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
1. 개요
고분, 유적을 몰래 발굴해 거기에서 꺼낸 부장품들을 업자나 후원자에게 파는 행위. 이런 행위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도굴꾼이라고 한다.
2. 상세
고대 이집트 파라오 당시에도 밑으로는 생활비, 위로는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툭하면 피라미드 및 당시에도 횡행했던 도굴꾼들을 피하고자 조성된 왕가의 계곡에서도 횡행했을 정도로 유구한 역사와 전문성(?)을 자랑하는 분야. 이 때문에 인류사에서는 매춘, 첩자, 도둑과 더불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오래된 직업으로 꼽는다. 영어로 하면 Grave Robber,[1] 또는 '''Tomb raider'''.
피라미드와 왕가의 계곡 항목에도 나오듯, 도굴꾼은 다른 여타 도둑과는 다른 끈기와 지식을 요구한다. 특히 현대에 오면서 더더욱 중요하다. 다른 도둑들의 목표는 분명하고 쉽게 찾을 수 있지만 도굴꾼의 목표는 과거 유명하고 부유했던 이들의 유적이나 무덤에 묻히거나 안장된 부장물이다.[2] 물론 봉분이나 비석, 특징적인 조형물 같은 단서가 있다면 찾기 쉽지만, 아무 티를 내지 않고 지하 등에 숨겨 위치를 모르는 경우도 있으므로 다수의 분업이나 협업을 요구하기도 하다. 개중엔 왕가의 계곡처럼 대대손손 가업으로 삼은 이들도 존재했다.[3] 이미 죽은 이의 무덤을 파헤치는 데다가, 더욱이 도굴꾼들의 주 목표는 왕가 등 높으신 분들의 무덤이므로 동서고금을 찾아볼 필요도 없이 처벌이 매우 엄했다. 도굴한 사실이 적발될 경우 얄짤없이 사형을 때릴 정도였지만, 그럼에도 도굴꾼들은 계속해서 생겨났다.
설령 무덤을 찾더라도 해당 분묘가 어떤 곳인지, 그것을 얻기까지 어딜 얼마나 많이 파내야 하는지 등은 나름대로 상당한 지식과 기술이 요구된다. 또한 거기에서 얻은 부장품이 시장에서 어떤 가치가 있는지도 알아야 하는데 업자에게 헐값으로 파는 일을 막기 위해서이다.[4] 그밖에도 순례나 등산객으로 위장하고 유적지나 사원 터 등을 돌아다니며 탐침봉으로 마구 찌르고 돌아다니다 손끝의 느낌으로 무덤이나 부장품을 찾아내는 이들도 존재했다.[5] 우리나라의 도굴꾼들은 무덤을 쉽게 찾기 위해 심지어 풍수지리를 배우기도 한다. 풍수적으로 명당이라 할 만한 곳을 뒤져보면 옛 무덤이 나온다고...
동서양 막론하고 연구를 목적으로 남의 나라에 가서 그들의 유적, 유물을 조사한 다음 본국의 박물관[6] 으로 보내거나 개인 소유로 돌리는 학자들도 도굴꾼이나 다를 바 없다.[7] 그런 연유에서 타국의 유적이나 무덤을 멋대로 휘저어 놓는 인디아나 존스, 몬타나 존스, 라라 크로프트, 네이선 드레이크[8] , 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국주의에 대한 반감으로 서양 고고학자들을 '도굴꾼이나 다름없다.'고 매도하는 경우도 적지 않으나, 생각보다 그런 사례는 많지 않았다. 현지 통치세력으로부터 정당하게 허락을 받고, 또는 구매하여 반출하였으니...문화재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현지 지배세력이 이를 쉽게 용인한 것이다.
3. 사례
3.1. 한국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왕조가 망하면 지키는 권력이 없어진 왕과 귀족의 무덤은 도굴의 표적이 되었다. 특히 정복전쟁으로 멸망한 경우는 패전국에 대한 약탈 및 보복 격으로 군대에 의한 조직적인 도굴이 벌어지기도 했다. 백제가 망한 후에 당나라군에 의해 백제왕릉은 대부분 도굴되었다고 하며, 고구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만 고구려왕릉과 백제왕릉이 모두 이 시기에 도굴된 것은 아니고 관련 기록이나 도굴갱의 수 등 신라,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장기적으로 시대를 막론하고 여러 차례 도굴되었다.
반면 섬멸전 없이 항복 형식으로 정권이 교체된 경우는 약탈도 없고 망한 나라의 무덤이라도 관리를 명령하기도 했다. 신라시대의 수로왕릉, 고려시대의 신라 왕릉이 그렇다. 조선 왕조는 초기가 지나면서 고려왕실에 대한 탄압을 거두고 살아남은 고려 왕씨들을 통해 고려 왕조의 제사까지 지원해주기도 했다. 20세기까지 유명 고분 및 왕릉들이 비교적 온건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지역민들[9] 과 역대 왕조들이 이전 시대의 능묘들을 파괴하거나 도굴하지 않고 관청에 보호대상으로 인지가 되면 관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나 임진왜란 때 건너온 일본군이 일부 고분들을 도굴했으며 일제강점기부턴 '오구라 컬렉션'으로 대표되는 골동품 수집가들의 수요에 힘입어 도굴이 대놓고 판을 쳐서 수많은 무덤을 속 빈 강정으로 만들어놨다...
고구려와 백제의 굴식돌방무덤들은 [10] 도굴이 쉬워 거의 대부분 탈탈 털렸고, 고려 시대 무덤들도 딱히 도굴 방어장치가 없는데다 고려청자를 발굴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욕심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일본인들은 이미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고려시대 고분에 있음을 알았는데, 고려 멸망 이후 고려 청자의 맥이 끊긴 이상[11] 고려 청자를 구하기 위해선 고려시대 고분을 팔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부를 만든 후 한 일 중에는 고려청자를 얻기 위해 조사를 벌이고 개성시의 고려 고분들을 파낸 것이 있다.[12] 이는 당시 일본인 학자들과 도굴꾼들의 회고록 및 책자를 통해 다수 교차검증 된다. 지금도 이렇게 원무덤 주인의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빛을 본 국보급 고려 청자들의 대다수가 일본에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신라의 무덤들, 특히 돌무지덧널무덤은 엄청난 무게의 봉토와 그 속의 돌무지를 전부 걷어내기 전에는 목곽 안으로 못 들어가는 구조상 도굴이 힘들어서 대놓고 도굴하진 않았으나[13] 금관총을 비롯하여 왕릉급 무덤 다수가 조선총독부의 발굴이라는 명목 하에 사실상 도굴되었다. 비슷한 시기 이집트에서 투탕카멘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고고학의 탈을 쓴 무덤 파헤치기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고 신라 고분에서 황금이 쏟아져 나왔다는 소식이 퍼지자, 백인들이 조선총독부에 허가를 받고 사실상 무덤 사냥을 하러오거나 구경하는 추태가 일어나기도 했는데 경주 서봉총과 그 옆의 '''데이비드총'''[14] 이 그 예다(...). 꼴 좋게도 데이비드가 판 고분에서는 부장품이 별로 나오지 않았고 데이비드는 허탕을 쳤다고...지금도 경주 시내 중심 대릉원 고분들 중 대부분은 도굴된 적이 없다.
가야 무덤은 도굴피해가 위의 신라보다는 심하지만 고구려나 백제보다는 덜한 편이다. 이유는 순장 풍습 때문인데, 가야 공통적으로 순장을 했고 특히 대가야는 한국사에서 독보적으로 순장을 많이 했다.[15] 무덤 주인이 묻힌 주곽 외에 주변에 순장곽이 여럿 있었는데, 도굴꾼들은 고급 유물이 많은 주곽을 노리고, 땅 속 이곳저곳에 퍼졌고 상대적으로 부장품 유물의 급이 낮은 순장곽은 찾지도 못하거나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가야 고분군에서는 미발굴분도 많이 발견되는 편이다. 순장풍습이 현대인 기준으로 좋게 볼 수만은 없지만 고고학적으로는 순장풍습 덕분에 그나마 잊혀진 역사를 더 추적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문화에 따라 화려한 부장품은 따로 묻지 않고 간소하게 묻어서[16] 부장품을 노린 도굴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조선말 혼란기에 도굴이 성행했는데 부장품이 아닌 바로 고인의 시신 자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는 경우가 잦았다. 자녀들 입장에서 부모의 유해를 가지고 인질극을 벌이니 피눈물을 머금고 돈을 주는 경우가 많았고[17] 부장품도 아니고 시신을 도굴하는 행각은 현대에도 그렇겠지만 당대에는 악질중의 악질로 생각해 후술할 오페르트 도굴사건 이후 조선에 전국적인 반외세 움직임을 불러올 정도로 유골 도굴범들은 비난을 받았다.
조선왕릉은 검소함을 위해 부장품이 왕릉에 맞지 않게 간소했고 석회를 발라 굳혀서 상당한 견고함을 자랑했기 때문에 대부분 도굴을 피할 수 있었다.[18] 여기에 조선시대에는 현역 왕조의 왕릉이었기에 경비가 삼엄했고, 조선이 망한 후인 일제시대에도 아직 왕릉에 대한 인식이 바뀌지 않았고, 조선 왕족들이 덴노가 다음가는 서열로 큰 대접을 받았기에 조선 총독부를 포함해서 누구도 도굴할 힘이 없었던 것도 한 몫했다. 해방 이후에도 이승만이 조선 왕족의 후예를 자처했던데다[19] 대한민국 들어서는 이제 전국의 유적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인력을 붙여 관리하는 것이 정착되었기 때문에 도굴되지 않았다.
다만 조선왕릉 중에서도 성종의 선릉과 중종의 정릉은 임진왜란 때 도굴되었다. 사실 이때 일본군은 왕릉이라고 하기에 명종의 강릉과 문정왕후의 태릉을 도굴하려고 했다가 너무 튼튼해서 실패하자 선릉과 정릉을 도굴했던 것이다. 그 밖에도 잘 알려져있다시피 고종 시기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의 무덤을 도굴하려 했으나 워낙 석회로 단단히 보호되어 도굴에 실패했다.
참고로 일제 당시 가루베 지온은 고고학이란 명분으로 충남 공주 일대에 조성된 고분들을 여기저기 파헤쳐 발굴된 유물들을 일본으로 빼돌렸는데, 만약 이것들이 다 환수되면 역사서 상당수가 바뀔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전에 가루베 본인은 물론 그의 후손들도 2006년에 꼴랑 기와 4점을 돌려주고는 더 이상 없다고 발뺌하는 중이다. 다만 가루베가 무령왕릉을 자기가 송산리 6호분을 파헤치며 생성된 인공주산이라고 여겨 손을 대지 않은 것은 불행 중 다행이라 하겠다.
광복을 맞은 후에도 황룡사지를 발굴해 조사하기 위해 민가들을 매입해 헐어버렸는데, 그 틈을 타 도굴꾼이 난입하기도 했다. 이 황룡사지를 턴 도굴꾼들은 그걸로도 모자라 석가탑을 털려하기도 했으나 미수에 그쳤는데, 도굴범들 때문에 파손된 석가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만약 그들이 석가탑도굴에 성공했더라면...
구제발굴을 주로 하는 한국고고학의 특징상 도굴 행위가 학술발굴의 시작점이 되는 아이러니가 있다. 도굴 행위는 전근대에만 있던 것이 아니라 현대에도 있는데 바로 임당 고분군의 도굴 사례가 대표적이다. 경산 임당 고분군 인근의 영남대학교 교수의 제보로 도굴 행위가 고발#되었고 나아가 해당 고분이 발굴되어 임당 지역 및 신라사•고고학적인 자료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물론 문화재 관리 당국과 그 행정의 구조적 문제일 뿐 도굴 행위가 이런 이유에서 절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3.2. 중국
후장(厚葬) 풍습이 성행하여 보물을 부장품으로 무덤에 같이 묻자, 당연히 도굴도 기승을 부렸다.역대 왕조가 도굴을 엄금했음에도 지켜지지 않았다. 사서에 기록된 것과는 달리 진시황릉은 도굴되지 않았지만 이후의 황릉들은 도굴당하지 않은 걸 찾기가 더 빠르고, 진시황릉 이전에 조영된 지배층의 무덤도 무사하지 못했다. 낙양의 북망산 같은 대표적인 무덤군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산 전체가 무덤으로 가득차 더 이상 묏자리를 찾기 힘들자 백성들이 기존의 무덤을 파서 시체를 버리고 내부를 손질한 다음 재사용하기까지 했다.
- 한나라: 서한의 황릉은 적미군이, 동한의 황릉은 동탁이 도굴했다.
- 삼국시대: 조조는 아예 군자금 확보를 위해 전문적으로 도굴하는 부대까지 운영했고, 손권도 마찬가지로 왕릉을 몇 개 도굴했었다.
- 당나라: 당십팔릉 중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은 서쪽 반을 파도 안 나와서 포기했지만, 나머지 황릉 17기는 오대십국시대에 온도가 모두 도굴했다.
- 송나라: 북송팔릉은 금나라가 세운 괴뢰 정권 유제가, 남송육릉은 원나라의 요승 양련진가가 도굴했다.
- 금나라: 베이징 대방산에 있던 금나라 능묘군은 후금의 기운을 끊는다며 원나라 때 도굴당해 껍데기만 있었는데, 천계제 때 명나라 조정이 조직적으로 파괴했다.
- 명나라: 명십삼릉은 도굴당하지 않았지만 지상부의 건축물은 청나라가 능묘공사에 쓰려고 대부분 훼손했다.
- 청나라: 청동릉은 순치제의 효릉을 제외하고[20] 모두 도굴당했고, 청서릉은 도굴당하지 않았다.
3.3. 이집트
피라미드가 많은 만큼 트레저 헌터들이 노리고 도굴해가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위 사례들과 다른 유형이 있는데, 그것은 노동쟁의에 의한 도굴로, 파업 수준으로 임금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자기가 지은 피라미드를 털어가는 일도 있었다.
4. 창작물에서의 도굴꾼 및 도굴 행위
상당수의 RPG류 게임의 플레이어나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은, 특히 문화적/기술적 배경이 대충 중세 유럽 수준인 세계관이라면, 거의 틀림없이 전업 도굴꾼이거나 도굴꾼을 겸업한다. 그도 그럴 것이, 주인공들이 들쑤시고 다니는 던전이 오래된 무덤인 경우가 많으며, 주인공은 대놓고 이런 무덤들을 지키는 수호자를 죽여서 소지품을 강탈하거나 보물상자(=부장품)을 털어서 시장에 유통하는 일을 주 수입원으로 삼는다.
물론 그 주체가 주인공인 만큼 이런 행위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작품은 사실상 없다. 보통은 게임 마스터(또는 작가) 자신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대충 어물쩡 넘어가거나, 아니면 더러운 주인공 보정으로 주인공이 하면 별 일 아닌데 다른 등장인물이 하면 얄짤없이 도굴꾼 취급이다.
엘더스크롤 시리즈 중 5편 스카이림에 경우 주인공인 도바킨이 주로 하는 일 중 하나가 고대 노르드 고분을 도굴하는 것이다. 스카이림엔 수 많은 고분들이 있으며, 작중 온갖 인물들과 집단들이 고분에서 뭔가 찾아오라는 임무를 주다보니 자연스럽게 도바킨은 도굴꾼이 될 수 밖에 없는 것. 물론 대부분의 노르드 고분은 어떤 위인의 것이라기 보다는 드래곤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강제로 매장당한 드래곤 교단의 무덤이 많다 보니 작품내에서도 딱히 도바킨을 비난하거나 하는 경우는 없다. 또한 그러한 고분들에는 온갖 언데드들과 드라우거들이 득실득실하는건 물론, 심지어 알고보니 거기엔 드래곤 프리스트같은 무지막지하게 위험한 존재가 봉인되어있더라 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도굴꾼 노릇하는 것도 쉽지 않은 것.
일반적인 의미에서 영웅이라 불리는 자들 이외에 이런저런 막장 인생들[21] 도 영웅으로 등장하는 다키스트 던전에서는 도굴꾼(Grave Robber)이라는 영웅 캐릭터가 등장한다. 장비하고 있는 무기로도 도굴에 사용되는 곡괭이가 존재.
마피아 게임의 도굴꾼은 사망자의 팀에 따라서 자신의 팀이 결정된다. 무덤을 도굴하여 귀중품을 챙기는 것을 사망자의 직업을 챙기는 것으로 바뀌었기 때문. 주로 첫날 사망자의 직업을 가져간다.
이누야샤에서는 우라스에가 키쿄우의 사당에 있는 유골을 도굴하여 반혼술로 키쿄우를 되살린다.
5. 기타(?)
한국 한정으로 도쿄 구울의 팬들을 '''도굴꾼'''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쿄)구(우)ㄹ'에 -꾼을 붙인 형태인 듯. 도쿄 구울 만화의 내용과 원뜻이 절묘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1] 강도를 의미하는 Robber에서, 무덤(Grave)을 턴다는 뜻이 합쳐진 것.[2] 이 때문에 고생에 비해 건질 건덕지가 없을 게 뻔한 무덤은 부관참시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한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3] 무덤 하나를 완전히 파내려고 몇 대가 무덤 옆에서 거주하고 나중에는 이들이 모여 마을까지 이루기도 했다. 심지어 일부 무덤은 자손을 위한 예금통장(?) 목적으로 손을 안 대고 보존하기도 했다. [4] 여담으로 상당수가 석실이나 옹곽묘 같은 것만 뒤지고 자잘한 부분이나 봉분에 해당하는 외곽은 건드리지 않았는데, 일부 무덤은 거기에 유물이나 부장품이 남아있어 학자들에게 위안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도굴꾼이 그들의 '''학술논문을 입수해''' 그곳에도 제법 값나가는 부장품이 있음을 알고는 그마저도 선수쳐 쓸어가기도 했다.[5] 이 때문에 도굴꾼들의 탐침봉 사용으로 인하여 생긴 유물의 흠이 진품이라는 증명으로 통하기도 한다.[6] 대표적인 사례가 대영박물관.[7] 따라서 일부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현지에서 도굴꾼으로 불리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랭던 워너, 알베르트 폰 르콕 같은 실크로드 고고학자들.[8] 네이선은 진짜로 전문 도굴꾼이다.[9] 구전으로 '저 무덤은 누구의 무덤이라 하더라~'라고 세대마다 전해졌기에 계백의 사례처럼 보호의 대상이 되거나 원균의 사례처럼 이야기 거리가 되곤 했다.[10] 주위를 빙 50센치씩만 파보면 큰 입구가 나온다. 나름 막아놨기는 하지만, 도굴꾼들에겐 하이패스급의 가치를 지닌 포인트.[11] 특히 조선은 고려 청자를 만들지도 않았다.[12] 이토 히로부미 본인도 떳떳한 짓은 아니라고 인식은 했는지 고종이 이토 히로부미가 고분에서 파낸 유물을 들고 자랑하자 고종이 다 좋은데 그거 어디서 난 거냐는 식으로 물어보자 대답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있다.[13] 현대라면 중장비를 동원하면 하룻밤만에 도굴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경주의 경우 왕릉 주변에 주민도 많이 살았으므로 야밤에 몰래 도굴하기란 매우 어렵다.[14] 데이비드가 팠다고 '데이비드' 총이다.[15] 한국사 다른 고대 국가들은 왕릉급 무덤에 1~6명 순장했고 그나마도 나중엔 금지했지만, 대가야는 한 왕릉에 많게는 40여 명씩 순장을 했다.[16] 직접적인 귀금속이 적었다는 것이지, 부장품이 있는 무덤은 많았다.대부분 고인이 살아 있을 때 즐겨 쓰던 물건들(특히 의복)이나 편지 등을 같이 묻는 경우가 많았고, 이런 것은 당대에는 크게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고 도굴꾼이 노릴만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후대에는 역사적 가치가 더해져 귀해지고 있다.[17] 그나마도 온전한 시체를 가지고 하는 놈들은 그나마 질이 좀 나은 편이었고 진짜 심한 이들은 시체를 훼손하기도 했다(...).[18] 말이 석회를 발랐다지, 석회로 수십 cm ~ 1미터 두께의 콘크리트층을 하나 만든 수준이라, 조선 왕릉 대부분은 시멘트 구조물이 보호하는 형태였다. 이걸 뚫으려면 중장비나 폭약을 동원해 며칠 동안 대공사를 해야하다 보니 '''몰래''' 도굴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19] 다만 자처만 했지 왕이 되려고 했다든가 왕족을 우대했다든가 하는 건 없었다. 사실 왕릉 보존도 그냥 모두가 관심이 없어서 온전했다고 봐야 할 듯하다. 왕릉 보존 같은 것에 관심을 쓸 정도로 시대가 여유롭지 않았다. 왕릉에 부장품이 많다든가 하면 도굴이 많이 일어났겠지만 조선 왕릉은 그런 것도 없었으니...[20] 부장품이 부채와 신발뿐이라고 전해졌다.[21] 이교적 주술에 심취한 신비학자, 어떤 집단에 의해 고문에 시달리던 중 그들을 모두 죽이고 탈출한 괴인, 사람을 죽이고 마차를 털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죄의식을 느낀 살인강도, 한센병에 걸린 시한부 인생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