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종(고려)

 


'''고려 제19대 대왕
明宗 光孝大王
명종 광효대왕
'''
'''묘호'''
'''명종(明宗)'''
'''시호'''
황명광효대왕
(皇明光孝大王)[1]
'''작위'''
익양후(翼陽侯)
익양공(翼陽公)
'''절일'''
건흥절(乾興節)
'''성씨'''
왕(王)
''''''
흔(昕) → 호(晧)
''''''
지단(之旦)
'''왕후'''
공평광정태후(恭平光靖太后)
'''부왕'''
인종 공효대왕
'''모후'''
공예태후(恭睿太后)
'''출생지'''
고려국 개경(開京) 개성부(開城府) 연덕궁(?)
'''사망지'''
고려국 개경 개성부 창락궁(昌樂宮) / 개경 개성부 양화궁(養和宮)
'''능호'''
지릉(智陵)
'''생몰연도'''
음력
1131.10.17 ~ 1202.11.17 / 1203.11.17
양력
1131.11.08 ~ 1202.12.03(71세 25일)
'''재위기간'''
음력
1170년 9월 기묘일 ~ 1197년 9월 계해일
양력
1170.10.13 ~ 1197.11.04(27년 23일)
1. 소개
2. 생애
2.1. 즉위 전
2.2. 즉위 후
2.3. 늙은 임금이 폐위되다
2.4. 붕어
3. 성격
4. 평가
5. 기타 창작물
5.1. 징기스칸 4
5.2. 무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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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제19대 임금. 묘호는 명종(明宗), 시호는 황명광효대왕(皇明光孝大王), 휘는 처음에는 흔이었으나 후에 호(晧), 자는 지단(之旦).
제17대 인종의 아들이자 제18대 의종의 동생이다. 의종에게 아들이 있었고 의종 다음으로도 대령후 왕경(大寧侯 王暻)이 있었기에 순번상 왕위 계승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맏형 의종이 둘째 형 대령후 왕경을 싫어해 대령후는 정계에서 밀려났다. 무신정변으로 인해 의종과 태자가 쫓겨나고 명종이 옹립되었다.

2. 생애


'''등극한 인종 공효대왕(仁宗 恭孝大王)의 아들'''
'''18대'''
'''19대'''
'''20대'''
의종 장효대왕
명종 광효대왕
신종 정효대왕

2.1. 즉위 전


인종과 공예태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동복형제로는 형 의종, 대령후, 충희, 동생 신종 등이 있었다.
형 의종이 즉위하고 2년에 형의 명령으로 아버지의 시신을 안치한 궁궐에서 해가 바뀌었음을 알리는 제사를 지냈다.
이후 형 의종이 익양후(翼陽侯)로 봉했고 공작(公爵)으로 진작된다. 봉지인 익양(翼陽)은 옛 마한의 세력지였던 곳이다. 지금의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무진군.
의종 24년(1170년) 무신정변으로 인해 의종은 폐위된 후 지금의 경상남도 거제시로 유배되었다.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 주동자들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왕호의 집으로 와 그를 정궁 수문전(修文殿)으로 데려갔다.

2.2. 즉위 후


1170년 9월은 명종의 안습한 일대기가 시작되는 날이다. 명종이 옹립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무신의 직위를 마구 올려 주는 것이었다. 무신들이 만족하고 나서야 대관전(大觀殿)에 나아가 만조백관의 경하를 받을 수 있었다. 임금의 권위는 이미 시작부터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다.
1171년 10월에는 고려 정궁에 불이 났다. 당시 정중부, 이준의 등이 궁궐 안에 있었는데 불난리가 나자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생길까봐 궁궐을 폐쇄해버리고 나갔다. 왕은 타버린 궁을 보고 크게 통곡(痛哭)했다.[2] 이 해에 무신 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인 이고가 죽고 이의방과 정중부의 양립 체제로 운영된다.
재위 4년차인 1173년 맏아들 왕숙[3]을 왕태자로 책봉했다. 또한 고려사는 이 해에 기록적인 가뭄을 보였다고 기록했는데 곡식이 없으니 인육(人肉)을 팔고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하는 등 나라가 엉망이 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 동북면 병마사[4] 한언국과 김보당은 선왕이던 의종을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로 데려와 김보당의 난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실패하고 의종은 이의민에게 허리가 반으로 접혀 끔찍하게 시해당했다.
같은 해 10월 명종은 모든 관리를 무신으로 채우라는 명령을 내린다. 하지만 이 명령은 누가 내리게 시켰는진 뻔하다. 같은 달에 고려 개국 전설과 연관이 깊은 옥룡사 선각국사 도선의 비석을 세웠다. 이 비문은 고려사가 인용한 편년통록의 전설과 비슷한 설화가 실려있다.
1174년 전국에서 반란이 들끓기 시작했고 서경을 중심으로 한 조위총의 난이 일어난다. 명종은 조칙을 내려 조위총을 타일러보지만 조위총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는다. 이 해에 무신 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이자 초대 집권자 이의방이 죽고 정중부 체제로 간다.
1176년엔 국가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음을 보여주는 작은 소요가 일어난다. 한 장수가 길거리에서 용호군[5] 소속 장교를 만났는데 장교는 대충 목례만 하고 갈려고 했다. 이에 장수는 분노해 장교를 감옥에 가두었는데 장교의 일당이 장수를 위협하고 장수의 집을 부수자 장수는 냅다 도망쳤다. 정중부, 이의방, 이의민 등이 자기 멋대로 구니 그 밑의 무신들도 양아치화 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같은 해엔 남쪽의 반란군이 기세가 커져 반란군 수장이 병마사(兵馬使)를 자칭했다. 병마사는 고려시대 군단 지휘관급 직위다. 명종은 결국 또 군대를 꾸려 정벌을 지시한다.
1177년엔 망이 망소이의 난이 일어난다. 역시 제대로 진압이 안돼 군사를 파견한다. 또한 조위총의 잔당이 들끓어 북방이 엉망이 된다. 어떤 수준이냐면 금나라가 정례적으로 사신을 보내 왔는데 고려는 조위총 잔당이 그들을 공격할까 두려워 80명의 부대를 보내 배로 호송했는데 역시나 공격을 받아 대부분 호송 부대원이 죽고 지휘관까지 다쳤다고 한다.
나라가 개판이 되가니 명종은 답답했는지 경령전(景靈殿), 태묘를 참배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경령전은 태조의 진영을 걸어두고 그를 신격화한 일종의 신전인데 1177년 7월 명종은 '''직접''' 자신을 탓하는 글을 써서 태조에게 바쳤다고 한다.[6]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엔 이 당시 이규보가 여러 산, 강, 도교의 신들에게 반란군을 잡게 해달라고 비는 축문이 잔뜩 있다. 그 중엔 "동도(東都)가 감히 상도(上都)에 대항했으니[7] 당신들은 신으로서 이 나쁜 놈들을 잡는 걸 도와줘야 됨!" 하고 거의 협박문 수준으로 비는 축문도 있다.
명종의 시대는 사실상 문종이 만든 전성기가 어찌어찌 인종 대까지 이어지다가 의종 때 결국 끝나고 본인 대에 무너지기 시작한 시대이다. 중흥의 군주가 필요했으나 권신들의 폭정과 명종의 부족함이 충족시키지 못했다.
1179년 이 해에 무신 정권은 무신정변 주도자이자 2대 집권자인 정중부가 죽고 경대승 체제로 간다.
명종 재위 10년인 1180년엔 궁궐의 대문 하나를 고쳤다. 문 이름이 향복문(嚮福門)[8]인데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향복(嚮福)은 항복(降服)과 발음이 비슷하니 이는 문신들이 우리를 누르려 하는 것이다! 라고 징징거려 명종은 이름을 고치게 해 영희문(永禧門)[9]으로 바꿨다. 근데 중방은 복 희 자는 좋은 뜻인데 길 영 자는 안좋은 뜻인거 같으니까 우리 부서 이름을 따서 중희문(重禧門)이라고 해줘!라고 또 징징대자 그렇게 해줬다. 참 어처구니가 없다.
1181년 명종은 잔치를 열었는데 견룡군[10] 소속 무신들이 너도나도 자기 의자를 높이고 치장해서 '''명종의 옥좌와 구분이 안됐다고 한다.''' 근데 명종은 참 속 편하게 술 먹고 크게 취해서 '''일어나 춤까지 추려다가''' 근처 신하가 말려서 못했다고 한다.
1183년 이 해에 무신 정권은 3대 집권자 경대승이 죽고 이의민 체제로 간다.
재위 14년차인 1184년 3월, 경성(京城)에 지진이 났다.[11] 명종은 점쟁이를 시켜 점을 처보게 했는데 '신하가 신하답지 못함(臣不臣)'이란 점이 나왔다... 사실상 점쟁이가 목숨을 걸고 지진이 난 게 무신 놈들 때문이라고 비꼰 것이다.
1186년 1월 13일 명종의 조카가 죽자 명종은 저황(儲皇)과 함께 애도했다. 또 처남 공화후가 죽었을 때 시호를 내려주고 우봉군에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공화후 묘지명에선 명종을 천자(天子), 제(帝)로 표현했다.

'''성수(聖壽)가 천장(天長)하시길 바랍니다.'''[12]

'''태자(太子)께선 천추(千秋)를 누리시길 바랍니다.'''

'''제왕(諸王), 궁주(宮主), 공주(公主)는,'''

'''각자 안녕(安寧)하시길 바랍니다.'''

'''문호양반(文虎兩班)은,'''[13]

'''충정(忠貞)으로써 보좌(補佐)하길 바랍니다.'''

- 자운사 의지대사비 비문 중. 1192년 제작됨. 왕실과 조정의 편안함을 기원하고 있다.

재위 25년인 1195년에 웃기는 일화가 있다. 당시 태자였던 왕숙이 자신의 생일 천희절(天禧節)[14]을 맞아 하례를 받고 명종을 보러 갔다. 명종은 민간에 무슨 말이 떠도는지 물어 봤다. 그러자 태자는:

태자: "사람들이 모두 신을 노태자(老太子)[15]

라고 웃습니다."

명종: "짐이 오래 사니 미안하구나."

명종의 말을 듣고 태자는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고 실색한다. 아버지가 오래 재위했다는 걸 농담으로 던진 것이지만 어떻게 보면 "아버지 왜 오래 사냐? 난 늙은 태자 취급 받는데" 같은 느낌도 들기 때문.
재위 26년인 1196년 2월, 또 경성(京城)에 지진이 났다. 명종은 다시 점을 치도록 했고 점은 '호령이 신하를 따라 나온다(號令從臣出)'는 답을 줬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이 조정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드러난다. 그리고......
'''두달 뒤 4월, 무신 집권자 중 최악이자 최대의 권력을 자랑한 최충헌이 4대 집권자 이의민을 죽이면서 역사에 등장한다.'''
재위 27년인 1197년 명종은 고려 왕실의 일원인 왕면(王沔)을 광릉후(廣陵侯)로 봉했다. 이에 왕면은 '천자의 가문(天子之家)'을 빛내겠다며 감사의 표문을 올렸다.[16]

2.3. 늙은 임금이 폐위되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재위 27년 9월, 최충헌 형제가 반역을 일으킨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에는 당시의 상황을 꽤 자세하게 기록해뒀다.
최충헌과 최충수 형제는 이전 무신 정권의 집권자들이 세운 임금인 명종을 폐위시키고 자신들이 직접 임금을 세우고자 했다. 그래야 전임 집권자들의 잔재를 없애고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할 수 있기 때문.
형제는 명종을 폐위하고 싶은 마음을 담아 하늘에 초제를 지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 날 저녁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며 번개가 쳤다고 한다.
이후, 충수는 자신의 생질인 박진재와 함께 형 충헌을 찾아갔다.

'''최충수:''' "금상(今上)이 재위한지 28재(載)이며 늙고 일하기 싫어 합니다. 여러 소군(小君)이 항상 상(上)의 곁에 있으며 은혜와 위엄을 훔치고 있어 국정(國政)이 엉망입니다.

상(上) 또한 소인배들을 총애해 금과 비단을 함부로 하사해 부고(府庫)가 비어 신민(臣民)의 주(主)가 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태자(太子) 숙(璹)은 여러 비(婢)를 가까이 해 아들 아홉을 낳았는데 각각 소군(小君)에게 보내 머리를 깎아 제자(弟子)로 삼게 했습니다.

(태자의) 성품 또한 어리석고 약하니 저부(儲副)[17]

로 삼아서는 안됩니다.

사공(司空) 진(縝)[18]

은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고 총명하며 도량이 있으니, 그를 왕으로 세우면 나라가 중흥(中興)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 중. 충수가 왕진을 추천하다.

최충수는 종실의 일원인 왕진을 밀었는데 고려사에선 그 이유를 충수가 왕진의 여자 노비를 좋아해서 왕진을 돕고자 한 것이라고 했다.
최충헌은 반대했다. 그는 명종의 친동생 평량공을 세우고 싶어했다.

'''최충헌:''' "평량공(平凉公) 민(旼)[19]

은 상(上)의 모제(母弟)이다. 지략이 깊고 도량이 넓어서 제왕(帝王)의 양(量)을 가지고 있다.

또 아들 연(淵)[20]

도 총명하고 배움을 좋아하니 저부(儲副)로 삼을 만하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 중. 충헌이 왕민을 추천하다.

최충헌은 이미 늙어 나이가 많고 안정적으로, 최충헌의 의도대로 후계자를 정할 수 있는 왕제(王弟) 왕민을 밀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안 맞자 박진재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박진재:''' "진과 민은 모두 군(君)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금나라는 진이 있는지 모르니 진을 내세우면 무언가 속셈이 있다고 여길 것이니 민을 세우는게 낫습니다.

의종(毅宗)의 고사(故事)[21]

처럼 동생으로 뒤를 잇게 한 것이라고 알리면 뒷말이 없을 겁니다."

고려사 최충헌 열전 중. 박진재도 왕민을 추천하다.

결국 이렇게 평량공 왕민이 왕이 되는 걸로 결정되어 명종은 폐위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가 내리는 날, 최충헌은 최충수와 박진재, 김약진 등을 데리고 군대를 이끌어 개경 만월대황성 거리에 나왔다. 그는 모든 궁문을 폐쇄하고 '''국왕의 군대'''인 2군 6위를 5군 진영으로 배치해 아무도 빠져나갈 수 없게 했다.
최충헌이 보낸 군사들에 의해 명종은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혼자서''' 말을 타고 향성문(向成門)[22]을 나가 창락궁(昌樂宮)에 유폐당하고, 태자 왕숙은 태자비와 함께 '''걸어서''' 북궁을 나와 강화도로 유배를 떠났다.[23]
이후 최충헌은 명종의 막내동생인 평량공 왕민을 새 왕으로 옹립한다. 이렇게 우중충했던 명종의 시대가 끝난다.

2.4. 붕어


명종은 폐위되고도 5년 정도를 더 생존했다. 고려사 명종 세가 기록인 1202년 9월에 폐위된 명종이 병에 걸리자 동생 신종은 신하를 보내 묻는다.

신종: "의원을 보내 약을 드리려 하는데 누굴 보내 드릴까요."

명종: "난 28년 동안 보위를 더럽혔다[24]

. 나이도 이미 일흔둘인데 왜 굳이 수명을 늘리려 하겠는가."

라고 하며 의원을 거부했다. 고려사에 기록된 명종의 마지막 말이다.
결국 1202년 11월 17일 유폐당했던 창락궁에서 훙했으며 묘호를 명종(明宗)이라 해 태묘에 제사지냈고 시호를 광효대왕(光孝大王)이라고 했다. 이후 손자 고종이 시호 황명(皇明)을 추가한다.
근데 동문선에 실린 명왕 애책문(明王 哀冊文)[25]엔 명종의 마지막을 조금 다르게 적었다.
신종이 최홍윤이란 신하를 시켜 쓴 것인데 애책문에선 명종 광효대왕이 1203년 11월 17일에 양화궁(養和宮)에서 붕어(崩于)했다고 한다. 또한 너무 늙어 직접 양위하여 태상왕(太上王)이 됐다가 제향(帝鄕)으로 돌아갔다[26]고 표현했다.
고려사와 비교하면 일단 1년 더 살았던 셈. 창락궁에서 승하한 것이 아니라 양화궁에서 승하했다. 고려사는 명종의 죽음을 훙(薨)[27]이라고 표현했지만 당시엔 붕어(崩御)[28]라고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명종이 태상왕이 되었다는 기록은 고려사에 전무하다. 또한 명종이 직접 양위했다고 쓰여 있다. 대놓고 최충헌의 입김이 들어갔다는 증거. 여러모로 고려사와 다른게 특징.
고려사 예지 국상조 기록에 따르면 명종은 죽어서도 능욕을 당했다. 동생 신종이 형의 장례식을 치르려 하자 최충헌이 명종의 장례식을 '''국왕의 예가 아닌 왕후의 예로 치르게 한 것.''' 신종은 나름 반항한 것으로 보이지만 감히 최충헌을 거스르지 못했고, 결국 명종의 왕후인 광정태후의 예로 장사지냈다. 마치 중방의 무신들이 자신들이 죽인 의종을 싫어했던 것처럼 최충헌도 자신이 내쫓은 명종의 정통성이 강해지는 걸 싫어해 왕후의 예로 장사지낸 것이다.
최충헌의 명종 격하 시도는 계속 이어졌는데, 명종이 죽었을 때 정기적으로 오던 금나라 사신들이 왔다. 신종은 공예태후의 전례에 따라 연화를 열지 않고 풍악을 열지 않으려 했지만 금 사신들의 반발, '누군가'의 암묵적인 압박 때문에 기일에 맞지 않게 큰 연회를 열게 된다.
최충헌은 마지막까지 명종을 괴롭혔는데, 명종의 장례식 날에 '''친아들 강종이 참석하는 걸 막았다.''' 당시 강종은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아예 오지도 못하게 한 것이다. 강종은 명종이 죽고 11년 뒤인 1212년에야 아버지의 능묘를 참배할 수 있었다.

3. 성격


심히 유약한 성격으로 보이며 여색을 즐기고 애처가딸바보#s-1 성향도 있었다. 애첩인 순주가 죽고 거의 반년 후인 1180년에 명춘마저 죽어버리자 우울증에 시달려 어머니 공예태후의 호통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다 들을 정도로 울어댔다고 한다.
심지어 후궁들 중에서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이미 시집간 둘째 딸인 수안궁주를 측근으로 삼아 자신에게서 밤낮으로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음 밤에는 품에 끼고 잠을 자기도 했고 이 기간은 무려 5개월 가까이 되었다. 자기 마음을 위로해줄 사람이 없다며 시집 간 딸을 불러들여서 하루종일 자신의 옆에만 있게 하고 잘 때는 끼고 잔 것이다.
그러다보니 결혼한 지 1년만에 독수공방을 하게 된 사위가 분통을 터트리며 파혼을 요청하기에 이르었고, 그렇기에 명종은 결국 사위를 수창궁(壽昌宮)의 동쪽 태후(太后) 행궁(行宮)에 거처(居處)하게 하고, 공주를 보내 남편을 위로하게 했고 결국 5달만에 딸을 집으로 돌려보내주었다.
그리고 순주와 명춘 및 후궁들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궁내에 불러들여서 화려한 오색 옷들을 입히고 놀기 바쁘다보니 궁 내가 하도 시끄러워서 자연히 군주로서의 권위는 저 너머로 떨어졌고, 경대승 정권 당시임에도 무관들이 전부 마음 속으로 명종을 비난하고 수군거리며 탄식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경대승 정권 이전의 정중부 정권 당시에는 음악이나 여색 등에 빠지는 것을 정중부 정권에서 제재했기 때문에 의종처럼 마음대로 노는 것도 못했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정중부 일가가 경대승에게 몰살당한 후에는 자유로워진 명종은 이런 방탕한 행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고려사 명종 종실 열전엔 10명이 넘는 서자들이 기록되있다. 모두 폐첩, 즉 기녀가 낳은 자식이라고 명시되 있는 만큼 상당히 여색을 밝힌듯 하다.

4. 평가


정중부를 중심으로 한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말 그대로 도륙내고 의종과 태자를 쫓아낸 다음 유약한 성격인 그를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어느날 갑자기 임금이 되어버렸다. 일정 부분은 조선 중종과 비슷하지만 그 쿠데타 세력의 성격이 매우 달랐던 것.
사실상 무신정권의 '''허수아비 임금''' 신세였다는 것이 세간 그리고 학계의 주된 평가다. 게다가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문신들을 죄다 씨를 말려버린 데다가 그 무신들조차 서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이고#s-1이의방이 죽이고 그 이후에 정중부가 이의방을 통수쳐 죽이고 그 정중부는 경대승이 결사대를 꾸려 세력과 함께 살해하는 등 계속해서 권력자가 교체되는 양상으로 이어갔고 심지어 민중봉기도 자주 터지는 등 이래저래 사회가 막장#s-1.2화 되어갔다.
그러나 경대승이 젊은 나이로 급사하면서 잠시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는데 명종은 당시 경주로 낙향했던 이의민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였다. 이 때 이의민은 계속해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경대승이 두려운 나머지 경주로 요양을 핑계로 도망와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수도의 군부 세력을 제어하고자 하였다 보는 시각도 있지만, 경대승 잔당에 대한 문제 등이 추측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이의민은 선왕을 시해한 자인 데다 천민 출신으로 그나마 만만한 상대이기도 했기에. 때문에 명종은 '''임금 스스로 이의민을 불러서 관직을 제수'''함으로써 기회를 스스로 차 버린셈이 되었다. 그 때문에 고려의 무신 정권 기간이 길어지게 만든 인물이라서 심하게 까이기도 하는 임금이다.
그가 이의민에게 권력을 넘겨준 것도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인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볼 여지가 충분하다. 군부(정중부)에 의해 옹립된 왕이기 때문에 문벌귀족들 보다는 군부 세력이 자신을 옹호할 세력이라고 자기 나름대로 판단하였고 그런 판단하에 이의민을 불러올렸던 것이다.
다만 나름의 정치적 센스는 갖추고 있었는지 초기 무신정권의 집정들이 절대로 폭주하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이의방 집권기에는 중방과 정중부를 이용하였고 정중부 집권기에는 중방의 고위급 무장들과 문신들을 활용하였으며 경대승 집권기에는 두경승과 조원정을, 이의민 집권기에는 두경승을 안전장치로 마련하여 서로 견제코자 하였고 나름대로 이는 제대로 적중하여 명종대의 무신집정들은 후대의 최충헌 마냥 전횡을 일삼으며 폭주하는 것이 불가능했고 이의민대에 이르러서는 나름대로 정국이 안정되어 이의민두경승과 서로 견제하면서 장장 '''13년'''동안 연립 정국식으로 국정이 운영되었다. [29]
그러나 어디까지나 무신정권을 주동한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다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기에 결국 이의민을 제거하고 권력을 차지한 최충헌에 의해 폐위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 때 태자 역시 쫒겨나 강화도에 유폐된 건 덤.[30]. 명종을 폐위시킨 최충헌은 그의 아우 평량공 왕민을 왕으로 옹립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명종은 그로부터 5년이나 더 살다가 이질에 걸렸는데, 이 때 의원의 치료를 거부해 승하했다. 그때 한 말이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였다. 실제로 승하할 당시의 나이가 72세였으니 당시의 기준으로는 꽤나 장수한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후사는 그에게 이어졌으니, 신종의 뒤를 이은 신종의 아들 희종이 최충헌의 목숨을 노렸지만 도리어 실패한 후 폐위되자 그 때 같이 유배를 갔던 명종의 아들 강종이 임금으로 옹립되었고, 그 후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계속 그의 자손이 왕위에 올랐다. 덧붙여서 공양왕의 경우 부계로는 신종의 7대손이지만, 모계 쪽으로는 그의 핏줄을 잇고 있었다.

5. 기타 창작물



5.1. 징기스칸 4


[image]
'''징기스칸 4 일러스트'''
코에이징기스칸 4에서 시나리오 1의 고려 국왕으로 등장하고 마치 무인 정변을 주도하여 등극한 인물인양 설정되어 있으나, 능력치나 수명은 안습이다. 능력치는 정치 42, 전투 46, 지모 46이고 내정특기로는 농업 하나뿐이며, 전투특기가 없다.. 그나마 한글판일 경우 이벤트로 금나라의 도시 회령(하얼빈)을 점령하면 모든 능력치가 +5가 되지만 그래 봐야 평범한 수준. 오프닝 이벤트에서 최충헌과 대담을 나누지만 시나리오 1이 시작하는 1189년은 사실 이의민의 집권기.
실제로는 고려 왕 중 두 번째로 장수한 임금인데도(1위는 25대 충렬왕으로 73세) 십중팔구 얼마 못 가 병사해 버려[31] 컴퓨터가 플레이시 거의 수하 장수로 있는 최충헌이 후계자가 되어 "최씨 고려"가 되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한다. 그래서 시작하자마자 연회를 해서 최충헌의 충성도를 올림과 동시에 빨리 자손을 만들어야 한다. 그나마 고려는 아이템 '인삼' 때문에 왕비의 회임율이 타국보다 높다는 이점은 있다. 거기에 정발판에서는 얼굴이 그나마 한국사 왕 답지만 일본판에서는 무슨 왕서방으로 등장, 지못미. 그래도 사실 역사적 행적으로 봐도 그다지 좋은 능력치를 받기는 어려울 테니, "등장했다"는 데 의의를 둬야 할지도.
한글판과 원판의 운영이 약간 차이가 있지만 의외로 명종의 고려는 그리 어렵지 않다. 한글판일 경우 원판에 없는 장수들인 지눌(재야로 등장), 최종준(초기부터 존재), 일연(몇 년 후 재야로 등장)이 추가되어 초반 내정이 편하며 일본이 분열되어 있는 데다가 당시 유통사 비스코의 알고리즘 수정으로 일본문화권 국가가 절대 외국을 침입하지 않아서[32] 원판에 비해 난이도가 대폭 낮다. 이런 보정이 없는 원판에서는 초기에 최충헌, 효심만 존재하는 데다가 이들의 충성도가 낮기 때문에 초반에 다소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고 일본이 대외 공격을 하지만, 그나마 시나리오 1은 일본이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배후의 염려로부터 다소 자유롭다. 실제 역사에서 자신을 폐위시킨 최충헌을 잘 이용하는 게 이 시나리오 고려 플레이의 포인트.

5.2. 무인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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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인시대에서는 김병세가 배역을 맡았다. 1회에 등장하여 최충헌 정권 초반부인 133회에 퇴장했으니 드라마 진주인공인 이의민보다도 더 오래 등장한 셈. 조연 중에서는 두경승과 더불어 비중이 높은 캐릭터인데, 두경승은 전형적인 고결한 영웅 캐릭터이지만 이쪽은 단지 황제라서 비중이 높을 뿐이다.
작중 위치는 권력없는 나약한 허수아비이긴 한데, 오랜 기간 온갖 몹쓸 일을 당하는 데다 권력의 단맛과 책임감을 느끼면서 명종 역시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인다. 가령 처음 즉위할 때만 해도 뭔 일이 벌어지면 눈 튀어나올 듯이 놀란 표정을 짓는 데다, 극 초반부 금나라와의 외교 분쟁이 발생하자 태후 앞에서 울먹거릴 정도로 그저 무기력하고 나약한 모습만 보인다. 그러나 정중부 정권 시점에선 은근히 자기 고집이 생기더니, 후반부에 이르러선 초반에 비해선 강단있고 편집증적인 성격으로 흑화해버린다.[33] 인물 묘사의 변화 및 배우의 열연으로 인해, 후반부엔 얼굴서부터 대놓고 명종이 흑화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권력에는 부모자식도 없다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초반에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데다 나약한 인물이다보니 태후에 무작정 기대는 모습을 보이더니 정중부 정권쯤부터는 은근히 태후(공예왕후)와 대립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보당의 난 때는 태후가 의종을 처단해야 한다고 말하자, 명종은 울먹거리며 어찌 형님을 시해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한다. 그러나 경대승 정권쯤에 와서는 태자의 입지가 커지자 태자를 정치적인 적으로 여기고서는 정말로 제거할 생각까지 한다.[34]
무신정변 당시엔 갈등의 원인 중 하나로 등장한다. 이의방을 비롯한 소장파 측에선 대령후를 옹립하고자 했으나, 정중부 측은 익양후(명종)를 옹립하고자 했고, 때문에 이고 측에서 익양후를 인질로 잡는 등 유혈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나 대령후가 아무도 몰래 정균에게 살해당한 관계로 결국 익양후가 황제로 즉위한다. 접전이 벌어질 당시, 익양후는 장독에 숨는 굴욕적인 모습을 보이기까지 한다.
원래 황제의 자리에 오를 위치가 아닌 데다가 유약하다보니, 용상에 오르고도 어머니인 공예태후에게 의존하는 등 심약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정작 태후가 해주는 충고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고 반항하다 보니 태후와 심하게 갈등한다. 이 때문에 태후도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들인 명종에게 화가 나 대놓고 명종에게 "황상을 황제로 고른 것은 이 어미요!"라고 말할 정도. 금나라가 시비를 걸자 태후에게 울먹거리기까지 한다. 김보당의 난 때 의종 시해건에 대해서도 태후에게 울먹거리며 어찌 형님을 시해할 수 있냐며 거부했으며, 결국 이의민이 의종을 시해하자 충격을 받으며, 한편으로 어머니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이의방 정권이 몰락하고 정중부 정권이 들어설 때쯤엔 은근히 자기고집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의방의 딸인 태자비를 폐위할 때부터 태후에게 본격적으로 반항하기 시작하며 자신을 황제로 세워준 것은 감사하지만 황제는 자신이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아무리 허수아비라지만 권력자들은 겉으로나마 명종을 최고 권력자로 대우하는데, 공예태후가 자신이 명종을 즉위시켰다며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니, 명종으로서는 어머니가 못마땅해보이는 것. 또한 정중부가 몰락하자 정중부에게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워서 조리돌림 후 도끼로 처형하는 잔혹한 면모까지 보인다. 이 때문에 정중부는 충격을 받았고 정중부 일가를 도모한 '''경대승조차도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냐며 경악한다.''' 사실 정중부는 권력을 탐하고 권신으로서 지위를 노렸을 뿐 황제의 자리를 탐하지는 않았다.[35] 정균의 경우도 죽기 직전에 가서야 자신이 황제가 되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 이전에는 그저 임씨 부인의 일로 흑화한 광기에 찬 권신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명종은 자결을 하겠다고 하는 정중부를 잔혹하게 죄를 뒤집어씌워 조리돌림까지 시켰다. 이에 경대승마저도 자신도 이렇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충격을 받는다.
과연 경대승 집권기에는 경대승을 배척하는 모습을 보이는 한편, 경대승을 비호하던 태자와의 반목 때도 술을 마시면서 "태자, 짐은 결코 네게 용상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하며 분노한 모습은 허수아비일 뿐이기는 하지만 황제의 자리에 올라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름에 따라 그 권력에 취하여 이쪽도 '''흑화'''했음을 보여주는 부분. 그러나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실책을 저지르는데 국정은 제대로 돌보지않고 연회에만 빠져살고 만다. 그래서 보다 못한 태자가 연회장으로 찾아와서 연회는 그만하고 이만 국정을 돌보라고 건의했는데 오히려 크게 화를 내며 태자한테 술잔을 던져버리는 바람에 태자가 그 술잔에 머리를 맞아 피가 나고 만다. 이는 태자와 공주들, 태후, 경대승, 주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준다. 게다가 경대승과 태후, 신하들이 국정을 돌보라고 해도 마찬가지로 화를 내며 말을 듣지 않는다. 이 때문에 태자와 공주들, 경대승, 신하들은 크게 실망했고 태후도 아들 명종을 포기해버렸을 정도다. 드라마의 연출상 명종이 경대승의 집권으로 태평성대를 이룰 호기를 맞았지만 잘못된 판단으로 내쳐 버렸다는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그건 경대승을 너무 띄워주다 보니 다른 면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오판에 가깝다. 극중에서도 몇 차례 묘사된 바와 같이, 고려를 무신정변 이전으로 되돌리겠다는 경대승의 생각은 그 무신정변으로 옹립된 명종의 정통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었기 때문. 이에, 아예 학계 일각에서는 의종이 이의민에게 시해당하지 않았더라면 '''경대승에 의해 의종이 복위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즉 경대승의 집권으로 (명종의) 황권은 약화되면 약화되었을지언정 결코 강해질 수 없었고, 명종으로서는 경대승을 믿지 못하고 경계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 다만, 무엇보다 국정을 소홀히 하고 향락에 빠져 살며 주변인들의 충고를 듣지 않은 것은 명백한 실책이었다. 하여간 작중 경대승과 명종을 대비시키기 위해서 그런지, 이 시점에서 명종은 전형적인 암군의 모습을 보인다.
경대승의 죽음 이후, 정신을 못차리고 경대승의 죽음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푸는 작태를 보이자, 태후가 찾아와서 국정을 제대로 할 생각도 안하면서 연회부터 베푸냐며 질책한 다음 신하들에게도 왕을 제대로 이끌 생각도 안하냐며 같이 질책하고 연회장을 난장판으로 만들다 가슴을 부여잡고 쓰러지자, 어머니를 걱정하면서도 결국 그 일을 빌미삼아 태후전에는 가보지도 않는 찌질함을 보인다. 하지만 곧 손석과의 거래, 김자격의 낚시 등으로 청주 가문이 반역을 저지르지 않은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키기로 마음먹은 조원정이 대전에서 황명을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이 뭔가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병상에 있던 태후가 "황실의 권위를 찾고 태평성대를 이루겠다는 꿈은 버리고, 황실을 지켜내는 것만을 생각해야할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이의민을 불러올리라는 조언을 주고, 명종 역시 이 조언을 받아들여 두경승을 통해 이의민을 불러올린다.
이의민 집권기에는 결국 태후마저 세상을 뜨고, 홀로 황실을 지키며 문극겸두경승에게 의지하여 정국을 운영한다. 이 즈음부터는 허수아비 황제로나마 오랜 기간 제위에 있으면서 드디어 무언가를 깨달은 것인지, 이의민의 장남 이지순이 황실을 떠받들 재목이라 평하는 태자에게 "'''허수아비 황제로 무부들에게 흔들리는 것은 자신의 대에서 끝나야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모습은 조원정의 난 때부터 볼 수 있는데, 도성 내에 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자리를 지키다가 반란군 수괴가 들어오면 대면하겠다'라는 판단을 내린다. 극 초반에는 장독에 숨어들 정도로 유약했고, 경대승의 거병 때만 해도 정중부의 사가로 도주할려고 했던 것과 비교하면 성장했다고 볼 수 있는 부분이다.
이의민 집권기 때는 두경승을 이용해 이의민을 견제하는데, 그렇치만 이의민의 존재 의미 자체는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은 무신 정변으로 옹립된 황제이니, 무신들을 부정하는 건 자신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은 것. 때문에 극 초반부 때와는 달리, 의종 시해건에 대해선 황실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일이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타락한 이의민과 이지영이 횡포를 부리자 점차 이의민을 제거할 생각을 하기 시작했으며, 이지영이 궁녀도 아니고 '''후궁'''을 겁간하는 일이 벌어지자[36], 뒷목을 잡은 명종은 두경승과 최충헌을 이용해 이의민 일파를 제거한다.
최충헌은 유약한 황제라고 무시하는 최충수와 주변 부하들에게 "명종은 유약하게 권력자들에게 흔들리다가도 그들의 권세가 기울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무서운 황제"라고 평가하며 그를 경계하는데, 과연 명종은 최충헌이 중방을 도륙내는 모습을 보며 느낀 것이 있는지 두경승에게 그를 도모하라는 밀명을 내린다. 하지만 두경승이 최충헌의 고육지책에 휘말려 그에게 패하고, 명종은 대전의 용상에 앉아 최충헌, 최충수 형제의 병장기와 마주하게 된다.[37] 최충헌은 명종과 독대하여 당신이 물러나야 고려가 살 수 있다며 우회적으로 협박을 했고, 중과부적임을 안 명종은 결국 종묘사직을 위해 자신의 폐위를 받아들인다. 최충헌에 의해 폐위당한 명종은 용포는 모두 벗겨지고 굵은 빗줄기 속에서 비참하게 대전에서 끌려나오며[38] 형인 의종의 전철을 밟게 된다. 유폐된 곳에서 새로 왕이 된 동생 신종이 찾아와서 위로하자 왕으로서 더 이상 미련이 없으니 동생에게 잘하라고 덕담을 해주었고 이후 노환으로 최후를 맞이한다.
[1] 고려사 명종 세가 마지막 조 기준.[2] 고려사 원문 기록.[3] 후의 강종.[4] 고려 동북면 일대의 군대 지휘관 정도 직위이다.[5] 고려 시대 정규 군대인 2군 6위 중 용호군.[6] 보통 임금은 한림학사, 중관을 시켜 글을 쓰게 하지 자신이 직접 쓰지 않는다. 그래서 어필이 매우 희귀한 것.[7] 동도는 경주를 비유한 것이고 상도는 고려를 비유한 것이다. 경주의 반란을 제후국의 반란으로 비유한 셈.[8] 복으로 향하는 문.[9] 길게 복을 누릴 문.[10] 왕의 호위 부대. 높은 직위의 무신들이 속해 있다.[11] 경성은 고려사 원문 기록으로 당시 수도 개성을 이른다.[12] 원문은 성수천장(聖壽天長)인데 성수는 '임금의 수명'을 이르고 천장은 '하늘과 같이 길다'는 뜻이다.[13] 호는 혜종 무(武)의 이름을 피휘한 것이다.[14] 태자의 절일이다.[15] 명종이 오래 재위하니 강종은 오랫동안 태자로 있었다. 그래서 강종을 늙은 태자라고 민중이 놀린 것.[16] 동국이상국집 출처.[17] 태자의 다른 말.[18] 현종의 아들 정간왕의 직계 후손이다.[19] 이후의 신종(고려)이다.[20] 이후의 희종(고려)이다.[21] 중방의 권력자들은 의종의 죽음을 외국에 알리고 동생 명종이 대신 자리에 올랐다고 발표했다.[22] 본궐의 서대문.[23] 후에 고종이 된 만 5살 왕손 역시 유배되었다. 왕손의 유배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강종과 같이 갔을 수도 있고 나중에 아버지가 즉위하여 아들을 '서해도(西海道) 풍주(豊州) 안악군(安岳郡)'에서 데리고 온 걸 보면 그쪽으로 유배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서해도 안악군은 지금의 황해도 안악군이다.[24] 고려사 원문에 더럽혔다고 되어 있는데, 명군으로서 통치하지 못했다고 겸양하는 표현.[25] 동문선에서 명종의 묘호가 명왕 시호로 격하된 이유엔 두가지 추측을 할 수 있다. 고려의 묘호는 원 간섭기를 거치며 시호로 격하되었다. 그러니 조선 성종 대에 편찬된 동문선에 그 영향이 남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다른 하나는 제작자인 성종이 제후국이 묘호를 쓰는 것은 참람된 것이라 하여 의도적으로 낮춘 것일 수도 있다.[26] 여기서 제향은 황제(명종)의 고향이 아니라 상제(上帝)의 고향, 즉 죽어 승천했다는 뜻이다.[27] 제후의 죽음을 의미하는 한자어.[28] 천자의 죽음을 의미하는 한자어. 천붕(天崩)이라고도 한다.[29] 그나마 분쟁이 없던 이 시기를 아예 깨부숴버린 인간이 최충헌이다. 이의민을 살해한 뒤 명종과 태자를 폐위한 뒤 쫓아내버렸고 두경승도 귀양보내버렸다.[30] 이 때 같이 쫓겨난 태자는 이로부터 14년 후에 수도 개경으로 돌아와 강종이 되었다.[31] 1189년에 44세이고 첫 아이가 9세, 10세쯤 되면 대부분 눈을 감게 되는 쪽으로 설정이 된 듯하다. 실제로는 1131년생이니 고증대로 한다면 59세라서 나이 설정이 잘못된 건 맞지만.[32] 일본 지역 밖으로 공격을 나가지 않을 뿐이지, 일본 지역의 도시가 외국의 세력에 점령되면 이를 탈환하기 위해 즉각 공격해 온다.[33] 다만 올바른 결단을 내리기보다는 자신의 보신과 권위 보전에만 급급한 소인배스러운 집착에 가깝다.[34] 태자가 태후전에서 공예태후와 마주앉아 신세 한탄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러다 명종의 심기를 심히 거스를 수 있는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때마침 태후전 문 밖에 와 있던 명종이 이 소리를 그대로 듣고 말았고, 이에 검을 빼들고 태자를 내리치려는 장면까지 있었다. 그것도 태후의 면전에서 이런 터라 태후와 태자가 충격을 받았고 태후의 질책을 받아서야 그만두지만 태후와 태자는 명종한테 크게 실망하고 만다.[35] 특히 정중부가 거병을 했을 때 원인이 명종의 형인 의종의 실정이었다.[36] 이지영의 이 행동에 이지광조차도 '형님 제정신이오?!'라고 하면서 경악할 정도였다.[37] 명종은 자신에게 칼을 들이대는 최충수에게 '이 황제를 어디 한 번 시해해 보라'고 일갈하기까지 한다. 용맹무쌍한 최충수도 이때는 명종의 포스에 눌려 잠시나마 움찔하기까지 했다. 최충헌이 최충수를 제지하여 결국 흐지부지되지만, 극 초반 장독에 숨던 명종의 모습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충격과 공포의 장면.[38] 명종이 대전 앞을 나가는 도중 돌바닥에 넘어지는데, 최충헌은 그걸 일으킬 생각따윈 없다는 듯 주변에 아무런 명을 내리지 않고 차가운 눈으로 명종을 노려보기만 해서 명종은 불편한 몸을 직접 일으켜야 했다. 한때는 만인지상이었던 자였건만, 정말 비참하기 짝이 없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