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여진
1. 인명
인명으로 보는 경우.
'''유리명왕의 아들.'''
서기 18년(유리명왕 37년) 여름 4월에 물에 빠져 사망했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유리명왕은 애통해하며 여진의 시체를 찾고자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얼마 후 비류 사람인 제수(祭須)라는 자가 여진의 시체를 찾아서 왕에게 알렸다. 유리명왕은 제수에게 금 10근과 밭 10경(頃)을 하사해 보답하였으며, 여진의 시신을 거두어 예로서 왕골령(王骨嶺)에 장사지냈다.
유리명왕은 여진이 죽은 후 불과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여진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 듯하다. 유리명왕은 이전에도 도절태자와 해명태자 2명의 아들을 잃은 바 있다. 다만 해명태자는 유리명왕이 죽인 케이스.
2. 지명
지명으로 보는 경우.
여진(如津) : 이전에는 유리명왕의 아들로 봤지만, 본문에 나오듯 물에 빠져 사망하였다는 것 이외에 다른 행적은 알 수 없다. 2017년 논문에 의하면 여진의 진(津)에 나루터란 뜻이 있다는 점에서 보자면, 왕자가 죽었다고 전하는 지역의 이름에 기인하여 명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지명 유래 전승일 가능성이 있다[1] . 유리명왕 28년(9) 3월 해명이 죽은 '''여진(礪津)'''이란 곳과 발음이 같으므로 동일한 지명인지도 모르겠다.
3. 창작물에서의 여진
만화 바람의 나라의 등장 인물. 유리명왕의 아들로 모친은 미유부인. 다만 만화와 소설 모두 모친은 이미 세상을 떠난 것으로 나온다.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 탓에 아버지에게 냉대를 받으며 자라 아버지를 상당히 무서워하는 어린 왕자로 등장한다.
무휼에게는 '''내 아버지처럼(아버지가 여진을 대한 것처럼) 내 아이를 사랑하지는 않겠다'''란 결심을 하게 만드는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나온 대로 작품상에서도 익사하는 것으로 나오며 유리명왕이 여진의 죽음을 상당히 괴로워하기도 했다.(2권 초입부 참조) 그런데 여진이 유리왕을 두려워한 이유가 평소 자식들을 냉혹하게 대한 유리왕의 태도 때문이었고, 익사하게 된것도 유리왕에게 혼난 후 궁밖으로 나갔다가 벌어진 일이니... 훗날 무휼과 호동왕자 사이의 갈등을 암시하는 대목.
이 시절 김진의 그림체가 워낙 수려해서 그런지 상당히 귀여운 모습으로 나온다. 또한, 1부에서 잠깐 등장한다. 등장빈도는 적지만 작품의 주제를 다시 한 번 상기를 시켜주는 인물이기도 하며, 특히 2부에서 무휼이 점점 유리왕을 닮아가며 아들 호동에게 냉혹하게 변해가는 모습과 겹쳐져 더 크게 다가온다.
동명의 드라마에서도 어린 왕자로 등장한다. 배우는 김혜성. 배다른 형제 해명태자 사후 여진을 태자로 만들기 위해 몸달은 미유부인과 달리 본인은 천하태평이다. 작중 사망하는데 배극의 쿠데타 와중에 죽는걸로 나온다.
박창화의 창작 남당유고는 려진(礪津)을 지명으로 보았으며, 해술태자(解術太子)라는 가공의 인물이 등장한다.
[1] (奇庚良, 2017, 「高句麗 王都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7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