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공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왕면
王沔'''
'''작위'''
광릉후
광릉공
'''성씨'''
왕(王)
'''이름'''
면(沔)
'''배우자'''
화순공주
'''아버지'''
공화후 왕영
'''어머니'''
승경궁주
'''생몰년도'''
음력
? ~ 1218년 5월 14일
양력
? ~ 1218년 6월 8일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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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왕족.

2. 생애


광릉공 왕면은 조선국 양헌왕의 후손인 공화후 왕영과 인종의 딸 승경궁주의 아들이다. 왕면의 성격은 순후(純厚)했으며 침착하고 조용했다.
왕면의 누나(兄姊) 왕씨는 혼기가 차도 결혼하지 못하고 결국 명종 15년(1185) 병사하는데, 왕면은 누이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듬해에 직접 묘지명을 짓는다. 묘지명에는 품행이 아름다운 누이의 장수와 그 자손의 번성을 바란 왕면이 누이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드러난다.

內守貞明兮端正其心, 外發英華兮肅雍▨德

何皇天兮忍令不扶, 乃鬼神兮忽然無良

先朝露兮浮生大夢, 飛舟旐兮九原荒莫

天長地久兮有時盡, 此恨綿綿兮無絶期

안으로는 곧고 밝음을 지켜 그 마음 단정하고, 밖으로는 영화를 드러내니 ▨(그) 덕은 엄하지만 화목하다

어찌 황천은 차마 도와주지 못하는가, 이에 귀신 돼 홀연히 아름다움은 없어진다

아침 이슬[1]

보다 먼저 가니 덧없는 큰 꿈이여, 배에 깃발[2] 휘날리고 구천은 황망하다

하늘은 길고 땅은 멀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 한은 계속 이어져 끊임을 기약할 수 없구나

「왕영녀왕씨묘지명」.

왕면은 붓글씨 쓰는 재주도 뛰어났지만 의술에도 정통했다.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약을 쌓아두고 사람 살리는 것을 일로 삼았는데, 병 앓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집으로 가는데도 꺼리는 기색이 없었다. 왕면이 의술을 행해 백성들을 구했다는 말은 그 외에도 있다.

雅性嗜縑緗之學, 千金購書, 餘事精服餌之方, 百藥濟衆.[원주(한문)]

有德不飮, 受福何涯.

본래 성품이 겸상(縑緗)의 학문을 즐기시어 천금으로 서적을 구입하시고, 여사(餘事)로 복식(服食, 단약을 만드는 도가의 양생법)의 방법에 정통하시어 백약으로 백성을 구하셨습니다.[원주(국문)]

덕이 있음을 숨길 수 없으니 복을 받으심에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동인지문사륙』 권13, 목도호부사(牧都護府使)가 종실(宗室)에 신년을 하례하는 장(狀).

왕면은 의종의 딸 화순궁주와 결혼했는데 이 덕에 신종 즉위년(1197) 수사도 상주국 광릉후에 임명되고 후일 광릉공으로 승진한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개천사청석탑기명」에 따르면 왕면은 충청남도 천안시 풍세면에 있던 개천사에 시주하는데 그 덕에 고종 1년(1214) 개천사 석탑이 건립된다. 고종 5년(1218) 5월에 죽는다.

[1] 조로(朝露) 역시 인생의 덧없음을 의미한다.[2] 旐는 검은 깃발로 시신을 운구하는 앞에 세우는 깃발을 의미하기도 한다.[원주(한문)] 公嘗製藥施人.[원주(국문)] 공은 일찍이 약을 조제해 사람들에게 베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