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정

 

1. 개요
2. 평가
3. 참조


1. 개요


1988년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를 졸업한 후, 베트남의 한 대학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구수정은 2011년 아맙을 만들어, 베트남 정기 여행상품을 고가 판매하고 있다. 현재 한베평화재단이란 이름을 지어 금전모금 및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

2. 평가


구수정은 베트남 전쟁에서의 한국군에 대한 거짓말을 유포하고 주도한 부분이 있다. 이에 평가는 해당 담론에 대한 것이, "소문"이나 사실이 아닌 가짜 문서, 인위적으로 포장해 접근했다고 판단한다.
그녀가 특이한 것은 유포행위가 지속적 이루어졌다가, 사실이 드러나면 다시 함구하고, 말을 바꾸고 잠복해 반복하는 것이 문제로 보인다.
얕은 지식과 견해로 군대를 접근하다보니, 군인에 관한 무지에서 오는 오류와 허위 사실을 남발하여 "저평가" 되었다. 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을 참조 / 또한 거짓이 계속 적발돼 모든 사실에 진실성이 없는 부정적 반응을 보였고, 법적 문제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1]
남을 속이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범죄로, 구수정은 그런 면에서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은 사실적 증거로서 말한 것이다. 한겨레21이 그녀의 관련 내용에 대해 반복적으로 기사를 썼고 의도가 깔린 것으로, 역사적 과오는 비판적인 견해들도 대부분 이러한 방향성 자체를 문제삼지는 않는다.
그러나 구씨 자신이 허위사실을 스스로 생산해 퍼뜨리는 것은 또다른 문제다. 특히 역사학에서는 기본인 "국가의 참전군인" 의 교차검증없이, 베트남 현지인의 일방적 혹은 착오에 기한 주장을 진실로 믿고 이를 사실 관계와 다른 것을 확정하는 경향이 있으며, 그 과정에서 한국군의 과오를 과장하거나 없던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마구 퍼뜨린 바 있다. 또한 거짓 진술이 밝혀진 베트남 사람들을 모집해 한국 정부로부터 대대적 보상금을 받아줄 것처럼 유인해, 그 취지와 목적과 의구심을 갖게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군은 30년 전부터 걸프전, 소말리아, 인도, 파키스탄 동명부대까지 해외파병이 이뤄졌고, 중동아시아 등에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국가가 관장하고 지휘관의 실제 교육도 있어 왔다.
이것은 구수정처럼 허위 사실 유포자가 없었기 때문에 해외파병 군인들이 모두 무사히 그 임무를 마칠 수 있어 왔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구수정은 자신이 최초로 밝혔다며 한겨레21 기고를 통해 공론화한 고자이 마을 학살 사건#의 경우 한국군이 당시 갖고 있지 않았던 B-52 폭격기[2]독약으로 양민 학살을 했다거나, 전부 미군으로부터 지원받았던 헬기를 타며 총을 난사했다고 자작극인 허위사실을 유포해 놀라게 했다. 특히 한국군이 독약을 지참하고 다니다 양민들에게 하나씩 억지로 먹여 살해했다는 주장 자체도 사실이 아니다.
증거의 하나로 제시된 위령탑은 대부분 거짓이고, 여러 증거 사실도 있다. 회랑에 그려진 '무서운 한국군의 모습'에 나오는 병사의 부대 마크는 맹호부대라고 말하나 그 주장은 허위로 남베트남 공화국레인저 부대다.# 한겨레를 지지하는 성향이 강하고 베트남전 참전에 대하여 비판적인 오마이뉴스의 기사조차도 고자이 학살 관련 주장에 대하여는 허위로 판단하고 있으며 교차검증이나 충분한 취재를 통한 검증을 하지 않고 그대로 기사를 게재한 한겨레를 강도 높게 비판한다.#
그외 린선사 승려들의 1997년 증언을 자세한 검토없이 1999년 한겨례21에 베트남 통신원 자격으로 기고한 사건이 있다. 증인인 푸 승려와 응웬티유엔한의 주장에 의하면 한국군이 승려들을 남녀 구분없이 살해했다는 증언인데...# 해당 사건은 사실 주체가 한국군인지 베트콩인지도 확실하지 않아 1969년 11월 당시 남베트남에서도 주체가 불분명한 것으로 인식이 돼서 남베트남에서 발표를 보류하였다. 당시 남베트남 보도에 따르면 승려가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이 아니고 증언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베트남 전쟁/한국군/논란의 당시 남베트남 언론기사 참고) 오히려 1971년 11월 남베트남 정부가 생포한 베트콩으로부터 린손사 승려들이 한국군과 남베트남군에게 베트콩 활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동료 베트콩과 함께 린손사에 들어가 승려들을 살해하고, 이것을 한국군에게 뒤집어 씌움으로서 한국과 베트남간의 이간을 획책하였음을 자백받고 베트콩 소행으로 발표하면서 최종 종료가 된 사건이었다. 그 후 1972년에도 駐越韓國軍(주월한국군)의 民間(민간)학살누명의 제목으로 이에 대한 기사가 나온 적도 있었지만 그 후 이 사건은 거의 잊혀졌었다.
그러다 1999년에 구수정이 작성한 한겨례21 기사를 통해서 다시 알려졌는데 이 정도 민감한 주제라면 당시 전투상보와 같은 한국군 자료 및 내외신 기사 자료 등 충분한 교차검증이 이루어졌어야 하며, 이것이 어렵다면 1999년 당시 네이버 옛날신문같은 서비스가 없었기 때문에 고충은 이해하지만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당시 국내 언론 기사와 같은 1차 사료를 통해 최소한의 교차검증이라도 해야 하지만 전혀 없었으며 그리고 중립적인 시각은 애초부터 배제되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측의 일방적인 증언만으로 대한민국 국군에 대한 섣부른 유죄추정을 하였다.
나아가 일본의 주간문춘(슈칸분슌)[3]과 인터뷰하여 2014. 10. 16. "조국의 죄를 폭로하여 '일본의 앞잡이'로 매도당한 나"라는 기사가 실리면서,## 상당히 논란이 있었다.

3. 참조



[1] 파월 한국군 사령관이었던 채명신은 특히 구수정이 한국군 출신 포로의 존재를 언급한 건에 대해 생전에 서운한 심정을 드러낸 바 있다. 당시 파월 사령부에서 집계한 사실(부상/전사자만 존재)과 다른 부분을 상세한 검증 흔적없이 '''짧게''' 문제제기하는 선에서 그쳤기 때문.[2]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그 당시는 커녕 현재까지도, 건군 이래 대한민국 공군에선 폭격기 자체를 보유한 적이 없다.[3] 일반적으로는 연예계 가십 기사를 주로 다루는 황색 언론이나, 한국 관련 기사에 있어서는 극우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한국군이 베트남전 당시 현지인을 동원하여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등 수많은 날조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