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상로

 

權相老
1. 개요
2. 생애 및 활동사항
3. 친일 행위
4. 동국대학교와의 관계
5. 그 이후
6. 저서
7. 친일 적발
8. 참고문헌


1. 개요


1879(고종 16)∼1965. 법호는 퇴경
종교인·불교학자·교육자, 친일반민족행위자,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동국대 초대 박사학위 소지자이자 초대 총장. 이완용, 이종욱, 변설호, 이회광, 이동인과 함께 한국 불교 최대의 친일 흑역사. 이화여대에 김활란[1] 이 있다면 동국대엔 권상로가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 및 활동사항


1879년 경상북도 문경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8세 때인 1896년 출가해 문경 김룡사(金龍寺)에서 서진(瑞眞)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었으며, 이회광[2]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1906년 서울로 상경해 불교계 최초의 신식학교인 명진학교(明進學校)에 입학했으나 3개월 후 자퇴했다. 이후 강원도 고성군에 있는 건봉사(乾鳳寺)에서 설립한 봉명학 운영에 관여하였고, 김룡사 경흥학교(慶興學校)와 성의학교(聖義學校) 강사를 역임했다. 이회광의 주도로 불교계 대표들이 모여 창설된 종단인 원종(圓宗)에서 1909년 종무 편집부장으로 활동했다.

3. 친일 행위


유교 국가였던 조선은 불교 승려에 대한 여러가지 탄압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일본의 세력이 진입하면서 승려의 도성 출입 금지 정책을 해제하는 등 상대적으로 불교에 우호적인 정책이 나오게 되었다. 불교계에서는 일본과 조선총독부의 정책을 찬양하는 친일 문건을 다수 작성했고, 권상로는 자신이 편집자를 맡은 《조선불교월보》와 《불교》에 친일 논설들을 수록하여 한일 병합 조약 체결 무렵부터 친일적인 성향을 보였다.
1911년 문경 대승사(大乘寺)의 주지가 되었다. 1912년 조선불교월보사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취임해 『조선불교월보』를 발행했으며1939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참사가 되었다. 『매일신보』에 1940년 9월 6일자부터 3회에 걸쳐 「종교계의 임전체제」라는 글을 연재했으며, 같은 해 10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를 맡았다. 1942년 1월 잡지 『불교』에 「'''대동아전쟁(...)'''과 대승불교」라는 글을 발표했고, 같은 해 11월에는 같은 잡지에 「전시의 전 책임을 맡으라」라는 글을 게재했다. 1943년 10월 「육군특별지원병 임시채용규칙」이 공포되자, 11월 국민총력조선연맹에서 주최한 임시특별지원병에 관한 좌담회와 1944년 11월에는 국민총력경기도연맹에서 주최한 종교봉사 국민총진격 강연회에 연사로 참여했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安東相老

4. 동국대학교와의 관계


해방 후인 1946년 4월 동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고, 1949년 5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됐으나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1952년 동국대학교 학장을 거쳐 1953년 2월 '''초대 총장직'''을 맡았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으며, 1962년 동국대학교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활란과 비교해 보자면,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설립자도 아니고 초대총장이 아니며 , 7대 총장이다. 그런데 권상로는 동국대의 설립자는 아니지만, 초대 총장이자 박사학위 소지자다.

김활란은 처음엔 3.1 운동 당시엔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후 일제에게 굴복하며 친일파가 되었다. 그런데 권상로는 '''을사조약 이전'''부터 친일파 였다.
어찌보면 이화여대생이 김활란을 청산하는 것보다 동국대생이 권상로를 청산하는 것이 더욱 급선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상로의 친일행적을 비판하는 동국대의 활동'''은 아무것도 없다. '''도리어 권상로를 한용운(...)'''과 같이 말한 적 있다. 그것도 자랑스럽게''...'''

5. 그 이후


8월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았다. 이외에도 불교포교사시험 검정위원, 불교법계고시위원회 위원장, 불교법규 위원, 불교성전 편찬위원, 문교부 국정교과서 교사위원(校査委員), 대한고서간행회 국역위원, 대한종교신도연맹 고문, 신라가야문화연구소 위원, 우리말팔만대장경편수위원회 위원장, 중앙불교연구원 원장,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불교조계종원로회 원장, 현대불교사 사장, 불교사상사 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5년 4월 19일 사망했다. 입적한 뒤 조계종에서 대종사(大宗師)의 법계를 받았다.

6. 저서


조선불교약사(朝鮮佛敎略史)
조선불교사(朝鮮佛敎史)
삼국유사(...)역강(三國遺事譯講)
고려사불교초존(高麗史佛敎抄存)
이조실록불교초존(李朝實錄佛敎抄存)
한국불교사료(韓國佛敎史料)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한국지명연혁고(韓國地名沿革考)

7. 친일 적발


권상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65∼60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8.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1(민족문제연구소, 2009)
『친일파 99인』(반민족문제연구소, 1993)
「권상로와 삼국유사」(고운기, 『한국불교사연구』5, 2014)
「퇴경 권상로의 삶과 생각」(조혜룡, 『문학·사학·철학』14, 2008)
「권상로 불교학의 근대적 성격」(이재헌, 『불교학연구』4, 2002)

[1] 심지어 김활란조차도 처음엔 독립운동을 하고 3.1운동 이후 친일파로 변절했는데, 이 인간은 을사조약 이전부터 일본의 국권피탈을 옹호하고 앉아있었다.[2] 불교계의 이완용으로 불릴 정도의 친일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