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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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곽한일은 1869년 12월 10일 충청남도 아산군 송악면 역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최익현의 문인으로,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906년 2월에 남규진(南圭振)과 더불어 최익현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했다. 이에 최익현은 호서의 일을 맡길 테니 남규진과 함께 무리를 모을 것을 지시했고, 곽한일은 최익현으로부터 도장을 받고 호서로 내려갔다. 그해 5월 27일, 남규진은 예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고 곽한일은 400명의 병사를 인솔해 해미성을 점거하려다가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대가 홍주성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곳으로 향했다.
홍주성에 도착한 그는 민종식으로부터 돌격장으로 임명된 후 다시 소모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5월 31일 일본군의 대공세로 홍주성이 함락되자, 그는 가까스로 성을 빠져나온 뒤 최익현의 의병대를 따르려 했다. 그러나 최익현 역시 패하여 13명과 문인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에 그는 독자적으로 의병을 이끌기로 하고 9월 보름경 전 참판인 이남규의 집에서 김덕진(金德鎭), 이용규(李容珪), 박윤식, 김운락(金雲洛), 황영수(黃英秀), 정회규, 박창로(朴昌魯), 이만식(李晩植) 등과 함께 충남 예산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키는 일을 논의했다.
그들은 논의 끝에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황영수, 정재호를 중군장으로, 박윤식을 운량관으로 삼고 곽한일과 이용규, 김덕진은 참모로 배속되었다. 이후 1906년 9월 그믐 경에 수백 명의 장정을 예산읍 일대에 배치했으며, 11월 20일에 예산읍을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한곡 근처에 있던 일진회 회원에 의해 기밀이 누설되었고,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곽한일을 비롯하여 이남규 부자, 박윤식, 이용규, 이석낙 등이 체포되었으며, 뒤이어 민종식 등도 모두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공주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평리원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이후 곽한일은 김덕진, 이용규, 황영수, 박윤식, 박두표 등과 함께 지도(智島)로 종신유배되었다.
한일병합 후 사면령에 따라 유배지에서 풀려나 귀향한 곽한일은 1913년 2월 임병찬으로부터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총무총장(總務總長)에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약속했다. 그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전용규, 이정로와 협의한 후 온양군 일북면 덕지에 사는 윤천보(尹天普)·윤익동(尹翼同)과 평택군 서면 목정리에 사는 이일영(李一榮)·윤상보(尹尙普)·강태봉(姜泰逢) 등으로 하여금 모금운동을 전개하도록 명했다. 이들은 전라남북도·충청남북도·경기도 등지에서 3백원을 거두어서 3월 하순경에 김재순에게 출급(出給)하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경비를 조달할 것을 보장해 주었다.
1913년 음력 3월, 곽한일은 전용규와 함께 김재성에게 “방금 민권을 단합하기 위하여 창덕궁에서 칙명을 발포하였는데 준수한 사람에게 칙명을 하송하니 경북 문경군의 최욱영에게 그 칙명을 전해달라.”고 명하여서, 김재성이 최욱영에게 칙명을 전하게 하였다. 그러나 1913년 8월 13일 독립의군부가 발각되는 바람에 경찰에 체포되었고, 이후 1년 6개월의 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곽한일은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고 한훈의 설득을 받아들여 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침략의 원흉을 처단하기로 약속하고 군자금 수합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일이 또다시 발각되어 경찰에 체포된 뒤 유배형에 처해졌다가 1916년 종신집행유예로 바뀌어 고향으로 돌아갔고, 1936년 4월 12일에 아산에서 사망할 때까지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곽한일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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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일은 생전에 환도를 간직했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를 때 압수되었다. 그 후 그의 환도는 서대문형무소 역사박물관에 보관되었고, 문화재청은 2018년부터 곽한일 의병장의 환도를 문화재 등록 대상으로 선정했고 2019년 3월 문화재로 정식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