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북위)

 



'''북위의 권신
高肇 | 고조
'''
'''이름'''
고조(高肇)
'''관직'''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겸 령이부 겸 기주대중정(冀州大中正)
영주자사(추증)
사지절 시중 중외제군사 태사 태승상 태위공 녹상서사 기주자사(추증)
'''가족'''
고고(高顧, 5대조)
고양(아버지), 고승신(동생), 문소황후 고조용(여동생)
'''생몰년도'''
? ~ 515년
'''출신'''
고구려
'''국적'''
북위
1. 소개
2. 생애
2.1. 효문제 시기
2.2. 선무제의 즉위
2.3. 실세로 떠오르다
2.4. 종친들과 대립하다
2.5. 절정
2.6. 몰락의 징조
2.7. 권신의 종말
2.8.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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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高肇
? ~ 515년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北魏)의 '''권신.''' 자는 수문(首文). '''고구려 출신으로 시작하여 북중국의 강대국인 북위의 최고 권력자까지 올라선 인물'''이다. 진나라(晉) 영가 연간(307년~312년)에 난리를 피하여 고구려로 들어간 발해현 출신인 고고(高顧)의 5대손이다.

2. 생애



2.1. 효문제 시기


어릴 땐 고구려에서 살았으나, 북위 효문제 초인 473년 경 고조의 아버지인 고양은 동생 고승신과 함께 일가를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북위에 입국하여 여위장군에 제수된다. 효문제는 고양의 딸이자 고조의 누이동생인 고조용을 후궁으로 맞았는데 그녀는 뒷날 선무제가 되는 원각의 모후, 문소황후이다.
효문제 시기의 북위는 남쪽으로 제나라, 북쪽으로 유연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쪽의 고구려는 북위에게 가장 중요한 상대국이었다. 북위가 고구려 출신의 여성을 후궁으로 들인 것은 바로 고구려를 우대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한편 효문제는 죽기 직전 어린 아들인 원각이 걱정되어 6명의 권력 핵심자에게 아들을 부탁한다. 이른바 육보(六輔)이다.
그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 1.시중 겸 호군장군 북해왕 원상(효문제의 이복동생) - 사공으로 임명됨.
  • 2.진남장군 왕숙 - 상서령으로 임명됨.
  • 3.진남대장군 광양왕 원가(효문제의 이복동생) - 좌복야로 임명됨.
  • 4.상서 송변 - 이부상서
  • 5.시중 겸 태위 함양왕 원희(효문제의 이복동생)
  • 6.상서우복야 원징(효문제의 이복동생)
6명중 4명이 효문제의 이복동생이라는 것을 볼 때 그만큼 효문제는 자신의 이복동생들을 신임하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효문제는 원희와 또다른 이복동생 팽성왕 원협에게 "내 자손들이 제위를 지키지 못할 것 같으면 너희들이 황제가 되어 다른 성씨가 제위를 찬탈하는 것을 막아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2.2. 선무제의 즉위


499년 효문제의 죽음과 동시에 태자 원각이 17세의 나이로 제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선무제이다.
선무제가 즉위한 지 2개월 후 고조는 평원공에 책봉된다. 고조가 처음으로 북위의 정치사에 그 이름을 내밀게 된 순간이다.
당시 선무제의 나이가 어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탁고대신인 위의 6보가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는데 특히 원희와 원협이 실질적으로 북위를 위임통치하였다. 그 중에서도 원희의 전횡이 가장 심했다.

북위에서는 함양왕 원희를 상상(上相)으로 삼았다. 원희는 노복(늙은 종)을 시켜 우림 호분(황제 직속, 황제의 경호와 의전을 담당하는 군대)을 요구하고 들고 날 때 의장대를 데리고 다녔다.-위서 501년 정월 을사일 기사

그야말로 재상들 중에서도 가장 높은 재상이며 황제 이상가는 권세를 휘둘렀던 것이다. 이때 영군(황제의 경호책임)장군 우열이 원희의 전횡에 맞섰고 이에 원희는 우열을 항주자사로 삼아 변경으로 보내려 했다. 하지만 우열은 병을 핑계로 나가지 않았고 아들인 우충을 통해 선무제에게 비밀리에 원희의 전횡을 말한다. 또다른 실세인 북해왕 원상 역시 원희의 허물과 악행을 말했으며 사람들의 인망을 얻고 있던 팽성왕 원협 역시 여기에 동조하자 결국 선무제는 친정을 선언한다.
우열을 영군으로 삼은 뒤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을 더해주며 우열의 세를 강화시킴으로서 원희를 견제하기 시작하자 원희는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2.3. 실세로 떠오르다


선무제는 친정을 시작함에 따라 원희를 태보로 자리를 올리고 원상을 대장군 녹상서사로 삼는다. 황족들의 관직을 올려준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원희의 실권을 빼앗아 더 이상의 월권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막은 것이다.
뒤이어 선무제 좌우의 사람들이 원희를 주살해야 한다고 말하자 궁지에 몰린 원희는 반란을 꾀한다. 501년 5월 19일 원희는 선무제가 북망산으로 사냥을 나가는 틈을 타 선무제를 습격하려고 모의하였으나 누설되었고 이에 선무제의 측근 우열은 신속하게 원희를 체포한 뒤 선무제 앞으로 압송시킨다. 선무제는 원희에게 자결명령을 내렸고 결국 당대 최강의 권신 원희는 그렇게 주살된다.
이후 우열은 선무제의 최측근이 되고 그의 조카는 선무제의 첫 황후가 된다.
한편 선무제가 육보를 내치고 원희를 주살하고 나자 고조는 선무제의 신임을 얻음과 동시에 조정의 실세로 급부상한다. 몰수된 원희의 집과 재산들은 모두 고(高)씨의 차지가 되었으며 고조는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겸 령이부 겸 기주대중정(冀州大中正) 에 임명된 뒤 선무제의 고모인 고평공주와 혼인하였고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을 거친 뒤, 다시 상서령(尙書令)으로 옮겨진다. 상서우복야, 상서령은 모두 황제에게 올라오는 문서를 관리하는 '상서대'에 소속되어 있는 직위들로 요직 중의 요직이라 볼 수 있다.

고조는 오랑캐 땅 출신이라서 당시에 명망이 가벼웠는데, 요직에 있으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데 마음을 두어 부지런히 힘쓰면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에 세상 사람들이 모두들 능력이 있다고 칭찬하였다.-위(魏)서 고조 열전

고조가 북위 조정의 실세가 된 것은 그가 황실의 외척이 되었기 때문이 가장 큰 이유이겠지만 그의 유능함 역시 그에 버금가는 요소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부터 고조는 본격적으로 북위의 종친들과 대립구도를 형성한다.

2.4. 종친들과 대립하다


첫 상대는 북해왕 원상이었다. 당시 대장군 녹상서사의 위치에 있던 원상은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불법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큰 집을 지었기 때문에 원성이 높았다. 원상은 관군장군 여호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여호는 고조의 사촌여동생의 남편으로 고조와 사돈관계가 된다. 고조는 애초에 선무제가 자신을 보필하게 할 목적으로 발탁했던 인물이지만 고구려 출신이라 북위 조정에 연고가 적었다. 때문에 여호와 사돈관계를 맺는 것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세를 부풀려가 어느덧 조정의 주요 인사가 된것이다.
그러나 고조는 궁극적으로는 여호 역시 제거하려 하였기에 선무제에게 여호와 원상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참소한다. 안 그래도 원상의 전횡에 실망했던 선무제는 최량으로 하여금 원상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고 고조로 하여금 원상을 체포케 한다. 원상이 체포되는 과정에서 그를 빼돌리려던 원상의 노복 몇명이 처형되자 원상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좌절하여 울다가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난다. 원상이 몰락하자 고조의 세력은 크게 확대된다.
원상이 죽고 얼마 후, 고조는 선무제에게 우림과 호분을 인솔하여 여러 친왕들의 저택을 지키자고 상소하는데, 이것은 북위 종친들을 감시하며 유폐시키자는 의도였다. 그 소식을 들은 팽성왕 원협이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508년 황후 우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무제는 고조의 조카인 귀빈 고씨를 새 황후로 삼으니 그녀가 선무황후다. 선무제는 고조를 더욱 신임하였고 고조의 위세는 점점 더 높아진다. 선무제의 신임과 상서령(尙書令)이라는 요직, 그를 따르는 막강한 세력을 갖춘 고조는 북위의 최강 실세가 되어 조정의 개혁을 단행한다.
바로 종친들의 권한을 축소하는 일이었다. 봉록과 녹질을 감소시키고 훈인들을 내쫓는 개혁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개혁조치들은 황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탁지상서 원광은 고조를 진나라 시대의 환관 조고에 비유하며 비난하였다. 하지만 원광의 뜻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오히려 좌천되었다. 보다못한 원협이 고조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마저도 무시되었다. 고조는 역으로 원협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선무제는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협의 인망이 높았던 때문도 있겠지만 선무제가 나름대로 종친과 외척 간의 균형을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2.5. 절정


계속된 황족들의 수난과 고조의 정권장악에 불만을 품은 경조왕 원유는 508년 7월 12일,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원협의 몰락을 불러온다. 원유가 끌어들인 이들 중 반승고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원협의 첩인 반씨의 아버지였다. 사실 반승고는 원유의 협박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유와 연락을 취하고 있었던 터지만 이 사실은 고조의 귀에 들어갔고 고조는 원협을 완전히 몰아내기로 마음먹는다.
고조는 측근인 위언, 고조진 등과 함께 원협이 반승고를 통해 원유와 내통하고 있다고 참소한다. 선무제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반승고가 원유와 연락한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고조의 말을 믿게 된다.
508년 9월 18일 선무제는 연회를 베푼다며 원협에게 입궐을 명했고 원협은 처음에는 부인의 출산이 임박했기에 가지 않으려 했으나 선무제가 다시 입궐을 권하자 어쩔 수 없이 입궐하려 동액문으로 향한다. 이때 좌위장군 원진이 독이 든 술을 가지고 원협의 앞길을 가로막은 뒤 원협을 독살시킨다.
한편 경조왕 원유가 일으킨 반란은 2달만에 고조의 아들인 고식과 상서 이평에 의해 진압되었고 508년 9월 23일, 낙양으로 압송되던 원유가 고조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서 끝난다.. 아래 기록에서 보이듯 이미 원협을 주살하기 이전에도 북위 제일의 권력자이던 고조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었다. 이제 북위에서 고조 이상가는 세력이나 권력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에 위에서는 고귀빈(高貴賓)을 세워서 황후로 삼았다. 상서령 고조(高肇)는 더욱 귀하게 되고 중용되어 용사(세도를 부림)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니 여러 신하들과 종실(황족, 친왕)에서는 모두 몸을 낮추어 그의 밑에 있었다.-508년 가을 7월 갑오일(13일) 기사


2.6. 몰락의 징조


고명대신이었으며 권력을 멀리했고 안팎으로 인망이 높던 원협의 죽음은 결과적으로 고조의 권세에 역효과를 불러오게 된다. 안 그래도 황족들로부터 경계심을 불러일으키던 고조는 인망까지 잃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철옹성 같은 그의 권세에 그것은 아직 작은 흠집 정도일 뿐이었다.
512년 고조는 사도가 되어 조정의 요직에서 물러난다. 사도는 비록 명예상 최고의 관직들인 3공중 하나이긴 했지만 고조가 이전에 역임하고 있었던 모든 관료들의 인사권을 장악한 직위인 상서령에 비하면 실권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자리였다. 고조도 그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연창(延昌) 초(512년)에 사도(司徒)로 옮겨졌는데, 비록 태정(台鼎)의 귀한 자리에 올랐으나, 요직에서 떠났다는 이유로 불만스러운 기색을 말투와 얼굴빛에 드러내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들 침을 뱉으면서 비웃었다.-위서 고조 열전

다만 선무제가 이때부터 고조를 멀리했다고 판단 할수는 없는 것이 후술하겠지만 514년의 익주 정벌에서 15만에 가까운 대군을 고조에게 맡긴 것을 보면 그에 대한 선무제의 신임은 떨어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비록 천하의 세력가 고조라고는 해도 황족들과 공신들로부터 적대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그였기에 지속적인 황족, 공신들의 견제를 못 배긴 까닭에 선무제가 일단 그를 요직에서 한발짝 물러나게 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어찌 되었건 아직까지 고조는 분명히 북위 최강의 권신이었으며 세력가였기에 종친들과 공신들은 섣불리 그에게 대항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 무렵 선무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지 못한 선무제는 후궁 호씨(훗날의 영태후)에게서 낳은 아들인 원후를 태자로 책봉한다. 원래대로라면 북위의 풍습인 자귀모사(황태자의 어미는 죽임을 당한다)에 의해 후궁 호씨는 죽었어야 했지만 무엇 때문인지 선무제는 호씨를 살려둔다.
이것이 고조의 실각의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관습대로 후궁 호씨가 죽었다면 원후가 제위에 오른다고 해도 권력은 선무황후가 장악할 수 있었기에 고조 역시 권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후궁 호씨가 살아남으면서 뒷날 원후가 제위에 오르자 후술한 대로 그녀가 태후가 되어 권력을 장악하게 됨으로서 선무황후와 고조는 정계에서 축출된다.

2.7. 권신의 종말


514년 11월 선무제는 고조를 평촉대도독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15만을 주어 익주를 정벌케 한다. 고조는 익주자사 부수안으로 하여금 파군을 공격하게 하고 양주자사 양지에게는 유성을, 안서장군 해강생에게는 면죽관을, 무군장군 견침은 검각을 치게 한다. 익주정벌이 한창일 무렵인 515년 정월, 선무제는 갑작스럽게 병석에 눕고 말았는데 3일 만에 급사한다.
시중 겸 태자소부 최광, 영군장군 우충(우열의 아들)을 비롯한 여러 대신은 동궁에서 태자 원후를 모셔와 당시 황후인 선무황후 고씨에게 고한 후 제위에 앉히니 이가 바로 효명제이다. 황후 고씨는 관습대로 직접 자신이 후궁 호씨를 죽이려 하였으나 최광 등이 선무제의 명을 받들기 위해 이를 막는다. 황후 고씨와 후궁 호씨 간의 갈등은 깊어진다.
한편 고조는 선무제의 붕어 소식을 듣자 익주 공략을 멈추고 철수한다. 그를 전부터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북위의 종친들과 일부 신하들은 이를 기회로 고조를 실각시킬 계획을 세운다. 515년 2월 7일 운명의 날, 낙양에 돌아온 고조는 입궐하라는 조서를 받고 곧장 선무제의 관이 있는 태극전으로 향한 뒤, 선무제의 관을 보고 통곡하며 애도를 표한다. 애도의식을 끝마친 뒤 태극전을 나온 그는 결국 고양왕 원옹과 우충 등이 미리 매복시켜놓은 군사들에 의해 교살당한다.
곧이어 조서를 내려 고조의 죄악을 폭로하였으나 죄명은 언급하지 않고 자살(자진)하였다고 말하는 한편, 나머지 친척과 한패거리에게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고 그의 관직과 작위를 삭탈하여 선비로서의 예로써 장사 지내도록 하였다.

2.8. 사후


그 뒤 영태후(후궁 호씨)가 조정에 임어하여 특별히 영주 자사를 추증하였다.
영희 2년(533)에 이르러 당시 북위의 황제인 효무제가 사지절 시중 중외제군사 태사 태승상 태위공 녹상서사 기주자사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