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공

 

1. 개요
2. 기행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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滿空
1871년 ~ 1946년 10월 20일
한국의 불교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속명은 송도암(宋道巖)이다. 만공(滿空)은 법호이며 실제 법명은 월면(月面)이다. 그래서 두 사형 수월(水月), 혜월(慧月)과 함께 "경허의 세 달"이라고 불린다.
전라도 태인군(현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면)에서 태어났으며 서산의 천장사에서 출가하였다. 선종(불교)의 큰스님인 경허(鏡虛)스님의 수제자로서 법맥을 이어받았고, 이후 전강으로 법맥이 이어진다.

2. 기행


생전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기행과 발언으로 유명하였다. 스승인 경허 스님도 이 기행으로 유명했는데 청출어람(?)이라고 만공 스님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아래 내용 중에는 이런 일화의 특성상 사실을 각색한 내용도 있을 수 있으므로 참고하자.
  • 1937년 마곡사의 주지로 지낼 때, 조선총독부에서 31본산 주지회의가 열려서 여기에 참석하였다. 이 때 당시 총독인 미나미 지로는 "전임 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국불교를 진흥한 공이 크다"고 칭찬하며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통합을 주장하자, 그 자리에서 “청정(淸淨)이 본연(本然)이거늘 어찌하여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라고 호통을 쳤다.[1] 본디 깨끗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엉뚱하게 산과 강과 대지를 논하냐, 즉 가만히 둬도 되는 한국불교를 왜 간섭하려 드느냐는 비판이었다. 곧이어서 '데라우치 총독은 우리 불교를 망친 인물로 큰 죄악을 저질렀으니 무간 아비지옥에 떨어졌을 것이다.'라고 직접적으로 비난하였다. 당시 배석한 총독부 경무총감은 바로 이 마사타케의 아들인 데라우치 히사이치인데, 이 말을 듣고 대노해서 미나미 총독에게 만공을 잡아들이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공의 명망이 너무 높은 관계로, 미나미 총독은 처벌 대신 만공에게 일본 여행을 제안하는 등의 회유책을 폈다. 물론 만공은 이 또한 거부했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 야인시대(30화)에서 살짝 각색되어서 등장한다.
  • 대한제국 황실을 모시던 궁녀들이 찾아와서 법문을 요청하자, 만공은 진성 사미(후대의 원담 스님)을 불러다가 속세의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다. 그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았다.
>"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 우리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즉 노골적인 성관계를 묘사한 것이었다. 당연히 궁녀들은 노래를 듣고 당황하였다. 그러나 만공은 차분하게 설법을 하였다.

"바로 이 노래 속에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력의 직설 핵심 법문이 있소. 마음이 깨끗하고 밝은 사람은 딱따구리 법문에서 많은 것을 얻을 것이나, 마음이 더러운 사람은 이 노래에서 한낱 추악한 잡념을 일으킬 것이오. 원래 참법문은 맑고 아름답고 더럽고 추한 경지를 넘어선 것이오. 범부중생은 부처와 똑같은 불성을 갖추어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누구나 뚫린 부처씨앗이라는 것을 모르는 멍텅구리요. 뚫린 이치을 찾는 것이 바로 불법(佛法)이오.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된 어리석은 중생들이라 참으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지극히 가까운데 있소. 큰길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결국 이 노래는 뚫린 이치도 제대로 못찾는, 딱따구리만도 못한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훌륭한 법문이 것이오."

이에 궁녀들은 크게 감탄하며 만공에게 감사를 표했고, 이후 궁녀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순정효황후 윤씨도 감동해서 진성 사미를 왕궁으로 불러다가 노래를 듣기도 했단다.
  • 만공과 다른 승려가 산길을 걷고 있는데, 이 승려가 지쳐서 더는 못 걷겠다며 길에 주저앉았다. 이 때 마침 길 옆에 밭을 일구는 부부가 있었는데, 갑자기 만공이 부부 중 아내에게 달려가 입맞춤을 하고 도망갔다. 당연히 이를 보고 남편은 농기구를 들고 쫒아왔고, 동행하던 승려도 엉겁결에 만공과 함께 도망쳐야 했다. 간신히 따돌린 뒤 승려가 만공에게 왜 그런 짓을 했냐고 따지자 만공은 "이 사람아. 그 바람에 이 험한 길을 한 숨에 달려오지 않았나?"라고 말하였다. 이 이야기는 전래동화에서 스님이 아닌 조선시대 선비의 이야기로 각색되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만공 본인이 아닌 경허 스님이 주인공인 이야기라고도 한다. 이 경우 동행했던 승려가 만공 본인.
  • 덕숭산 수덕사의 말사인 정혜사에는 불유각(佛乳閣)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부처님의 젖'이란 뜻이다. 물론 만공 스님이 직접 이름을 짓고 현판까지 쓴 건물이다. 이 '부처님 젖'에 대한 일화도 있다. 만공이 불상을 보며 '부처님 젖이 저렇게 크시니 수좌들이 굶지는 않겠구나.'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제자가[2] '무슨 복으로 부처님 젖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복을 짓지 않고는 그 젖을 먹을 수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만공은 '그대는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고 젖을 먹지는 못하는군.'이라고 답했다고.

3. 기타


말년에는 예산군에 있는 덕숭산전월사에서 기거하였다. 죽기 직전 거울을 보며 "이 사람 만공, 70년 동안 나와 동고동락하느라 고생했지. 그동안 수고 많았네"라는 유언을 남긴 뒤 입적하였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서 유골을 봉안한 부도탑(만공탑)을 덕숭산 금선대 인근에 세웠다. 다만 "부처님 사리로 모든 것은 넉넉하고 거기에 다 뜻이 포함 되어 있으니, 사리를 수습하지 말라"는 유언에 따라 사리를 수습하지 않았으며, 이후 덕숭산의 다비식에서는 어떤 스님이던지 사리를 수습하지 않는 것이 문도들이 지켜야 할 전통이자 불문율로 자리집았다.
제자로는 춘성, 일엽(여류시인인 김일엽의 법명), 고봉, 혜암, 원담 등이 있다.
만해 한용운과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만해는 내 애인이야."라고 말했는가 하면, "지금 온 조선 땅에 사람이 하나 하고도 반 있는데 그 하나가 바로 만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4. 대중매체에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연극배우 정대용이 만공을 분하였다.

[1] 청정본연 운하홀생 산하대지 (淸淨本然 云何忽生 山河大地) - 불경 '능엄경'의 인용이다.[2] 비구니 김일엽이라는 얘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