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무신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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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구려의 제3대 군주. 고구려 초기의 팽창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왕으로 유명하다. 고구려에서 태어난 첫번째 임금이기도 하다.[8]
2. 이름
시호 뜻이 참 거창한데 풀이하면 '큰 전쟁의 신', '큰 무예의 신'이라는 의미다. 최씨낙랑국의 왕 최리는 아예 '''북국신왕(北國神王)'''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왠지 시호가 멋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 편. 휘인 무휼도 멋진 이름이라 평가받는다.[9]
호와 휘는 여러 가지가 전해져 오는데 유래는 다음과 같다
이 중 무휼은 현대에 와서 발음이 와전된 것으로, 광운식 발음을 적용하면 실제 이름은 '''무술'''에 가까워진다. 막래는 세자(世子)를 뜻하는 고구려어 '''마카리'''요모('''まかり'''よも)와 어원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
3. 생애
3.1. 왕자 시절
유리명왕의 장남 도절태자는 요절하고 차남 해명태자는 자결하는 바람에 3남 무휼이 태자에 옹립되었다.[10]
삼국사기에 첫 등장한 것은 유리명왕 재위 28년 8월인데 동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게 복속을 명령하자 고구려의 세력이 아직 약한 것을 염려한 유리명왕은 복속하겠다는 회답을 보냈다. 하지만 어린 나이의 무휼은 동부여의 사신을 만나 중국 고사 누란지위에서 따온 대소에게 보내는 경고를 남겼다.[11]
유리명왕 32년 겨울 11월에 부여가 쳐들어오자 무휼은 적은 군사로 복병을 써서 학반령이라는 곳에서 부여군을 격파하고 모두 죽였다.
유리명왕 33년 봄 정월에 태자에 올랐는데 이때 나이가 11살. 근데 기록이 뭔가 이상하다. 앞에서 32년에 부여군을 대파했다는데 그럼 10살 때 뛰어난 전술로 적을 죽였다는 말이 된다. 다만 알 수 있듯이 11살은 아닌 것으로 보아 이때 대무신왕의 나이는 20~21세로 추정된다.
어머니는 고구려의 땅인 다물도의 영주이자 비류국의 전 왕인 송양의 딸이라고 하지만 나이 문제와 얽혀 신뢰하지 않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면 대무신왕의 어머니가 다물후 송양의 딸이라고 했는데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유리명왕 3년에 송양의 딸이 사망한다. 만약 유리명왕 3년에 무휼이 태어났다면 태자일 때 나이는 30살이고 왕위에 올랐을 때 나이는 37살이다. 또는 왕후 송씨가 사망했다는 기록 직후에 화희와 치희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사망 기사는 왕후의 추가 책봉을 정당화하기 위한 조작이라는 해석도 있다. 학자들에 따라서는 유리명왕이 송양의 다른 딸과 다시 결혼해 무휼을 낳았다는 의견도 있다.[12] 하지만 황조가에 있는 기록에는 송양의 딸이 아닌 다른 이가 왕후였으므로 연구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처럼 유리왕의 손자라면 해석이 차라리 쉬운데 이 경우라면 장남 도절태자의 아들일 가능성이 있거나 송씨가 속한 비류부(후대의 소노부)가 고구려의 왕후족이니 후계자였던 여율이 송양의 딸 또는 손녀와 결혼해서 대무신왕을 낳았을 수도 있다.
반대로 대수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단서가 되는 기록도 있는데 앞서 등장한 유리명왕 28년 8월 조에 따르면...
이와 같이 대무신왕이 주몽을 '부왕'이라고 칭하는 기록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대무신왕은 유리명왕과 같은 대수의 인물이 되며 나이 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부여 관련 기록에 대해 당시의 사실이 아니거나 후대에 첨부되었다고 보는 의견도 많기 때문에 사료는 참고만 해 두는 것이 좋다.時 王子無恤 年尙幼少 聞王欲報扶餘言 自見其使曰 我先祖神靈之孫 賢而多才 大王妬害 讒之'''父王''' 辱之以牧馬 故不安而出 今大王不念前愆 但恃兵多 輕蔑我邦邑 請使者 歸報大王 今有累卵於此 若大王不毁其卵 則臣將事之 不然則否
이때 왕자 무휼(無恤)은 나이가 아직 어렸으나 임금이 부여에 회답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스스로 그 사신을 만나 말하였다.
“나의 선조는 신령의 자손으로서 어질고 재능이 많았다. 그런데 대왕이 시기하여 해치려고 '''부왕(父王)'''에게 말이나 기르는 직위를 주도록 참언하여 욕되게 하였으므로 불안하여 피해 나온 것이다. 지금 대왕이 지난 날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병사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나라를 업신여기고 있다. 사신은 돌아가 대왕에게 ‘지금 여기에 알들을 쌓아 놓았으니 대왕이 만약 그 알들을 허물지 않는다면 신은 왕을 섬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섬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아뢰어라.”
유리명왕 36년 태자로서 국정에 참가했다.
3.2. 왕위에 오르다
서기 18년, 유리명왕이 승하하자 15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르고 재위 3년 봄 3월에 동명왕묘를 세웠고, 가을 9월에 골구천(骨句川)에서 사냥하다가 신마(神馬)를 얻어서 이름을 거루(駏䮫)라고 했다.
3.3. 정복 전쟁
3.3.1. 부여 정벌
재위 3년 10월에는 부여의 대소왕이 사신을 보내 붉은 까마귀를 보내왔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처음에 부여 사람이 대소왕에게 바친 것이었는데 어떤 사람이 까마귀는 본래 검은 것인데 붉게 되었고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이니 두 나라가 1명의 왕 아래에 합쳐진다는 의미라 하여 부여가 고구려를 차지할 징조라고 말하자 기뻐서 보내주고 그 말도 알려준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의 신하들은 검은 것은 북방의 색인데 지금 변해서 남방의 색인 붉은색이 되었고 또한 상서로운 물건인데 자신이 가지지 않고 고구려에 보냈으니 두 나라의 운명은 알 수 없게 되었다고 풀이했다. 대소왕은 그 말을 듣자 크게 후회했다.[13] 남방이 붉은색이라든가, 북방이 검은색이라든가 하는 것은 오행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해석된다.[14][15]
재위 4년 겨울에 군대를 내서 숙적 동부여를 공격했다. 이때 여러 가지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비류수 가에서 물가를 보니 마치 여인이 솥을 가지고 있는 듯했는데, 가까이 가보니 솥만 있었다. 그 솥은 불을 피우지 않아도 스스로 열이 나서 밥을 지어 군대를 먹일 수 있었다. 나중에 한 장부가 나타나 그 솥은 자신의 누이가 잃어버린 것인데 왕이 찾았으니 자신이 솥을 지고 따를 수 있게 해달라고 하여 부정(負鼎)씨라는 성을 하사했다.
이물림(利勿林)에서 잠을 자는데, 밤에 쇳소리가 들려서 밝은 뒤에 찾아보게 하니 금도장과 병기를 얻었으며, 왕은 하늘이 내린 것이라 했다.
길을 떠나려 할 때 북명(北溟) 사람 괴유라는 기인이 나타났는데 키가 9척에 얼굴이 희고 눈에 광채가 있었다. 그는 왕이 정벌을 하러 떠난다니 자신은 부여 왕의 머리를 베어 오겠다고 하여 왕이 따르게 했다. 또 적곡(赤谷) 사람 마로#s-3(麻盧)라는 자가 나타나서 왕을 따라서 창으로 길을 열겠다고 하자 그렇게 하도록 했다.
재위 5년 봄 2월에 부여국의 남쪽으로 진군하였는데, 진흙이 많은 땅의 평지를 골라 군영을 만들어 쉬었다. 그때 부여의 대소왕은 온 나라를 동원하여 출전하였으나 군대가 진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그때 괴유가 공격을 개시하자 부여의 모든 군대가 무너지고, 급기야는 괴유가 대소왕의 머리를 참수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왕의 죽음에 분노한 부여의 군대는 쉽게 굴복하지 않고 계속 고구려 군을 둘러싸 위기에 빠졌는데, 대무신왕이 하늘에 영험을 빌자 안개가 피어올라 7일간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고, 풀로 허수아비를 만들어 무기를 쥐여 거짓 군사를 군영에 만들어 놓은 다음 샛길로 군대를 이끌고 도망쳐 나갈 수 있었다. 이때 신마 거루와 비류수에서 얻은 솥을 잃어버렸다. 하지만 거루는 이듬해 3월에 부여의 말 100필을 거느리고 돌아왔다.
가을 7월에는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부여 사람 만여 명과 함께 투항해오자, 그를 왕으로 봉하여 연나부(掾那部)에 두었다. 이 연나부는 이후 절노부로 바뀌어 대대로 왕후족을 하였으며, 고추가라는 지위를 얻는 등 소노부와 함께 왕권 버금 세력의 2톱을 달린다.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의 등에 줄무늬가 있어 낙(絡)씨 성을 하사했다.
3.3.2. 개마국 & 구다국 정벌
재위 9년에는 개마국(蓋馬國)[16] 을 정벌하고, 구다국(句茶國)의 항복을 받았다.
3.3.3. 낙랑 정벌
재위 15년, 최리의 낙랑국의 항복을 받았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야기는 이때의 일화. 이후 호동은 계모의 참소로 자결.
재위 20년에는 한나라의 낙랑군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그러나 대무신왕이 죽기 직전 도로 한나라에게 빼앗긴다.
낙랑 정벌 기록이 두 개가 나온다. 낙랑이 두 번 멸망하는 이상한 내용이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완전히 별개라는 주장도 있고, 연계가 있지만 다르다는 말도 있으며, 같다는 말도 있는 등 말 그대로 온갖 설이 난무한다. 낙랑군, 최씨낙랑국 항목 참조.
3.3.4. 신라 침공?
《삼국유사》에선 42년에 신라에 고구려가 쳐들어왔다는데 《삼국사기》에는 내용이 없다.
그리고 단재 신채호에게 광무제와 9년간 전쟁을 벌인 임금으로 지목받기도 했는데, 이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참고 대충 낙랑을 빼앗고 다시 털리는데 걸린 기간이 7년여 정도이니 이 즈음해서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은 있다.
또 모본왕 때 한나라의 북평 등을 공격한 걸로 보아선 북평 등의 주변 영토를 이미 차지했다는 것인데 그 또한 《삼국사기》에 기록이 없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사기》에서 기록하는데, 《후한서》에서는 이 공격의 주체를 동이전에서는 고구려라고 말하지만, 열전에서는 오환과 선비 등의 맥인으로 적고, 특히 태원은 너무 멀어서 불가능하리라고 주석에서 알린다.
하지만 고구려는 유리왕때 이미 시라무렌 강에서부터 난하에 걸쳐 존재하는 선비족들을 정복한 적이 있었고 모본왕 다음 즉위한 태조왕 때 요서지역에 10개의 성을 쌓았다고 하는 것, 후한서에 고구려가 선비족을 이끌고 한나라를 공격한 기록이 있다는 점 떄문에 무조건적으로 틀렸다고 볼 수도 없는 상황이다.[17] 이 부분만 해도 오래인 떡밥.
게다가 민중왕 때에 동해인이 고래를 바쳤다고 하니 동해 부근의 영토를 이미 차지했어야 했는데 역시 《삼국사기》에 없다. 동예나 옥저 세력이 고구려에 복속한 흔적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32년 이후 10년간의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있지 않다는 것(...)
3.4. 중국 세력과의 관계
재위 11년에는 한 요동 태수가 공격해왔으나 위나암성에서 을두지의 지략으로 굳게 지켜서 막아냈다. 자세한 내용은 을두지 문서 참고.
재위 15년에는 사신을 파견해 후한에 조공을 바쳤고,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 왕의 호칭을 회복시켰다.
4. 후계
《삼국사기》에 따르면 첫째 왕후 소생이어서인지 일단 그 아들은 태자를 했지만, 대무신왕이 사망했을 때 워낙 나이가 어려서 대무신왕의 동생인지 친척인지 헷갈리는 민중왕이 대신 즉위했다.
5. 창작물에서의 대무신왕
- 삼국통일전쟁기, 고려와 조선에 비해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지 않은 고대의 왕 치고는 꽤 극적이고 튀는 행적을 많이 남긴 왕이라서 창작물에서 다루기에 매우 적합한 임금이다. 왕자 시절에 두 형과 한 동생을 잃고, 특히 한 형은 부왕과의 갈등으로 죽음을 맞았는데, 정작 본인 역시 아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비극의 연쇄라던가, 그리고 위에도 언급된 신마 거루나 용사 괴유 같은 뭔가 기이한 요소가 왕을 도왔다는 점이라거나, 할아버지 때부터 고구려를 괴롭힌 숙적을 전사시킨 점 등 가정 비극에 초점을 둔 묘사로나 옛 선왕 시대로부터 이어진 악연을 끊는 영웅담에 초점을 둔 묘사로나 스토리를 짜기 매우 좋은 요소를 갖추고 있다.
- 만화 바람의 나라의 주인공이다. 그 덕에 게임과 드라마, 심지어 뮤지컬까지 나왔기에 고구려 국왕들 가운데 가장 창작물로 조명을 많이 받았다. 바람의 나라는 유럽에서도 꽤 유명한지, 유럽 팬의 코스프레도 있어 어쩌면 유럽에서 그나마 가장 많이 아는 고구려 왕일 수도 있겠다.
- 드라마 바람의 나라에서도 역시 주인공인데 흥미롭게도 할아버지 역할과 동일인물이었던 송일국이 열연했다. 유년기를 제외한 청장년기를 배우 교체없이 연기했는데 늙어 보이지만 역사와 대비해보면 9살 ~ 11살 때 모습인 실존 인물과 묘하게 위화감이 느껴진다. 물론 실제 역사는 철저히 쌈싸먹었는지 태어나자마자 고구려를 멸망시킬 운명을 타고났다고 하여 죽을 뻔한다거나 왕족이라는 본인의 신분을 모른 채로 부여의 비밀조직에 가담한다던가 하는 극단적인 픽션이 있다. 그러나 송일국의 연기는 이번에도 뛰어나서 오로지 예언만 믿고 자신을 매몰차게 버린 아버지에 대한 애증, 한 여자를 향한 지고지순한 사랑, 친구를 잃은 슬픔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버리고 고구려의 임금으로써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야 했던 복합적인 면모를 지닌 대무신왕을 잘 연기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 드라마 자명고에서도 당연히 등장했다. 배우는 그것이 알고 싶다로 유명한 문성근. 중년과 노년의 대무신왕으로 나와서 호동왕자의 지지자이자 호동의 정적으로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들을 보여주었다.
- 최근 재연재 중인 신비소설 무의 주인공 무당 낙빈이 사역하는 신으로 등장한다.
- 소설 '대무신왕기'에선 신화 같은 기록에 작가 나름대로 상상해서 개연성을 붙인 것들이 나온다. 대소왕은 죽였지만 전쟁에서 패한 기사의 경우는 아예 대무신왕이 괴유 등과 함께 대소왕만 암살하러 간 거고, 이걸 전쟁으로 포장하는 과정에서 부정이나 이물림 무기들을 대무신왕이 지어낸다라든지.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대무신왕 본기'''
一年秋冬十月 대무신왕이 즉위하다
二年春一月 국내성에 지진이 일어나다
二年春一月 대사면을 실시하다
二年春一月 백제인이 투항해오다
三年春三月 동명왕 사당을 세우다
三年秋九月 왕이 신령스러운 말을 얻다
三年冬十月 부여왕이 붉은 까마귀를 보내오다
四年冬十二月 부여를 정벌하려고 출발하여 세 사람을 얻다
五年春二月 부여 정벌에 실패하다
五年春三月 신마 거루가 부여말을 데리고 오다
五年夏四月 부여 왕 대소의 동생이 압록곡에 와서 갈사국을 세우다
五年秋七月 부여 왕의 사촌 동생이 투항해오다
五年冬十月 북명인 괴유가 죽다
八年春二月 을두지를 우보로 삼다
九年冬十月 개마국을 정벌하여 군현으로 삼다
九年冬十二月 구다국이 항복해오다
十年春一月 좌보와 우보를 임명하다
十一年秋七月 잉어를 적진에 보내 포위를 풀다
十三年秋七月 매구곡 사람이 투항해오다
十四年冬十一月 겨울에 천둥은 치는데 눈은 오지 않다
十五年春三月 백성들이 원망하는 구도 등 세 사람을 서인으로 삼다
十五年夏四月 최리의 낙랑을 정복하다
十五年冬十一月 왕자 호동이 자살하다
十五年冬十二月 왕자 해우를 태자로 삼다
二十年 낙랑을 멸망시키다
二十四年春三月 국내성에 우박이 내리다
二十四年秋七月 서리가 일찍 내려 곡식이 피해를 입다
二十四年秋八月 가을에 매화가 피다
二十七年冬十月 대무신왕이 붕어하다
7. 참고 항목
[1] 일반적으로 수류(殊留)를 오기한 것으로 본다. 이 경우 광개토왕릉비문에 나오는 이름인 주류(朱留)와 음운적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2] 위서와 북사에 나오는, 주몽-(여달)-여율의 뒤를 이어 즉위해 부여를 병탄한 왕이다. 막래의 행적이 대무신왕과 일치하므로 막래를 대무신왕으로 보는 설이 있다. 반대로 조선 후기 한치윤의 『해동역사』는 “이른바 여율과 막래는 지금 상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막래는 ‘모본’ 글자가 와전된 것 같다(所謂如栗莫來今未可考而莫來似是慕本之字訛者也).”라는 주장을 실어, 서로 다른 두 설이 양립하고 있다.[3] 첫째 왕후, 모본왕의 어머니.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지라는 이름으로 나온다.[4] 둘째 왕후, 호동왕자의 어머니.[5] 후한서 기준. 정확한 세대수는 누락되어 있다.[6] 비류의 수장 송양의 딸. 삼국사기의 기록이지만 연대 논란이 있다.[7] 촌(村)이 림(林)의 오기일 수도 있다.[8]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부여에서 태어났다.[9] 이 휼자는 근심하다, 걱정하다라는 뜻인데 앞에 없을 무와 합치면 걱정할 일이 없다는 뜻이다. 이방원의 처남 중에도 민무휼이 있다. 흥미롭게도 조양자와는 뜻은 달라도 음은 똑같이 '무휼'인데 이쪽이나 저쪽이나 나라(단 조양자의 시대에는 나라까지는 아니었다.)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는 점은 같다.[10] 해명이 자결할 당시 대무신왕은 6세였다.[11] 이 부분 때문에 후세의 성호 이익은 해명태자의 일과 연계하여 "해명태자가 황룡국에게 깝쳤다고 죽였다면 왜 무휼은 안 죽였냐?"라고 까기도 했다. 당시 부여는 고구려보다 압도적인 강국으로 동명성왕과 유리명왕 시절에는 부여에게 깨갱하던 신세였고 대무신왕 시절 부여와의 전쟁에서 대소왕을 죽이는 전과를 올리지만 고구려도 많은 피해를 봤다. 부여와 고구려의 국력은 초기에는 부여가 강했는데 이게 역전되기 시작한건 3세기 말에 벌어진 모용외에 의한 부여 침공 때라고 봐야 한다.[12] 만화 바람의 나라에서는 이 설을 채택하였다.[13] 고대에는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서 명분이 필요했는데 대소왕은 해당 까마귀를 부여가 고구려를 병합할 명분으로 쓰려고 했지만 대무신왕이 해석을 고구려가 부여를 병합할 명분으로 바꿔버린 것이다. 결국 고구려가 부여를 공격할 명분을 얻은 것.[14] 사방신 운운하면서 도교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해당 시점에서 도교는 종교의 흔적도 보이기 이전이었고 원시 도교는 황건적의 장각이나 장로의 조부인 장도릉의 오두미도에서나 시작된다. 오두미도와 장각 이전의 도교의 씨앗은 말 그대로 방술을 말하는 무당과 같은 샤머니즘이나 마찬가지였다. 반면 더 체계적으로 존재했던 파벌이 있는데 바로 음양가이고 음양가에서 나온 오행설은 도교는 물론이고 유교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이는 오행상극을 오행상생설로 갈아엎은 인물이 전한의 대표적 유학자 동중서라거나 청나라 때까지 중국 국가명이 오행설의 영향에 있다거나 이름에 오행설을 집어넣는 것이 현대의 항렬자까지 영향을 준다거나 하는 등 다양하다. 유교 국가라고 자처한 나라들도 오행설을 벗어나는 연호, 국명, 이름 등을 쓴 예가 없다.[15] 공교롭게도 고구려 역시 자신들이 한반도 북방의 위치가 된 이후 남쪽의 국가와 그 동맹국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다.[16] 국가명이 개마이기 때문에 개마고원 일대의 소국으로 비정하는 설이 있다.[17] 이 주석을 붙인 것이 당고종의 태자로 측천무후 소생인 장회태자 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