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문제

 



'''북위 제7대 황제
高祖 孝文皇帝 | 고조 효문황제 '''
[image]
<colbgcolor=#DC143C> '''묘호'''
'''고조(高祖)'''
'''시호'''
효문황제(孝文皇帝)
'''연호'''
연흥(延興, 471년 8월 ~ 476년 6월)
승명(承明, 476년 6월 ~ 476년 12월)
태화(太和, 477년 ~ 499년)
'''생몰 기간'''
467년 10월 13일 ~ 499년 4월 26일 (32세)
'''재위 기간'''
'''북위의 황제'''
471년 9월 20일 ~ 499년 4월 26일 (28년)
'''능호'''
장릉(長陵)
<^|1>{{{#!wiki style="margin:0 -10px -5px;"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DC143C> ''''''
탁발(拓跋)→원(元)[7]
''''''
굉(宏)
'''부모'''
부황 헌조 헌문황제 탁발홍
모후 헌문사황후 이씨
'''황후'''
폐후 임씨, 폐후 풍씨, 효문유황후 풍씨, 효문소황후 고씨

1. 개요
1.1. 친정
1.1.2. 낙양 천도
1.1.3. 정책 목록
1.2. 토지 개혁
1.2.1. 삼장제
1.2.2. 균전제
1.3. 결과
2. 황후
3. 여담
4. 미디어에서의 등장
5. 둘러보기(계보)

[clearfix]

1. 개요


중국 남북조시대 북위의 제7대 황제.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효문황제(孝文皇帝). 휘는 굉(宏). 제6대 황제 헌문제의 장남.
471년 5세의 나이에 즉위하였다. 어려서 초기에는 태황태후인 문성문명황후가 섭정을 하였다. 이 시기 삼장제(三長制)와 균전제(均田制)를 시행하며 황제권 강화와 국가 재정을 튼튼히 하였다.

1.1. 친정


490년, 풍태후가 죽자 친정을 시작하였다.

1.1.1. 한화#s-3 정책


남조를 통틀어 위진남북조시대에서 가장 중요하고 핵심인 정책 중 하나다. 효문제를 가장 잘 나타내는 업적.
그는 '''한화(漢化) 정책'''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대개혁을 시작했다. 이는 선비족이 적극적으로 한족으로 동화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을 펼친 이유는, 선비족이 포함된 5호(선비, 흉노, 저, 갈, 강)는 아무래도 농업경제가 바탕이 된 고대국가를 경영한 적이 없어서 나라를 세워도 쉽게 망해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서진의 약화를 틈타 북중국을 정복할 수 있었지만, 문화수준이 상대적으로 밀리는 데다가, 지배층인 선비인의 풍습과 피지배층인 한인의 풍습이 달라서 국가경영에 서툰 모습을 보였고, 결국 이들이 세운 왕조는 단명하고 말았다.
특히 북조에서는 한족 농민반란이 계속 일어났는데, 이는 유목민 출신인 지배층이 농경을 잘 몰라서 지나친 착취정책을 펼쳤기 때문이었다. 선비족 출신 효문제는 이런 문제점을 깨닫고, 낮은 문화 수준의 선비족으로 문화 수준이 더 높은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펼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선비족이 세운 나라 북위는 유목 민족인 5호가 세운 나라 중에서 북중국을 통일하여 가장 오래 지속되었고, 한화된 선비족이자 지역 군벌집단인 소위 관롱집단은 전 중국을 통일하고 당나라 시절까지 지배층으로 군림했다. 이로써 500년간 선비족은 중국의 지배층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 대가로 선비족은 당대에 이르면 그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스스로 한인을 자처하기에 이르렀다.

1.1.2. 낙양 천도


1. 낙양(洛陽) 천도
동호계인 탁발선비가 세운 대나라는 평성 (현재 산시성 다퉁)에 도읍을 두었으나 티베트계의 저족이 세운 전진에 의해 망했다. 전진이 비수대전에서 남조의 동진에게 대패하고 망하자, 다시 선비족은 평성에서 일어나 북위를 건국했을 정도로 평성은 선비족의 기반이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문화 수준이 낮은 곳인 데다가, 당시 5호의 이동을 야기한 전 지구적인 한냉기후 때문에 농업이 불가능한 곳이어서 생산력이 미흡해, 화북지방 전체를 다스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리하여 효문제는 정통 중화 왕조들이 낙양에 도읍을 정한 것을 본따서 천도한 것이다.

사실 낙양 천도는 반대가 엄청나게 많았으나[1], 효문제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꾀를 내었다. 남조를 정벌하러 간다는 핑계를 댄 후, 장마철에 군대를 이끌고 남진하다가 비 때문에 행군이 어렵자 낙양에 잠시 주둔시키면서, 선비족 장수들을 낙양의 화려한 문화생활에 잔뜩 홀리게 만들었다. 효문제는 짐짓 다시 남조 원정을 재개하자고 명했지만, 이미 낙양 생활의 달콤함에 취해버린 선비족 장수들은 떠나기 싫어서 그대로 낙양에 머무르자고 청원했고, 효문제는 이런 꾀로 결국 낙양 천도를 이루었다고 한다.

낙양은 지형 특성상 방어에 대단히 취약하다.[2] 따라서 천도 당시 수많은 신하들이 반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도한 이유는 통일 전쟁을 위해서였다. 남조의 물산은 북위에 대단히 탐나는 것이었고, 또한 이때쯤 되면 북위도 중원을 계승했다는 의식을 갖게 되어 통일 전쟁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후한의 수도이기도 했던 낙양을 수도로 삼는다는 것 자체가 한화 정책의 성격을 부여하기 때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1.1.3. 정책 목록


1. 호한(胡漢) 간 결혼 장려 - 본인 자신도 혼혈이었다. 즉 풍태후가 한족.

2.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개변 - 북위 황실도 씨족명을 탁발(拓跋)에서 한성 (元)으로 고쳤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극심했으며, 결국 북주 무제 때 이르러 한성으로 개변하던 것을 다시 호성으로 되돌리는 정책을 실시했다.

3. 호속(胡俗), 호어(胡語) 금지 - 선비족 고유어를 금지하고 한어를 쓰게 했다. 다만 이는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4. 성족분정(姓族分定) - 씨쪽이 다르면 다르게 살게 했다. 이는 씨족연맹을 형성하여 황권에 도전하려는 것을 방지하려는 중앙집권화 정책이기도 했다.

5. 서교제천 금지 - 서교제천은 선비족 고유의 제천의식이다. 선비족은 한족과는 다른 고유의 민족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나 효문제는 이런 고유 신앙을 금지했다. 또한 공자묘를 대대적으로 보수했으며, 이는 국교를 유교로 바꾼 것이었다.[3]

6. 관제개혁 - 원래 선비족을 비롯한 유목민들은 부족국가 체제이기 때문에 부족장의 대표에 불과했던 황제는 권한이 미약했고,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중국(한족)은 전통적으로 황권이 엄청나게 강했고, 투입할 수 있는 국가적 역량은 확연히 달랐다. 그러므로 선비족이 한족을 모방함에 따라서 황권이 엄청나게 신장되었다. 그리하여 북조가 중국식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이외에도 본인이 직접 농사를 시범삼아 지어서 유목생활을 하던 선비족에게 농경정착 생활의 우월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한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선비족을 한화 선비와 비한화 선비로 나누는 결과를 낳았고, 낙양 천도로 인해 황제를 따라 이동한 한화 선비족은 중앙 권력을 독점하게 되고, 천도를 반대하여 원래 있던 곳에 남아있던 비한화 선비족은 그만큼 입지를 잃게 된다. 이와 함께 효문제 치제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문성문명황후 섭정하에 실시된 삼장제와 균전제 실시다.

1.2. 토지 개혁



1.2.1. 삼장제


'''삼장제'''는 황제의 신민에 대한 일신지배를 강화하기 위함과 동시에 균전제를 원활하게 실시하기 위해 시행한 제도였다. 내용을 보면, 5가구를 한데 모아 1린이라는 단위를 설정하고, 5린을 한데 모아 1리라는 단위를 설정했다. 마지막으로, 5리를 한데 모아 1당이라는 단위를 설정한 다음 각각 '''인장, 이장, 당장'''을 두어 호구조사, 조세량 지정 등 행정 업무를 맡기는 제도였다.

1.2.2. 균전제


'''균전제'''는 당시 황폐화된 화북의 토지를 정비하여 국가가 일반 백성에게 노동력을 기준으로 토지를 하사한 제도였다. 여기에는 '''토지 공유주의와 균분주의'''라는 원칙이 투영되어 있었다. 즉 한족의 전통과 유목민의 전통이 어우러진 이 제도는 전란으로 황폐화된 화북 지방의 토지를 개간하는 한편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해 시행되었다.[4]
균전제의 내용을 보면 먼저, 일반 성인 남성인 정남에게 환수전인 노전과 불환수전인 상전이 지급되었다. 이 점에서 정전제 이래 중국의 토지 사상이 강하게 투영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남의 부인에게도 토지가 지급되었고, 이외에 농우에까지 지급된 것으로 봐서 여자와 가축의 노동력을 중시하는 유목민적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노비에게도 토지가 지급되었다.[5]


1.3. 결과


이런 한화정책은 단순히 5호 16국 이전의 한족 풍습을 복고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 발달시킨 것이었다. 중국식 고대국가의 완성형이라고 볼 수 있는 당나라의 제도 또한 북위 효문제의 제도에 뿌리가 닿아 있을 정도로, 효문제의 개혁은 철저한 것이었다.
이러한 한화 정책의 결과 황제권은 강화되었고, 국가체제는 정비되었다. 하지만 단기적, 장기적으로는 이런 개혁에 동반되는 보혁갈등이 일어났다. 한족 등용이 늘어났고, 문인을 우대하는 풍토가 일어나자 소외된 무장들과 비한화된 선비족 내 족장들의 불만이 누적되어갔다. 496년 실제로 장남이었던 황태자 원순(元恂)이 한화 정책에 반발해 옛 수도였던 평성(平城)에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진압되었다. 진압 후 효문제는 원순을 폐태자시키고 주살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불만은 사라지지 않았고, 499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그가 사망한 후 누적된 불만은 523년 육진의 난으로 폭발하게 된다.
이런 한화 정책의 부작용으로 인해 단기적으로는 지배층인 선비족 내에서 한화 정책파와 전통 고수파와의 상당한 갈등이 있게 되었고, 이것은 북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5호가 중심이 된 북조는 왕조가 교체되더라도 이런 한화 정책을 지속하였으며, 이런 정책에 따르는 보혁갈등으로 은 있었지만 개혁이 효과를 보면서 정치가 안정되자 더욱 부강해졌고, 결국 수나라 때 남조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북위의 전성기를 일궜으나 사실상 북위 멸망의 씨를 뿌린 것으로도 평가되는 황제. 한족 입장에서는 중화주의에 입각해서 오랑캐 군주가 중화 문명을 받아들여 한화를 한 것을 높게 평가하였지만 만주족 군주인 강희제는 너무 선조들의 전통을 잊어버렸다고 비평하는 등[6] 침투왕조 북위의 장점과 단점을 고루 보여준 군주였다.

2. 황후


효문제는 생전에 두 명의 황후를 두었는데 모두 문성문명황후의 조카다.
본래 풍윤이 입궁하여 효문제의 총애를 받았으나 피부병에 걸리자 문성문명황후가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여동생인 풍청이 문성문명황후의 명으로 황후가 된다. 문성문명황후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풍윤을 계속 그리워하던 효문제가 풍윤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풍윤을 다시 입궁 시킨 후 풍청을 폐하고 풍윤을 황후로 봉한다. 풍윤은 고미인을 독살하고 그 아들을 양자로 삼으며 효문제가 출병할 당시에 고보살이라는 가짜 환관과 사통한다. 이후 효문제의 누이인 팽성공주가 효문제에게 풍윤의 사통을 알리고 풍윤은 폐위되진 않았으나 연금된다. 효문제는 충격을 받아 병석에 눕게 되고 죽을 날이 오자 풍윤을 자신을 따라 순장시키라고 명하고 사망한다.

3. 여담


484년과 488년,490년에 백제를 침공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육지로는 고구려가, 바다로는 황해가 사이에 있어 접근하기도 어려운 백제를, 그것도 수만의 병력을 동원해 왜 침공했는지는 아직도 의문. 자세한 내용은 동성왕 항목 참고.

4. 미디어에서의 등장


뮬란: 전사의 귀환에서 남자 주인공으로 비중있게 등장한다.
우리나라에 쑨원의 중화민국 건국편까지 정발된 만리중국사 12권에서 나름 비중있게 등장하는데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미소년으로 그려놓고 나름 긍정적으로 묘사되었다. 다만, 이 효문제가 중국을 지배했던 이민족 왕조에서 계속 반면교사의 일종으로 거론되는데, 여진의 금나라, 몽고족의 원나라 지배층이 '효문제랑 선비족의 전례가 있소. 한족들이랑 필요이상의 적극적인 동화정책을 피면 우리 인구가 한족에 열세라서 저들과 완전히 동화되면 우리 민족이 아예 한족에 흡수되어 사라질 수 있단 말이오' 하며 지나친 한화정책을 지양할 걸 주장하는 장면이 나온다.

5. 둘러보기(계보)





[1] 업성으로 천도하자는 견해도 있었고, 태원으로 천도하자는 의견도 있었다.[2] 낙양 항목에도 나와있듯이, 북쪽으로는 황하가 있고 주변에 적절한 산이 있으며 분지도 어느 정도 되어서 방어하기 좋을 것 같지만, 황하는 건너올 수 있는 곳이 너무 많고 산은 간격이 넓어서 방어진을 차려야 하는 곳이 너무 많다. 몇 십 년 뒤 의 명장 진경지가 낙양을 수복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700년 전 한고제 유방도 항우를 멸하고 통일한 직후에는 낙양을 수도로 삼았다가 방어에 취약하다는 지적을 받고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3] 하지만 북조는 이후 유교 못지 않게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된다.[4] 한때 균전제에 대해 실시 여부에 대해 찬반논란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균전제 시행에 대한 사료는 이안세의 상소문 정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투르판 지역과 돈황 지역에서 균전제 실시에 관한 토지 문서가 발견되어 균전제가 실시되었다는 쪽에 의견이 강하게 실렸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지 않아 귀추가 주목된다.[5] 여담으로 이 제도는 북제와 북주, 를 거쳐 시기까지 지속되었가 토지부족 문제로 안사의 난을 전후로 사라지게 된다. 점차 인구는 늘어갔고 이로 인해 불환수전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는 대체적으로 북위 멸망 이후에 실시된 균전제가 토지 지급에 대한 제한이 걸려 부인이나 가축에겐 토지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또한 관리들에 대한 토지는 일반 정남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균전제 특성상 노비와 농우를 많이 가진 권세가들이 토지를 더 많이 지급받았으며 노비와 농우의 세금도 정남에 비해 적었다. 결국 당나라 중후기가 되면 지급되는 토지는 규정의 절반 이하인 농가가 급증하고, 그 소출로 무장을 해야 했던 농민들에게는 상대적으로 군역 부담이 커지는 꼴이 되면서 도호화, 즉 토지를 이탈해 숨어버리는 농민들이 증가하고, 그 결과 안사의 난을 기점으로 균전제는 끝을 맺는다.[6] 헌데 정작 만주족 역시도 북위의 길을 걸었다. 북위와는 달리 민족 자체가 사라지진 않았지만 한족에 동화되어 그게 그거의 수준이 된게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