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 카츠나가

 

'''오사카 오인중'''
사나다 노부시게
'''모리 카츠나가'''
고토 마타베에
아카시 테루즈미
쵸소카베 모리치카

1. 개요
2.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
3. 오사카 전투
4. 창작물에서


1. 개요


毛利勝永(もうり かつなが(모리승영)
1577년 ~ 1615년 6월 4일 (음력 5월 8일)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 원래 성은 모리((もり)였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으로 명가 모리(毛利(もうり )성을 쓰게 되었다. 관직인 부젠노카미(豊前守)를 붙여 모리 부젠노카미 카츠나가라고도 부른다.

2. 임진왜란과 세키가하라 전투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와, 울산왜성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 아버지인 모리 카츠노부가 당시 4번대의 대장이었다[2]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서군에 참가하였다가, 이후 쵸소카베가 대신 도사에 들어온 야마우치 가에 몸을 의탁하였다. 도사번 초대 번주 야마우치 카즈토요에게 후대 받았으나 동서의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토요토미 히데요리의 초대를 받아 오사카 성으로 탈출한다. 카즈토요의 조카 겸 양자이자 2대 토사 번주인 야마우치 타다요시와의 내연 관계를 커밍아웃하고 이를 빌미로 하여 탈주. 도사에서 오사카까지 헤엄쳐서 도망쳤다는 일화도 있어, 왠지 수영 실력으로 유명하다.

3. 오사카 전투


사나다 노부시게, 고토 마타베에, 쵸소카베 모리치카, 아카시 테루즈미와 함께 오사카 5인 중 한 명.
오사카 여름의 진의 치열한 전투였던 도메이지 전투 당시, 짙은 안개 때문에 때맞춰 도착하지 못하여 고토 마타베에가 전사했다는 자책감에 노부시게가 그 자리에서 죽을 생각으로 전투를 준비하자 그를 다독여 퇴각 지휘를 하는 등의 냉정침착한 면도 돋보인다.
[image]
마지막 싸움인 텐노지 전투에서도 엄청난 대활약을 하여, 혼다 타다카츠의 차남인 타다토모와 오가사와라 히데마사[3]를 전사시키고 적부대를 차례차례 괴멸시키면서 사나다 노부시게와 함께 이에야스의 본진까지 돌입하였다. 이 때 박살난 네임드는 아사노 나가시게(浅野長重)[4], 아키타 사네스에(秋田実季)[5], 사카키바라 야스카츠(榊原康勝)[6], 센고쿠 타다마사(仙石忠政)[7], 스와 타다츠네(諏訪忠恒)[8], 사카이 이에츠구(酒井家次)[9], 혼다 타다즈미(本多忠純)[10]등.
결국 사나다 군이 괴멸하면서 성내로 철수하는데, 이 때에도 도도 다카토라 군을 격파하고 이이 나오타카나 호소카와 타다오키 군을 막아내면서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태에서 침착하게 철수를 완료한 지휘 능력은 단연 발군'''이었다고 한다.
결국 6월 4일, 주군 토요토미 히데요리, 요도도노의 카이샤쿠를 한 뒤 자결하였다.
두 아들 중 카츠이에는 아버지와 함께 자결, 다른 아들 타로베에는 체포되어 처형당한다.
오사카 성에 입성한 인물 중에서는 단연 사나다 노부시게가 유명하나, 모리 카츠나가 또한 매우 출중한 인물로써 노부시게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라 한다.
온화하고 정이 많은 성격에 사교성도 좋았으며, 입성인물 중 1, 2위를 다툴 정도로 명망있는 인재였다. 전반적으로 군사의 지휘에 능하여 불리한 싸움에서 아군을 후퇴시키는 역할을 맡는 경우가 많아 돋보이지는 않으나, 아군에게는 절대적인 신임을 주는 인물이었다고. 텐노지 전투 당시, 구로다 나가마사가 적진에서 싸우는 그를 보고 가토 요시아키에게 누구냐고 물어 모리 카츠나가라는 것을 알고,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벌써 저렇게 훌륭한 무장이 되었다고 평했다는 일화가 있다.
오사카 5인 중 중에서도 최연소였으나[11], 여러모로 노부시게와 이미지가 겹치는 바람에 왠지 노부시게 쪽을 띄워주다보니 존재감이 약해지고, 노부시게를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이에야스 본진 공격 또한 상을 차려준 것은 카츠나가임에도 정작 유명해진 것은 숟가락을 든 노부시게. 여러모로 손해본 케이스다.
덤으로, 사나다 십용사의 최후의 활약 장면의 대부분이 '''카츠나가의 활약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에도시대의 문인인 칸자와 토코(神沢杜口)는,

'''안타깝도다 후세여. 사나다를 칭송하면서도 어찌하여 모리는 그리하지 않는가.'''

惜しいかな後世、真田を云いて毛利を云わず

라고 그의 인물됨과 활약상을 기렸다.
여담이지만, 후손(직계는 아님) 중 일부가 메이지 시대 때 해외로 이주, 현재 미크로네시아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인 매니 모리(Manny Mori)가 그의 후손이라고.

4. 창작물에서


[image]
[image]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image]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노부나가의 야망에서 천도 기준으로 통솔 89 무력 82 지력 76 정치 42 특기 연격지이라는 능력치로 등장. 그런데 기병적성이 A인데 철포적성은 B이다.
태합입지전에도 등장하지만 여기선 눈물나게 구리다. 의리가 있는걸 제외하면 제대로 평가받은게 없을 지경. 70이라도 넘는 능력치가 단 하나도 없으며 전투에서도 철포, 무운이 2레벨인걸 제외하면 1레벨인것도 몇개 없다. 먼치킨인 사나다 노부시게와 비교하면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릴 뿐.

[1] 당시 조명연합군은 1,2차전투에서 패전.[2] 시마즈 요시히로 등을 이끌었다.[3] 마츠모토번 초대 번주. 이 전투에서 장남이 전사하고 자신도 상처로 인해 채 한 달이 안 되어 사망.[4] 오봉행 필두인 아사노 나가마사의 셋째 아들.[5] 안도 치카스에의 장남.[6] 타테바야시번 2대 번주로,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셋째 아들.[7] 이즈시번 2대 번주.[8] 스와번 2대 번주.[9] 사카이 타다츠구의 장남.[10] 에노모토번 초대 번주로, 혼다 마사노부의 세째 아들.[11] 노부시게보다도 열 살 이상 어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