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

 


'''조위 제5대 황제'''
'''元皇帝 | 원황제'''
'''묘호'''
없음
'''시호'''
원황제(元皇帝)
'''연호'''
경원(景元, 260년 6월 ~ 264년 5월)
함희(咸熙, 264년 5월 ~ 265년 12월)
''''''
조(曹)
''''''
환(奐)
''''''
경명(景明)
'''생몰 기간'''
246년 ~ 302년
'''재위 기간'''
260년 ~ 265년
1. 개요
2. 생애
3. 미디어 믹스
4.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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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제5대 황제이자 마지막 황제. 자는 경명(景明). 시호는 원황제(元皇帝). 다른 호칭으로는 진류왕(陳留王).[1] 본명은 조환(曹奐).[2]
조조의 9남인 연왕(燕王) 조우의 아들로 전 황제 조모에겐 '''5촌 숙부'''인 셈이다.[3][4] 황후는 원황후 변씨다.[5]

2. 생애


즉위 전 258년, 상도향공에 봉해졌으며 황제 조모가 시해되자 사마소에 의해 황위에 오르게 된다.
전전 황제가 폐위당하고 전 황제가 시해당했으며, 사마씨 타도를 외쳤던 관구검, 제갈탄 등의 반란도 모조리 진압당한 뒤라 조환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사마소가 올린 문서에 도장찍는 일뿐이었다. 본인은 평범했는지, 아니면 현실에 순응했는지 조방이나 조모처럼 사마씨 토벌 계획을 세우지 않고 조용히 지낸다. 어차피 조환의 능력이나 의지와 관계없이 위나라 조정에서 조환에게 충성하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263년 사마소가 등애종회에게 촉한 정벌을 지시하고 촉한을 멸망시켰다. 264년 종회의 난과 강유의 촉한 부흥 운동을 제압하자 조환은 선양으로 가는 전 단계로서 사마소를 진왕(晉王)에 봉한다.
265년, 진왕 사마소가 죽자 아들 사마염이 지위를 이어받은 뒤 조환을 협박하여 제위를 찬탈하였고, 서진을 세운다. 그리고 조환은 진류왕으로 강등되어

12월 13일

위나라에 내린 하늘의 은혜는 영원히 떠나고, 천명은 진나라로 옮겨졌다. 모든 공경․사대부들에게 조서를 내려 남쪽 교외에 의식을 갖춰 설치하도록 하였으며, 사자를 보내 황제의 옥새․수(綏)․칙서를 받들어 진왕 사마염에게 주도록 했다.

그 법식은 한위(漢魏) 교체기의 예에 따랐다.

15일, 사자를 보내 칙서를 받들도록 했다. 조환은 궁전을 나와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겨 기거했으며, 그 이후에는 업성의 관사에 줄곧 기거하였다. 당시 그는 20세였다.

《위서 삼소제기 중 진류왕기》

황궁에서 나간 뒤 낙양 서북쪽 금용성으로 이주했다.[6] 이후에는 업성의 관사로 이동하여 여생을 지냈다.
선양 이후에는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진 게 없는데[7] 그만큼 평온하게 살았기 때문인 듯하다. 사마씨는 이미 두 황제 중 한 명은 폐위시키고 남은 한 명은 살해해 권력을 거머쥐었던 지라 아무 힘도 없는 조환까지 죽이기엔 부담도 되었고 그렇게까지 할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조위후한을 처리할 때와 마찬가지로 대우를 그럭저럭 잘 해줬다. 전 왕조 마지막 황제에 대한 예우를 줘서 왕으로 강등되었지만 황족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으며 조위 황실에 대한 제사를 허가했고 조환이 서진 황제의 신하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게 했다. 황제로서의 재위 기간은 고작 5년에 불과했지만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 퇴위했기에 이 후 거의 40년 가까이 살고, 서기 302년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사망한 후에는 다시 황제로 추존되어 원제의 시호를 받았는데 이는 서진의 정통성을 위해 조위를 어느 정도 존중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진의 꼬라지도 개막장 이었으니....
왕조의 마지막 군주 치고는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았고 한편으로는 죽어서 다시 황제에 봉해졌으니 유선이나 손호보다 대우가 더 좋았던 셈이다. 조환은 희대의 바보 황제로 낙인 찍힌 혜제 사마충 재위 기간인 302년에 편안히 갔다. 선양#s-1의 피해자이긴 하나, 천수를 누리다 전란이 천하를 뒤덮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니 선양 후 어김없이 비명에 갔던 이후 남북조의 황제들보단 훨씬 편안한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 팔왕의 난 와중에 사망했는데 건국할 때는 기세등등하던 서진이 본인 생전에 내란으로 망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8] 유선의 자식들은 팔왕의 난 중에 모두 끌려다니다 희생당했는데 그래도 무사히 죽었으니 나름 성공한 생이기는 하다. 그리고 얼마 후 일어난 영가의 난으로 완전히 망하든지 말든지 조환에게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긴 했다.
놀랍게도 중국 역대 황제 중에서 생전에 나라가 망하고도 비명횡사하지 않고 평안한 여생을 보내다가 자연사한 것은 20세기의 청나라 선통제 이전에는 유선과 더불어 그가 마지막이다.[9] 조환 이후의 망국의 황제들은 얼마 동안 살려 두었다가 슬그머니 죽여 버리거나, 금 애종이나 남송 소제, 원 순제, 명 숭정제처럼 전란통에 죽거나, 요 천조제나 북송 흠종처럼 계속 살려 두더라도 좋은 대접을 하진 않았다. 송나라가 후주의 시종훈을 우대했다고는 하나 시종훈도 20세에 의문사하여 독살 의혹이 있다.
그냥 묵묵히 살았는지 그 자손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

3.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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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9,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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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12, 13
삼국지 시리즈에도 등장하지만 능력치가 나쁘다. 삼국지 3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삼국지 3에서는 범용 얼굴에 육전지휘 41, 수전지휘 16, 무력 43, 지력 50, 정치력 52, 매력 59의 능력치로 쓸 데가 없다. 야망, 운, 냉정, 용맹도 마찬가지로 바라지 말자. 용맹이 높아봤자 이 무력으로는 허당이고[10] 냉정이 높아봤자 이 지력으로는 역시 허당이다. 운은 극후반 장수라서 그렇게 의미가 없고, 250년도 넘어서야 나오는 장수가 오래살아봤자 얼마 못 가서 게임이 끝난다. 야망이 낮아서 자진 하야 확률도 낮고, 장군과 군사로 쓸 능력치도 아니다.무력 43으로는 장군은 어림 반푼어치 없고 지력 50과 정치력 52으로는 군사는 꿈도 못꾼다. 굳이 쓸모를 찾으려 한다면 상업 투자 정도 시켜주면 된다. 그리고 삼국지 3에서 출생연도가 제일 늦은 무장으로 나온다.
삼국지 6의 일러스트는 왠지 망국의 군주 답지 않게 활기가 넘쳐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8/무력 8/지력 26/정치력 40. 병법은 조영 하나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4/무력 13/지력 31/정치력 40/매력 64에 특기는 상업 1개 뿐인데 정치력이 40이라 별 의미도 없다. 특이 사항으론 사실 장수 중엔 2번째로 늦은 303년 사망이라 역사상 305년에 죽는 왕융이 먼저 죽을 경우 가끔 혼자 남을 때가 있다. 등장하는 장수 중 나이는 제갈상과 동일한 246년생으로 등장하며 248년생인 사마유 다음으로 어리다.
삼국지 12 PK에서 추가되었는데 선양하라고 겁박하는 사마염한테 잔뜩 쫄아있는 모습의 청소년으로 나왔다. 실제로 즉위할 때 중학생 정도의 나이였으니 고증이 된 편이다. 능력치는 통솔력 30/무력 28/지력 30/정치력 45이며 명사 특기 하나뿐이다. 아쉽게도 백하팔인에 들어가지 못한 능력치다.
삼국지 13에서의 능력치는 전작과 같으며 특기는 문화 1 단 하나. 전수특기도 당연히 문화이며 전법은 주위공격이다.
삼국지 14에서의 능력치는 통솔 15, 무력 18, 지력 30, 정치 45, 매력 64로 전작에 비해 통솔력이 15, 무력이 10 하락했다. 개성은 나약,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순회 Lv 2, 진형은 어린, 전법은 없고 친애무장과 혐오무장 또한 모두 없다.
삼국전투기에서는 장갑형 복화술 인형으로 등장했다. 사마소사마염이 사용하는데 사용할 때는 칙명이라쓰고 자신들의 속셈을 말한다. 조위의 마지막 황제이기도 하며, 정상적으로 계승받은 조방과 사마씨에게 저항한 조모와는 달리 완전한 사마씨 일가의 꼭두각시였으니 적절하기도 한다. 참고로 사마소와 사마염 시기에 색깔이 미묘하게 다른데, 사마소 때는 흰색, 사마염 때는 회색이다.
진삼국무쌍 7에서는 사실 루트와 가상 루트에서 모두 꼭두각시 황제로 등장하며, 사마사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가상 루트 엔딩에서 사마사에게 선양한다.
토탈 워: 삼국 팔왕의 난 DLC에서 마이너 세력 중 한명으로 등장한다. 클래스는 지휘관으로 고유등급 갑옷 '오래 사는 거북이'를 장착하고 있어 스탯이 높고 수행원들이 공포 면역이다. 진군 농지 1개를 가지고 시작하며 올팩션 모드를 하면 호표기도 사용가능하다. 농지 1개 시작이라 빠듯하지만 운 좋으면 사마수와 위관을 영입할 수 있으며 이 두 인물을 잘 사용해야 한다. 사마월이 먹기 전에 빠르게 의양왕 사마위의 축사를 점령한 다음 진나라의 진군 수도를 막대한 자금을 주고 사든가 아님 사마월을 굴복시켜야 한다. 이것도 힘들다 싶으면 강동런을 하여 건업 사마안을 굴복시키고 새시작하는 것도 방법. 강동에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다 싶을 때 진나라를 배신해서 남쪽땅을 꿀꺽하자. 그후 다른 팔왕들을 굴복시키고 수하를 부리면서 위나라 재흥을 도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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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조조전 Online에서는 초상화가 만들어진 것과 본래 사마소전이 예정되었던 것으로 보아 스토리상으로 사마소전에 등장할 것으로 보였으나, 사마소전이 폐기되면서 초상화가 사용되지 못했다.
이문열 평역 삼국지에서는 '조황'이라고 오역되었다.
라디오 드라마 와이파이 삼국지에서는 에필로그인 545화에서 사마염에게 양위를 협박 받는 장면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성우는 홍진욱.[11] 조예 사후 등장한 위나라 황제 중 마지막 황제에 해당하며, 전임 황제인 조모는 아예 등장하지 않았다.[12]

4. 둘러보기(계보)


'''조위의 역대 황제'''
4대 폐황제 조모

'''5대 원황제 조환'''

위 멸망/진무제 사마염


[1] 헌제소제 즉위 후 받은 작위와 같다.[2] 본래는 조'''황'''(曹璜)이었으나 '황(璜)'자가 많이 쓰인다는 이유로 피휘를 위해서 개명했다.[3] 그러나 숙부가 조카보다 나이가 어렸다. 흔히 막내 아들이나 그에 가깝게 늦게 태어난 아들의 후손이 종가집 장손보다 나이가 어린 사례와 같다. 조우도 조조의 늦둥이 아들이었는데, 조환 본인도 늦둥이였기 때문.[4] 조조의 손자지만 조조보다 '''91살이 어렸다.''' 거의 4대손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나이 차이다.[5] 변림(卞綝)의 딸로 무선황후 변씨의 일족이다.[6] 위나라가 멸망시킨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즉위 전에 진류왕이었다. 하고많은 왕토 봉지 중에 일부러 진류왕에 봉한 것은 고의적인 능욕으로 보아야 한다.[7] 정사 삼국지 삼소제기 진류왕기에서는 선양하는 걸로 기록이 끝나는데 진수가 집필하던 당시에는 조환이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진수가 297년에 죽고 6년 뒤에 조환이 죽었다. 이후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세보의 기록을 인용해 조환이 사망했다는 기록이 추가되었다.[8] 비슷한 케이스로는 조조의 딸이자 후한 헌제의 황후, 그리고 조환 자신에게는 고모가 되는 헌목황후 조씨가 있다. 조조는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목적으로 딸을 헌제에게 시집보냈으나, 정작 그 딸은 조위의 공주이기보다 후한의 황후이기를 택해 평생 동안 헌제의 옆을 지켰다. 조비가 선양을 받고 나서 옥새를 달라고 사자를 보내자, 못 준다고 한참을 버티다가 끝내 강요에 못 이겨 옥새를 집어던지고 '하늘이 돕지 않을 것'이라고 울며 저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조 황후는 산양공부인이 되어 남편을 따라가서 그가 죽을 때까지 함께했고 자신은 남편 사후로도 20여 년을 더 살다가 조환이 즉위한 해인 260년에 죽었다. 즉 이 사람 또한 조환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충성하던 사직을 빼앗은 왕조가 본인 생전에 망조가 드는 것을 목격하고 죽었다. 조환은 고모의 장례를 한나라의 예법에 따라 치르고 헌제의 무덤인 선릉에 합장했다.[9] 동시대의 손호는 나이가 젊은데도 3년여 만에 갑자기 죽었는데 반골 기질과 성격 때문에 사마염에게 제거당했다는 설이 제기되고 있다.[10] 조환 정도의 무력이라면 용맹 최고치인 15를 달아봤자 일기토 뜨면 왕평에게도 패한다. 용맹 7 높아봐야 30이나 차이나는 무력은 어찌해볼 수가 없다. 같은 30차라도 100과 70이 아니라 70과 40이라면 더더욱 그렇다.[11] 신기하게도, 조환의 성우는 조조와 동일한데, 사마염 또한 조부와 동일하다.[12] 애제 조방 또한 조예 사망 장면에서 등장해 조모만 유일무이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