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혁(서진)
1. 개요
郭奕
? ~ 287년
서진의 관료. 자는 대업(大業)
2. 생애
태원군 양곡현 사람으로 어려서 중한 명성이 있어 산도가 그 고상하고 꾸밈없음과 너그럽고 깊은 도량이 있는 것을 칭찬했으며, 처음에는 야왕령이 되었고 양호가 항상 그 현을 지났다고 한다.
곽혁은 양호에 대해 양숙자는 어찌하여 곽대업을 덜어내려 하지 않냐고 탄식했지만 양호가 적은 이들을 뽑은 뒤에 다시 떠나자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갔다면서 탄식했다. 수백 리 경계까지 나와 양호를 전송하고 앉은 채로 지켜봤으며, 265년에 사마소의 주부가 되었다.
이 때 종회가 촉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순욱은 종회의 종생(사촌자매의 아들)인 종씨 일가의 사람이었지만 사마염이 그를 자신의 연으로 삼았기에 곽혁이 나와 이에 대해 아뢰었으며, 조환이 이를 기용하지 않았지만 자연스럽게 그의 아담하고 바른 것을 알게 되었다.
265년에 사마염이 즉위해 동궁을 세우자 정묵과 함께 중서자가 되었으며, 우위솔, 효기장군이 되었다가 평릉남에 봉해졌고 함녕[1] 초에는 옹주자사, 응양장군으로 옮겼다가 적당, 곡개, 고취를 임시로 받았다. 곽혁에게는 홀로 된 손윗 누이가 있었지만 곽혁이 벼슬을 하게 되자 부리는 동복과 수많이 간통해 사람에게 규명받았으며, 곽혁이 이를 살피는 것을 마치고 대장부가 어찌하여 늙은 손윗 누이를 구명하겠냐고 했다.
마침내 떠나보내 더는 캐묻지 않았고 이함이 준걸의 재주가 있었지만 가문이 한미해 호족들에게 배척받자 곽혁은 그를 별가로 기용했으며, 이함이 훗날 명성있는 지위에 오르자 곽혁을 통해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게 되었다. 276년에 사마염이 양준에게 국사를 일임하자 저략과 함께 그의 그릇이 작아 사직을 맡길 수 없다고 표를 올렸으며, 사마염은 이를 듣지 않았고 훗날 양준은 주살되었다.
태강 연간에 징소되어 상서가 되었고 곽혁은 중한 명성이 있어 당시의 조신들은 모두 아래로 내려갔으며, 곽혁이 병에 걸리자 사마염이 이십만 전과 함께 하루마다 술과 쌀을 내리는 조서를 내렸다. 287년에 사망해 태상이 경(景)의 시호를 올렸지만 맡은 관리는 귀하고 천한 것을 함께 부를 수는 없다고 했으며, 곽혁의 시호는 경황(景皇)과 같다고 의논해서 사마염이 그 말에 따라 경의 시호를 허락하지 않았다.
곽혁의 시호에 대해 목(穆)을 청했지만 조서를 통해 시법을 살펴보니 일덕(一德)이 나태해지지 않는 것을 간(簡)이라 하면서 곽혁은 충성스럽고 꿋꿋하면서 청렴하고 강직했으며, 덕을 세워 변하지 않다고 해서 시호는 간이 되었다.
곽혁은 재능이 있으면서도 온갖 관청에서 관직에 임용하도록 추천했어도 모두 거절한 양호를 가리켜 오늘날의 안자(안회)라고 칭찬했다. 곽혁이 칭찬한 후에도 양호는 왕침과 함께 조상에게 초빙되었지만 이를 거절했으며, 뒤에 조상이 몰락하자 왕침이 그의 의견이 옳다고 여기면서 처음부터 이렇게 되리라고 생각하면서 겸손함을 나타내다가 사마소가 대장군이 될 때부터 양호는 벼슬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1] 275년 ~ 280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