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종(고려)

 



'''고려 제18대 대왕
毅宗 莊孝大王
의종 장효대왕
'''
'''묘호'''
'''의종(毅宗)'''
'''시호'''
강과장효대왕
(剛果莊孝大王)[1]
'''절일'''
하청절(河淸節)
'''성씨'''
왕(王)
''''''
철(徹) → 현(晛)
''''''
일승(日升)
'''왕후'''
장경왕후(莊敬王后), 장선왕후(莊宣王后)
'''태자'''
효령태자
'''부왕'''
인종 공효대왕
'''모후'''
공예태후(恭睿太后)
'''출생지'''
고려국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연덕궁(?)[2]
'''사망지'''
고려국 동경(東京)[3]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
'''능호'''
희릉(禧陵)
'''생몰연도'''
음력
1127년 4월 11일 ~ 1173년 10월 1일
양력
1127년 5월 23일 ~ 1173년 11월 7일
(46세 5개월)
'''재위기간'''
음력
1146년 2월 28일 ~ 1170년 9월 기묘일
양력
1146년 4월 10일 ~ 1170년 10월 13일
(만 24년 6개월)
1. 소개
3. 생애
3.1. 태자 시절
3.2. 즉위 후
3.2.1. 가족 견제
3.2.2. 문신 견제 시도
3.2.2.1. 문신 vs 무신
3.2.3. 과도한 향락과 사치
3.2.4. 무신의 난
3.2.5. 폐위와 유배
3.2.7. 비참한 최후
4. 평가
4.1. 고려 멸망의 씨앗
4.3. 의종 시해의 영향
5. 이모저모
5.1. 자작 표문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1. 무인시대
6.2.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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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의 제18대 임금. 묘호는 의종(毅宗), 시호는 장효대왕(莊孝大王). 휘는 현(晛). 자는 일승(日升)[4]. 인종장남이자 공인된 후계자였다.
현종 이후 지속되어 온 고려 왕조 황금기에 종말을 고한 암군이자 무신정변으로 인해 폐위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은 임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2. 묘호, 시호, 존호


공식 묘호는 의종(毅宗)이다. 본디 동경으로 쫓겨나 참혹하게 시해당한 의종은 묘호도 시호도 없었으며 제사조차 모셔지지도 않았다.[5] 이를 고려 내 중방 반대파가 문제삼자 부랴부랴 올린 묘호가 바로 의종이다. 뒤늦게야 천자의 대우를 받은 셈.
시호는 강과장효대왕(剛果莊孝大王). 원래 시호는 동생 명종이 올린 장효대왕(莊孝大王)으로 꽤나 다급하게 올려진 시호다. 후손 고종이 강과를 추가했다.
의종 대부터 원종까지 고려 국왕들의 시호가 크게 줄어드는데 이는 무신정변이 터지고 몽골과의 전쟁이 시작되어 국가가 혼란스러워진 것과 왕권 추락 등의 원인이 있다.[6]
생전 의종은 자신에게 표문을 지어 스스로를 만승(萬乘), 천(天)으로 표현했고 일본이 자신을 황제라 부른다며 자찬했다. 신하들에게는 대평호문지주(大平好文之主)란 존호를 받은 적이 있다.

3. 생애


'''등극한 인종 공효대왕(仁宗 恭孝大王)의 아들'''
'''18대'''
'''19대'''
'''20대'''
의종 장효대왕
명종 광효대왕
신종 정효대왕
'''고려의 역대 왕태자'''
왕해

'''왕현'''

효령태자[7]

3.1. 태자 시절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8]

을 사랑해 그를 왕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

- 『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어린 시절부터 공부보다 놀기를 더 좋아했던 탓에 부모의 속을 꽤나 썩였다. 의종의 모후 공예태후 임씨는 차남 대령후 왕경#s-4을 총애하여 인종에게 태자로 삼을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인종은 겉으로는 반대하였지만 내심 태자를 바꾸려고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9] 그러나 당대에 강직한 신하로 이름이 높았던 정습명[10]의 만류로 그대로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러나 임금이 된 후에도 정습명은 의종이 풍류를 즐기는 것을 간언하다가 의종의 미움을 사서 쫓겨났고[11] 결국 1151년에 향년 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원인으로는 독약을 먹고 자결했다는 말도 있고 홧병으로 죽었다는 말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의종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고 죽었다는 사실과는 다르지 않은 부분이다.
하여튼 위의 서술처럼 젊은 시절부터 놀자판의 기질이 있다고 고려사에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의종은 사람 자체만 놓고 보면 대단한 엄친아암군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백하팔인 급의 인물은 또 아니었다. 특히 의종은 힘이 세서 각궁을 잘 다뤘고 방 안에 촛불을 켜 놓고 활 시위를 당겨 촛불을 꺼버리는 엄청난 묘기를 선보일 정도였다. 또한 기마술과 격구에도[12] 두루 능했던 무인형 군주였으며 수박희라는 일종의 격투기를 좋아하여 무인들의 수박희 경기를 자주 즐겨 이를 관람하고는 했다. 그리고 풍류를 즐긴 군주답게 음악과 시문 등 예술에도 나름 조예가 깊었다.[13]

3.2. 즉위 후



3.2.1. 가족 견제


철저한 유교식 종법으로 왕위 계승자 자격을 철저히 줄여버렸던 조선과는 달리 고려는 국왕과 왕후 소생의 적자였다면 누구든지 임금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다. 특히 옛 삼국 시대처럼 형제 간의 상속이 꾸준히 이뤄졌던 고려에서는 도전자를 더욱 증가시켰다.
일례로 숙종은 형제 상속이 마땅함을 들어 사실상 헌종을 임금 자리에서 끌어내리기도 했다. 숙종의 장남이자 의종에게는 할아버지가 되는 예종 역시 숙부 및 기타 왕자들과 임금 자리를 둘러싼 신경전을 벌였고 인종은 이자겸의 도움으로 작은아버지들을 제치고 겨우 국왕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14]
앞서 태자 시절 항목에 언급했듯이 의종은 태자 교체까지 당할 뻔한 적이 있었다. 물론 처신을 잘못한 자신의 탓이 컸다고 할 수 있지만 언제든지 형제가 왕위에 도전할 수 있다는 이러한 풍토는 의종으로 하여금 권력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의종은 자신의 모후 공예태후와 첫째 동생 왕경을 극도로 의심하면서 경계했다. 비록 어머니를 왕태후로 올리고 동생에게 후작위를 내렸지만 그들에 대한 의심의 끈은 놓지 않고 있었다.
고려사 공예태후 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의종은 늘 어머니를 견제했고 어느 날 태후의 면전에서 이런저런 말을 뱉었다. 분노한 태후는 맨발로 전각을 뛰쳐나와 하늘을 향해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했는데 갑자기 천둥번개가 크게 쳤다. 기겁한 의종은 어머니 앞에 와 엎드렸는데 잠시후 번개가 전각을 때렸다고 한다. 이 일 이후 의종과 공예태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모자 관계가 한 때 지독히 나빴었다는 것을 방증하는 부분이다.
의종의 가족 견제에 태자 시절부터 총애했던 김존중, 환관 정함 등이 적극 기용된다. 짧은 시간이지만 즉위 후 10년동안은 김존중 등이 권신이 되어 반대파를 찍어누른다. 한편 의종은 즉위 후 2년차인 1148년 11월에 동생 왕경을 대령후(大寧侯)로 봉하고 대령부(大寧府)를 설치해 주기도 한다.[출처] 정함의 무고로 제거 명분을 얻은 의종은 대령후의 가신을 고문했지만 증거가 없어 별 소득이 없었다.
낙랑군 개국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실수로 화살을 의종 앞에 떨어지게 만들자 반란을 두려워하던 의종은 격노하여 화살의 주인을 찾았다. 의종을 비판하던 신하들은 대부분 대령후와 친했는데 이는 의종의 의심과 두려움을 극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 때 정함과 김존중이 다시금 대령후를 무고했고 이번에는 최윤의 같은 중신들까지 이야기를 꺼내서 공론화시키자 이 때를 틈타 의종은 자신의 어머니를 보제사로 보낸 뒤[15] 못 이기는 척 대령부를 해체시키고 대령후를 천안으로 유배보내면서 완전히 세력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3.2.2. 문신 견제 시도


의종은 인종 시대의 잦은 내란으로 인해 땅까지 추락했던 왕권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특히나 재위 첫 해에는 승보시를 도입하는 한편 백성들을 생각하는듯한 발언을 하는 등 초기에는 꽤 괜찮은 모습을 보였다. 최윤의를 시켜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를 제작해 고려의 제도를 모두 기록하는 모습도 보였다.[16]
특히 임금의 권력에까지 해를 끼치면서 권력을 휘두르는 문벌귀족들을 적극적으로 견제하기 위해서 몇몇 환관과 내시들을 왕권을 보좌해줄 측근 세력으로 삼았으며 동시에 무신들을 전격 중용하여 이때 무신정변 주역들로 유명한 이의방, 정중부, 이의민 같은 이들을 무관으로 발탁하였다. 무신들을 우대하여 조정 내 문신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고자 한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
그러나 이러한 의종의 개혁 시도는 권력을 잡고 있던 김부식 일파를 중심으로 한 당대의 세력가였던 문벌 귀족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고 결국 종전대로 문신 우대 정책을 펼치면서 자연스레 무신들의 불만을 살 수 밖에 없는 구조로 돌아가고 만다. 또한 이들과 문신들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아버지 인종 시대에 연회 중 용춤을 추던 정중부의 수염을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태웠다는 일화도 매우 유명한데 이미 인종 대부터 조금씩 문신의 무시와 무신의 반감이 드러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의종 대에 와서 무신을 제법 크게 키우나 했지만 어쨌든 의종의 문신 견제가 실패로 돌아감으로써 최소한 왕에 의한 무신들의 힘 실어주기는 무산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3.2.2.1. 문신 vs 무신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

- 『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또한 무신정변 당일에는 '''종 5품의 젊은 문신이었던 기거주 한뢰가 종 3품이 되는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지경에까지 이를 정도였다. 종 3품이면 고려 시대 무관이 오를 수 있는 직위 중 2번째로 높은 직위이니, 현대로 치자면 웬 중앙 정부 외청 산하 인재 개발원 과장 나부랭이가 공식 석상에서 합참 수뇌부 인사의 싸대기를 날렸는데, 주변 공무원들 모두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인양 웃고 넘기려는 상황을 생각하면 비슷한 분위기가 된다. 이는 그 당시 무신들이 문신들에 비해 얼마나 홀대받고 있었는지를 나타낸다. 게다가 의종 본인도 한뢰를 질책하거나 처벌하지 않고 문신이라 해서 분노한 정중부에게 "그냥 니가 참아줘라"라는 문신 쪽의 편을 들어주는 모습을 보였으니, 무신들의 분노 게이지는 더더욱 치솟을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흔히 이 사건이 무신정변의 원인이라고들 하는데, 이 사건과 정변은 같은 날에 일어났으므로 원인이 될 수 없다. 특히 정변 자체는 이 일과는 상관없이 사전에 왕이 보현원에 가면 결행하기로 모의된 것이므로, 이 일이 없었더라도 일어났을 것이다. 다만 정변 후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던 한뢰가 시초격으로 무참히 목숨을 잃게 된 것은 이 일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인다.

3.2.3. 과도한 향락과 사치


''''포정(布政)하여 인은(仁恩)이 흡족하니, 삼한(三韓)은 대평(大平)에 이르렀구나!''''

- 고려사 의종 세가 중 발췌. 이 시를 짓고 2년 뒤 무신정변이 터진다.

결국 이러한 무기력한 흐름 속에서 좌절했는지 말년에는 정사를 멀리 한 채 후궁을 지나치게 곁에 둔다거나 문신 및 환관들과 어울려 향락과 사치를 벌이고 무리한 건축 사업으로 백성들의 곤란을 가중시켰다가 적절한 표현이다. 1154년 개건한 서경의 중흥사[17], 1158년 백주에 창건한 중흥궐은 고려 왕실을 중흥하겠다는 의종의 의지가 드러난다는 평도 있지만 중흥사는 태조가 지은 사찰이니 단순히 유지, 관리를 해준 것에 지나지 않고, 중흥궐은 지을 때 백주의 백성들이 죽어나갔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볼 때 무리한 토목공사였음은 빼도 박도 못할 팩트다.
대단히 유명한 이야기인 머리카락 잘라 팔아서 공사판에서 땀 흘려 일하는 남편과 동료들의 점심을 마련했다는 여인 이야기[18]의 배경 역시 바로 의종 시대다. 이 이야기 또한 의종 시기 고단했던 고려 백성들의 힘겨운 삶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정사인 고려사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정도. 의종 21년 3월조에 나와 있는 이야기중미정이라는 정자를 지을 때 실린 이야기다. 잦은 연회로 국고가 탕진되어 인종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유지되었던 고려의 태평성대가 무너지고 본격적인 쇠락을 맞기에 이른다.

3.2.4. 무신의 난


'''"장하도다! 이 곳에서 병법(兵法)을 연습하고 익힐 수 있겠도다."'''

- 고려사 의종 세가 중. 보현원에 들어서기 전 한 말.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 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순검군[19]

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 이복기, 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

- 『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년) 8월

결국 이런 난행을 벌인 끝에 마침내 사건이 터졌으니, 1170년 음력 8월 30일 보현원 행차로 일은 시작되었다. 어가행렬이 도착하기 직전 정중부 등은 순검군(巡檢軍)을 소환해 미리 숨겨두었다. 어가가 보현원의 대문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무신들과 병사들이 앞서서 호종하던 문신을 모두 쓸어버린다. 이어 임종식, 이복기, 한뢰와 의종의 측근인 환관들마저 무자비하게 몰살했다. 의종은 크게 당황해 환관 왕광취를 통해 무마시키려 했지만 그는 의종과 같이 유폐되었고, '''보현원에 도착한 모든 문신들이 끔찍하게 살해당하고 만다.''' 의종은 보현원에 유폐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떻게든 무신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보검을 하사하지만 오히려 그 보검으로 무신들은 잔혹한 살육을 이어나갔다.
9월 1일, 의종은 무신들에 의해 강제로 개경 본궐로 돌아왔다. 본궐에 있던 문신과 환관은 무신들에게 발견되는 즉시 살해당하고 천동궁, 태자궁의 문신도 모두 뗴죽음을 당했다. 의종은 곧장 이고, 이의방, 정중부, 두경승 등의 관직을 승진시키거나 문관직에 올려주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의종은 본궐의 편전 강안전에 있다가 수문전으로 옮겨 갔다. 이상하게 고려사 의종 세가는 의종이 수문전에서 아무 일도 없는 마냥 악사들에게 노래를 시키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날, 갑자기 이고가 의종을 시해하려 했다.[20]
이후 환관 왕광취가 무신정변을 일으킨 주동자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회복하고자 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엔 왕광취가 주도한 것으로 나오지만 의종의 의사가 크게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정중부는 이를 알아차리고 의종을 본궐에서 내쫓아 유폐시켜 버리기 때문.
'''보현원 사태를 시작으로 무신정권이 시작되었으며, 무신 집권기는 1270년 마지막 실권자 임유무가 살해되기까지 정확히 100년간 지속되었다.'''

3.2.5. 폐위와 유배


왕광취 사건이 터지자 의종은 군기감(軍器監)에 유폐된다. 군기감은 군대의 장비를 보관, 관리하던 곳인데 당연히 무신난의 지지자들인 하급장교들과 무신들이 지키는 곳이었다. 의종의 태자 왕기는 영은관(迎恩館)에 갇힌다. 당시 영은관은 금나라 사신들이 고려에 오면 머무는 숙소다.
이후 의종은 폐위당해 거제도에 유배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지금의 경남 거제시 둔덕면 둔덕기성[21]이 의종의 거처였으며 이 곳에서 3년을 지낸다. 후궁 무비가 같이 따라갔다.
태자 왕기도 폐위되어 지금의 전남 진도군에 유배되었고 이후 사서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는다. 시호만 남아있어 그가 사후 추증만 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의종의 손자, 태자 왕기의 아들인 태손은 정중부에 의해 어린 나이에 죽는다.
'''의종과 태자, 태손이 모두 없어진 그 날, 의종의 셋째 동생 익양공 왕호가 무신들에 의해 추대되어 본궐의 제 2정전 대관전에서 즉위한다.'''

3.2.6. 복위 운동


동생 명종 재위 3년차인 1173년 8월, 정 4품 간의대부(諫議大夫) 직을 맡고 있던 김보당[22](金甫當)은 동북면 병마사(東北面 兵馬使)에 임명되어 지방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김보당은 명종 대의 문관 출신으로 하도 문신이 죽어 국정운영이 힘들어지자 무신들이 적당히 봐주기 시작할 때 조정에 출사했다. 정 4품이란 나름 높은 직위였지만 문관이라 사사건건 무관에게 밀렸고[23], 병마사가 되어 동북면을 가게 되자 기회를 틈타 '''의종 복위를 시도한 것이다.'''
정중부 열전에 따르면 김보당은 의지가 세고 자기 줏대가 강한 인물이었던 탓에 정중부가 꺼려했다고 한다. 김보당은 환관인 진의광(陳義光), 배윤재(裵允材)와 의논하여 개경에서 계획을 세운 뒤, 배윤재를 거제로 내려보낸다. 녹사(錄事) 이경직(李敬直)과 녹사 장순석(張純錫)이 함께 했으며 동북면 지병마사(知兵馬事)[24] 한언국(韓彦國)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정중부 열전엔 특이하게 '''김보당이''' 환관 배윤재, 녹사 장순석, 유인준(柳寅俊)을 다른 직위에 임명했다고 한다. 즉 신하인 김보당이 국왕과 조정의 재가 없이 자기 맘대로 직위를 봉했다는 것인데 누군가 더 큰 존재가 개입했는지 의심되는 대목이다. 그냥 김보당이 복벽운동을 위해 잠시 사칭시킨 것일 가능성이 높긴 하다.
어쨋든 남로 병마사(南路 兵馬使)로 임명된 이경직과 장순석, 서해 도병마사(西海 都兵馬使)로 임명된 배윤재는 거제로 가 의종을 데리고 계림(鷄林), 즉 동경(東京)으로 간다. 자세한 사건 진행은 김보당의 난김보당 문서 참조.
거제에 있던 의종이 김보당파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는 알 수 없다. 기록이 없으니까. 경주로 이동한 것도 의종이 원해서 간건지, 김보당파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억지로 가기 싫다는 의종을 끌고 간 건지, 역시 알 수없다. 당시 상황이 어땠든 의종은 김보당파와 이동해 2개월 간 동경에서 버텼지만... 1173년 10월, '''격노한 무신들의 도착과 같이 말려들고 싶지 않았던 동경 시민들의 비협조로 김보당 일당은 체포, 의종은 동경 객사(客舍)에 갇힌다.'''
이의민 열전에 따르면 김보당파는 고작 수백여명 뿐이였다고 한다. 애초부터 수적으로 크게 밀린 것. 게다가 진압하러 온 이의민은 경주 출신으로 경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3.2.7. 비참한 최후


이후 곧바로 찾아온 이의민에 의해 동경 곤원사로 옮겨진 뒤, 그 절의 북쪽에 위치한 연못에서 '''글자 그대로 끔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향년 47세. 얼마나 처참하게 시해당했는지 고려사의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이러하다.

"전왕(前王)을 끌어내서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에 이르러 술 두어 잔을 드리고, 의민이 '''등뼈를 부러뜨리니 손대는 대로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의민이 큰 소리로 웃었다. 박존위가 담요로 싸고 2개의 가마솥을 마주 합하여 그 속에 넣어 못 속에 던졌다.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일어나 티끌과 모래가 날아 오르니, 사람들이 모두 부르짖고 떠들며 흩어졌다. 절의 가운데 헤엄 잘 치는 자가 있어서 가마솥은 가져가고 시체는 버렸다."

- 『고려사이의민 열전

아마 기록으로만 미뤄 보면 고려사, 아니 한국사의 역대 임금들 중에서도[25] 영류왕, 공민왕과 더불어 가장 참혹하게 시해당한 임금 중 한 명일 것이다. 이의민의 등 뼈 꺾기에 온몸의 가 부러져 사망했고, 그 시신을 담요로 감싸고 가마솥 2개를 합쳐서 연못 속으로 던져졌으며, 이후 지나가던 스님이 발견하긴 하나 가마솥만 가져가고, 시체는 그냥 버려뒀다.[26][27] 반대로 말하자면 상당한 용력을 가지고 있던 무장급 의종을 '''접어서 죽인''' 이의민이 어느 정도의 인간 흉기였는지를 잘 알 수 있다.[28] 아이러니하게도 천민 출신인 이의민을 무신으로 발탁하여 출세시킨 사람이 바로 의종 자신이었다는 것.
한편 의종의 시신은 며칠 동안 곤원사 연못에 떠 있었지만, 아무도 거둘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나마 전 부호장(副戶長) 필인(弼仁)이라는 사람이 몇 명을 데리고 의종의 시신을 수습해 관을 짜서 물가에 묻어 주긴 했다.
무신난 이후 두번이나[29] 무신을 놀라게 한 의종은 무신들의 철저한 무관심을 받았고, 시해당한 지 2년 뒤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서야 묘호와 시호를 받고는 그의 왕릉이 조성될 수 있었다. 조위총 열전 기록으론 조위총이 공개적으로 비난하기 전까지 의종이 세상을 떠났다고 조정에서 공식적으로 발표조차 안했다.

3.2.8. 또 다시 근왕운동


의종은 사후에도 무신들을 귀찮게 했다. 동경(東京)에서 한번 복벽운동이 터지더니 이번엔 서경(西京)에서 의종 시해 사건을 빌미로 반란이 터진 것이다. 바로 조위총의 난이었다.
서경유수(西京留守)인 조위총(趙位寵)은 계급이 낮은 무신들이 정권을 차지하는 것을 보고 서경의 시민들과 함께 같이 일어나 개경과 같은 대우를 받고자 했다. 태조 이래 숙종, 예종 대까지 엄청나게 우대 받은 서경이지만 인종 대에 묘청의 난, 개경 귀족들의 견제[30]로 서경은 분사(分司)도 폐지되고 지위가 크게 하락했는데 이 때 다시 한번 옛 지위를 회복하려 한 것이다. 자세한 사건 진행은 조위총의 난, 조위총 문서 참조.
조위총은 의종을 죽인 큰 죄를 저지른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박존위 등을 공개적으로 거론하면서 그들을 싸잡아 비난했다.[31] 이에 1175년 5월 명종은 형 의종의 상을 공개적으로 선포하고 조정의 모든 신하는 사흘동안 검은 관을 쓰고 흰 소복을 입었다. 아울러 묘호 의종(懿宗)을 올려 종묘에 신위를 올려 해동천자(海東天子)로서의 제사를 지내주고 시호 장효대왕(莊孝大王)을 올렸다. 의종의 시신을 개경으로 가져와 국왕의 예로 장사지내니 능호는 희릉(禧陵)이었다.
의종의 원찰도 세워 초상화를 그렸다. 하지만 무신들은 끝까지 의종을 괴롭혔는데 의종의 원찰이 개경 서쪽에 있고, 무신이 서는 자리가 서쪽이고 무신을 상징하는 방위가 서쪽이니 무신을 싫어한 의종의 원찰이 서쪽에 있으면 안된다고 해 동쪽에 있는 사찰로 옮겼고, 서쪽의 사찰은 중방의 원찰로 바꾸었다. 결국 사후까지도 무신에게 능욕당한 셈.

4. 평가



4.1. 고려 멸망의 씨앗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

- 김상기, 『고려시대사』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 정변)가 일어났다."

- 『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흔히 이렇듯 항락과 사치에만 몰두하다가 끝내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만들어서 고려의 혼란을 초래한 암군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다가 험한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만 비운의 임금으로 평하는 시각도 있다. 의종은 무신 정권의 시작이라는 것만으로도 역사와 당시 상황을 기록하는 문신들에게 최악의 평가를 받은 측면도 있었다는 것.
그러나 의종이 비운의 군주 소리를 듣기에도 뭣한 게, 25년이란 재위 기간은 결코 짧지 않았고[32], 아무리 왕권이 실추되었다고 한들 의종이 후대의 고종, 창왕이나 공양왕처럼 아예 권력이 없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허수아비 임금이었던 것도 아니었다.[33] 또한 의종은 자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보다 더 오래 살았고, 임금 자리에도 더 오래 있었다. 게다가 죽어서 왕위를 넘긴 것이 아니라 폐위당해서 왕위를 빼앗겼던 것이었으며, 이의민에 의해 제 명에 죽지도 못했으니 무신 정변이 없었더라면 더 오래 재위했을 가능성이 높다.
결과적으로 의종은 무신 집권과 고려의 국정 혼란을 초래한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임금인 동시에 특히 무신 집권기 이후 몽골의 침입 때까지 고려가 혼란기를 겪는데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해 버렸다는 점에서 고려를 쇠락의 길로 이끈 암군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가 없다. 물론 문벌귀족 사회가 왕권을 억압하고 고려를 좀먹은 탓도 크게 있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종이 고려 멸망의 씨앗을 싹 틔웠다는 사실은 절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4.2. 사치천자


현종국가 흥성의 기반을 닦았고 덕종, 정종의 짧은 치세가 있었다. 문종전성기를 구가했고 순종, 선종, 헌종의 짧은 치세가 있었다. 숙종, 예종은 북방 고토 회수를 천명했고 인종은 상대적으로 조용한 치세를 보냈지만 두 차례의 큰 환란[34]을 겪었다.
보다시피 현종 대부터 시작한 고려 왕조의 빛나는 상승세는 점차 빛 바래가고 있었다. 의종은 이렇듯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임금이 되었으며 그의 치세에 따라 고려는 다시 상승세를 탈 수도, 크게 변하지 못하고 계속 조금씩 하락할 수도, 아예 크게 나락에 떨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의종은 고려미래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의종의 이런 의미 없던 치세는, 무신정변 일어나는 계기 중 하나가 되었고 이로 인해 나중에는 나라를 더욱 혼돈에 빠지게 하여 고려를 말아먹었다.
고려사에 기록된 의종의 사치만 해도 끝이 없을 지경이다. 본궐에 있는 기간이 매우 짧아서 언제나 띵가띵가 놀러 다녔으며, 별궁, 별장도 정말 많이 건립했다.[35] 이때문에 보다 못한 대간이 계속해서 간언을 올렸음에도 그 때에만 들을 뿐 전혀 되새기지 않았다.

4.3. 의종 시해의 영향


이와 별개로 의종의 존재감 하나는 최고였다. 고려의 군주로 25년이나 재위했고, 암만 나라를 개판으로 운영했어도 왕조시대였던 만큼 의종의 폐위, 시해는 과하다고 여긴 사람들은 존재했다. 의종이 거제로 내쫓겼을 때 김보당이 그를 복위시킨다는 명분으로 난을 일으켰고, 의종이 처참하게 죽었을 땐 조위총이 의종의 원한을 갚겠다고 난을 일으켰다.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은 죽을 때까지 왕을 죽인 자로 비난받았다. 특히 이의방은 죽었을 때 조위총은 선왕의 시해자가 잘 죽었다며 축하드린다는 요지의 표문을 명종에게 바쳤고, 이의민은 경대승이 선왕을 시해한 자가 버젓이 살아있는데 내가 어찌 술을 마시겠나며 일갈하자 겁이나 경주로 도망칠 정도였다. 이의민이 의종을 죽일 때 거든 박존위는 사지가 찢기는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의종을 시해한 이의민 본인 역시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의 급습을 받아 고향인 경주에서 처참한 말로를 맞았고 이후 그의 일가 역시 모두 멸족당하고 말았다.

5. 이모저모


  • 고려사절요금나라에서 사신이 왔을 때 사신이 김돈중의 관상을 봐주었다는 말을 듣고 의종이 자신의 관상도 봐 달라고 하면서 수명을 물었는데, 사신은 "왕께서는 수명이 셀 수 없을 만큼 길고 기셔서, 조정의 노소 신료들이 다 죽고 난 뒤에야 임천지환[36]이 생길 듯 합니다."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그 말이 제대로 실현되고야 말았다.
  • 언젠가 거북이 모양을 한 금덩이가 발견되어 의종에게 진상된 적이 있다. 신하들은 의종의 성덕(聖德)에 감응해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며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정확히 이틀 뒤...
  • '대평호문지주(大平好文之主)'라는 존호가 있었다. 신하들이 의종이 쓴 시를 보고 바친 존호다.
  • 의외로 의종은 손자까지 보아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고려사 정중부 열전, 고려사절요엔 의종의 손자를 태손(太孫)이라 부르고 있다. 고려사 의종 세가엔 단순히 왕손(王孫)으로만 등장. 의종의 태손은 고려 최초의 태손이다. 두번째는 고종의 태손인 충렬왕.
  • 의종은 기존의 5묘 9실제 태묘를 7묘 9실제 태묘로 바꾸어 완전한 천자식 태묘를 완성한 임금이다. 그동안 고려는 제후의 5묘제를 쓰면서 방을 9개로 맞추고 묘호를 올려, 불완전한 천자식 종묘를 사용해왔다. 이후 고려의 태묘는 원종 대까지 7묘 9실제가 유지된다.
  • 의종은 종묘에 별묘(別廟)를 추가한 임금이기도 하다. 태묘엔 의종까지 이어지는 정통성을 가진 국왕을 모시고[37] 그 외 의종의 정통성과는 큰 연관이 없는 국왕[38]은 신위를 없애는 대신 별묘로 옮겨 계속 제사를 지냈다. 원래는 재위 중인 국왕의 정통성이나 직계와 관련이 없는 임금은 신위를 꺼내 땅에 묻어야 하지만 따로 모아 제사 지내는 방식을 정한 것이다. 나중에 이 방식은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이 사용한다.
  • 의종이 금에 사신을 보내 국서를 바친 적이 있다. 당시 금은 고려의 상국이었으니 고려는 신하의 예로 국서 양식을 갖춰야 했다. 그러나 의종은 표문[39]에 자신의 이름을 쓰지 않고 국서를 가져간 사신을 가리켜 배신(陪臣)이라고 하지도 않았다. 의종은 금 황제의 신하(제후)이니 의종의 신하는 신하의 신하, 즉 배신(陪臣)이다. 하지만 의종은 이름을 쓰기 거부하고 배신이라고도 안해 표문의 양식을 제대로 지키지 않았다.
  • 의종과 남송진회는 이상한 인연이 있다. 고려의 이심이란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바꾸고 진회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엔 고려의 지도가 동봉되어 있었는데, 이심은 진회에게 '송은 금을 공격하겠단 핑계로 고려에게 길을 빌려달라 하고 우리가 안에서 도와주면 고려를 차지할 수 있다.'란 내용을 썼고, 편지는 바다를 건너지도 못하고 중간에 뺏겨 의종에게 전달됐다. 이심은 당연히 죽고 가족은 섬에 유배당했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계획인데 일단 송이 바다를 건너 고려를 공격할만한 군사력이 있는지 의문이다.[40] 또한 고려가 아무리 약해졌어도 절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닌데 왜 이런 바보같은 반란 도모를 시도했는지 알 수 없다.[41]
  • 의종 대엔 수 많은 신하들이 그의 환심을 사 지위를 올리고자 하였다. 한번은 귀족 자제들과 학교 유생들간에 아부 배틀이 벌어진 적이 있다. 귀족 자제들은 막강한 재력으로 보석, 그림, 귀중품을 준비하고 서커스단을 데리고 와 왕이 송, 여진, 탐라, 왜 등에게서 조공을 받는 행사를 재현해 귀금속과 청색, 홍색 일산을 바치고 고급 말 2마리를 바쳤다. 반면 학교 유생들은 섭외 능력이 떨어지고 재력도 없으니 늘 진상품이 적었다. 고려사 의종 세가의 표현으론 100의 1도 안되는 양만 바쳤다고 한다. 결국 학교 유생들은 빚을 지고서 고급 말 6마리를 바쳤다. 하지만 이후 유생들은 계속 빚을 갚지 못해 늘 채무자들에게 욕을 먹어 백성들이 조롱했다고 한다.
  • 조위총이 아니었으면 묘호시호, 능호는 커녕 장례식조차 받지 못할 뻔했다. 고려사 정중부, 조위총 열전에 따르면 의종은 죽은 뒤 시체가 물 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누군가가 겨우 시냇가에 묻었다고 한다. 조위총이 의종을 핑곗거리로 내세우지 않았으면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 중방의 무신들은 절대 그를 굳이 언급하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경대승 같이 중방 소속이 아닌 자들이 대놓고 이의민을 왕을 죽인 역적이라 비난한 걸 보면 중방이 약해지고 묘호, 시호가 올려졌을 가능성도 높다.
  • 의종이 유배될 당시 동경은 19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정과정의 작가 정서[42]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심지어 의종이 거제에 온 뒤 한달 뒤에 정서가 복권됐으니 같은 지역에서 같이 산 것.
  • 고려시대의 문집 보한집(補閑集) 권중엔 의종의 이야기가 실려있다. 의종이 남황(南荒)으로 옮겨졌을 때 이기(李琪)라는 화가가 의종의 어진을 그렸지만, 이름을 붙히는 등 마감을 하지 않고 단지 동도초당(東都草堂)이란 곳에 걸어두고 아침저녁으로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시를 보면 이기가 그린 의종 어진은 곤룡포를 입은 모습이 아니라 복두에 학의, 즉 평복을 입은 초라한 모습이었던 걸로 보인다.
  • 고려시대의 문집 파한집(破閑集) 권하에도 의종의 이야기가 나온다. 의종이 조령을 내려 고려 각지에 있는 사원, 역참에 있는 시를 수집해오라고 하였다. 근데... 당시 장관급 직위를 맡고 있던 신하가 썼던 시가 의종에게 보내졌다. 시의 내용은 대략 '밑을 쥐어짜 위에게 잘보이는 것이 풍속이 됐고, 온나라가 따르고 있다. 뭐가 부끄럽냐? 올바른 일을 하는게 맞지.'이었는데 의종을 크게 비꼬고 있었다. 의종은 이 시를 읽고 한참 동안 말 없이 서 있었고, 좌우의 신하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무서워 겁을 먹었다고 한다. 글에 따르면 아무 일도 없었다. 다만 어떤 신하 한명이 관례를 깨고 두 차례나 변방에 나가야 했을 뿐...
  • 의종의 왕릉인 희릉은 현재 유실 상태다. 최근 북한 학계에서 고읍리 2릉을 희릉으로 비정했지만 진짜 희릉일지는 미지수...

5.1. 자작 표문


초하루 임자일. 왕이 대관전(大觀殿)[43]

에서 신년 하례를 받고는 친히 신료가 올리는 하례의 표문을 지어 신하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새해 정월이 돌아오니 만물이 새로우며 옥전(玉殿)에 봄이 돌아오니 용안(龍顔)에는 기쁨이 가득하나이다. 우주의 이치를 체득하시어 은혜를 널리 펴시고 모든 복록을 한 몸에 모으사 조화를 크게 만드시니 이야말로 성인의 도가 길이 이어나갈 시초이자 만물을 생장하게 하는 기운이 퍼지는 처음이로소이다.

공손히 생각건대 폐하(陛下)께서는 요(堯) 임금의 성스러운 밝음과 순(舜) 임금의 지혜로운 총명을 한 몸에 지니셨으니, 온갖 복록이 모여들어 쉼 없이 나날이 새로워지며, 다달이 끊임없이 무궁한 천령(天齡)을 누리시리이다. 어진 덕이 가득하시니 만물이 제 자리를 찾고, 전쟁을 끝내고 문교(文敎)를 펴시니 이야말로 무궁한 경사로소이다. 이제 태평성대를 맞이하여 닥쳐올 경사가 더욱 융성하리니, 님 계신 북궐(北闕)에서 신령스런 상서를 옹위하고 남산(南山)에서 창성한 국운을 보위하리이다.

만방(萬邦)이 분주히 달려와 옥과 비단을 다투어 바치옵고, 사방의 신민들이 뒤질세라 산넘고 물건너 모여드옵니다. 이 좋은 날에 하례를 받으시니 복을 더욱 크게 받으시리이다. 하물며 요즘 바쁜 정무의 여가에 부지런히 신하들을 접견하시고 글하는 신하들과 더불어 즐겨 문장과 사육변려문을 훌륭히 지어내시며, 천림(天臨)하시어 시(詩)·서(書)·경(經)·사(史)의 오묘한 글들을 강론하시나이다. 북사(北使)[44]

는 술잔을 올리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일역(日域)[45]은 보물을 바치며 황제라 부르나이다.

하늘 신령께서 늘 몰래 도우시니 복록과 경사가 강물처럼 불어나고, 세상에 다시없는 새로운 상서가 열리니 군왕께서 통일을 이루심을 보겠나이다. 신하들은 찬미를 바치옵고 그 위업은 청사에 빛나리니, 인민이 생겨난 이래로 오늘 같이 성대한 날은 다시 없으리이다. 저희들은 이 성대를 만나 밝은 임금의 은택을 흠뻑 받으니 만승(萬乘)[46]

과 같은 위엄을 우러러 보며 대궐로 달려 왔사옵니다. 여섯 왕조의 음악[六樂]과 아홉 곡의 연주[九奏]는 모두 간자(簡子)가 들었던 천상의 음악에 견줄만 하나, 또한 만세를 세 번 불러 한나라 무제가 들었던 것과 같은 축수를 아니 바칠 수 있겠나이까?”

이 글을 두고 백관이 하례하는 표문을 올렸다.

- 고려사 세가 의종 24년 1월 1일.

간단히 요약하면, 의종이 직접 "하례는 이렇게 쓰는거야!"라고 예시문을 썼는데 이를
  1. 님은 레전드 OF 레전드 클라스가 다름. 요, 순 임금 합친 레벨임.
  2. 세상의 모든 나라와 신민이 님 앞에서 조공함.
  3. 님은 존나 똑똑함.
  4. 금나라도 님한테 만수무강하라고 빔.
  5. 일본은 님을 황제라 부름.
  6. 님같은 성군을 만난 우리는 겁나 축복받은거임.
  7. 폐하 만세!!
...로 요약할 수 있다.
의종은 이런 자뻑짓을 한 후 반년도 안되어 폐위를 당하고, 이를 후대 조선에선 "수양제도 쪽팔려서 안한 짓을 한다, 임금이란 작자가 자뻑만 하고 살았으니 망할 만 했다"라며 대차게 깠다.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6.1. 무인시대


[image]
KBS 대하드라마 무인시대에서는 김규철이 연기했다. 안하무인에 똘기 어린 암군이면서도, 한편으로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아 정신이 붕괴하는 의종의 모습을 잘 표현하였다.
무신정변이 발생하는 첫 화에선 그저 흥청망청 노는 것만 좋아하는 암군으로 등장한다. 훗날 무비의 언급에 의하면 처음의 의종은 성군이 되고자 했으나, 그가 등용한 문신들이 의종의 시야를 흐리게 만들면서 결국 의종이 타락해버렸다고 한다. 하지만 술잔을 투구를 쓴 장군 머리에 던져서 깨뜨리거나, 노령의 장군이 하급 문관에게 노인학대를 당하는 광경에 웃음만 터뜨리는 등, 암군 이전에 인격에 문제가 있는 인물임이 묘사되었다.
문신과의 차별 등으로 인해 분노가 극에 달해있던 소장파 무인들은 미리 정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정중부는 소장파 무신들에게 만약 의종이 황궁으로 돌아간다면 정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운다. 이에 수상함을 느낀 김돈중이 황궁으로 돌아갈 것을 건의하나 의종은 이를 무시하고 보현원에 놀러가버린다. 이후 역사대로 무신정변이 벌어졌고, 그 와중에 의종이 총애하던 한뢰는 의종 앞에서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2화에서 의종은 정중부와 회담을 나눈 끝에 환궁한다. 사건을 빨리 종식시키고 싶던 정중부와, 폐위를 고려하던 이의방 측간의 갈등이 시작하는 와중에, 의종은 환관들이 나서겠다는 말을 듣고선 그 들에게 소장파 무신들을 척결하라는 혈서를 내린다. 하지만 이의방 일파는 밀고자 덕분에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황궁에 들어선다. 희대의 무력 굇수들에게 환관들은 일방적으로 박살나버리고, 주동자인 왕광취는 이의방의 철퇴에 참교육을 당하고 만다. 왕광취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절명한 직후, 이의방은 의종 앞에 대놓고 왕광취의 머리통을 내던지고(이 때 의종은 비명을 제대로 질렀다.) "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를 외친다.
의종은 이의방에게 삿대질을 당한 뒤, 궁에 유폐되는데, 이의방 일파가 대놓고 궁전 앞에서 환관들을 고문했고, 그 비명 소리가 내부에 까지 들려오자 멘탈붕괴한다. 위에 언급했듯이 정중부는 폐위를 생각치 않았는데, 이의방은 일부러 의종에게 정중부 역시 폐위에 동참했다는 발언을 하였고, 정중부가 배신했다고 여긴[47] 의종은 모조리 구족을 멸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댄다. 이 때 의종의 의향을 들어볼 생각으로 궁에 들린 정중부는 의종의 발광을 듣고선 의종이 자신들을 저버렸다고 여기고선 결국 폐위에 동참한다.
의종의 폐위가 결정된 후엔 군기감에 유폐되는데, 거기선 일개 하급 장교 따위에게도 멸시당하고 두들겨 맞기까지 한다. 궁궐 밖으로 끌려나갈 때 의종은 대신들과 장군들을 향해 "짐은 반드시 황도로 돌아올 것이다. 짐이 돌아와서 다시 용상에 앉는 날 여기 있는 네놈들의 간을 내어 씹어먹을 것이다. 네놈들의 목을 자르고 불에 태워버릴 것이다!"하는 살벌한 대사를 퍼부으며 재기를 다짐했다. 그러나 형벌이 결정되고 무비와 함께 거제현으로 유배를 떠나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도 별로 평판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유배 도중 백성들에게 돌을 맞기까지 한다. 이때 두경승이 찾아와 의종에게 절을 올렸고, 당시 의종을 호송하던 이의민은 두경승의 인물됨을 눈여겨본다.
거제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의종은 와신상담을 하듯이 생선 내장을 생으로 씹어먹는 충공깽스런 모습도 보이며, 황궁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린다. 의종은 금나라가 자신의 폐위사실을 알게되면 고려를 침공해 무신정권을 몰아낼 것이라 기대했으나, 정중부의 예견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48]. 그 와중에 김보당 일파가 찾아와 의종을 보위에 올릴 것을 약속한다.
얼마 후, 의종 폐위와 관련하여 금나라와 외교 분쟁이 벌어지자, 혼란을 이용해 왕조를 갈아치우고자 했던 이고 일파는 의종을 살해하고자 결사대를 파견했고, 때마침 무비를 걱정하던 이의방도 이의민을 몰래 거제현으로 보낸다. 이고의 부하들이 거제현에 도착할때 쯤 악몽을 꾼 무비는 그 날 밤 의종을 데리고 산속으로 도주하였고, 덕분에 이고의 부하들은 의종을 찾지 못하고 때마침 도착한 이의민에게 끔살당하고 만다. 무비는 의종을 버리고 이의민과 함께 거제현을 떠나는데, 뒤늦게 무비를 발견한 의종은 무비를 애타게 외치지만, 무비는 의종에게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며 떠난다. 이 때쯤 의종의 상황을 설명하자면, 의종은 어머니인 공예 태후에게 버림받고, 수많은 신하들에게 폐위당한지라 멘탈에 금이 가 있었는데, 유일하게 무비가 의종과 함께 한 지라 무비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그런 무비마저도 의종을 져버리자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야 만다. 한참 후 송유인이 병사들을 이끌고 거제현에 찾아왔을때, 의종은 완전히 정신줄을 놓고선 무비를 부르짖으며 온 곳을 쏘아다니는 안습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섬을 하루종일 돌아다니며 소일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사실 섬의 지도를 그리기 위한 것이었다. 의종은 김보당 일파에게 지도를 전달했고, 반란군은 이를 이용해 손쉽게 주둔군을 박살내 의종을 데려간다. 지도건도 그렇지만 이때의 의종은 어찌 멘탈은 추수린 듯 아주 정상적이다. 더불어 무비에 대한 배신감을 내비치며 그녀에게 복수할 것을 내비치기도 했다. 이를 보면 복수심으로 망가진 멘탈을 추수린 듯.
김보당의 난 때 경주 호족들과 야합하여 김보당과 개경을 협공하고자 하였으나 김보당은 붙잡혀 참수되고 이의민에게 경주를 장악당하며, 이의민이 거제현으로 다시 데려가겠다고 하자 의종 자신의 은덕으로 천민에서 벗어난 그에게 이별주를 청하며 부월무(도끼춤)를 보여달라고 한다. 이 때 이의민이 추는 부월무가 압권. 그 후에 계곡을 바라보며 "떠날 때가 됐구나"[49]라고 말하며, 그 직후 역사대로 이의방의 밀명을 받은 이의민에게 등뼈가 으스러져 죽는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금강야차로 악명 높은 이의민에게도 의종 시해는 엄청난 일이어서 그런지, 이의민은 한동안 악몽을 꾼다. 책사인 두두을 말로는 의종의 원혼이 성불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아서 그런거라고. 한편 김보당의 난 당시에는 어떻게 형님을 죽일 수 있겠느냐고 울먹이던 명종은, 먼 훗날 이의민 정권 때에 이르러서는 의종 시해를 '어쨌든 국가과 황실을 위해서 할 수밖에 없었던 필요 악'으로 인정한다. 의종이 시해당하면서 황실이 안정되고, 명종의 정통성이 확립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6.2. 그 외


  • KBS 1TV <역사저널 그날> 2015년 3월 29일 67회에 <드라마 속 역사 인물 시리즈 제 4탄 천민 이의민 왕을 꿈꾸다>라는 제목으로 이의민을 다뤘다. 정중부에게 오늘 일을 잊으라며 술을 따라준 장면이 나왔는데, 정중부는 의종이 자리를 비웠을 때 그 술을 쏟아버렸다.

[1] 고려사 의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당시 공예태후는 연덕궁을 하사받은 상태였다.[3]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로, 당시엔 동경이라 불렸다. 이후 신종이 경주로 강등시키고, 고종이 다시 동경으로 복구하지만 충렬왕이 계림부로 강등시킨다.[4] 자는 대부분 부모가 지어주니 인종이 주었을 것이다. 자의 뜻은 '뜨는 해', '떠오르는 해'인데 의종은 결국 저문 해가 되어버렸다.[5] 그를 불쌍하게 여긴 백성 '필인'이 작은 무덤을 만들어 놓기는 했다.[6] 강종은 예외. 그의 아들인 고종과 손자인 원종이 계속 추가했다.[7] 의종의 태자, 아버지가 폐위되자 진도군으로 유배됨. 고려사절요 기록으로 태손이 있었지만 무신에게 살해됨.[8] 대령후 작위로 더 유명하다.[9] 인종 역시 겉으로는 반대했지만 혼란을 야기시킬까봐 반대한 것으로 보이며 의종의 난봉을 좌시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10] 그 유명한 정몽주의 조상이다.[11] 정습명이 병을 얻게 되니까 이를 핑계삼아서 내쫓았다는 말도 있다.[12] 고려사나 고려사절요를 보면 알겠지만 의종은 거의 격구에 중독이 되었다시피한 사람이었다. 특히 격구는 뛰어난 승마술이 받쳐줘야 진행할 수 있는 스포츠였다.[13] 비슷한 예술가 타입 군주였던 공민왕이 무예에 그다지 소질을 보이지 못해서 노국대장공주에게 말 타는 법을 배우기 이전에는 말을 탈 줄 몰랐다고 할 정도.[14] 그러나 이는 인종이 즉위 후 이자겸에게 휘둘리는 원인이 된다.[출처] 고려사 대령후 왕경 열전[15] 어머니가 만월대에 있으면 분명히 대령후를 옹호할테니 먼저 옮겨 버린 것이다.[16] 고려사 예지는 고금상정례를 인용한 부분이 많다.[17] 장락궁 근처에 있었다고 추정. 황룡사 구층탑을 본딴 9층 목탑이 있었다.[18] 어느 공사판 현장에 일하는 사람들은 전부가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녔는데 어느 집에서는 너무 가난하여 그마저도 쌀 여유가 없었다. 그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에게 자신들의 밥을 조금씩 나누어주었고 그는 이를 미안하게 여겼다. 남편의 이 사정을 알게 된 아내가 점심 도시락을 만들어서 직접 가져왔는데 많은 사람들이 나눠먹을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았다. 남편이 이 많은 음식이 어디서 왔나 궁금해하니 아내는 두건을 벗어서 자신의 잘린 머리카락을 보여주었고 놀란 남편이 "차라리 물어보지 말걸 그랬소...."이라며 아내와 함께 통곡하고 주변 사람들도 그 여인의 짧은 머리카락을 보고는 음식을 먹지 않고 슬피 울었다고 한다.[19] 국왕의 친위대 중 하나이다.[20] 의종을 죽이진 않았는데 다른 무신들이 말렸기 때문. 아마 이는 왕광취의 무신 살해 시도와 연관되었을 것이다.[21] '폐왕성'이란 별칭이 있다. 폐왕은 당연히...[22] 문신이었지만 평소에 백성들을 안 돌보고 놀기만 하는 의종의 실정을 비판하던 입장이라서 무신정변 때는 무사했었다.[23] 바로 3, 4년 전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문신의 기세가 순식간에 추락한 것.[24] 지병마사는 병마사의 바로 아래에 있는 직위다.[25] 중국에서도 뼈가 꺾여 죽은 군주가 있었는데, 바로 춘추시대 때의 노나라 환공으로, 제양공의 지시로 팽생에 의해 뼈가 꺾여 끔살당했다.[26] 스님의 인간성이 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저의를 생각해 보면, '귀한 가마솥은 술꾼의 저승길 선물로도 아깝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마 이 스님도 어지간히 의종한테 불만이 쌓여있던 듯 하다.[27] 맹꽁이서당에서는 순화하여 산 채로 가마솥에 갇힌 뒤 물에 던져져 죽는 것으로 바뀐다.[28] 하지만 정작 이의민도 이 의종 시해 건으로 평생 리스크를 달고 살아야 했으며, 그 역시 차후에 최충헌과 그 일파에 의해 참혹하게 목숨을 잃고 만다.[29] 왕광취 사건, 김보당 사건.[30] 대표적으로 개경의 김부식과 서경의 정지상, 친 서경파인 윤언이 등이 있다.[31] 이 중 박존위는 늘 자신이 의종의 시체를 가마솥에 넣었다며 자랑하다가 처형당했다.[32] 시대와 상황이 다르긴 하지만, 명군 평가를 받는 조선 성종, 정조는 약 25년 간 집권했다.[33] 무신정권 시절의 고려 국왕들과 비교해봐도 답이 나오는데, 의종이 실권이 전무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고려가 인종 시기 이후에 군약신강 국가로 전락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왕권을 회복할 도리나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던 셈. 무신정권 시절의 고려 국왕들은 몽골 제국의 도움으로 왕정 복고가 이뤄지기 전까지는 창왕이나 공양왕처럼 아무것도 못하는 허수아비 신세였다. 희종처럼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가 실패하기도 했을 정도.[34]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35] 그런데 그렇게나 많이도 많이 만든 별궁이나 별장들은 나중에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정변의 주역들인 이의방이고정중부 등한테 모조리 빼앗겼다(...).[36] 任川之患, 물가에 다다라서 생기는 고민.[37] 태조(건국군주), 혜종(태조 공인 후계자), 현종(중흥군주 및 왕실의 중시조), 문종(전성기 및 왕실의 중시조), 순종(문종 공인 후계자), 선종(숙종이 '양위' 받은 국왕, 헌종은 무시됐다.), 숙종(선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3대조), 예종(숙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2대조), 인종(예종 공인 후계자, 의종의 부왕).[38]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덕종, 정종. 헌종은 무시됐다.[39] 신하가 천자에게 보내는 글은 표(表)라고 한다.[40] 심지어 금나라가 호시탐탐 송을 노려보고 있는 와중에 송이 군대를 빼 고려로 보낸다는 모험을 할지도 의문이다.[41] 이 일은 의종이 재위한지 얼마안된 2년 차에 일어나 고려는 아직 인종 대의 국력이 있었다.[42] 정항과 강릉군부인의 4남으로 왕국모의 외손자.[43] 만월대 본궐에 있던 전각. 고려 초기엔 제 1정전이었으나 중기부터 제 2정전으로 밀려 났다.[44] 금나라 사신.[45] 일본.[46] 천자를 뜻하는 말로 대부의 나라는 백승지국(百乘之國), 제후국은 '천승지국(千乘之國)', 천자국은 '만승지국(萬乘之國)'이라 부른데서 연원한다.[47] 이 시점에서 의종은 정중부가 무신정변의 주동자임을 알지 못했다. 이의방등의 소장파가 주도한 것으로 알았던 것[48] 금나라 입장에서는 무신정권이 금과 우호적인가만 중요하였지, 의종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훗날 조위총이 영토 할양을 조건으로 도움을 요청하였음에도 금나라는 고려 침공을 거절하였다. 금나라는 고려와 싸울 생각이 아예 없던 것이었다.[49] 어쩌면 죽음을 직감한 것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