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백자

 

1. 개요
2. 소성 방법
3. 형태적 특징
4. 가치
5. 고려백자 고미술품 목록
5.1. 국가 지정 문화재
5.2. 시도 지정 문화재
5.3. 일반 동산 문화재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1. 개요


'''高麗白磁.'''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백자. 고려 하면 고려청자를 떠올리고 백자 하면 조선백자를 떠올리나, 고려시대에도 백자가 있었다. 비슷한 케이스로 조선청자가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는 청자의 전성기로 제조된 수량은 고려청자에 비해 매우 적어서 현존하는 수량이 매우 희소하다.[1] 박물관 수장고에도 생각 외로 고려청자들이 많고 종류도 다양하다. 국가지정문화재 중에도 고려청자가 상당히 많다. 그만큼 많이 만들었고 많이 남았단 뜻이다. 반면에 박물관에 있는 고려백자는 손에 꼽을 정도이다.[2] 조선백자 중에도 고려백자의 전통을 계승한 유물들도 있다. 백자 상감연화당초문 대접, 진양군 영인정씨 묘 출토유물 등이 그러하다.

2. 소성 방법


고려백자 태토를 백토로 성형한뒤 청자유약을 입힌 후 청자가마에서 번조해서 만들었다. 그냥 청자 만드는 과정에서 흙만 백토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조선백자와는 달리 순백이 아니라 푸른빛이나 누런색을 띄었다. 질감은 완전히 경화되지 않은 석고 같은 느낌이다. 이렇듯 조선백자의 과도기에 가까운데, 고려청자를 만들 때 부수적으로 같이 만들었다. 오직 고려백자만 전문적으로 만든 가마터는 경기도 동남부의 용인 서리 고려백자 요지[3]와 여주 중암리 고려백자 요지 둘밖에 없을 정도이다. 나머지 고려백자 가마터는 고려청자 가마터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상황이 정반대가 되어서 조선청자를 만들 적에는 태토를 백토로 쓰고 청자유약을 바른 뒤 백자가마에서 구웠다. 그래서 조선청자고려청자와 색감이 다르고 좀 더 백색에 가깝다. 청자가마, 백자가마는 불의 온도에서 차이가 난다. 백자가마가 더 고화력으로 온도를 더 높인다. 이렇듯 고려백자와 조선청자는 당대의 주류에서 벗어난 마이너였다. 더욱 마이너한 것으로는 철유자기, 흑유자기, 연리무늬자기, 도칠자기, 잡유가 있다.

3. 형태적 특징


고려백자의 가장 큰 특징은 색감이다. 조선백자와는 확연히 다른데, 사실 색감의 질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석고 같은 빛깔이라고 하면 좋게 표현한 것이다. 색 자체를 잘 내지 못하여 한 도자기에서도 색깔이 균일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어느 쪽은 푸르스름하고 어느 쪽은 누렇고... 화려한 청자와 고려, 순박한 백자와 조선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지만, 실은 백자가 더 만들기 힘든 하이테크놀로지이다. 아직 조선시대만큼 외면적 기술과 장인들의 노하우가 발전하지 않아 못 만들었다고 봐야 한다. 백자는 더 높은 온도에서 구워야 한다. 그렇지 못한 고려백자들은 소성이 완벽하지 못했다. 편견 및 고정관념/문화 참조. 태토를 성형할 때는 그 두께가 상당히 얇으며 바닥은 편평하게 만들고 유약을 바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려 청자를 만들 때에는 굽받침에서 내부 깊은 곳까지 손이 닿는 부분이라면 어느 한 곳 빠지지 않고 유약을 발랐다.

4. 가치


앞서 기술적으로 볼때 조선백자보다 질이 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하였으나, 어디까지나 중세의 고려가 근세의 조선보다 더 옛날이라 기술발전 단계가 아직 미치지 못했을 뿐, 고려백자도 청자만큼이나 고급스러운 명품들이었다. 색감이 순백이 아니고 균일하지 못할 뿐, 성형부분에선 사치스러운 귀족 취향 도자기였다.[4]
백자를 만들려면 청자보다 더 고도화된 기술이 필요했고, 당시에는 재료가 되는 백토가 귀했다.[5] 고려청자 중에는 최상품도 있지만 품질이 조잡한 하품도 굉장히 많은 반면, 백자는 거의 상등품만 있다.[6] 청자는 대량생산되어 상류층부터 서민까지 사용하지만[7] 백자는 오직 상류층용 소량 생산품이었다. 수요도 꾸준해서 고려 초기부터 청자와 거의 동일한 시점에 그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수요량도 꽤 되는 편이라 부족한 물량은 중국에서 수입했다. 안 만든 게 아니라 실은 못 만든 거였다.
결국 시간이 지나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둘의 지위가 역전되어 백자 우위 시대가 되었다가[8] 청자는 끝내 실전되어버리고 말았다.[9] 고려백자도 고려청자처럼 귀족문화의 유산인 것이다. 현재도 완형으로 남은 고려백자 유물은 매우 드물어 희소성이 있으므로 가치가 높으며, 대체적으로 유물들의 예술적 수준 역시도 높다.

5. 고려백자 고미술품 목록



5.1. 국가 지정 문화재



5.1.1. 국보



5.1.2. 보물


  • 보물 제238호 백자 박산형뚜껑 향로
  • 보물 제345호 백자 상감모란문 매병
  • 보물 제1058호 백자 청화칠보난초문 병

5.2. 시도 지정 문화재



5.3. 일반 동산 문화재


  • 고려 백자철화 국화나비무늬 매병
  • 고려백자향합
  •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고려 백자 일괄

5.4. 해외 소재 문화재



6. 같이보기



7. 둘러보기




[1] 사실 고려청자는 남아있는 수량이 일반인들의 생각보다도 상당히 많다. 사람들은 고려청자라 하면 다 귀하고 비싸리라 생각하지만,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막사발 등은 너무 많아 천 년 전 유물인데도 가격이 고작 몇만 원에 불과하고, 현존수량이 많은 개합은 그보다 비싼 정도이다. 심지어 상감청자라 하더래도 엉성한 하품들도 많은데, 그런 것들은 고려청자란 이름이 무색하게 박한 대접을 받는다.[2] 물론 개인소장품은 더 있을 것이다.[3] 사적 326호.[4] 오히려 기술이 더 발달된 조선시대의 백자보다도 더 화려한 면이 있다. 고려는 화려한 귀족문화였으나 조선은 사대부문화여서 검소하고 질박한 것을 추구하는 사상적 차이에서 기인한다.[5] 사실 지금도 그렇다. 땅 파서 회흑색토를 보는 확률과 백색토를 볼 확률을 생각해보자.[6] 사실 현존하는 수량 자체가 드물어서 고려백자를 전체적으로 조망하기가 어려운 점도 있다. 확실한 사실은 적게 만들었으니 적게 남았다는 것이다.[7] 물론 주사용품은 목기나 토기가 더 많았을 것이다.[8] 조선에서는 왕과 왕비는 그릇으로 백자를 사용하였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청자를 사용하였다. 백자가 청자보다 격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조선 초중기의 이야기이고 후기에는 아예 청자는 궁에서 퇴출되어버렸다. 고종황제는 청자의 존재 자체를 몰랐고, 조선에는 이런 도자기가 없다고 할 지경이었다. 물론 민간에서는 일부가 보존되어 있었을 것이다.[9] 중국이나 일본은 청자도 꾸준히 제작했다. 그러나 백자가 청자보다 어려운 기술임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 청자 이후 백자기술이 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