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기계화보병사단

 





'''수도기계화보병사단'''
'''首都機械化步兵師團'''
'''The Capital Mechanized Infantry Division'''
[image]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
'''창설일'''
1949년 6월 20일(수도경비사령부)
1950년 7월 8일(수도사단)
1973년 3월 21일'''(수도기계화보병사단)'''
'''상징명칭'''
'''맹호부대'''
'''소속'''
[image] 대한민국 육군
'''상급부대'''
[image] 제7기동군단
'''규모'''
사단
'''역할'''
공격 부대, 전시 진격
'''사단장'''
[image] 소장 양태봉(육사 47기)
'''위치'''
경기도 가평군 현리

1. 개요
2. 상세
3. 예하부대
4. 과거부대
5. 출신인물
5.2. 장교/부사관
5.3. 병
6. 기타
6.1. 훈련
6.3. 맹호 기수
6.4. 명칭과 상징
6.5. 과거의 악습
6.7. 사단가
7. 사건사고
7.2. 김희성 일병 자살 사건 (유가족 조의금 횡령사건)
8. 여담

'''보병사단령'''
'''제1조(설치)''' ① 육군에 보병사단(이하 "사단"이라 한다)을 둔다. ② 사단은 관할구역의 작전·훈련 및 군 행정에 관한 사항을 관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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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육군의 기계화보병사단. 한국 전쟁 발발 전에 창설한 부대로 메이커 사단 중 하나이다. 상징명칭은 맹호부대[1], 경례구호는 맹호이며, 2016년 기준으로 사단 공식 구호는 '''강한 부대! 좋은 부대! 위풍당당하고 멋진 부대!'''. 이 구호는 2014년 새로 부임한 사단장이 새로 만든 것이다. 여담으로, 전역한 예비역들은 2013년 공식 구호가 낫다고 새로운 공식 구호를 까는 편. 2013년에 만들어진 공식 구호는 '''조국이 부르면! 맹호는 간다!''' 였으며 이후 2017년이 돼서 다시 해당 구호로 돌아왔다.
약칭은 '수기사'로써 수방사, 정보사 같은 '사령부'의 약칭인 줄 아는 사람들이 꽤 있다. 특히나 수방사와 비슷하기 때문에 여기에 배속받은 신병들은 서울 간다고 좋아하기도 하는데, 아래에도 서술돼 있지만 이름과는 달리 서울에 있는 부대가 아니다. 경기도 동북부 가평, 포천 쪽이라 보면 된다. 차라리 30기계화사단이 서울에 더 가깝다. 실제로 이름만 보고 수도에 있는 줄 알고 좋아했다가 실망했다는 병사들이 많다. 수도군단과 비슷한 케이스. 그래도 둘 다 수도'''권'''경기도에 있으니 틀린 명칭은 아니다.
육군 전투서열 0순위 부대[2]. 타 사단과는 달리 유일하게 숫자가 아닌 부대 자체명칭을 사용하며, 국방 전산 시스템에도 수기사단이 1사단보다 앞서있다.
수도기계화보병사단장은 육군사관학교 출신 동기수 중 가장 엘리트를 선발해 가장 먼저 임명한다. 대부분 사단장을 이임하면 진급하는 코스를 밟는다.[3]

2. 상세


1949년 6월 20일, '''수도경비사령부'''로 창설되었는데, 당시엔 그 명칭처럼 서울 향토방위를 담당하던 경비부대였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발발하고 한강 방어선 전투를 끝으로 서울이 함락되어 수도방위라는 의미가 사라지자 7월 5일 해체 후 (구)수도사단(현: 7사단)으로부터 '수도' 명칭과 1연대를 넘겨받아 7월 8일 1, 8, 18연대 근간의 수도사단으로 재편한 게 현재의 수도사단이다.
이 신생 수도사단 역시 박격포 정도가 중화기였을 정도로 매우 열악한 상태에서 진천 전투를 치르었으나, 김석원 준장의 활약으로 북한군 2사단을 7일간 묶어두었고, 청주 전투에서도 민가에서 빌린 곡괭이와 대검으로 진지공사를 해야할 정도였으나 이 역시 부대 건재를 유지하며 속리산을 거쳐 낙동강 전선까지 후퇴한다. 그 후 제7보병사단을 재창설할 때 8연대가 차출되어 떠났고, 그 빈자리에 독립기갑연대가 예속되었고, 이 상태로 안강-기계 전투를 치른다.
그리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자 통일의 꿈을 안고 원산까지 맹진하였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흥남에서 배를 타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 와중에 18연대가 3사단 26연대와 배를 바꿔타 버렸는데, 철수의 난잡함 속에서 원대복귀를 위해 서로 목적지를 바꿀 수도 없어서 결국 연대를 맞교환 하는 식으로 26연대가 예속되었다. 그 후 38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는 고지전에 투입되기도 했으며, (수도고지-지형능선 전투 등) 이따금 후방의 지리산 공비 토벌에도 투입되었다.
휴전 협정 이후 수도사단은 경기도 포천군 일동면과 이동면에 산재해 있게 되며 1953년 9월 18일 기갑연대 3대대 11중대장 안도현 대위와 일행 장교가 2개 중대를 이끌고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으로 이동했는데, 이후 이 중대들은 훗날 제27보병사단모체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지역 향토방위 위수부대로 제6군관구사령부(현 수도군단)와 예하 30사단(현 30기보사), 33사단(현 17사단)이 담당하게 되었고, 지금의 수방사는 1961년 용산구 후암동에서 재창설된 수도경비사령부의 후신. 베트남 전쟁 때 파병된 부대 중 하나이며 현재도 최정예 부대로 수도권 방위 및 반격 작전의 중추를 맡고 있다.
베트남전에서 철수한 사단은 사실상 해체된 상태였으나(베트남전 파병시 여기저기서 파견을 받아 병력이 운용되었기에) 미7사단 철수 시 장비를 인수받아 최초의 기계화사단이었던 32사단이 수도사단으로 단대호를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32사단은 다시 창설되었다.)[4] 현재는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제7군단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있으며, 현재 경기도 일대에 주둔하고 있다. 1980년대 이전에는 제5군단의 예하부대로 편성되어 있던 적이 있으며 지금처럼 제7기동군단로 편성된 것은 1983년 이후이다. 그 당시 막 기계화보병사단이 된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 함께 제7군단 예하로 예속변경이 되었다.
2021년 들어 명칭면에서 유일한 기계화보병사단이 되었다.(나머지 기보사는 기동사단으로 변경.)
월남전 당시 작전 기록은 수도기계화보병사단/월남전 참전기록 참조.
2018년까지 1기계화보병여단, 26기계화보병여단, 포병여단, 1기갑기계화보병여단 등 4개 여단을 예하에 두고 있었으나, 2019년 1기갑기계화보병여단을 8사단의 16기계화보병여단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개편되었다.
서울과의 접점이라고는 육사 내부에 있는 강재구 소령 동상뿐(...) 실제 이 동상은 육사에서도 꽤나 유명하며 수기사의 한 여단에서 가끔 간부 한 명을 보내 동상상태를 살피고 있다.

3. 예하부대




3.1. 사단 직할대


  • 본부근무대
  • 정보대대[5]
  • 공병대대[6]
  • 방공대대[7]
  • 기갑수색대대[8]
  • 화생방대대[9]
  • 군수지원대대[10]
  • 정보통신대대
  • 군사경찰대[11]
  • 의무근무대[12]
  • 보충중대 [13]

3.2. 제1기계화보병여단 비호


  • 여단 본부 및 본부 중대, 직할 중대
  • 군수지원대대
  • 제17전차대대 돌파
  • 제102기계화보병대대 돌진
  • 제133기계화보병대대 재구


3.3. 제16기계화보병여단 번개


  • 여단 본부 및 본부 중대, 직할 중대
  • 군수지원대대 천둥
  • 제18전차대대 왕호
  • 제81전차대대 전승
  • 제136기계화보병대대


3.4. 제26기계화보병여단 혜산진


  • 여단 본부 및 본부 중대, 직할 중대
  • 군수지원대대
  • 제8전차대대 기드온
  • 제35전차대대 승호
  • 제103기계화보병대대 노도


3.5. 포병여단 상승


  • 여단 본부 및 본부 포대, 직할대(승포대대)
  • 제10포병대대 백호[14]
  • 제60포병대대 충무
  • 제61포병대대 북진
  • 제808포병대대 기적[15]


4. 과거부대



4.1.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 번개




5. 출신인물



5.1. 사단장


'''볼드체'''는 대장 진급이 된 사단장.
'''역대 수도사단장'''
'''역대'''
'''이름'''
'''계급'''
'''임관'''
'''비고'''
'''기타'''
초대
권준
소장[16]

사단장

00대
송요찬
예) 중장
군영 1기
육군참모총장
국방부장관, 외무부장관
00대
채명신
예) 중장
육사 5기
제2작전사령관

00대
윤필용
예) 중장
육사 8기
수도방위사령관

'''00대'''
'''조남풍'''
'''예) 대장'''
육사 18기
제1야전군사령관

00대
이유수
예) 중장
육사 20기
제7기동군단장
[17] [18]
'''45대'''
'''엄기학'''
'''예) 대장'''
육사 37기
제3야전군사령관

46대
권오한
예) 소장
육사 39기
사단장

47대
이석구
예) 중장
육사 41기
국방대학교 총장, 국군기무사령관

48대
김선호
예) 중장
육사 43기
수도방위사령관

49대
유기종
소장
육사 45기
육군기계화학교

50대
양태봉
소장
육사 47기
사단장


5.2. 장교/부사관


말이 필요 없는 참군인. 자신의 생명보다도 부하 병사들의 생명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그의 살신성인의 정신은 수기사를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잡고 있다.
월남전에서 수류탄만으로 적 벙커 5개를 부수는 활약으로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모범소대장 상인 동춘상도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이 부대의 상징격인 인물로 소위 임관 직후부터 중장진급 후 제7기동군단장으로 복무하기 직전까지 군복무의 모든 기간을 이 부대에서만 복무했다. 그러나 제7기동군단장이 된 직후 헬기사고로 순직했다.
대한민국 합동참모의장. 소위 시절 제203대대에서 소대장을 역임했다.

5.3. 병


조리병으로 복무.
공병대대 복무.
군대 관련 컨텐츠 시 입고 나오는 예비군복의 부대마크로 알 수 있다.
대형차량 운전병으로 복무 중.
포병여단에서 155mm 자주포병으로 복무.
사단 불교 군종병이다.

6. 기타



6.1. 훈련


일반 소속부대 역시 훈련의 강도가 높고 빈도도 매우 잦은 편이어서 맹호부대에 입대한다면 시간이 정말 빨리 갈 것이다. 한 전역자 왈, 장갑차 좀 탔다 내렸다 하다보면 전역한다고... 정말 훈련빈도는 '''지나칠 정도로''' 높아서 한 달에 3회, 심하면 4회 하는 경우도 있다 ~~준비태세만 하루에 '''4번'''. 훈련-복귀 훈련-복귀를 반복하다보면 당신도 어느새 전역.[19]
한때는 국군에서 제일 먼저 최신장비를 배치받았지만 지금은 제20기계화보병사단에 밀리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덕에 수기사에서는 20사단을 테스트베드 부대이기 때문에 장비들이 먼저 들어오는거지 수기사랑 붙으면 양기사는 상대도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정확히는 K1전차는 수기사가 그 이후 개량형인 K1A1과 K21장갑차는 20사단이 먼저 지급을 받았다. 이제는 K2흑표전차도 20사단에 들어온다고 하는 판... 하지만 K21은 수기사에도 배치가 되고 있고 어느새 전량 배치가 완료되었다. 그리고 K2흑표전차의 양산이 늦어져 새로 개발한 K1A2같은 경우에는 2014년 수기사 예하 전차대대들에 배치되어 있으며 2015년까지 점진적으로 확장할 예정이다. 더불어 최신장비 들어온다고 무조건 좋은 게 아닌 것이 이전에 쓰던 주차호를 전부 없애고 새로 만들어야하고 그에 따른 교리 및 교범 사용법 등이 바뀌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다시 교육훈련을 실시해야하므로 그만큼 '''간부나 병사나 죽어나는'''상황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런걸 종합적으로 따져볼 때 실상은 붙으면 그게 그거다. 20사단이 화력 최강부대라고는 하지만 '''최신 장비가 언제나 1순위로 배급되는''' 같은 7군단인 이상 수기사와는 큰 차이가 없다.
해병대의 구호인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의 원조가 "한번 맹호는 영원한 맹호"라는 말이 있는데 한국해병대의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은 미해병대의 'Once Marine, Always Marine'에서 빌려온 구호이므로, 당연히 틀린 말이다. 이는 월남전에서 접촉한 맹호부대원들이 임의로 자신들의 구호로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일반 기보 및 전차 대대기준으로 큰 이벤트라면 전투사격훈련, 공중지상 합동훈련, 여단급 전술훈련, 군단급 FTX, 호국훈련(호국훈련을 단골로 뛰는 부대. 격년으로 뛴다고 한다.[20] 뛴다면 상대는 '''바로 양기사가''' 되며 실제로 2012년 20사단, 수기사의 호국훈련은 역대 최악의 박터지는 호국 훈련이었다고 혹자들은 말한다. 수기사 포병대대가 20사단 포병대대와 기갑여단을 몰살시키기도 하고 20사단 포병대대가 수기사 포병여단을 쓸어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양기사를 잡으려고 기동하라는 전차는 기동을 안하고 산을 뛰어 다니면서 잡을 정도였으니... 운 좋으면 호국훈련을 안 뛸 수도 있다. 2011년 KCTC 훈련 당시 여단본부 인원은 그해 호국훈련 파견을 나갔다가, 지원이 끝난 뒤 바로 KCTC 훈련에 투입되었다고 한다.[21]
그리고 '''전투장비 지휘검열'''이 있다. 소대원 전원이 탑승 장비에 달려들어 의자 뜯고 포 뜯고 갈고 닦아 먼지하나 없도록 만드는 그 상큼한 맛이 일품. 또한 전투사격 훈련의 경우 대규모로 진행되면 정말로 스펙타클하다. 포가 펑펑 터지고 지원온 코브라가 발칸을 갈겨대는데 정말 TV에 나오는 기갑부대 훈련 같다. 문제는 먼지와 진흙탕 속에서 굴러다니는 그 기갑부대가 '''바로 당신'''이다. 공지합동 훈련은 주로 포천 일동에 있는 훈련장에서 진행하는데, 계획표대로 훈련이 진행되지 않아서 전차포와 공격헬기 사격이 다 끝나서 다들 물러났음에도 뒤늦게 전폭기가 날아와서 폭탄을 떨구는 좀 안습한 장면을 목격하는 경우도 있다.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지휘소에서 훈련장에 있는 병력들을 무선으로 지휘하기도 하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병력들을 보면서 육두문자를 날려대는 대대장이나 중대장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텐트치고 지내는 호국훈련과는 달리 다행히도 승진훈련장에는 '''제대로 된 막사'''가 존재해서 여건은 나은 편이다.[22]
하지만 사실상 공지합동훈련이나 군단급 FTX같은 대형 훈련은 모든 대대가 참여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저런 거 구경도 못하고 전역할 수 있다. 일반적인 훈련으로는 소,중,대대 및 여단급 전술훈련, 유격훈련, 혹한기훈련 정도가 있다. 전설적인 진급으로 유명한 모 장군이 사단장으로 역임했던 당시에 군단급 FTX에 7군단 소속으로 참가했던 일도 회자된다. 군단급 FTX는 군단들끼리 편제를 비슷하게 맟춘 뒤 공격/방어를 연습해보는 실기동훈련으로, 각 군단 지휘소도 야전에 실제로 설치되며 지휘관을 비롯한 사령부도 야전에서 주야지속해서 작전을 지휘한다. 공격작전 당시 수기사가 주공을 맡았는데, 군단장이 취침하러 간 사이에 흥이 올랐던 수기사단장이 돌파를 시도해서 전선에 돌출부가 형성되었다. 사단장을 말릴 짬밥이 없던 군단사령부는 숨만 죽이고 있었는데 새벽에 군단장이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라이브로 쌍욕을 시전했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외에도 2011년 당시 막 부임하지 얼마되지 않은 권오한 사단장은 훈련장에서 포탄낙하 상황에서 병사들이 뛰어다니는 게 마음에 안 들자 각개전투 교범에서나 볼 법한 각종 포복을 사용하며 직접 시범을 보여줬는데, 이 모습을 본 각 참모들과 여단장, 대대장 및 많은 간부들이 시범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 참모가 갑자기 쓰러지자 사단장이 "이게 바로 실제 같은 응급처치 상황이지" 라면서 참모를 들쳐업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고 한다. 대대 훈련 중 화생방 상황 재현한다고 대대장이 직접 CS캡슐 사방에 터트리는 건 화제 축에도 못낄 정도. 오죽하면 5군단 예하배치되면 똥 밟았다고 하고 수기사로 오면 똥통에 빠졌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 시기에 신병 포병 교육대대에서 교육을 받던 몇몇 신병들의 오줌색은 붉은색이었다고 하는 전설도 내려온다.[23]

6.2.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의 관계


제20기계화보병사단과는 경쟁심리가 강한 편. 합동훈련이라도 하는 날엔 기를 쓰고 이기려 들며, 정작 그쪽 군인들이 싫어하는 '"양기사'"라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사용한다.[24] 수기사 병사들이 20사를 양기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가 수기사니까 그쪽도 양기사가 낫지 않나 라는 생각인데, 자기들 기준에 맞춰서 남을 부르는데 당사자가 싫어하는 게 당연하다. 물론 이런 성향은 20사단도 마찬가지로 수기사에서 싫어하는 사단이라느니 사단이라느니 X사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어쩌다 파견 때문에 두 부대원이 모이기라도 하면 서로를 '살쾡이', '자일리톨'이라고 까기도 한다. 2000년대 중반까지는 서로 간의 라이벌의식이 심하게 존재하여 파견나간 수기사 병사가 훈련 중 버린 입맛을 돋우기 위해 PX에 가면 수기사 소속이라면 물건을 안 파는 경우도 있었다.
라이벌이 된 이유는 여러 가지라고 알고 있지만 주로 많이 나돌고 있는 설은 12.12사태. 당시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은 육군 유일의 기계화보병사단이었는데 12.12사태 당시 수기사는 26사단과 함께 충정부대(수도권의 시위,쿠테타 진압부대)로 유사시 수경사령관이 배속받을 수 있었기에 당시 수경사령관이 었던 장태완이 가장 먼저 찾았던 부대였다. 반면 쿠데타 주역인 박준병이 사단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20사단은 자연스레 반란에 가담했다. 수기사는 작전처에서 포탄 적재계획/수송계획 등 출동계획까지 세웠으나 최종적으로 국방부장관 노재현의 출동명령이 떨어지지 않아 출동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단 보안부대장 최우천 중령의 설득으로 출동계획이 폐기된 후 사단장 손길남은 취침에 들었다. 출동했어도 육사출신 수기사 포병단장 김도수 대령이 이미 포차로 경춘국도 다리목에 바리케이드를 새워 뒀기에 같은 사단 병력들끼리 싸울 판이었다.[25]
보면 알겠지만 이때 수기사에 쿠데타에 동조한 하나회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수기사가 보여준 대응도 차량 동원조차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출동했다가 하나회의 회유가 아닌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의 명령으로 복귀한 9공수여단과 비교하면 미적지근하기 그지 없었지만 어쨌든 충정부대였기에 군사정권이 무너진 후 나름의 명예가 되었다.
사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단순히 보병사단이었던 20사단이 1981년에 차량화보병사단으로 승격하고, 다시 1983년 기계화보병사단으로 개편한 다음 수기사를 5군단에서 빼내 20사단과 묶어 제7기동군단이란 공세 지향적 부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같은 기계화사단에, 같은 군단에 묶여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최신장비들을 지급받으니 라이벌 의식이 안생길 수가 없었다.
수기사는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부대, 20사단은 현존 최강화력 부대[26]라는 걸 내세운다. 2006년 그 이전 20사단 전역자의 증언을 따르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서로 간의 라이벌의식은 더 심했다. 물론 지금이야 시대가 바뀌었으니 어느 정도 희석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요 장비를 운용하는 장갑차 조종수와 전차 조종수들이 육군 기계화학교에서 후반기 교육을 받고 오는데 항상 수기사 Vs 양기사 라고 교육을 많이 하는 바람에 상관없는 타 부대 기갑조종수[27]들까지도 수기사 VS 양기사를 알고 있어서 라이벌 매치는 계속된다.
원래 전통적인 라이벌 관계는 6,25전쟁 당시 전공으로 유명한 제3보병사단이었으나[28] 지금은 그보다는 20사단과의 라이벌 매치가 더욱 더 부각 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간부들이나 이런 거에 진지하게 반응하지, 예나 지금이나 병사들은 크게 관심이 없다. 그저 뺑이치기 바쁠 뿐. 사실상 주변에서 계속 얘기하니 괜히 그렇게 된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05~07년 수기사 1기갑기보여단 출신 경험으로 말하자면 양기사 라이벌이니 뭐니 그딴 건 복무기간 내내 없었다.(다만 같은 사단이라도 여단 대대마다 성향이 다를 수는 있긴 하다)
결국 국방개혁에 의해 20사단이 2019년 해체되어 제11기계화보병사단으로 통합되기로 결정되면서 이 라이벌 관계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되었다.

6.3. 맹호 기수


(1973.3.23~2016.09.07) (맹호1기 ~ 762기)
수도사단이 베트남 전쟁 종료 후 기계화 부대로 개편되면서 사단 신병교육대(수기사 신병교육대(맹호신교)) 출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1기에서 762기까지 교육이 이루어 졌다. 수도사단이 기계화부대로 바꾸고 난 뒤 신병교육을 받은 기수를 1기로 친다고 한다. 1973.3.23이 1기 기수일이다. 그전에 복무한 맹호부대원들은 군번으로 하고 베트남 파병시절 군 복무를 한 전역자들은 월남파병 군번이라고 한다.
가끔 운전병들 중에서 수기사 신교대에서 훈련 받고 3야수교 교육을 받은 뒤에 수기사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는 흔치 않은 맹호 운전병이라고 한다. 주로 소총수나 박격포, 기타 사단급 부대에서 자체내에서 심화 주특기 훈련이 가능한 군번이 맹호기수로 수기사에 간다. 가끔 의무병도 선발이 되기는 하는데 의무 행정 쪽의 일을 본다. 그런 사람은 학과가 의무관련쪽 이기에 의무병 특기를 받을 수 있다. 다른 부대를 자대로 배치 받은 사람이 맹호기수 운운해봤자 그런거 없다.
맹호부대 전역자 모임인 맹호전우회에서는 맹호기수도 쓰기는 하지만 주로 군번으로 구분을 한다고 한다. 만약에 X여단 82년도 군번이면 X여단82 이런식으로...
최근에는 소총수에서도 다른 사단에서 훈련을 받고 온 병사들도 있어서[29] 맹호기수는 점차 의미가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부사관들 중에서 병장 까지 군 생활 마치고 수기사에서 부사관 하는 고참 부사관들 중에는 은근히 맹호기수를 따지는 경향이 남아있으며, 아직까지 맹호 신교 출신 맹호 기수들 간에 정은 있는 편이다. 단 맹호 기수라고 해서 해병대 기수처럼 빡센 건 아니고 선배 기수면 그냥 예의차 선배님이라고 불러주는 식.
유명인들 중에서는 축구 선수 박지성 선수가 병역 특혜를 받은 뒤 기초 4주 군사훈련을 수기사에서 받았다. 최근에 SG워너비의 가수 이석훈이 맹호 708기로서 훈련을 받았지만 연예 병사로 차출되어 맹호부대와는 인연이 끊어졌다.[30] 또한 같은 연예병사였던 영화 국가대표에 출연한 탤런트 최재환(당시 계급 병장)이 연예병사 폐지 후 수기사로 자대배치가 되어 군복무를 하였으며, 2013년 11월 12일날 수기사에서 현역제대를 하고 이후 MBC 수목 미니시리즈 미스코리아에 출연 하는 등 배우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사단 신병교육대인 맹호 신병교육대가 입대 병력 감축으로 인한 해체를 함으로써 이제 사단 병력은 논산이나 같은 군단 내 다른 사단 신교대에서 오는 인원들로 충원을 한다고 한다. 마지막 기수는 2016.09.07에 수료를 한 762기 군번이다. 사단 자체에서도 역사와 전통이 있는 부대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맹호 기수를 존치 하려고 했으나 102보충대, 306보충대등 전방 보충대들이 해체하고 사단 신병교육대도 해체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덧붙여서 이와는 별개로 맹호화 기수도 존재한다. 특기병들이 주로 받는 기수로, 예를 들면 전차나 장갑차 승무원은 논산 교육 직후 후반기 교육을 받고 수기사 구)신교대로 오는데 자대 가기 전 2주 동안 집체교육을 받고 맹호화 기수를 부여받는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진짜 자대가 나온다.

6.4. 명칭과 상징


일반적인 사단과는 달리 번호로 매기는 형식이 아닌 저런 식의 이름을 채용하는지라 몇 사단인지 궁금해하는 훈련병들도 존재하는데 숫자로 분류할 시에는 대체적으로 '''0사단'''이나 '''10사단'''이라고 부른다.[31] 애초에 다른 사단과 달리 숫자로 명명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라도 말하지 않으면 곤란해지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제3보병사단하고 많이 엮이는데 그 이유로는 원산 최초 입성문제가 있다. 이 이유는 원산 전투 당시 원산에 함께 투입된 제3보병사단과의 전투지경선이 애매하게 설정된 탓에 서로 이를 자주 침범했고, 급기야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과 3사단 26연대장 이치엽 대령이 여왕산 산록에서 옥신각신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 문제는 서로가 원산에 먼저 입성했다고 주장하는 수준으로도 번졌고, 참다못한 당시 1군단장이었던 김백일 장군이 당시 사단장이었던 이종찬 장군과 송요찬 장군을 불러 공동입성으로 합의를 시켰다고 한다.
상징은 울부짖는 호랑이. 맹호 마크의 의미는 외곽의 방패는 국가방위, 포효하는 호랑이는 용맹한 비호부대, 번득이는 눈은 번개부대, 녹색바탕은 희망을 상징하며 혜산진 부대를 나타낸다. 적색 맹호 혓바닥은 수기사 포병여단, 백색둘레는 단결을 의미한다. 군복의 부대 마크는 보안 문제로 한동안 폐지되었다가 1982년 여름에 다시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병사들이 휴가를 나갈 때 마장동 군장품 가게에서 사제를 부착하고는 했다. 그런데 새로 지급된 마크에 비하면 사제는 그야말로 엉성하기 그지없었다. 사실 부대 마크가 새로 디자인되었기 때문으로, 인터넷을 뒤지면 훨씬 볼품없는 옛 마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타 사단과 달리 맹호마크는 워낙 복잡해서 그랬던 것.
현재는 위장용 투컬러 패턴의 마크로 교체되어 저 원색의 부대마크는 일반 전투복에서는 보기 힘들어졌다.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이지만 전차 전면장갑 등에 그려넣었던 부대 마크도 전부 지워진 상태. 공식적으로 원색 마크를 사용할 수 있는 복장은 '''근무복'''이나 '''정복''' 아니면 '''예복'''. 물론 사단 소속 병사는 군악대가 아니라면 평생 입어볼 일 없는 옷들이다. 전역 때 군장점에서 원색마크의 오버로크를 쳐서 나갈 수는 있다만 디지털 전투복에 이 약장을 달면 너무 눈에 띈다는 게 흠.....
한때 저 마크의 호랑이 눈과 눈싸움을 시키는 가혹행위도 있었다. 그 외에도 후임의 군복 맹호마크를 손가락으로 누르면 이등병은 야옹! 상병부터 어흥! 하게 하는 가혹행위나 여단 탱크 비표를 누르면 각 여단 상징을 이야기하게 하는 가혹행위도 있었다. 응용해서 이름 오버로크를 누르면 관등성명을 대기도 했다. 근데 가혹행위가 아니더라도 점호 중 맞은편 관물대에 걸려있는 맹호 마크와 눈싸움을 하라는 식으로 시선처리 방법을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 부대의 '''짬타이거'''에게 이등병은 경례를 때려야하는(....) 사단의 이름에서 유례한 가혹행위도 사단 전반에 걸쳐 있었다.[32]

6.5. 과거의 악습


  • 장비를 다루다 보니 과거에는 악습이 상당했다. 기보대에 배속된 장갑병들은 수가 훨씬 많은 보병과 늘 대립하는 상태라 더욱 그랬다. "장갑차 앞에서 (고참을) 보면 맹호, 뒤에서 마주치면 또 맹호." 이런 식으로 가르쳤다. 또한 장갑병(정원은 조종수+부조종수 34)명에 정비병까지 포함한 이 병력은 모두 기갑 전공 하사관인 정비반장이 통괄하지만 반장 자신도 이리저리 뛰느라 바쁜 까닭에 주로 병사들끼리 통제해야 했고, 그만큼 위계질서는 엄청 강했다. 아침에 중대 주차장에 내려가 각자의 차량을 점검하다가 중대 선임이 '집합'을 걸면 그때부터 주차장은 맹꽁이 밭으로 돌변한다. 각 차량호에서 뛰어온 병사들이 연달아 "맹!" "맹!"을 외쳤기 때문
  • 동 시기의 타 육군부대에 비해 유별날 정도로 굉장히 구타가혹행위가 심해서 한때 ' 폭력의 파라다이스 ' 라는 불미스런 별명이 붙었던 적도 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따귀나 아구창 한 대 날리는 수준이 아니라 부랄이 터지고 입안이 찢어져서 봉합수술을 할 정도의 잔혹한 구타가 2001년까지도 그치지 않았다. 웃기게도 전입한 지 100일이 안 된 신병은 손대지 않는다는 룰이 있긴 했는데 아무도 안 지켰다. 간부들도 암암리에 구타가혹행위를 방조[33]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한때 전군 통틀어 사고율 1위를 찍은 적도 있다. 실제로 2천 년대 초반만 해도 자대도 아닌 자체 신병교육대 내에서 조교들이 훈련병을 맨손으로 구타하고 조인트를 까는 일들이 실제로 있었다. 이게 문제가 되는 것이, 육군훈련소나 다른 전방 신교대에서는 폭력과 구타가 거의 사라진 시점이었는데 맹호부대에만 폭력이 남아있었다는 점이다.
  • 동 시기에 다른 부대는 가혹행위가 사라져가고 있는데도 맹호부대 만큼은 왜 그렇게 상상을 초월하는 잔혹한 폭력[34]이 성행했는지 원인을 찾아보면, 1차적인 원인은 맹호부대 일선 간부들에게 있다. 선임병에게 암암리에 폭력을 방조하면서 병사를 쉽게 통제하려고 들었기 때문에 폭력이 사라질 수가 없었던 것.
    • 상급부대에서 아무리 가혹행위 퇴출 정신교육, 강의를 해봤자 간부들이 선임병들을 데리고 나가서 술 먹이면서 " 니들 요즘 애들 관리 안 하냐, 눈치껏 못하냐 " 라고 은근슬쩍 압박을 주는 식이었다. 심지어 99년까지만 해도 상처까지 보여주면서 폭행 당한 사실을 행보관 같은 간부에게 고발하면 상부에 보고조차 안 하고 오히려 폭행을 가한 선임병에게 고발이 들어왔고 저 놈은 맞으면 긁는 놈 같으니 잘 감시하라고 알려줄 정도로 막장이었다. 그런데 01년부터는 사고사례 발생율이 전군 통틀어서도 너무 높다며 사단에서 개거품을 물며 압박을 가하자 간부들이 고발을 씹는 짓만큼은 안 하게 됐다.
    • 98년 ~ 2000년 과도기에는 간부들이 통제를 위해 병사들의 가혹행위를 방조하는 수준을 넘어서 자기들끼리 BOQ 에서 엄청나게 폭행을 해댔다. 오죽했으면 이 시기에 18전차대대에서 간부 간의 폭행으로 2명의 부사관(당시에는 하사관)이 불명예 전역을 했다. 더군다나 오후 일과집합 시간에 사열대 앞에서 초임 장교와 병장이 주먹질까지 했으니. 2000년에는 60포병대대와 61포병대대에서 1달 간격으로 구타 사망사고가 발생했는데, 하나는 선임이 후임을 때려죽이고 다른 하나는 후임이 선임을 때려죽였다. 참 명예와 전통에 빛난다는 부대에서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이 시기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병들과 부사관들이 학력도 높아지고 생각도 바뀌기 시작하면서 흔히 말하는 본전 생각 하지 말고 이런 개같은 상황 우리 대에서 끝내자고 노력하는 간부들과 선임병들도 함께 존재했다. 여러모로 혼돈의 카오스 시대.

  • 기갑수색대대[35]. 90년대 후반 입대자 기준으로 보면 99년도에는 정말 무시무시 했었다. 이른바 일병 선임이 이병 일병을 관리하고 선임 상병이 그 이하를 관리하고 상병 말호봉되면 손 뗀 상병이라 해서 왕고허락하에 물주전자 가득 마시는 행사? 를 하고 모든 후임 관리 및 청소에서 말 그대로 손을 뗀다. 병장들은 다놀고. 구타와 암기강요는 일상이었고 밤에 넌다고해서 당직병장의 널어 한마디에 선임상병 밑으로 깍지끼고 구내무반 나무관물대 꼭대기에 발을 올려야했다. 심지어는 선임하사들이 대가리박아 시키던 시절. 그러나 2000년도 들어서 대대적인 소원수리와 개혁으로 병사들 간에 일병선임이니 선임상병이니 하는 게 싹 사라지고 병장들도 강제로 내무실 담당구역을 배정받고 청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도 새로온 신임하사를 병장들이 줘패거나 그럴 수는 없었다. 물론 경례 안 하고 개무시하거나 하긴 했지만(물론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새로온 하사를 병장들이 때렸던 건 90년대 초반이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그 이후에는 부대에 부사관들도 많고 파워가 워낙 셌던지라 말그대로 중사만 되어도 병사들은 꾸벅 엎드려야 했다.
  • '폭력의 파라다이스' 라고 불리던 시절에 수기사에서 군복무를 했던 사람들의 쓰라린 경험담을 군부심으로 치부하기도 하나 결코 당사자들은 자랑하거나, 혹은 자랑스러워하는 마음으로 말하는 게 아니다. 그냥 끌려가도 억울한 군생활인데 그걸 또 맞아가면서 했다는 억울한 마음에서 토로하는 것뿐이다. 오죽하면 똑같은 시기에 다른 부대에서 군생활한 친구들한테 그 당시 난 그렇게 맞으면서 짬밥 먹었다고 토로해봤자 그때 그렇게 두들겨 패는 데가 어딨냐라는 식으로 잘 안 믿어주거나 군부심 취급당한다.
  • 다만 2003년경부터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 무렵부터 인권위의 감시활동이 활발해지고 군 내부에 각종 사건들이 터지면서 군 인권문제가 크게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을 방조하는 것으로 병사들을 통제하던 간부들이 더이상 자신들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 분위기가 굳어지자 희망전역을 시작하면서 맹호부대에서 사라진 원인도 있다. 그렇지만 완전히 뿌리는 뽑지 못했고 2010-2011년까지도 몇몇부대에도 병영 내 구타가 잔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영문화 개선의 노력으로 많이 사라졌으며 결정적으로 11~12년경에 재임했던 사단장의 역할이 컸다. 당시 구타를 뿌리뽑겠다며 일종의 시범케이스로 폭행을 했던 선임병을 바로 구속시켜 육군교도소[37] 로 보냈기 때문이다.
    • 참고로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군 내부의 폭행은 쌍방과실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다. 폭행당해서 마음의 편지 작성했더니 폭행 한 사람과 당한 사람 모두 사이좋게(?) 영창을 갔다는 얘기가 항상 회자되기도 했다. 폭행자만을 일방적으로 처벌한 저 조치에 대해 당시 복무했던 수기사 장병들이 굉장히 당황해 했다는 후문이다. 일부는 사단장이 너무 오버를 떤다면서 부정적인 시각도 있었다. 분명 그 후임병도 잘못한게 있었는데 선임병에게만 너무 가혹한 처벌을 하는게 아니냐는 의견이었다. 폭행했던 선임병은 결국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는 소문이 돌았다. 겁주기 용이 아닌 진짜로 정식 기소후 처벌은 한 것으로 보인다. [36].
  • 물론 그 이후로는 무조건 교도소에 보내지는 않고 있으며 사건 경중을 따지긴 하지만 구타에 가담한자는 당시 최소 15일 영창[38], 타 부대 전출 처분을 내리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노력의 결과 ' 폭력의 파라다이스 ' 라는 별명은 잊혀진 별명이 되었다. 제발 이대로 잊혀지길..... 2013년경부터는 아예 선임병들한테도 후임이 잘못하는 게 있다면 마음의 편지나 면담 등으로 해결하라는 분위기이다.[39] 이제는 사적제제보단 정식적인 징계절차를 더 선호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는 16년 기준으로 현재는 병사 간의 경례 자체가 금지 되고[40] 급기야는 "선후임 예의를 전혀 안 차린다." 는 말까지 나올지경이다.

6.6. 맹호회관


'''맹호회관'''
'''猛虎會館'''
'''Ferocious Tiger Hall'''

'''위치'''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리 413-1

6.7. 사단가




수기사 사단가
1절
조국의 운명을 두 어깨에 짊어지고
백전백승에 강철 같은 신념으로
안강에서 함흥에서 길주 청진 혜산진까지
피흘려 싸워온 빛나는 수기사단
[후렴]

비호같은 호 부대[41] 번개의 기갑부대[42]
삼팔선을 돌파한 이름 높은 혜산진 부대[43]
북진의 최선봉 상승포병부대[44]
조국통일 위하여 싸우는 맹호부대
2절
내 겨례 위하여 그 무엇을 아낄소냐
험악한 설악산 가리봉 향로봉에서
화랑의 기백으로 원수들을 무찔러치고
서울을 지키는 철옹성 수기사단
[후렴]

3절
자유의 부름받아 이백만 리 월남땅에
힘차게 진군한 불퇴전의 맹호용사
두코에서 안케에서 정글 속에 실화심고
온세계 용맹 떨친 무적의 수기사단
[후렴]

4절
천지를 진동하는 철갑의 위력으로
맹호는 달린다 새 역사의 선봉에서
민족웅비 염원다져 백두산 압록강까지
조국을 수호하는 천하제일 수기사단
[후렴]

맹호는 간다 [45]
1절
자유통일 위해서 조국을 지키시다
조국의 이름으로 님들은 뽑혔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가시는 곳 월남 땅 하늘은 멀더라도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한결같은 겨레 마음 님의 뒤를 따르리라
2절
자유통일 위해서 길러온 힘이기에
조국의 이름으로 어딘들 못 가리까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남북으로 갈린 땅 월남의 하늘아래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화랑도의 높은 기상 우리들이 보여주자
3절
보내는 가슴에도 떠나는 가슴에도
대한의 한 마음이 뭉치고 뭉쳤으니
그 이름 맹호부대 맹호부대 용사들아
태극깃발 가는 곳 적이야 다를소냐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무찌르고 싸워 이겨 그 이름을 떨치리라
현재 쓰이는 사단가는 처음에는 2절까지였으나, 1983(실제로는 2000년 넘어서)년쯤 사병들에게 3~4절 노랫말을 공모하여 추가된 것이다. 후렴도 달라졌는데, 당시에는 상승포병부대(포병여단)가 들어 있지 않고 대신 "청사에 찬란히 전공을 세우며"로 되어 있었다.[46] 3-3-3-3조라서 바뀐 가사에 맞추면 다소 부자연스럽다. 또한 곡(멜로디)도 '혜산진부대' 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가 그 뒤로는 잔잔해지는데 다른 부대가 더 들어갔기 때문에 뭔가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후렴 마지막은 "통일독립 위하여 싸우는 수도사단"이었다.

7. 사건사고



7.1. 염순덕 상사 피살사건


2001년 12월 군의 방산비리를 알고 있던 염순덕 상사가 피살당하고, 군측에서 그것을 조직적으로 은폐했다는 의혹이 팽배한 사건이다. 항목 참조.

7.2. 김희성 일병 자살 사건 (유가족 조의금 횡령사건)


육군수도기계화보병사단 26여단 본부중대 소속 김희성 일병(당시 20살)은 2011년 12월4일 부대 화장실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김 일병은 군 입대 직후 복무 부적응(자살 징후) 등으로 판정받아 관심사병으로 분류돼 특별 관리 받아야 했지만 선임인 정아무개 일병은 김 일병에게 잠을 재우지 않고 욕설과 인격 모독을 가했다. 부대 간부들은 이 사실을 알고도 김 일병과 정 일병의 내무반만 격리했다. 전체 병사가 60여명인 작은 부대에서 김 일병은 이후에도 정 일병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다. 김 일병은 우울증 치료를 받는 가운데 자살했다. 군 수사기관은 우울증 악화로 자살했다고만 결론내렸고, 김 일병의 부모도 이를 받아들여 부검도 하지 않은 채 장례를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김 일병의 3개월 선임인 김 씨는 전역 후, 2012년 11월 오늘의유머 한 게시판에 '나는 살인을 방관했고, 나 또한 살인자다'란 게시글을 올리면서 유가족들은 가혹행위, 은폐, 기록 조작, 허위진술 강요 등이 이루어진 사실을 알게되었다. 선임병 김 씨와 유족들이 만나면서 사건조사가 진행되었고, 이 사건을 조사한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달 24일 김 일병을 순직 처리하라고 국방부에 권고하면서 국방부 측에서는 이 권고를 받아들여 2014년 5월 31일, 순직처리되어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여기서 핵심은 군 사망자 유가족 조의금보다 '''사망원인 및 부실수사'''를 밝히는 게 우선인데 역시나 우리의 국뻥부는 언론이 무관심해 지고 피해자가 순직처리 되니깐 관련자 처벌하지도 않고 흐지부지하고 끝냈다.기사
여기서 도응조 여단장[47]의 악랄한 행위가 드러났는데, 자살한 김 일병의 조의금 290만 원을 가로채 군사경찰대 등 부대 간부들에게 회식비로 건넨 사실이 드러나면서 현재 이 부분은 수사 중이다.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도 여단장은 수시기록을 보여달라면서 소송을 제기했으나 패소했다.[48]
2014년 11월 10일,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은 1심 보통군사법원에서 인사행정부사관인 A 상사에 대해 징역 6개월, 집행유예 1년, 도 여단장과 B 주임원사는 각각 무죄가 선고되었다. 군 관계자는 "재판부가 주임원사도 인사행정부사관과의 공범 관계를 입증할 증거가 없는 것으로 (군사법원이) 판단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군 검찰과 가해자 변호인 측은 항소할 뜻을 밝힘에 따라 사건은 2심 고등군사법원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2014년 06월 25일, 김 일병의 선임은 '나는 살인을 방관하였고, 나 또한 살인자다. 그 후의 이야기'[49]를 자신의 블로그에 담았고, 다음카페 맹호전우회에서 김 일병과 같이 근무했다는 또 다른 병사가 뉴스 기사 내용을 허위, 과장 됐다는 식으로 글을 올리기도 해 논란이 되었다. 수사결과에서는 이미 사건 축소/은폐, 조작 정황이 드러났는데도 말이다... 해당 병사의 글 현재 삭제됨

8. 여담


  • 베트남 파병 때문에 한국군 부대 중에서는 해외에서 유명하며, 주로 tiger division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전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 어느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의 맹호부대 (tiger division)가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 사단가와는 별도로 '맹호는 간다'라는 제목의 테마송(...)을 갖고 있는데, 수기사가 베트남 전쟁에 파병됨에 따라 이 노래가 언론에 많이 노출된 덕분에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이 노래를 가요처럼 부르고 다녔다고 회고하신다. 놀랍게도 이 노래는 가수 마야가 부른 버전도 있으며 일부 간부들은 이걸 휴대폰 벨 소리로 지정해두기도. 베트남 파병 당시에는 (적어도 전방 지역의) 초등학교에서 정식으로 이러한 파병 테마송을 가르쳤다. 맹호부대뿐 아니라 백마부대, 청룡부대까지. 그중 단연(?) 인기곡은 맹호부대 테마.
  • 경례구호를 보면 알 수 있듯 센 발음을 하기가 힘들다. 게다가 상징이 호랑이다보니 이른바 호랑이 울음소리라 불리는 으르렁거리는 버전도 있는데. 덕에 "망호!"니 "앵호~"니 "매워~"(…),메롱(...), 심지어 "애무~"(…) 같은 애매한 발음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뒤에 악센트를 붙여도 '맹코!' 같은 묘한 발음이 나온다. 이 맹호라는 경례구호의 안습함은 국기에 대한 경례 중 삑사리가 발생했을 때 정점을 찍게 되는데, 고요한 연병장에서 홀로 맹!!! 소리를 내면 그 특유의 어감 때문에 충!!!이나 단!!! 등등보다도 훨씬 더 멍청해 보인다(...) 그나마 이 경례구호를 멋지게 소화할 수 있는 방법은 목소리를 낮고 허스키하게 깔고 두 글자의 악센트를 거의 동일하게 맞춰서 맹허-! 하는 것이다(...).

  • 2011년 11월에는 기계화보병사단 최초로 KCTC 훈련을 뛰었다(1여단 예하의 133기보대대와 여단본부 인원이 참여했으며 수기사 직할대 인원들이 훈련에 참가했다. 그 뒤 133기보대대 신막사에 KCTC 전승기념비가 세워졌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기계화부대 KCTC 최초 참여기념비이다).
  • 상술했듯이 ASP 경계근무 파견을 나가는 부대로, 각 여단 예하 기계화보병대대 중 1개 중대를 약 2-3개월 간 제2군수지원사령부 예하 탄약대대 경비중대로 파견한다. 제2군수지원사령부는 제7군단의 평, 전시 물자 보급 부대이기 때문에 경계근무를 지원간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 경비중대는 2개로 편성하고 있으며, 2개 여단에서 각각 1개 중대를 파견하는 방식이다. 전차대대는 편제가 적은 관계로 경계근무 파견을 가지 않으며 각 여단의 직할대는 여단본부의 방호와 평시 여단의 참모업무 등[50]으로 파견가지 않으며. 대대에 있는 본부중대도 마찬가지다. 남은 1개 여단은 기계화보병대대 예하 전투중대 중 1개 소대를 사단 인접 항공지원부대인 항공작전사령부 예하 항공대대로 파견보내 비행장 초소 경계근무 지원 및 유사시 기동타격대 임무를 약 2-3주간 수행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기계화보병사단이기 때문에 장갑차도 함께 파견간다. 그래서 일반 차량 속도로는 얼마 안 걸리는 거리지만 장갑차로 이동하는 속도로는 시간이 2-3배 이상 걸린다.
  • 자주국방 네트워크 신인균 대표는 2013년 7월 종편 채널A의 시사프로 쾌도난마에 출연하여 정전 60주년 기념특집으로 한국전에서 가장 잘 싸운 5대 국군부대를 꼽았는데, 맹호부대는 5위로 평가받았다.[51]
  • 과거에는 말 그대로 기갑의 역할에 충실했는데 인근66사단이 동원사단으로 전환되면서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자 가평군의 위수업무를 66사단으로부터 받아왔다. 그러나 수기사역시 인원이 많은게 아닌데다가 원래있던 훈련도 딱히 줄어들지 않아서[52] 부담이 더욱 커진 상황이다. 한강 이북 전방이고 이론상 완편부대이긴 하지만 최전방까진 아니라[53] 인력충원이 느린 편이다. 실제로도 예하부대까지 포함해 완편되어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여기에 예비군편재까지 있으니 부족현상이 더 심화되는 상황이다.
  • 보수대란, 보급수송대대를 뜻하는 말로써. 지금은 정비대대랑 통합 돼서, 군수지원대대가 되었다.
  • 외박 시 출타가능구역이 과거에는 현리일대에 부대들을 기준으로 봉수교차로 - 서파교차로 - 청평검문소 - 세구지검문소까지로 구역 내 번화가는 현리터미널 일대가 전부였기 때문에 사실 상 현리가 출타가능구역으로 통했다. 다만 현리 이북에 있던 부대들은 일동까지가 출타범위었으며 현리일대의 숙소난으로 인해 비공식적으론 청평까지 출타를 허용하기도했다.[54] 그러던 것이 2013년경 부터 2시간 이내 복귀가 가능한 지역으로 출타범위가 많이 넓어졌다. 그렇다고 서울까지 막 갈 수 있는 건 아니며 차가 막혀도 2시간 이내 복귀가 가능해야 된다는 조건이 있다. 현리에 주둔지가 있는 부대들을 기준으로 대략 남양주 평내 일대까지 갈 수 있다. 서울까지 안 돼서 아쉬워 하긴 하지만 경춘국도[55] 와 현리가는 37번 국도[56] 의 정체 한번 경험해보면 이와 같은 조치에 대체로 수긍하는 편이다. 대부분의 장병들이 현리에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많고 만약 영화관람 등 문화생활을 하려면 마석까지만 가도 영화관도 있고 나름 시가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엄청난 사건으로 인해 현리의 물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해진 것도 한 원인이다.[57] 군 주둔지 치고는 외부와 물가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
  • 현리에서 1330-4번, 1330-44번 광역버스를 이용하면 남양주, 구리, 중랑구, 청량리역을 갈 수 있으며, 포천에서 3006번 광역버스를 이용하면 잠실까지 한번에 갈 수 있다. 이 노선들은 모두 서울시내버스, 지하철 간 환승이 가능하다.
  • 반도(영화)의 악역, 황 중사가 이 부대 마크가 새겨진 군복을 입고 있다.
  • 로블록스 내에도 맹호부대 게임이 있는데 전에 민간인 학살 논란이 있어 대부분의 유저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다.
[1] 공식 영문명칭은 Tiger division[2] 전투서열(Order of battle)은 전투력 서열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대를 숫자별로 목록을 만들어 관리하는 서열이다. 물론 수기사는 사단 단위 전투력에서도 최상위권이긴 하다.[3] 엄기학 대장 전 3야전군사령관 사단장 위임 후 작전 직능 소장 2차보직 최요직인 합참 작전부장 역임, 권오한 소장 사단장 위임 후 합참 작전부장 역임, 이석구 중장 사단장 위임 후 합참 작전기획부장 역임 등[4] 또는 월남에서 철수 후 최초의 기계화 사단이었던 32사단으로부터 각종 장비를 인도받아 73년 3월 20일 기계화보병사단으로 재창설 되었고 32사단은 향토사단으로 되돌아갔다. 공식적으로는 이 설명이 쓰인다.[5] 새롭게 편성된 부대로 기존의 정찰대와 비전투 정보분야, UAV 및 드론이 포함된 정보부대로, 기존의 정찰대는 정보대대 예하의 지상정찰중대로 편성, 개편되었다.[6] 기보사이기 때문에 전투공병들도 기계화가 되있어서 K200 장갑차를 타고 다닌다. 19년도 5월 기준으로, 보수대 있던 자리에 공병대대가 옮겨 갔다.[7] 복합형비호 전력화 중[8] 기계화사단은 전통적인 일반 사단의 수색대대 역할을 정찰대가 한다. 정찰대 역시 수색대대에서 분리되어 만들어진 것이 보통이며, 이 기갑수색대대는 기계화사단 직할대 중에는 유일한 화력 보유 부대이다. 다른 예하 여단의 대대와는 다르게 기갑수색대대만 유일하게 평시도 완편(완전 편성)되어 있다. 즉 1개 전투 중대는 3개 전투소대와 지원반으로 구성되며 1개 소대는 전차 2대의 중수색반과 1대 장갑차인 기보반으로 구성된다. 지원반은 4.2인치 박격포로 무장한 장갑차를 3대 운용한다. 기갑수색대대는 주로 전시에는 사단의 최선두에 위치하게 되어서 평시부터 완편되어있다는 장점을 살려 기보반은 의심 지역 정찰을 맡고, 중수색반은 화력, 위력 수색, 포격 지원 등을 담당한다. 작계에 따라서는 완편되는 각 여단으로 흩어져 활동하게 되기도 한다. 보통 유격조교는 수색대대에서 전담하며, 유격장 관리도 담당한다. 따라서 수색대 인원들은 2월부터 유격장 보수공사에 들어가며, 3월 말에서 4월 초에 사단에서 가장 먼저 유격훈련을 받는다. 수기사 내에서는 정찰대의 호랑이 흉장과 더불어 독수리 흉장을 다는 유일한 부대이기도 하다.[9] 화생방지원대에서 화생방대대로 개편되면서 전군 최초 사단 직할 화생방대대가 되었다.[10] 보급수송대대와 정비대대의 합병으로 군수지원대대가 편성[11] 여긴 기보사다!!! 작은 훈련도 무조건 교통통제가 필수라 훈련 강도는 상대적으로 낮지만 신나게 불려다닌다.[12] 각 여단에 중대급 부대로 파견되어있다.[13] 신병교육대가 2016.10.21 맹호 기수 762기를 끝으로 해체 되면서 보충병들을 교육하는 보충중대만 남게 되었다.[14] 원래 백조였으나 2015년 명칭이 변경되었다. 또한 대한민국 최초로 창설된 6개의 포병부대 중 하나로 창설 당시에는 야전포병단 7대대였다.[15] 여단에서 제일 먼저 K9을 굴리기 시작했다. 2010년 여름에 수령했고, 2011년 가을에는 K10을 수령했다. 장비는 좋은 걸 가장 먼저 받았다.[16] 복무 당시 계급은 대령[17] 기갑출신 첫 3성장군 및 첫 군단장[18] 1991년~1992년[19] 물론 병과 또는 예하 부대마다 다르다. 전역자 증언으로는 정비대대 일반지원중대 궤도반 나왔지만 정비나 훈련지원보다는 궤도반 공장 앞 연병장 풀 뽑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참고로 삼대 땡보로 의무, 정비, 항공이란 말이 돌았다. 2005~7년 사병 기준.[20] 격년이라지만 나가기는 매년 나간다. 한 해는 지원부대로, 한 해는 주공부대로 참가하는데 지원 부대나 주공부대는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변하므로 운 좋으면 군 생활 중 2번 할 수도 있다!...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훈련부대가 아닌이상은 대부분은 간부와 소수의 병사들만 훈련 통제 등의 목적으로 파견 나간다. 그리고 지금은 기계화 부대가 대폭 증편돼서 이 훈련을 아예 경험 못해보고 전역할 수도 있다.[21] 그때 그때 다르겠지만, 정말 운이 없는 경우 야외에서 세 달 가까이 생활하는 경우도 있다. 보급은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해 주지만, '''무엇보다도 씻을 수가 없다.'''[22] 주로 이 훈련은 통합화력훈련이라 하여 포천 일동의 승진훈련장에서 실시한다. 이 훈련의 경우 일반인도 관람할 수 있다.[23] 과도한 구보로 인해 오줌에 피가 섞여 나와 붉게 보인 것이다. 병사들에게 혈뇨가 나온 이후 포병 교육대대에서의 훈련 강도는 다소 약해졌다.[24] 20사단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본래 양기사의 뜻은 양평에 주둔하고있다고해서 '''양'''평'''기'''계화보병'''사'''단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며, 20사를 놀리는 의미가 강한 별명이다.[25] 12.12 쿠데타를 논할때 굉장히 중요한게 전두환, 노태우같은 장성급들만이 아니라 그 뒤를 뒷받침한 대령, 중령들이다. 연대장, 대대장, 참모에 위치한 사람들이 실무담당자로서 일선에서 부대를 이끌고 비하나회 장군들을 회유했다. 이들이 없었으면 쿠데타는 성공할 수 없었다. 이건영 3군 사령관의 출동금지 명령을 무시하고 9사단 29연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시킨 이필섭 대령과 노태우의 출동명령을 이필섭에게 하달한 9사단 참모장 구창회 대령, 26사단장 배정도를 회유해 출동하지 않게 만든 26사단 보안부대장 김현 중령, 끝까지 저항한 장태완 수경사령관을 체포한 수경사 헌병부단장 신윤희 중령 등이 대표적이다. 2017년 알자회가 이슈가 되었을 때 군내에 사조직을 결성했다는 그 자체의 문제와 별개로 제2의 하나회니 쿠데타를 모의한다는 일부 네티즌의 주장은 헛소리에 불과했던 이유가 마지막 기수인 43기가 이미 별을 단지라 행동대장 노릇할 대령, 중령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더하여 알자회엔 전투부대 지휘관이 강원도 1군 지역의 12, 22사단장 뿐으로 수도권 주변 주요부대에 대한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26] 최신장비를 현재 가장 먼저 보급받는다. 수기사에 먼저 안 주냐며 궁시렁 대는 현역병, 부사관, 장교들도 있지만 장비교체 시 작업의 주인공은 바로 '''수기사의 인원들'''이다. 전장비(CMI라고 부르며 보통은 전투 지휘 장비 검열로 부른다) 이상으로 현행장비를 말끔하게 수리하고 광내고 도색하고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채워야하며 이렇게 구형장비를 다른 곳에 보내도 다시 새로운 장비가 오면 생기는 작업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론 행정, 군수, 보급, 지휘는 더 골치를 썩이는 데다 결정적으로 기존의 훈련과 전술을 갈아엎고 새로바뀐 장비에 맞게 새로 교육, 훈련해야 한다. [27] 수기사, 20사단을 제외한 타부대 기보사단 인원들과, 기갑여단 인원들[28] 6.25전쟁 당시 원산 입성때는 1군단 소속이었고, 수도기계화보병사단이 7군단으로 가기전에는 같은 5군단 소속이었다.[29] 논산에서 소총수 특기를 받고 수기사로 올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거의 대부분이 본부중대와 같은 기행부대로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기계화부대다 보니 일반적인 보병들도 '기계화보병' 이라는 보직이 따로 주어졌기 때문이다.[30] 이 후에 국방홍보원 홍보지원대에서 복무 중이었으나 세븐상추안마시술소 출입 사건이 터지면서 연예병사가 폐지돼 제7보병사단으로 배치되었다.[31] 하지만 군대에서 교환병/행정병으로 복무한 사람은 10사단으로 분류하는 건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들 생각이라는 느낌이 들 것이다. 자세한 건 군사보안에 저촉될 수도 있으니 생략하지만, 궁금한 현역병은 '10사단이 실제로 있다'고 가정하고 해당 번호로 전화해봐라. 어디가 받는지. 그럼에도 10사단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같은 10배수 사단인 20사단과 30사단이 모두 기계화보병 사단인 데다가 이들 셋이 모두 서로 간에 라이벌 의식이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32] 물론 2017년 현 시점에서는 오래된 옛날 이야기니, 장난으로라도 절대 따라하지 말자.[33] 눈이 멍들거나 입안이 터진 정도는 그냥 걷다가 넘어졌다고 보고하면 대충 넘어갔다. [34] 예를 하나 들면 후임병을 세워놓고 싸대기나 조인트를 까는 정도가 아니라 주먹으로 패다가 쓰러지면 발로 잘근잘근 짓밟다가, 그래도 분이 안 풀리면 쇳덩어리나 다름 없는, 벽돌 만한 크기의 4FM 배터리를 내무반 바닥에서 고통스러워하며 뒹구는 후임병 가슴에 집어 던지는 놈도 있었다. 21세기를 목전에 둔 99년인데도 맹호부대는 이런 짓을 하고도 영창 한번 안 가고 전역이 가능한 미친 분위기였다.[35] 사실상 이 폭력의 파라다이스에서 기보대와 함께 폭력의 투탑.[36] 집행유예 여부는 알 수 없음. 집행유예 가능성이 높긴하나 어쨋든 전과기록은 남는다. 일정기간이 지나면 전과기록이 경찰 내부 열람용 문서에만 남긴 하지만 인생에 적지 않은 오점을 남긴 건 분명한 사실이다. 당장 영창등의 이유로 다른사람과 군복무기간이 조금만 차이나도 이를 면접등지에서 해명해야 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군대에서 전과기록 가지고 전역했다면......[37] 지금은 국군교도소로 개편되었다. 참고로 구속시킨 게 뭔 대수냐 하겠지만 의무복무자는 어지간해선 군 내부의 자체징계로 끝내는 경우가 절대다수이다. 구속을 시켰다는 의미는 정말로 감옥살이를 시키겠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다. 일단 폭행자체가 군 형벌에서도 처벌규정이 나와 있기도하고 국방부등지에서 명령을 통해 구타를 수시로 금지했기 때문에 명령불복종으로도 처벌이 가능하다. 즉 재판에만 넘기면 처벌할 수 있는 규정이 차고 넘치는 셈....[38] 현재는 영창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다른처벌로 바뀌었을듯...[39] 물론 같은 선임병이라도 분대장이 하는 약간의 훈육은 허용. 병영생활강령에 분대장에 의한 훈육규정이 나와있기도 하고......[40] 물론 일부 사단 예하부대에서는 병 상호 간의 경례를 하게 하는 부대도 있다.[41] 비호부대인 제1기계화보병여단을 뜻한다.[42] 번개부대인 제1기갑기계화보병여단을 뜻한다.[43] 혜산진부대인 제26기계화보병여단을 뜻한다.[44] 상승부대인 수기사 포병여단을 뜻한다.[45] 사단가 만큼이나 자주 불리는 곡이다. 사실상 비공식 사단가[46] 2003년경 바뀜, 사단장의 지시로 억지로 개사되었다는 당시 풍문이 있음.[47] 수많은 군사서적을 집필한 인물이나, 알고 보면 외국 서적을 번역하여 저술하였다. 그리고 번역 역시 본인이 한 게 아니고 부대에서 영어 좀 한다고 하는 병사들을 싸그리 불러모아서 일 시키는...그러다보니 전문 군사용어에서 발번역이 많이 이루어지기도 했다.[48] 디시 수기사갤러리에서 도 여단장을 엄청 깠는데 도 여단장이 대대장 중령시절에 양기사에서 복무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양기사 찌끄레기 출신이 대 수기사를 더럽혔느니 어쩌느니 이야기가 나왔었다.[49] 아쉽게도 비공개로 바뀌었다.[50] 통신, 작전 등...,,[51] 1위-육군 제6보병사단(청성부대. 김종오 장군 지휘. 춘천전투, 백마고지 전투 등), 2위-육군 제1보병사단(전진부대. 백선엽 장군 지휘. 다부동전투, 평양 탈환전 등), 3위-해병대(진동리 전투, 통영 상륙작전, 인천 상륙작전, 도솔산전투 등), 4위-육군 제3보병사단(백골부대. 38선 첫 돌파, 현리전투 등), 5위-육군 수도사단(맹호부대. 송요찬 장군 지휘. 원산탈환.)[52] 기계화부대가 증가하면서 약간 줄긴 했는데 평균적으로 봤을땐 여전히 다른 부대들보다 훈련이 많다.[53] 간부들은 중방(...)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한다. 실제로도 기갑 이외의 보직을 가진 간부들은 이 부대를 별로 선호하지는 않는듯...... 차라리 최전방이면 점수라도 많이 받겠지만 여긴 위치도 어중간한데다 거의 기갑을 보조해주는 역할이라 진급에 크게 어필을 할 수 없는 점이 작용한것으로 보인다. 기갑이다보니 병력이 일반보병부대보다 적은건 덤이고.....[54] 과거부터 연고지 복무병에 한해 간부 출타가능지역인 포천, 남양주 일대까지 출타가 가능했다.[55] 현리로 갈 때 그 유명한 청평을 지나야 한다. 참고로 출타범위로 지정되있는 평내까지도 차가 밀리면 2시간안에 복귀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구리까지 출타범위를 넓힌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는데 가평등지에서 오래 살았던 장병들은 도로사정때문에 힘들거라는 의견을 제시했었다.[56] 이쪽도 운악산이나 각종 계곡들로 인해 정체가 상당한 곳이다. 과거 국도 개량전에는 타이밍 잘못 맞추면 현리에서 청평까지 2시간 가까이 걸렸을 정도로 악명이 자자했으며 신도로가 개설된 지금도 차 밀리면 한 시간 이상은 각오해야될 정도라고...... 참고로 평소엔 15-2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이다[57] 원래 현리일대도 강원도에 있는 여느 군부대 주둔지처럼 바가지가 일상이었다고 한다. 결국 참다못한 한 사단장이 외박 출타지역을 1330-4번이 다니는 곳 즉 청량리일대까지 확 넓혀버린다. 이게 지속되면서 현리일대의 상권이 거의 파멸직전까지 갔다. 결국 상인들이 다시는 바가지를 씌우지 않겠다고 사단장에게 빌면서 사건이 일단락 되었다. 그 후로는 하나로마트등이 생기기도 했고 출타지역이 평내일대까지 넓어지면서 바가지를 씌우는게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