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연

 


1. 국가
1.1. 개요
1.2. 유연 = 아바르족 설
1.3. 역대 가한
1.4. 둘러보기
2. 어휘
2.1. 柔軟
2.2. 有鉛
3. 인물
3.1. 劉延
3.2. 劉淵
3.3. 劉延


1. 국가



[image]
柔然

1.1. 개요


서기 4세기와 6세기 초까지 지금의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동호 계열 유목민족이다. 그런데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에 의해 유연의 언어(적어도 지배층의 언어)는 고시베리아 제어에 속했다는 가설이 제기되었다.[1][2]
본래 탁발부에 부속되어 있다가 북위가 건국될 즈음에 이르러 독자 노선을 탔다.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화북 지방을 통일한 탁발부 선비족북위와 대립하며 싸웠으나, 북위의 강성한 힘에 눌려, 후대의 정복왕조를 세운 거란이나 여진족, 몽골족과는 달리 그다지 큰 위세를 떨치지는 못했다. 특히 북위의 전성기인 태무제 시절에는 그야말로 샌드백 수준이었다. 영토만 보면 왠지 엄청 강했을 것 같은데 실은 역대 몽골 지역의 통일 왕조 중에서는 거의 최약체. 그도 그럴 게 난다긴다 하는 북방 유목민들은 죄다 남하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들은 진짜 한게 없어서 심지어 북위가 개판이 되는 육진의 난에서도 한 게 없었다. 기껏해야 사태 초기 북위가 유연에 도움을 요청했다가 반란군과의 교전에서 승리한 것이 전부, 이는 이후 등장한 돌궐이 북위가 동위와 서위로 나뉘고 동위와 서위가 북제와 북주로 바뀐 때에 두 나라에게서 많은 이득을 땡겨온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북위와는 같은 선비족 계통임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철천지 원수 사이였다. 중국 사서에는 연연(蠕蠕)이라고 적혀있는데, 벌레가 꿈틀거린다는 뜻으로 이들을 벌레로 취급하며 멸시했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무렵, 자신들에게 복속되어 있던 돌궐족의 반란으로 멸망하고 만다.[3]
이전의 유목민족과 달리 몽골-튀르크계열 유목민족들의 수장 칭호인 가한을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했다. 일단 비공식적인 부분까지 따지자면 그전에 선비족에서 먼저 사용하고 있었다. 유연이 본래 선비족 탁발부에 부속되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쪽이 연원일 수도 있는 일.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 미누신스크에서는 다량의 마구 및 기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유연의 유물로 추정된다고 한다.
같은 북방계 유목민족인 점, 위진남북조 시대와 관련 있다는 점 때문에 뒤에서 나올 전조의 유연에서 이름을 따거나 관계되었다고 보기 쉬우나, 한국 한자음만 같을 뿐, 한자부터 다르고 전혀 무관하다.

1.2. 유연 = 아바르족 설


최근 유전자 조사에 의하면 유연족-아바르족 관련성은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는 모양새다. #

1.3. 역대 가한


유연의 왕성은 욱구려(郁久閭)다.
'''대수'''
'''왕호'''
''''''
'''재위 기간'''
'''1'''
구두상벌가한
욱구려사륜
402 ~ 410
'''2'''
애고개가한
욱구려곡률
410 ~ 414
'''3'''
-
욱구려보록진
414
'''4'''
모한흘승개가한
욱구려대단
414 ~ 429
'''5'''
칙련가한
욱구려오제
429 ~ 444
'''6'''
처라가한
욱구려토하진
444 ~ 464 / 450
'''7'''
수라부진가한
욱구려여성
464 / 450 ~ 485
'''8'''
복고돈가한
욱구려두륜
485 ~ 492
'''9'''
후기복대고자가한
욱구려나개
492 ~ 506
'''10'''
타간가한
욱구려복도
506 ~ 508
'''11'''
두라복발두벌가한
욱구려추노
508 ~ 520
'''12'''
칙련두병두벌가한
욱구려아나괴
520 ~ 552
'''13'''
-
욱구려철벌
552 ~ 553
'''14'''
-
욱구려등주
553
'''15'''
-
욱구려고제
553
'''16'''
-
욱구려암라신
553 ~ 554

1.4. 둘러보기








2. 어휘



2.1. 柔軟


부드럽다는 뜻이다. "신체가 유연하다" 등의 용례가 있다.

2.2. 有鉛


납이 들어간 제품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다. 납이 들어간 휘발유를 유연휘발유라고 부른다.

3. 인물



3.1. 劉延



후한의 황족으로 광무제와 광무황후 곽씨 소생의 아들이다.
건무 15년에 회양공으로 봉해지고, 건무 17년에 황자를 왕으로 봉하는 조치에 따라 회양왕으로 봉해졌다.
유연은 성정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우며 아랫 사람을 대하는 것이 엄하였다. 영평 연간에 유연이 다른 이들과 함께 간교한 이들과 소통하여 도참을 만들고 저주를 일삼았다고 상주하니, 연루되어 죽거나 유배당한 이들이 많았다. 유사(有司)가 유연을 주살할 것을 주청했으나 명제는 유연의 죄가 초왕 유영보다 가볍다고 여기어 특별히 은혜를 베풀어 부릉왕으로 옮겨 봉하니 봉국의 규모가 줄어들었다.
유연은 봉국을 옮기게 되면서 원망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장제 건초 연간에 다시 유연이 역심을 품고있다고 하여 조사할 것을 청하는 상주가 있었으나, 장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알자(謁者)를 보내어 유연을 감시하도록 시키고 다른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부릉질왕 유연 > 부릉상왕 유충(유연의 자) > 자식이 없어 봉국이 없어짐 > 부릉경왕 유방(유연의 자, 유충의 형) > 부릉회왕 유회(유방의 자) > 부릉절왕 유대(유회의 자) > 자식이 없어 봉국이 없어짐 > 부릉공왕 유편친(유회의 자, 유대의 형) > 부릉효왕 유통(유편친의 자) > 부릉왕 유왕사(건안 연간에 사망했는데, 혼란 정국 속에서 시호를 받지 못한 듯?) > 자식이 없어 봉국이 사라짐

3.2. 劉淵




3.3. 劉延




[1] 고시베리아 제어 사용 민족들은 단일 계통의 민족들은 아니고 아주 아주 오래 전에 거의 가장 먼저 아시아에 이주했던 인류로서 후발주자들에게 밀려나 시베리아 같은 척박한 벽지에 파편처럼 남아있는 것 같은 형태로 분포하고 있는데 북방민족들 중 최약체에 속하는 군집이긴 했지만 오호십육국시대 때 메이저 북방민족들은 죄다 중국 대륙으로 남하한 상태였으니 그 틈을 타고 내려왔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2] 그러나 나중에 이 설을 사실상 철회했다.[3] 이 때 돌궐은 유연을 무너뜨리기에 앞서 그들과 우호 관계에 있던 고구려의 신성백암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장군 고흘의 활약으로 물 말아먹고 끝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