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고려)

 


'''고려 제20대 대왕
神宗 靖孝大王
신종 정효대왕
'''
'''묘호'''
'''신종(神宗)'''
'''시호'''
경공정효대왕
(敬恭靖孝大王)[1]
'''작위'''
평량후(平凉侯)
평량공(平凉公)
황태제(皇太弟)
'''절일'''
함성절(咸成節)
'''성씨'''
왕(王)
''''''
민(旼) → 탁(晫)
''''''
지화(至華)
'''왕후'''
신헌선정태후(信獻宣靖太后)
'''왕태자'''
왕연(王淵)
'''부왕'''
인종 공효대왕
'''모후'''
공예태후(恭睿太后)
'''출생지'''
고려국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연덕궁(?)
'''사망지'''
고려국 덕양후 사저
'''능호'''
양릉(陽陵)
'''생몰연도'''
음력
1144년 7월 11일 ~ 1204년 1월 13일
양력
1144년 8월 11일 ~ 1204년 2월 15일 (59세)
'''재위기간'''
음력
1197년 9월 23일 ~ 1204년 1월 5일
양력
1197년 11월 4일 ~ 1204년 2월 7일 (7년)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전
2.2. 즉위 후
2.2.1. 양위
2.3. 최후
3. 평가
4. 기타
4.1. 왕릉
5. 대중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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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 제20대 임금. 묘호는 신종(神宗), 시호는 경공정효대왕(敬恭靖孝大王), 휘는 처음에는 민(旼)이었으나 후에 탁(晫)으로 바꿨다.
인종 공효대왕의 다섯째 아들이며 의종 장효대왕, 명종 광효대왕의 동생이다.

2. 생애


'''등극한 인종 공효대왕(仁宗 恭孝大王)의 아들'''
'''18대'''
'''19대'''
'''20대'''
의종 장효대왕
명종 광효대왕
신종 정효대왕
'''고려의 역대 왕태제'''
왕오(왕태자)

'''왕탁'''

왕영(왕태자)

2.1. 즉위 전


인종 22년에 인종의 보령 36세 때 태어났다.[2] 공예태후 소생으로 이름을 왕민이라 했고 만조백관이 표문(表文)을 올려 축하했다.
원래 팔자대로라면 왕민은 왕위와 전혀 관계가 없을 왕자였다. 그의 위로 동복형이 의종, 대령후 경, 명종, 원경국사 충희 등 4명이나 있었기 때문. 실제로 맏형 의종의 즉위 당시 왕민은 고작 세 살짜리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1154년 맏형인 의종 재위 8년에 평량후로 봉해졌고 이후 공작으로 진작했다. 봉지인 평량(平凉)은 옛 고구려의 평원군이었으며 신라의 북원소경이기도 했다. 평량은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이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 맏형 의종이 폐위되면서 셋째 형인 명종이 왕위에 올랐다.
1182년 명종 재위 12년에 넷째 형 충희가 사망했다. 원경국사 충희는 왕가를 떠나 승려가 됐지만 좋지 않은 행보를 보여줬다. 충희는 왕실을 떠났으니 정변에 영향을 받지 않고 나중에 죽은 것인데 공예태후는 충희가 무신들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나머지 화병에 걸렸다.
당시 평량공은 치질에 걸려 오랫동안 집 밖을 못 나가고 있었는데 공작이 문안을 못 오니 태후는 평량공도 죽었다고 생각했다. 이에 명종은 평량공을 수레에 태워 태후전에 같이 가 모후를 알현했고 같이 술잔을 따라주는 등 어머니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1197년 4대 무신 집권자 이의민의 목숨을 빼앗고 5대 무신 집권자가 된 최충헌이 형 명종을 폐하고 평량공을 사저에서 데려와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시켰다.[3]
최충헌 묘지명에 따르면 최충헌은 평량공을 황태제(皇太弟)의 신분으로 만들어 올린 것으로 보인다. 이 황태제가 참 이름만 거창한 작위인게 명종은 진작에 장남 왕숙[4]태자로 임명되어 매우 오랜 기간 동안 활동하고 있었다. 최충헌이 명분이 부족하니 억지로 끌어들여서 황태제로 올린 셈.

2.2. 즉위 후


54세 때인 1197년 9월 대관전에서 축하를 받은 후 신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의봉루(儀鳳樓)에서 반란군을 칭찬해주는 일'''이었다.[5] 맏형셋째 형을 제멋대로 폐위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어머니까지 화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만든 무신들을 칭찬하는 신종의 마음은 썩어 들어갔을 것이다. 이후 늘 그렇듯 최충헌, 충헌의 동생 최충수, 충헌의 부하들의 직위를 매우 올려주었다.
같은 해 10월 신종은 휘를 민(旼)에서 탁(晫)으로 개칭하였는데 왜 바꿨나면 민(旼)은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의 한자식 이름이었기 때문. 여기서 고려의 금나라에 대한 반감을 볼 수 있는데 상국으로 받드는 금나라 태조의 이름을 고려 왕자의 이름으로 쓴 것이다. 즉 피휘를 안해주겠다는 것. 게다가 신종은 원래대로라면 군주가 될 수 없으니 평생 민으로 살았을 것이다.
신종은 공작 시절 꿈을 꿨는데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천탁(千晫)으로 바꿔주었다. 이 꿈 이후 신종은 즉위했는데 개명을 위한 회의를 할 때 한 신하가 탁 자를 추천하자 내심 신기해하면서 이를 따랐다고 한다.
재위 3년(1200년) 왕후를 궁주 원비(宮主 元妃)로 책봉하는 한편 맏아들의 이름을 왕연(王淵)에서 왕덕(王悳)으로 바꾼 뒤 왕태자(王太子)로 봉했다.
재위 4년(1201년) 4월, 주리들의 횡포로 인해 진주에서 공사 노비들이 난을 일으켰고 이듬해가 되어서야 간신히 평정되었다.
재위 5년(1202년)엔 제주도와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보냈다.
또한 신종의 재위기에 그 유명한 만적의 난이 일어났다. 여전히 고려의 혼란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재위 6년 12월 연말엔 등창[6]에 걸렸는데 최충헌이 직접 문병했다고 한다.
재위 7년(1204년) 1월에 병이 나을 기세가 없자 최충헌과 논의한다:

'''신종''': "짐이 번저(藩邸)에서 보위(寶位)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공의 힘 덕분이었다. 나이는 늙어가고 병까지 걸려 더이상 청조(聽朝)할 수 없으니 태자에게 전위하려고 한다.

'''충헌''': "상께선 깊게 생각해 주시길 바랍니다. 선위의 명령은 신이 감히 쫓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병을 마친 최충헌은 궁궐을 나와 부하들과 사저에서 은밀히 선양에 관해 논의한다.

2.2.1. 양위


1204년 1월 5일, 신종은 다시 한번 최충헌에게 선위를 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하지만 허수아비 신세였던 신종은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는 것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최충헌이 태자 왕덕에게 신종의 이 같은 뜻을 전하자 태자는 울며 이를 거부했다.
신종은 천령전(千齡殿)으로 가 태자에게 조칙(詔勅)을 내린다.

"짐은 얇은 덕으로 큰 기업(基業)[7]

을 그르쳤다. 이제 늙고 병에 걸려 청정(聽政)하지 못하겠다. 너 원자(元子)는 학업이 빛나고 덕은 민의 소망을 채울 수 있으니 대보(大寶)를 너에게 넘겨 쓰도록 하라."

최충헌은 태자에게:

"군부(君父)의 명령은 굳이 거부하시면 안됩니다."

라고 한 뒤 강안전(康安殿)[8]으로 데려가 임금의 복장을 바치고 태자가 있는 북쪽을 향해 두 번 절을 했다.[9]
태자는 대관전(大觀殿)[10]에서 만조백관의 축하를 받는다. 신종은 부축을 받고 일어나 최충헌에게 말했다:

"오늘 짐이 원한 것이 이루어지니 병도 같이 낫는 듯 하다. 경은 짐 부자(父子)에게 바친 공덕이 앏지 않은데 갚을 길이 없다."

말을 마친 뒤 눈물을 흘리니 최충헌은 두 번 절하고 밖으로 나갔다고 한다.
이후 주변 중방 소속의 관리들을 향해 더 이상 경들을 못볼 것이니 다음 왕을 열심히 섬기라고 당부하자 모두가 울었다고 한다.

2.3. 최후


신종은 둘째 아들 덕양후의 사저로 옮겨가 그곳에서 지내다가 퇴위한 지 8일 만인 1204년 1월 13일에 향년 61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정궁 내의 전각인 응건전(應乾殿)에 시신을 안치하지 말라고 하여 별궁인 정안궁에 빈소를 차렸다.
묘호를 신종(神宗)이라고 정한 뒤 태묘에 제사지내고 시호를 정효대왕(靖孝大王)으로 올렸다. 이후 형 명종의 손자 고종이 경공(敬恭) 시호를 추가했다.[11] 또한 고종은 성평왕후의 시호를 올릴 때 신종을 언급하여 '성황(聖皇)'이라 부르며 우대해줬다.

3. 평가


딱히 평가할 건덕지도 없다. 그냥 최충헌의 허수아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늙은 보령에 옥좌에 강제로 올라 아무 권력도 없었으며 옥좌에서 내려오는 것마저 무신들의 눈치를 살펴가며 해야했다. 더구나 태자 희종은 최충헌을 역으로 제거하려다 실패해 폐위당한 뒤 유배당했고 대신 즉위한 조카(즉 희종의 사촌형) 강종도 그처럼 늘그막에 최충헌에 의해 강제로 왕위에 오른 뒤 얼마 못 가 승하하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여러 모로 비운의 인생을 살다간 임금.

4. 기타


25대 국왕인 충렬왕은 그의 증손녀 사위뻘이다. 충렬왕이 태자 시절이던 1260년 신종의 증손녀 정화궁주 왕씨를 태자비로 맞이했다. 그러나 원나라와의 오랜 전쟁이 끝나고 고려가 원나라의 간섭을 받게 되면서, 충렬왕은 결혼한 지 14년이나 된 정화궁주를 두고 원나라 황제 쿠빌라이 칸의 딸 제국대장공주왕비로 맞이해야 했다. 정화궁주는 제2비로 밀려나 갖은 수모를 당하며 살았다.
신종의 7대 직계 후손이 바로 고려 최후의 국왕인 공양왕이다.
동문선 31권에 '함성절하표(咸成節賀表)[12]'가 남아있다. 함성절은 신종의 절일이다. 김극기란 신하가 썼으며 '성상폐하(聖上陛下)'의 생일을 맞아 만국(萬國)이 조천하러 왔다고 표현했다. 신종을 바라보는 것을 하늘을 바라본다고 표현했다.
동문선 116권에 신종의 친손자 회경공(懷敬公)의 뇌사[13]가 기록되있다. 뇌사는 이규보가 칙령(勅令)을 받고 썼는데 회경공을 '천자지손(天子之孫)'이라 칭했다. 고종이 신종을 '성황(聖皇)'이라 한 것도 그렇고 허수아비 임금치고 사후 나름 우대받았다고 할 수 있다.

4.1. 왕릉


[image]
'''양릉(陽陵)'''
신종의 무덤 양릉은 현 황해북도 개풍군에 있다.
이 능에서 고려청자 조각이나 장신구 등의 고려시대 유물들이 출토되어서 고려 중기 문화재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쓰였다. 무덤 내부의 천장에는 북두칠성을 비롯한 158개의 별들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무덤 내부에 벽화를 그리는 것은 고구려 시대부터 고려 왕건의 현릉, 신종까지 이어진 전통이다.[14]
그런데 2009년 북한 고려왕릉의 모습을 일부 공개한 한서대학교 장경희 교수에 따르면 북한 측에서 복원을 잘못하는 바람에 깨진 난간석이 능 주변에서 굴러다니고 능 규모도 왜소해졌다고 한다.

5. 대중 매체에서


코에이의 게임 징기스칸의 세계편에서는 고려의 군주로 등장한다. 하지만 세계편 시작연도가 1206년이라 고증에 맞지 않는다. 후속작인 원조비사에서는 고증에 맞게 아들인 희종으로 교체되었다.
[image]
KBS 대하사극 무인시대에서는 배우 이우석이 맡았다. 명종과 신종의 모후인 공예태후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등장하는데, 나름대로 황실을 걱정하는 인물로 나오지만 명종이나 아들 희종에 비하면 비중이 적은 편. 즉위 이전부터 최충헌을 진심으로 충신으로 생각하고 그의 뜻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며, 최충헌에 의해 옹립된 뒤에도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인정하고 맞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병이 깊어져 아들 희종에게 양위할 때에는 최충헌을 불러다가 무릎을 꿇고 아들을 보좌해줄 것을 당부할 정도.
[1] 고려사 신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부왕 인종은 2년 뒤인 1146년에 38세를 일기로 붕어했다. 그래서 신종은 아버지를 기억하지도 못했을 것이다.[3] 대관전은 옛 천덕전으로 본궐의 제 2정전이다. 형 명종이 즉위한 곳이기도 하다.[4]강종 원효대왕.[5] 의봉루는 의봉문 위에 있는 누각이며 옛 신봉루이다. 의봉루는 본궐의 세 번째 대문이며 매우 화려한 누각이었다.[6] 등에 종기가 나는 병.[7] 회사 기업 말고 왕조의 기반을 의미한다.[8] 옛 중광전으로 본궐에서 가장 활발하게 사용된 편전이다.[9] 군주(왕덕)는 북쪽, 신하(최충헌)는 남쪽에 서니 '이제 태자 왕덕은 임금이다.'라는 뜻이다.[10] 태조가 세운 옛 천덕전으로 고려 본궐의 제 2정전이다.[11] 그리고 고종의 왕후인 안혜태후의 조부가 바로 신종이기도 하다.[12] 절일 함성절을 축하하는 표문.[13] 죽은 자를 추모하는 시.[14] 왕건의 현릉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