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조)

 


'''
'''
'''479년 ~ 502년'''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유송'''
'''양나라'''
'''별칭'''
'''남제'''(南齊), 소제(蕭齊)
'''위치'''
중국 남부, 베트남 북부
'''수도'''
건강(建康)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국성'''
소(蕭)
'''국가원수'''
황제
'''주요 황제'''
고제 소도성,(479~482),
무제 소색,(482~493),
명제 소란,(494~498),
'''언어'''
중세 중국어
'''문자'''
한자
'''종교'''
대승 불교, 유교, 도교
'''종족'''
한족
'''통화'''
오수전
'''현재 국가'''
중국, 베트남
1. 개요
2. 역사
2.1. 시조 태조 고황제 소도성
2.2. 세조 무황제 소색
2.3. 전폐제 울림왕 소소업
2.4. 해릉왕 소소문
2.5. 고종 명황제 소란
2.6. 후폐제 동혼후 소보권
2.7. 화황제 소보융
3. 남제의 황제

[clearfix]

1. 개요


479년에 유송(劉宋)을 무너뜨린 무장 소도성이 세운 나라로 오나라(동오, 손오)-동진-송(유송)에 이은 육조시대 왕조 중 하나다. 북조의 북제에 비교하여 남제, 혹은 동제, 소제(蕭齊)라고도 한다. "남제서"가 이 시대를 다룬 역사.
제나라 다음에는 양나라(남양)와 진나라(남진)가 있다. 이 다음 왕조인 양(梁)나라는 제나라의 방계 황족 소연(양무제)이 세운 왕조로 그나마 52년이나 갔지만 그중 40여 년은 무제 소연의 치세였다.
왕조의 시조를 전한 창업기의 명재상인 소하에서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24년, 즉 '''30년도 못 간 단명왕조'''이다. 그럼에도 황제들의 막장성과 엽기 행적들은 전 왕조 유송과 쌍벽을 이루었다. 유송처럼 나름대로 명군이 있긴 했지만 그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고 그래서인지 유송보다도 더 빨리 망했다(...).[1]
남조 국가답게 문화는 꽃을 피웠지만 문벌 귀족과 관료 세력이 융합하지 못하고 황족끼리 피를 보는 일이 너무 잦아서 기반이 늘 위태로웠다. 게다가 유송은 그나마 막장성이 왕조 내부의 문제로 그치고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 자체는 그럭저럭 큰 문제 없이 돌아가는 상황이었던 반면, 이쪽은 그 시스템조차도 여기저기 삐걱대기 시작한 시기에 그런 짓을 했으니 더욱 어이가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북위도 사정이 막장이었기 때문에 망해가던 남조를 칠 여유가 없어 자기들끼리 열심히 죽일 수 있었다.[2] 소도성의 다른 자손들은 소란과 소보권이 처리했고, 남은 고종 소란의 자손조차 북위로 망명한 동혼후의 아우 소보인(蕭寶寅) 을 제외하고 소연이 멸했으며, 소보인, 소종도 북위의 혼란기 떄 죽어 소란의 자손이 끊겼다. 다만 소도성의 손자인 소자현은 어떻게 살았는지는 몰라도 어쩄든 살아남아 남제의 역사서인 남제서를 썼다.

2. 역사



2.1. 시조 태조 고황제 소도성


蕭道成, 427년 ~ 482년, 재위 479년 ~ 482년
내란을 진압하여 중령군 장군으로 승진하여 중앙군을 장악하고 송나라의 정권을 장악하자 후폐제를 죽이고 순제인 유준을 등극시키지만 곧 폐위하여 그를 죽이며 제나라를 세우고 479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절약 근검을 숭상하고 세금을 감면하고 호적을 정리하였으며 또한 우완지의 건의로 교적관을 설립하여 450년에 호적을 정리하여 과보 전쟁 이전의 통치 상황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그가 죽으면서 자신이 일개 서민으로 태어나 황제가 될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면서 송나라 황실의 내분으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면서 유씨를 교훈삼아 서로 죽인 유씨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지만 그가 죽은 뒤부터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다만 소도성 같은 경우 조조, 사마소, 유유와는 달리 국가를 크게 진흥시킨 군공을 세운 바 없었고, 아무리 잘 봐줘도 현상 유지에 불과한 정도인데 무리하게 찬탈을 감행한 게 특이한 경우다. 좋은 일화가 많긴 하지만 그건 상식적인 황제가 하는 일반적인 정치 행위들이었던 것으로, 이미 선양의 의미 자체가 소도성의 시대부터 상당 부분 뒤틀리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옳다. 이는 다름 아닌 동시대의 북위도 했던 생각이었다.[3]

2.2. 세조 무황제 소색


蕭賾, 440년 ~ 493년, 재위 482년 ~ 493년
소도성이 겨우 13살에 얻은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정치를 잘했으나, 사치를 부리고 후계자를 잘못 선정하는 바람에 내분이 일어나고 만다. 소색은 상당 부분 나서기 좋아하고 자신감이 지나쳐 태자 시절에 월권이 잦아 부친의 견제와 꾸지람까지 들었던 일화도 있었다.

2.3. 전폐제 울림왕 소소업


蕭昭業, 473년 ~ 494년, 재위 493년 ~ 494년
소색의 장손으로 정치를 마음대로 하다가 방계 황족 소란에게 죽음을 당했다.

2.4. 해릉왕 소소문


蕭昭文 480년 ~ 494년, 재위 494년
소소업의 동생으로 황제였지만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의식주를 모두 소란에게 통제받는 등 평민만도 못한 대우를 받다가 독살되었다. 이후 제나라의 황계는 방계 가문으로 넘어간다.

2.5. 고종 명황제 소란


蕭鸞 452년 ~ 498년, 재위 494년 ~ 498년
본인은 유능했으나, 정통성이 없었기 때문에 황족들을 대거 도살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후계자가 더한 막장이었다.

2.6. 후폐제 동혼후 소보권


蕭寶卷 483년 ~ 501년, 재위 498년 ~ 501년
아버지는 다방면으로 유능했지만 이 자는 살인과 가렴주구, 폭정 면에에만 유능했다. 여러 번의 반란 시도를 막아내어 방심했고 소연의 형 상서령 소의를 독살하고 그의 아우 옹주자사 소연까지 죽이려다가 소연의 반란으로 피살당했다.

2.7. 화황제 소보융


蕭寶融 483년 ~ 502년, 재위 501년 ~ 502년
소보권의 동생으로 반란을 일으킨 소연(양무제)에게 옹립되었다.
결국 선양을 통해 멸망했으며 어쨌든 특이하게 국호가 바뀌었는데 기본 왕족의 출신이 변하지 않은 교체극이었다.[4] 이미 이 단계에서 남조에서의 선양은 완전히 쇼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3. 남제의 황제


대수
묘호
시호
성명
연호
재위기간
능호
-
-
선황제(宣皇帝)[5]
소승지(蕭承之)
-
-
만안릉(萬安陵)
1대
제 태조(齊太祖)
고황제(高皇帝)
소도성(蕭道成)
건원(建元) 479 ~ 482
479 ~ 482
태안릉(泰安陵)
2대
제 세조(齊世祖)
무황제(武皇帝)
소색(蕭賾)
영명(永明) 483 ~ 493
482 ~ 493
경안릉(景安陵)
-
제 세종(齊世宗)[6]
문황제(文皇帝)
소장무(蕭長懋)
-
-
숭안릉(崇安陵)
3대
-
-
,<전폐제(前廢帝)>,
,<울림왕(鬱林王)>,
소소업(蕭昭業)
융창(隆昌) 494
493 ~ 494
-
4대
-
해릉공왕(海陵恭王)
소소문(蕭昭文)
연흥(延興) 494
494
-
-
-
경황제(景皇帝)[7]
소도생(蕭道生)
-
-
수안릉(修安陵)
5대
제 고종(齊高宗)
명황제(明皇帝)
소란(蕭鸞)
건무(建武) 494 ~ 498
영태(永泰) 498
494 ~ 498
흥안릉(興安陵)
6대
제 열종(齊烈宗)[8]
동혼양후(東昏煬侯)
소숙황제(昭肅皇帝)[9]
,<후폐제(後廢帝)>,
소보권(蕭寶卷)
영원(永元) 499 ~ 501
498 ~ 501
-
7대
-
화황제(和皇帝)[10]
소보융(蕭寶融)
중흥(中興) 501 ~ 502
501 ~ 502
공안릉(恭安陵)
[1] 이 24년이 얼마나 짧냐면 전왕조인 유송의 유의륭 재위기간이 29년이며 남제가 존속하던 동안 북위는 효문제, 선무제 꼴랑 두명만 재위했다.[2] 물론 이는 양나라 시절 이야기, 남제 시기만 해도 아직 북위는 강성했다.[3] 북위는 송제 교체를 알리고자 파견된 사신에 대해 제가 송을 섬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선양이 이뤄졌냐고 비웃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가 갈 만한 반응이다. 참고로 당시 북위의 황제는 북위 전성기를 구가한 효문제로 그나마도 재위 초반 시기였다.[4] 소도성과 소연은 정확히 9촌지간이다. 현대에는 친척 취급도 안 해주는 머나먼 관계지만 당시로서는 8촌까지는 가까운 친척으로 취급해줬으니 아주 먼 관계는 아니다.[5] 제 고제 추존.[6] 제 전폐제 추존.[7] 제 명제 추존.[8] 북위 제왕 소보인(蕭寶寅) 추존.[9] 북위 제왕 소보인(蕭寶寅) 추존.[10] 양 무제 추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