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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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鏡虛, 1849년 ~ 1912년)는 한국 근현대 간화선풍을 일으킨 불교 승려이다.
1. 소개
법호는 경허(鏡虛), 법명은 성우(惺牛) 속명은 동욱(東旭)이다.
1849년 전주 자동리에서 아버지 송두옥(宋斗玉)과 어머니 밀양 박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9세 때 경기도 의왕시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하였다.
61세(1906년)에 갑산, 강계, 만주 등 북방의 오지에서 이름을 박난주(朴蘭洲)로 바꾸고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숨어버렸다.
67세(1912년) 함경남도 갑산군 웅이방 도하동에서 세상을 떠났다.
2. 깨달음
경허는 본래 선승(禪僧)이 아닌, 31세까지 10여 년간 동학사에서 화엄 교학을 강의하던 스님이었다.
그러다 경허의 어린 시절 은사인 계허(桂虛)스님을 만나러 서울로 가는 길에 천안의 한 마을에서 맞닥뜨리게 역병으로, 멀쩡한 사람이 순식간에 죽어버리는 모습을 본 경허는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경전의 수많은 교리들이 죽음 앞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스승을 만나러 가는 일과 강사 생활을 포기한다.
이후 경허는‘나귀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말의 일이 와버렸다(驢事未去馬事到來)'는 화두를 가지고, 동학사 골방에서 정진한다. 그러다 어떤 사미승의‘소가 되어도 고삐 뚫을 곳이 없다(到牛無鼻孔處)'는 말에 깨달음을 얻었다.
이는 그의 오도송(깨달음을 읊은 노래)이다.
경허는 이후 깨달음을 점검해 줄 스승이 없음을 한탄하였다.[1]
忽聞人語無鼻孔 홀연 콧구멍 없다는 말에
頓覺三千是吾家 돌연 우주가 내 집인 줄 깨달았네
六月燕岩山下路 유월에 연암산 내려오는데
野人無事泰平歌 거지는 일 없어 태평가를 읊느니
3. 열반까지
경허는 동학사에서 깨달음을 이룬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사람들과 섞여 지내거나 한가로이 정자에 누워 풍월을 읊으며 지냈다고 전해진다. 따라서 대부분의 연구자는 경허가 깨달은 이후의 20여 년간의 행적에 대해서 은둔의 세월이라거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실망하며 울분의 세월을 보냈으리라 본다.
이후 충남 서산에서 조용히 세월을 보내던 경허에게 새로운 전기를 가져다준 것은 1899년 해인사의 초청이었다. 51세에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경허는 이로부터 1904년까지 5년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그러나 다시 1904년, 경허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승복을 벗고 일반인과 같은 모습으로 박난주(朴蘭洲)라는 이름으로 경허는 함경도 지역을 떠돌며 서당 훈장 노릇도 하고 시장 거리에서 술잔도 기울였다고 전해진다.
1912년 4월 25일 함경도 갑산 웅이방에서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제자인 혜월과 만공은 스승 경허의 열반 소식을 듣고 함경도로 가서 유골을 수습하여 화장하였다.
아래는 그가 죽음을 맞이할 때 남긴 글이다.
心月孤圓 마음 달 홀로 둥근데
光吞萬象 빛은 모든 것을 삼키네
光境俱亡 빛과 경계는 함께 사라지니
復是何物 또 이것은 무슨 물건인고?
4. 연표
- 1849년 전라북도 전주 자동리 출생
- 1857년, 경기도 의왕시 청계산에 있는 청계사로 출가(9세)
- 1879년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 한마디를 전해 듣고 깨달음(31세)
- 1899년 해인사의 초청을 받음(51세)
- 1904년 7월 15일, 만공에게 법을 전하고 천장암을 떠남(55세)
- 1912년 4월 25일, 환속하여 함경남도 등지에서 훈장을 하다가 갑산에서 열반(64세)
5. 여담
- '북송담 남진제'라 불리는 한국 선맥은 경허에서 나온 것이다. 송담은 경허 - 만공 - 전강 -송담(현재 인천 용화선원장)의 계보이고, 진제는 경허 - 혜월 - 운봉 - 향곡-진제(현재 해운정사 조실 및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의 계보이다.
또한 해외 포교로 유명한 숭산도 경허 – 만공 – 고봉 – 숭산(승려)의 법맥이다.
- 만공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로 한암, 수월, 혜월이 있다.
- 제자인 만공 스님과 함께 길을 가는데 시냇물을 건너지 못해 발을 구르고 있던 한 여인을 만났다. 경허 스님은 대번에 그 여인에게 강을 건네주겠다면서 여인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넜다. 여인이 떠나간 뒤에 한참 뒤 경허 스님에게 만공 스님이 “출가자가 어찌 젊은 여자를 등에 업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경허 스님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 여자를 냇가에 내려놓고 왔는데 너는 아직도 여자를 등에 업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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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러므로 깨달음을 인가받은 현대 한국 간화선의 법맥은 그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