 이건 고구려도 비슷했다. 만주지역으로의 진출은 태조왕때 책성을 점령하여 두만강 유역에 진출한 것과 광개토대왕시절 요동을 먹고 이후 494년 문자명왕때 북부여를 흡수하여 영토화 시킨 것 이외에는 거의 대부분 지역을 영향력만 확보할 정도의 간접통치로 일관했고, 그 이후에는 북진보다는 오히려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남방으로 진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가 말기까지도 이어졌는데 북부지역에서의 충돌은 중원왕조와 북방민족을 상대로 한 방어전이었지만 신라와는 치열한 한강쟁탈전을 벌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고구려도 자신의 뿌리국가였던 부여[49]와 고조선의 고토를 회복하는 것 외에는 북부지역으로의 세력확대는 영토확장보단 영향권 확대에 비중을 두었던 것이다.[50] 이렇게 보면 오히려 말갈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발해의 동진정책이 한국사에서 특이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발해도 중요도시인 5경들 위치를 보면 상경성을 제외한 나머지는 한반도에 있거나 아니면 한반도 바로 옆자락에 위치해있었다.[51] 결국 애초에 한민족은 만주지역으로는 영토확장보다는 영향력 확대에 비중을 두었고 만주보다 한반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남부 한반도인들은 만주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의식 자체가 없었다. 만주를 상실했다는 개념조차 없었던 셈. 이게 농담이 아니라 당연한 생각[52]일 수 있지만 당시 신라인들은 통일전쟁 후 자신들이 더 거대해졌다고 생각하지 작아졌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최치원은 지증대사비에서 고구려도 작은 나라로 비유하기도 하고 사불허북국거상표에서 발해를 고구려의 방계로 조롱하기도 했으며 이러한 신라인의 의식이 이어져 후대의 한반도인들을 보면 삼국사기에서도 만주를 차지하고 있던 발해를 북적(당시 중국식 표현으로 북쪽 오랑캐.)이라 취급하고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마저도 발해를 속말 말갈로 여겼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만주보다 한반도가 가지는 의미가 더욱 거대했다.[53]
그리고 애초에 그 큰 만주땅은 고구려의 고유의 영토가 아니었다. 고구려의 건국지점은 압록강변의 북부에 위치한 오녀산성과 국내성[54]이었고, 이곳을 중심으로 만주와 한반도 내부로 뻗어간것이 고구려이며, 고구려 사회가 정교해질 수록 반농 반수렵의 가난한 약탈경제 국가에서 탈피해, 국가 중심지가 한반도 중북부로 쏠려들어가 쌀농경민족 성향이 강해지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고구려의 정체성 변화를 건국 초부터 봐와 잘 알고있던 이웃 백제,신라인과 중국인들은 고구려인을 '''삼한인의 일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55]
고구려인에게 만주는 중원왕조와 북방민족(흑수말갈,친중계 거란, 실위 등)들을 억제하기 위한 로마제국식 군사적 용도의 팽창이었을 뿐[56], 국가 경제와 행정과는 거의 관련이 없는 곳이었다. 어디까지나 고구려의 중심지는 건국 초부터 멸망까지 압록강변 북부[57]~한반도 중북부 지역인 오늘날 한국영토에 중심지가 거의 다 들어와있는 한반도 정주민적 성향이 굉장히 강한 왕국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데, 만주땅은 우선 '쌀농경'이 되질 않기에, 면적대 효용성이 굉장히 크게 떨어진다. 게다가 이후 한민족의 아이덴티티는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과 마찬가지로 순도높은 농경민족으로 수렴된다. 당연히 만주의 양질과 안정성면에서 심각하게 떨어지는 식량생산성과 비교하면 한반도 남부의 곡창지대를 확실히 개간해서 중세 농경민족으로 진화하는것이 가장 효율적이고 자연스러운 결론이다.[58] 그렇기에 꼴랑 한강유역 하나두고 박터지게 싸우던 고대 삼국의 비참한(...)역사와 비교할 때 통일신라가 국력과 영토(쓸만한)가 월등히 커졌다고 생각하는건 자연스러운 결론인 것이다.
또한 한민족은 중세(통일신라 말기~고려초)에 접어들어 완전한 '''한반도 정주민의 아이덴티티'''를 가지게 되자, 만주는 정복의 대상[59]이 될 수는 있어도 상실의 대상은 아니었다. 발해는 당나라의 과거 시험 빈공과[60]을 보면 문화적인 면에서도 뛰어났지만 신라인에게 그리 좋은 취급을 받지 못하였으며[61] 일본의 자각국사입당구법순례행기를 보면 신라 승려들이 매년 8월 15일에 발해에 대한 신라의 옛 승리[62]를 기념하기 위해 큰 잔치를 벌인다는 기록이 있다. 동사강목은 수나라의 침공을 막은 고구려를 칭찬[63]하기도 했지만 마한 멸망 이후 삼국시대를 정통이 없었던 시대로 보기도 하였으며 통일신라를 정통으로 쳤다. 이처럼 과거 사람들도 민족(?)에 대한 견해가 다양했지만 한반도 국가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문명이 발달된 한반도인들을 낙후된 만주인들보다 높게 보는 경향이 있었고 그래서 그런지 만주에 대한 연결성은 한반도에 대한 연결성보다 약했다.

5. 화려한 불교 문화


불교 문화가 크게 번성했다. 뒤를 계승한 고려가 불교 문화에 있어서 규모나 질적인 수준에 있어서 오히려 통일신라에 비해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을 정도다.[64] 특히 신라 시대가 다른 한국사의 시대와 비교되는 것이 불상의 완성도인데, 석굴암 본존의 조형미나 크기는 한국 불상의 정점에 있다고 평가받고 있다. 불국사석굴암 등 신라와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불교 유산들과 명승 고찰이 대부분 통일신라 시기에 완성되었다. 물론 고려도 신라 못지 않은 불교 국가여서 왕자가 승려가 되는 것이 비일비재했을뿐더러 이 시기에도 흥왕사 보제사 같은 거찰이 많이 세워졌고, 기존에 있던 황룡사 같은 신라 거찰들도 후기에 외적이 침입하기 전까지는 관리를 받으며 잘 번성했다. 그러나 신라와 달리 교종선종의 대립 탓에 신라처럼 수도의 왕실이 불교계를 적극적으로 선도하는 입장은 못 되었고, 전국에서 비슷한 경주 스타일 표준형식 불상과 탑이 지어지는 통일신라와 달리 고려에서는 호족 등 지방 세력의 지분이 커서 파주 용미리 불상, 논산 은진미륵 등 투박하고 개성적인 형식의 불상이 많이 만들어졌고, 신라의 사실적이고 각 잡힌 불교미술과 비교당하는 측면이 있다. 다만 고려가 통일신라보다 역사가 2세기 더 길고 더 후대 왕조인만큼 남아있는 유물의 양은 고려가 더 많다.
신라는 통일 직후 새로 편입된 땅의 변방에 큰 절을 세우면서 불교 보급과 점령지의 민심 교화를 시도했고 또한 국방상의 기지 확보까지 꾀했다. 그 예가 의상대사의 화엄10찰 창건이다. 덕분에 원래 백제 영역이던 서남부 지역에도 남원 실상사 삼층석탑이나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처럼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이 세워졌고, 지금은 북한령인 금강산처럼 신라의 중심지에서 거리가 먼 지역에도 정양사 삼층석탑처럼 전형적인 통일신라식 3층석탑 유물이 많이 남아있는 등 신라 중심지에 질적으로 떨어지지 않는 문화가 전파되었다.

6. 경제와 활발한 대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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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유럽에서 작성한 세계지도.[65]

중국의 저쪽, 깐수의 맞은 편에 산이 많고 왕이 많은 한 나라가 있는데, 신라라고 불린다. 그곳에는 이 풍부하다. 그곳에 간 무슬림들은 좋은 환경에 매료되어 영구 정착한다.

- 페르시아인 이븐 쿠르다드비, <도로와 왕국 총람>

중국 해안의 맞은편은 신라와 그 부속 도서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라크인과 기타 외국인들이 정착하여 그곳을 조국으로 삼았다. 그들은 깨끗한 물, 비옥한 토지, 이익과 수입의 증대, 광물질과 보석류의 풍부함 때문에 그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곳을 떠난 자는 극소수다.

- 이라크인 마수디, <황금 초원과 보석 광산>

신라는 유쾌한 나라다. 중국의 가장 끝자리에 위치한다. 공기가 맑고 질병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람들은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말하길 집에 물을 뿌리면 용연향(龍涎香)이 난다고 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은 물론 드물고 파리와 야생동물 또한 거의 없다. 다른 지역의 어떤 환자도 이곳에 오면 치유된다. 모함마드 자카리야 라지는 "누구나 이 땅에 들어가면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 떠나려 하지 않는데 그건 자원과 금이 풍부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오로지 하나님(알라)만이 그 진실을 안다.

- 자카리야 카즈위니, <나라들이 남긴 발자취>

기타 중근동 문헌들의 신라 관련 기록들[66]
세계와의 무역도 활발했으며[67] 장보고한중일을 연결하는 허브 기지로서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군 일대에 청해진을 건설하여 해상을 장악한 시기도 이 때. 진정 아시아이탈리아라고 해도 좋을 정도였다. 장보고나 신라삼최, 혜초 등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유학 등 국제 인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했다. 게다가 당시 주변의 국제 정세가 당, 일본, 발해로 정립되어 자리잡고 있던 데다 신라 자체의 군사력도 상당했었기에 200여 년 동안 외적의 침입도 흔치 않았다. 사실 당과 일본 모두 삼국 통일 전후 혼란기에는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 집적거리긴 했지만 이내 역관광당했고, 통일 뒤 통일신라가 완전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국가적인 공격 기도를 멈췄다.
특히 일본의 경우 사이메이 덴노 ~ 덴지 덴노의 시기에 멸망한 백제를 돕겠답시고 대규모 군사를 내어 한반도로 보냈다가 싹 날려먹는 병크로 나라가 뒤집힐 지경이었고 이후 8세기에도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이 추진됐으나 이는 임진왜란과 같이 내부적불만을 외부로 표출하는것이었고, 발해 또한 무리한 것을 알기 때문에 결국, 발해의 도움을 얻는 데 실패하면서 끝내 당시 최강 국력을 자랑하던 통일 직후의 전성기 신라를 건드리지는 못했다. 아마도 실행했다면 사이메이 덴노 시즌 2 확정[68]. 오히려 신라에서 일본을 정벌하러 올까봐 두려워했다는 당대 정황도 나타나고 있으며, 실제로 일본측 사서들에서는 신라가 일본을 공격하였다는 기록들도 꽤 나오는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신라의 일본 침공 사례 문서를 참조.
내륙에 신라인의 거점인 신라방이 구축된 시기도 바로 이때. 그 외에도 신라관, 신라촌, 신라원, 신라소라 이름 붙은 이 시기의 대당 거점이 꽤 많이 있었다. 이는 당대 신라의 진취성과 개방성을 모두 보여주는 사례. 뿐만 아니라 국수주의로 돌아선 헤이안 시대 일본에조차도 견신라사(遣新羅使)가 오가면서 교류가 꽤 있었기에 통일신라의 영향을 받은 문화재가 꽤 많으며[69] 심지어 적성국으로 출발한 발해와도 후대에 교역을 트면서 <상경 → 동경 → 남경> 루트를 거쳐 금성까지 연결하는 <신라도>라는 무역로가 개척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서 인용한 당대 가탐의 저서에 따르면 발해의 동경이 있었던 책성부[70]에서 신라 북쪽 천정군[71]까지의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도 매우 융성하여 당시 기록에 따르면 수도 금성(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에서는 비가 오는 날 가가호호의 처마 밑만 따라 걸어도 비 한방울도 맞지 않고 목적지까지 갈 수 있었다고 할 정도. 말기인 헌강왕 때에 이르면 도성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으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하긴 그만 한 경제력이 뒷받침되었으니 문화적 성취가 가능했던 것이겠지만. 다만 모두 수도의 융성함을 드러내는 기록이다 보니 여타 지방의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나말여초 대에의 소설이나 지방에 도로가 이어져있는 것 등을 볼 때 지방 사정도 우리가 생각한 정도로 낙후하거나 방치된 것이 아닌 정돈이 잘 정리 되어있고 서라벌만큼 융성한 것은 맞는 것 같다.
위의 기록에서 보았듯, 세계사적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당대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조차도 신라에 와 보고는 고향보다 더 살기 좋아서 영구 정착, 아예 눌러앉으려 했다고 그들의 지리서에 기록했다. 기록들에서 일관적으로 서술된 내용에 따르면 실제로 정착한 무슬림도 적지 않았던 모양. 위에 첨부된 '알 이드리시의 세계지도'에도 신라가 표시돼 있는데, 아랍인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시칠리아 왕국 노르만 왕조의 루지에로 2세의 지원하에 제작했다. 한국이 포함된 최초의 세계지도로, 다만 신라가 섬나라로 묘사된 오류가 있는데, 멀리서 한국에 오는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해서 동중국해에서 올라와 한국에 상륙했기 때문에 한국의 북쪽으로 가 볼 일이 없어 섬나라로 오해한 것이다. 수백 년 뒤 조선을 표시한 유럽 세계지도에서도 조선을 섬나라로 잘못 그린 지도가 상당히 많다. 삼국유사에 용왕의 아들로 나오는 처용이 사실은 아랍에서 온 인물이었다는 정수일 선생의 설이 유명하다. 이외에 중세 이란의 서사시 쿠시나메사산조 페르시아의 멸망 후 신라로 망명한 페르시아의 왕자와 그의 혼혈 아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내용으로, 현대에 한국에도 알려져서 공연 등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그 외 신라 주변국에서 견신라사로 파견하여 활봘한 교역을 하였고, 반대로 신라가 견탐라사, 견일본사, 견발해사, 견당사 등을 파견하여 활발하게 교역을 하였다.

7. 역사



7.1. 초기(중대)


나당전쟁을 완료한 문무왕이 승하한 후, 다음 왕인 신문왕은 강한 개혁정책을 펼쳤고, 진골 귀족들의 반발을 감수하고 진골에게 주는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했다. 옛 삼국에 각각 3주와 2소경씩[72] 분배해 9주 5소경을 설치하고 신라군 중앙군 9서당에 고구려, 백제, 신라, 말갈로 출신별로 군부대를 만드는 등 옛 삼국의 균형을 맞추려 했으며, 신문왕대의 왕권강화는 통일신라의 국가 기반을 만들어주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7.2. 중기(하대)


흥덕왕장보고에게 서남해를 맡기고, 장보고는 청해진을 세워 바다를 지키게 된다. 그러면서 아랍, 당나라, 왜국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장사를 시작하게 되어 많은 이익을 벌게 되었다. 이 시기 김헌창의 난이 있었으나 중흥으로 국가를 이끌어간다.

7.3. 후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통제력이 약해지자 호족들이 자립하기 시작하고 그 중 901년 북쪽에서는 궁예가 후고구려를, 전라도 지역에서는 900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다. 초기까지는 대야성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신라의 국력이 어느 정도 건재했지만 결국 920년 대야성을 후백제에 잃고, 경애왕 사후에는 신라의 위기가 찾아왔다.

한편 북쪽에 있는 태봉은 왕건의 쿠데타로 고려로 교체된다. 927년 후백제의 경주 침공으로 무력해진 신라 조정은 마지막 왕 경순왕이 더 이상 백성들이 죽는 것을 보기 싫어서[73] 고려에게 항복하면서 신라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경순왕은 낙랑왕으로 책봉되어 고려 수도 개성에서 살았으며 978년 사망한다. 그는 죽어서도 남긴 자식들이 고려 왕실과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8. 역대 군주



문무왕 ~ 진성여왕까지 통일신라기 군주들이다. 그 외 자세한 내용은 신라/왕사 문서와 신라틀을 참고하면 좋다.

9. 관련 문서


[1] '통일신라'는 삼국시대신라와 구별하기 위한 역사용어이며,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은 말이다. 신라의 국호는 503년에 공식 지정된 이래 멸망할 때까지 신라였다. 신라가 한반도 남부를 통합한 이후 북쪽의 발해와 병존한 시기를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남북국시대라고 부르며, 그 이후의 시대를 후삼국시대라고 부른다. 하술 참조.[2]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해.[3] 한반도 북부 및 만주에서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발해를 세운 해.[4] 매소성 전투 및 기벌포 전투로 당군이 신라에 패하고 안동도호부가 요동으로 옮겨간 해.[5]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며 통일신라의 시대가 끝난 해.[6] 676년 나당전쟁 승리(임진강선) → 694년(효소왕3) 송악성 축성(예성강선) → 748년(경덕왕7) 대곡성(오늘날 평산군) 등 축성 → 선덕왕대 패강진(황해도 일대) 개척 → 헌덕왕대 취성군(오늘날 황주군) [7] 신라, 고구려, 백제를 아우르는 일통삼한(一統三韓)의 관념이 확산. 하지만 후삼국의 분열에서 보듯이 통일된 종족 정체성을 완성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8] 신라에서 원효와 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하대가 되면서 중국에 유학한 구법승려가 개인주의적, 사회개혁적, 민중지향적인 선종을 수입전파하고 호족들이 선종을 후원, 후삼국시대가 되면서 왕건의 고려는 선종 세력으로부터 사상적 후원을 많이 입었다. 그러나 고려도 국가 성립 이후에는 지배층은 교종과 밀교를 많이 신앙하였다. 고려 시대 불교 통합운동을 위해 노력한 의천도 교종 승려였다. 고려시대때는 의천이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으며 국청사를 중심으로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수행 방법으로 교관겸수를 제시했다.[9] 신라 때 원효의상으로 대표되는 교종불교가 발달했으나 신라 하대 선종의 출현으로 신라 말의 혼란은 더더욱 가중되었는데, 신라계 중앙귀족들은 왕실의 지원을 받는 교종(5교)을 신봉했다면 삼한계 지방 호족들은 신라의 원신라계 우대정책에 반발하여 중앙에 대한 악감정으로 누구나 부처가 될수있다는 교리를 지닌 선종(9산)을 추종하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부처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석가모니 부처가 아닌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증득한 자를 말한다. 하지만 궁예는 선종의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교리를 악용하여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미륵불이라 자처하던 궁예가 타락하고 멸망하게 되자, 왕건고려는 초반에 선종 세력의 후원을 많이 받았음에도 정작 국가의 지원을 받는 호국불교 교종을 국가이념으로 삼아 선종을 박해하였는데, 귀족 지배층 입장에서는 전통을 중시하는 교종 쪽이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 중 고종 시기 대각국사 의천은 선종을 매우 증오하여 선종을 사문난적이라 표현하며 조선 연산군의 파불에 가까울 정도로 박해를 가한다. 하지만 아무리 위에서 박해를 해도 대중의 지지는 선종쪽이 더 높았기 때문에 선종의 씨를 말리는것은 불가능했다. 이 교종과 선종의 대립은 12세기 후로 동아시아 국가들이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숭유억불 방향으로 나가면서 왕실의 불교 지원이 크게 줄어들게 되고 이로 인하여 정통 교종이 몰락하면서 오히려 선종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한국사에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후 '''도의선사(9산중 가지산파)에 의해 처음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선종 전체로 봤을 때 제일 먼저 들어온 시기는 서기 8세기 후반에 신행대사가 단계적 깨달음을 중시하는 북종선을 들여온 것이 최초다. (도의선사는 우리가 잘 아는 돈오=즉각적 깨달음을 강조하는 남종선을 들여왔다.) 선종이 들어오던 서기 820년대, 이 시기는 한국사의 3대 반란으로 칭해질 만큼 기세가 무시무시했던 그 유명한 김헌창의 난이 일어났던 시기고 그 규모는 신라 9주 중 4주를 점령할 만큼 막강했으나 상당히 빨리 진압된다. 거기다가 일부 주에는 반란에 가담하지 않은 공로로 '''7년간 면세''', 이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는 890년 이후에 일개 지방의 독립선언도 못 막는 안습한 상황과 너무 대비되기 때문이다.의 혜택을 주었을 정도다. 그 정도로 이 시기까지만 해도 신라 정부의 여력이 충분하고 권위도 있었기 때문에 민중들 입장에서도 권위에 의지하지 말라는 선종의 가르침이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북종선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주목받지 못했다. 때문에 도입되던 당시에는 선종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신라 말기인 서기 890년대 이후, 흔히 말하는 국가 막장 테크 시기에 9산 선문이 소율희 등 몇몇 호족들의 지원을 받고 성장하면서 보편화되었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신라 정부는 선종과의 제휴를 시도했다. 이유는 선종을 통해서 떨어지는 권위를 다시 세우려고. 물론 호족의 지원이 더 커서 선종 측은 이를 거절했다. 일본에는 남송을 통해 12세기경 유입되었다. '''누구나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보편성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간단하게 말해 원효대사의 정토종(법성종)보다도 파격적인 효과를 불러온다. 그 때문인지 ''''무식한' 호족과 무신정권기의 무인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이 표현은 조금 비약이긴 하다. 교종은 본래 문벌귀족 사회와 연결되어 있었기에 무신정권으로 문벌귀족 사회가 무너지자 이들을 지원했으며 심지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때문에 최충헌 시기 지눌과 같은 승려가 무신정권의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고 한다. [10] '황왕' 신라의 금석문에서 발견되는 칭호, 고유명사라기보다는 제왕(帝王)과 비슷하게 황제국에서도 쓰이는, 군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11] 신라 왕조 초기에는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돌아가면서 왕을 했지만 통일신라기에는 경주 김씨의 독점 세습이 고착화되었다.[12] 백제+신라 통일만. 고구려까지 통일한 것은 문무왕 때부터다.[13] 효공왕 재위기에 후백제와 태봉이 건국해 후삼국으로 분열하기 때문에 그 이후부터 말대 경순왕까지의 35년은 신라의 삼한일통 의식을 감안하더라도 통일신라라 부르기에 무리가 있다.[14] 무열왕계가 왕위를 이었던 시대. 혜공왕까지 이에 해당된다.[15] 선덕왕부터 진성여왕까지. 효공왕~경순왕은 신라 하대에는 속하지만 통일신라는 아니다. 신라/후삼국시대 문서 참조.[16] 신라를 상대, 중대, 하대로 나누는건 삼국사기 기준이다. 삼국유사는 상고, 중고, 하고로 나누는데 이 경우 통일신라는 하고(무열왕~진성여왕. 물론 하고는 말대 경순왕까지 이어진다.)에 포함된다.[17] 또한 남한 지역에 연고를 둔 백제와 신라의 발굴, 정비, 홍보에 따른 신라 알리기로 이 용어가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그 당시 북한은 북한 치하 북부 지방에 연고를 두는 고구려를 중점적으로 홍보하고 있었다.[18] 어두에서는 두음 법칙에 따라 '나'이지만 둘째 음절 이하부터는 '라'로 발음.[19] 좁은 의미로는 경주시에 있는 작은 이름이자, 넓게는 신라국 전체를 이르는 이름. 공식적으로 신라라는 국명이 정해진 뒤에도 일종의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별칭으로도 쓰였다. 이순신은 계림 최고의 장수라는 식.[20] 어디까지나 현대 중국어 발음이며, 당나라 시대의 중고한어 발음으로는 '신라'에 가깝다.[21] 아랍어 정관사 ال(al)+سيلى(silla)의 합성일 경우, 아랍어의 음운변화에 따라 앗실라로 읽는게 맞다. 아랍어로 중국을 지칭하는 الصين (앗씬)같이 정관사+단어로 구성된 국명이 많은데, 신라도 이와 같은 가능성이 높다.[22] 라틴어로 의자라는 뜻도 있다.[23] 통일신라, 후기신라를 모두 표기하고있다.[24] 혹은 신라[25] 다른 삼국 중 고구려도 고례, 구려(句麗/句驢), 고려(高麗), 한자가 다른 고구려 등의 국호를 음차로 사용하였다. 백제는 초기에 십제(十濟), 혹은 한자가 다른 伯濟가 조금 쓰이거나, 부여 계승의식에 따라 일시적으로 남부여라는 국호를 사용했는데 신라, 고구려와 달리 음차를 표기한 다른 국호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26] 신문왕 6년(서기 686년)에 고구려 사람들에게 중앙의 관위를 주었는데 고구려의 관품에 준하였다. 일길찬은 고구려의 주부(主簿), 사찬은 고구려의 대상(大相), 급찬은 고구려의 위두대형(位頭大兄)과 종대상(從大相), 나마는 고구려의 소상(小相)과 적상(狄相), 대사는 고구려의 소형(小兄), 사지는 고구려의 제형(諸兄), 길차는 고구려의 선인(先人), 오지는 고구려의 자위(自位)에 준하도록 하였다. ... 문무왕 13년(서기 673년)에 백제에서 온 사람들에게 내외의 관직을 주었는데 관등은 백제의 관직에 준하였다. 중앙 관직으로서 대나마는 백제의 달솔(達率), 나마는 백제의 은솔(恩率), 대사는 백제의 덕솔(德率), 사지는 백제의 한솔(扞率), 당은 백제의 나솔(奈率), 대오는 백제의 장덕(將德)에 준하였다. 외관으로서 귀간(貴干)은 백제의 달솔, 선간(選干)은 백제의 은솔, 상간(上干)은 백제의 덕솔, 간(干)은 백제의 한솔, 일벌(一伐)은 백제의 나솔, 일척(一尺)은 백제의 장덕에 준하였다. -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 하 신라 외관. 그러나 이런 삼국사기 일차사료만 보고 착각해선 안 되는 것이, 원래 갖고 있었던 관위에 비하면 분명코 낮춰서 준게 맞다는 거다. 고구려는 사실상 상한이 6두품, 백제의 사실상 상한은 5두품이었고 아예 이런 상한이 6, 5두품으로라도 지켜졌는지조차 상당 부분 의문시되고 있다.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 유민 편 참조[27] 나중에 실체가 없는 신라의 부용국이 되긴 했지만, 보덕국의 전신인 검모잠안승의 '고구려국'은 신라의 속국이 아니라 고구려인들과 신라가 서로 협력하는 공생관계에 가까웠고, 이들은 옛 고구려 남부 지역, 지금의 황해도 일대라는 근거지가 있었다.[28] 노태돈,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1982; 김영하, 일통삼한의 실상과 의식, 한국고대사연구 59, 2010 참조[29] 굉장히 작은 영토를 가진 것처럼 표현되곤 하는데, 신라 자체가 원래 영남 쪽의 소국이었음을 생각하면 이 정도도 괄목한 것이다. 게다가 대동강 이남임을 따지고 보면 대동강 근처도 못 가는 대한민국의 '실질적' 영토보다도 컸다![30] 이 때문에 극단적 의견으로는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적이 없고 정신승리만 했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이후의 고려와 조선 역시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토를 온전히 거두지 못했던 건 마찬가지라 현대인 기준의 영토적 관점에서 신라의 통일이 불완전하다고 말하는 경우 고려 역시 같은 이유로 불완전한 통일이 된다. '''요동과 한반도를 동시에 아울러야만이 통일이라면 한국사에 완전한 통일 왕조는 예나 지금이나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애초에 고구려의 주무대이자 영토가 만주나 요동이었더라도 지금의 우리가 거기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구려 땅은 고구려 땅이었을 뿐이고, 한국 땅은 한국 땅일 뿐이다. 국가의 구성 요건에 영토만이 해당되는 것이 아니니 영토 외에도 그 소속 백성을 모두 아우르지 못했다면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고려의 통일이 신라의 통일보다도 의의가 보다 높게 간주되는 것이 발해 멸망 이후 그 유민들을 '동족'으로 대하고 포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나라가 기울어가던 고려 말기까지도 "요심(遼瀋, 요양, 심양을 아우르는 지금의 랴오허 동쪽의 랴오둥 반도로써 '요동'으로 알려진 지역)은 원래 우리 땅이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북진의 기조를 왕조의 목숨과 맞바꾸어 가면서까지 아주 포기하지는 않았기 때문.[31] 다만 나당전쟁 결과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가 축출되어, 대동강 이북은 비록 신라 땅은 아니지만 당나라로서도 제대로 지배하지 못하는 명목상의 영역에 그치게 되었다. 그리고 발해가 성장하면서 당의 느슨한 고구려 고토 지배는 장기간 이어지지도 못했다.[32] 영토 자체는 발해가 차지한 지역이 넓지만 고구려의 대도시 3경 중 가운데 국경에 끼어 몰락한 평양을 제외하고 남북이 각자 하나씩 가져간 형태였고, 옛 고구려의 인구도 고구려 멸망과 직후의 고구려 부흥 전쟁, 나당전쟁 과정에서 중원과 신라로 많이 빠진 상태였다.[33] 고구려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였고 통일과정에서 외세의 도움을 받았고 사실상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존재로 남북국의 대치상황으로 불완전한 통일이란 점에서[34] 적어도 후삼국의 영역은 모두 지배했으며 외세의 도움없이 자주적인 통일을 하였으며 발해 유민까지 흡수/통합하여 완전한 통일이란 점에서[35] 이 명칭은 그렇다면 왜 통일 이전의 신라를 '전기 신라'로 부르지 않느냐는 반박이 나올 수 있고 보통 '후'를 붙이는 다른 사례와 달리 왕조의 연속성에 끊김이 없다. 실제로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통사, 조선전사, 조선단대사 에서는 '후기 신라와 발해'로 장이 구성되기도 한다. 이는 한반도 북부에 있는 북한이 '전기 신라'를 주제로 다룰 일 자체가 별로 없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다.[36] 이성계가 세운 조선을 후조선이라 부르자는 주장도 재야사학 등지에서 나오고 있지만, 이성계가 세운 조선이 가진 정보량, 현재 대한민국과의 연결성 등이 고대 조선과 비교하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압도적으로 높기 때문에 사실상 받아들여지는 건 힘든 주장이다.[37] 이러한 주장의 밑바탕에는 발해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고, 신라가 한반도 전체를 통치한게 아니라 반박당할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북쪽 경계선(압록강, 두만강)이란 것도 인위적으로 형성된 인문학적 인식이라 후대의 기준으로 논하기 시작하면 답이 없다. 지리적 의미에서의 '반도'는 가장 반도가 좁아지는 신라-고려시대 국경선 쪽이 압록-두만강선보다 더 일리가 있다. 당장 중국사에서 '요동(遼東)'이라고 부르는 지역도 지금의 랴오허 서쪽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 성 일대를 가리키는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당나라 때의 요동은 랴오허(요하) 동쪽의 모든 지역을 포함하는 것이었고 심지어 '''현재의 한반도까지도 '요동'으로 간주'''되었다.[38] (출처: 발해의 대외관계사)[39] 신라 중대 시기.[40] 고려 시대, 특히 고려 초기는 태조 왕건의 역대급 포용책으로 인해 지역별로 정치 분파가 생성 대립하는 성향이 강했고, 지방에서 달려온 세력에 의해 수도의 정치가 뒤집어지는 일이 매우 잦았다.[41] 심지어 후고구려와 후백제 역시 신라 출신이 세운 나라이며 이성계 역시 족보상으론 신라 귀족으로 되어 있다. 단, 후고구려와 태봉의 나머지 건국층은 신라6부의 후예가 아니었고 전주 이씨의 가문 조상이 정말로 신라 귀족이었을 가능성은 희박함을 알아두어야 한다. 통일신라 당시 황해도 일대를 제외한 신라 영역 전체에 오히려 고려 전기의 그보다도 훨씬 강력한 신라의 밀도 높은 직접 지배가 이어져 옛 고구려, 옛 백제 유민의식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행세하려면 호족들은 통일신라 체제와의 연관성을 내세워야 했던 걸 두고, 정말로 신라가 삼국유민들의 정체성을 완전 희석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렇게 신라 체제가 선망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타도와 배제의 대상 또한 되는 현상 자체가, 신라의 한계를 말한다.[42] 요컨대 고구려백제가 통일했더라 손 쳐도 이런 신분 질서가 완화되길 기대할 순 없다는 이야기. 고구려나 백제도 골품제 비슷한 신분 제도가 있었다. 고구려의 고추가나 백제의 대성팔족 등은 어떻게 보면 골품제보다도 적폐 세력이었다. [43] 조선에서는 왕실에서 암투는 있었지만, 왕자의 난과 이인좌의 난을 제외하면 왕위 쟁탈을 위한 내전이 일어나지 않았다.[44] 문주왕, 삼근왕 때 백제에서 일어난 반란.[45] 당쟁 등을 언급하면서 한국사를 분쟁의 역사로 몰아세우는 것은 일제 식민사관이 즐겨 써먹던 여론몰이 수법 중 하나이나, 정치가 있는 곳에 다툼은 필연이다. 중국만 해도 60여 개에 달하는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65년 정도며 진시황 이후의 통일 왕조 중에서 송나라만이 북송과 남송을 합쳐 300년을 간신히 넘겼을 뿐이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천황제를 천년 이상 존속시켰다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귀족 세력과 다이묘(막부)의 정치적 농단을 그저 지켜만 보다가 가끔씩 쫓겨나거나 죽어나가는 마스코트에 불과하였고, 결정적으로 무슨 무슨 막부 하는 세력들 모두가 천황의 명목상 신하이기는 하되 실상은 서로 항쟁하는 독립된 국가나 다름없다. 즉 따지고 들면 통치 체제가 외침과 내란에 맞서 건재하게 유지됨에 있어서 한반도만큼 안정적인 지역은 오히려 찾기 힘들다. 당장 신라 이후 한반도의 국가들이 건국부터 멸망까지 대항했거나 사대했던 국가들만 따져봐도 이는 간단하다. 신라는 수나라당나라, 고려는 북송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조선은 명나라청나라.[46] 혜공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 피살당했고, 나머지 임금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해서 오래 왕위를 지키다 세상을 떠나거나 해서 아무튼 50세를 넘기지 못했다.[47] 이와 별개로 고구려를 비롯한 부여계 국가들과 읍루는 달랐다고 한다[48] 당나라와 고구려가 싸우는 틈에 신라도 후대 왕조인 고려만큼 확장하기도 했다. 실질적인 의미는 없겠지만 어쩌면 더 많이 확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49] 심지어 책성도 동부여 영역의 일부였다.[50] 다만 영향권까지 고구려의 영역으로 포함한다면 상당히 넓게 나오긴 한다.[51] 남경남해부는 함경도 해안평야지대인 북청으로 비정되고 있고, 동경은 두만강 바로 건너편 도시인 훈춘, 중경은 과거 조선인들이 이주했던 두만강 이북의 연변 화룡지역 평야지대로 비정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서경은 고구려의 국내성 바로 옆인 길림성 임강지역으로 배정되고 있는데, 발해의 서남부 지역의 지리를 보면 국내성이 있던 지역이 보기드문 대평야지대였다. 그리고 그 국내성은 압록강 바로 윗편에 위치해 있다...[52] 일단 자신들 국가가 더 커졌으니. [53] 한반도를 만주보다 더 거대한 것으로 본 사람들은 단순히 영토의 크기만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도 다른 여러 이유를 들기도 했다. [54] 고구려 초기 영토를 보면 대부분이 산지인데 국내성 지역만 유일한 평야지대다...[55] 이 때문에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해 살아남았다 해도, 과연 후대의 왕조인 고려나 조선과 극명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게 가능할까 하는 의문들이 생겨나는것이다. 고구려의 만주지배의 형태는 청조 만주족의 후금시절 모습이었던 '여진족'에 한없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즉 한반도 남부의 농경국가로 거듭날것이냐, 중국의 정복왕조로 진출했다가 흡수되버릴것이냐 둘 중 하나라는 것.[56] 요동평야는 화학비료가 보급된 오늘날에나 곡창지대이지, 당시대에는 기후와 토질의 문제 때문에 잡곡농사 외에는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또한 요하를 두고 끊임없이 중국과 대립했기에 주로 둔전의 형태로 운영되었을것으로 추론되며, 민간인들이 안정적으로 농사를 짓기는 힘든 곳이었다.[57] 게다가 국내성도 고구려 중반이 지나면 만주 방어선의 군사 중심지 역할을 하는 군구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지되었다.[58] 최소한 한반도 남부인들도 고구려의 '약탈경제'와 '조공 삥뜯기'로 점철된 역사를 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고구려의 영토가 척박하고 무가치하다는 인식또한 강했을것임은 자연스래 추정할 수 있다.[59] 심지어 대부분은 그렇게 열심히 시도하지도 않았다. 한반도는 기를 쓰고 가지려고 사람들이 오랑캐들의 침략에 죽어나가도 계속 보냈으며 한반도 영토에 대한 요구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반면에 만주는 신라와 고려에서 몇 번 정복 시도는 있었지만 좀 역경이 생기니까 바로 다 철수시켰다. 당시의 만주는 춥고 황량하고 척박한 농사도 잘 안되는 동네였기에 만주에서 건국한 국가들에게 만주보다 따뜻하고 농사가 잘되는 한반도는 생존을 위한 필수지였지만 한반도에서 건국한 국가들에게 그리 차지할 만한 메리트가 없고 괜히 고생만 더하는 땅이기 때문이었다. [60] 물론 공부를 잘한다고 문화력이 꼭 강한 것은 아닐 수도 있긴 하다.[61] 물론 빈공과 합격생의 '''80%'''가 신라라 발해가 급제 순위 2위라 한들 신라인들 눈에는 별거 아닌걸로 보였을 것이다. 물론 인구수 차이는 감안해야하지만...[62] 신라인들은 삼한통일에서 발해를 찬밥 취급했지만 동시에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 비슷하게 여겼다. 물론 정통성 논란에서는 오랑캐라고 비난했다. [63] 그러나 찬양 이유가 민족보다는 도덕 문제였다. 민족의 방파제가 아니라 비도덕적인 수나라에게 천명에 따라 권선징악을 했기 때문이었다. 동국통감에서도 민족 통일보다는 도덕적으로 우월한 신라가 포악한 고구려와 백제를 끝장내고 고통스러운 전쟁을 중단시키고 평화를 가져온 것으로 나온다. [64] 물론 고려의 근본은 지방 세력인 호족의 연합 정권이었기 때문에 지방색이 신라에 비해서 강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65] 참고로 이 지도는 남쪽이 위로 가게 만들어서 신라가 좌측 끝에 있다.[66] 여담으로 중근동 쪽 문헌에서는 이미 고려시대로 접어든 중세 11세기까지도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했는데, 당시 정보나 교통은 현대 같지 않았다 보니 새로운 왕조에 대한 정보를 얻지 못했거나, 혹은 알면서도 과거부터 이미 '신라'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표기했던 듯 하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외국에서 '고려'라는 명칭을 쓰는 등의 일이 있었고, 멀리 떨어진 아랍도 아니라 가까운 일본이나 여진족에 심지어 19세기 이양선을 타고 오는 서구 열강까지 고려란 표기를 쓰기도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일은 꽤 흔했던 듯하다.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한국의 영어명 코리아 자체가 이미 고려를 어원으로 한다.[67] 당나라, 발해, 일본은 물론이고 심지어 멀리 아라비아 상인도 왔다. 이는 당이 다른 중국 통일 왕조보다 더 개방적인 성향이었던 탓도 크다. 반대로 조선이 해외 교류가 거의 없었던 것도 명이 폐쇄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이 큼.[68] 신라에 대한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이후 당은 주로 서쪽 토번, 일본은 동북방의 아이누족과 대치 국면에 들어갔다. 토번은 송첸캄포 대왕 때 크게 성장하여 안 그래도 한반도 쪽에 신경 쓰느라 바쁜 당을 털어버렸다. 덕분에 신라는 나당전쟁을 승리로 빠르게 당나라 세력을 몰아냈다. 그리고 토번은 당이 막장 테크를 타자 당의 수도인 장안까지 털어버린다.[69] 헤이안 시대의 경총(經塚)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의 금동불입상이 대표적이다. 덴무 덴노 시절에 제정된 팔색성(야쿠사노가바네)이라는 씨성제가 '''신라의 골품 제도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70] 지금의 중국 길림성 훈춘.[71] 지금의 북한 함경남도 문천군 덕원면.[72] 단 신라는 옛 가야 지역까지 신라로 쳐서 영남 지역에 3주를 두고, 수도 왕경이 있으므로 소경은 김해소경 하나만 두었다.[73] 물론 "더 이상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것을 볼 수 없어서"라는 건 명분상으로 그렇다는 거고, 당시 신라에게는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애초에 가진 것도 없는데 더 버텨서 뭐하리.[74] 고려 이후 한구라고 불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