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인

 

李東仁
1849년 ~ 188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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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이면?
3. 매체에서


1. 소개


조선 말기의 승려이며 개화 사상가이다.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정양과 함께 1세대 개화파에 속한다.
이동인은 개화파 분화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온건 개화파에도 급진 개화파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치만 딱히 말하자면 급진파에 가깝다. 왜냐하면 친일 성향이 굉장히 강했기 때문이다.
이동인은 일찍 개화에 눈을 떠서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과 함께 개화파들에게 개화 사상을 전해 주었다. 또한 일본어를 배워 1879년에 김옥균의 도움으로 일본에 밀항했다. 일본에 가서는 하나부사 요시모토, 후쿠자와 유키치, 이토 히로부미, 김홍집 등과 접촉하여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또한 귀국한 뒤에는 알고 지내던 김홍집, 김옥균 뿐만 아니라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민영익 등과도 친하게 지냈다.
1881년 2월에는 신사 유람단을 추진하여 유길준, 윤치호 등의 유학생을 보내기도 했다. 이동인은 1881년 3월에 영국과 독일을 비롯한 열강들과 군함 구매 비밀 교섭[1]을 하다가 실패한 뒤 살해되었는데, 암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실종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2. 이면?


그런데 나중에 이동인은 아사노 도진(朝野東仁)이라는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근현대 친일파 연구의 권위자인 임종국에 따르면 창씨 개명 1호. 승려라는 것도 일본식 불교인 정토진종 오타니파(眞宗大谷派)의 본찰인 히가시혼간지에서 법계를 받았다. 이전에 범어사와 통도사에서 정식 승적에 올랐는지는 이론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 시기에 일본에서 법계를 받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개화승 부분도 논란이 있어서, 임종국은 이동인을 이중 스파이로 지목했다. 승려 겸 사학자 임혜봉도 그를 일본의 조선 침략 세력에 부화뇌동한 전형적인 친일파로 평가하였다. 왜냐하면 이동인이 개화 문물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일본 정부의 침략 밀명을 받고 부산에 처음 상륙한 일본 불교의 접근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회광과 함께 구한말 ~ 일제 시대 불교와 급진 개화파의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동인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20여년 전에 죽어서 공식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분류하지는 않는다.[2][3]

3. 매체에서


사극 풍운에서는 김순철이, 찬란한 여명에서는 김갑수가 해당 배역을 맡아 66회까지 극중 주인공으로 활약했다. 김갑수의 연기는 인상적이었으나, 찬란한 여명 항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신봉승 작가의 주인공 보정이 잔뜩 들어가서 해당 인물의 실제 행보에서 상당히 미화되었단 것이 문제.

[1] 이쪽 관련은 양무호를 참고할 것.[2] 대한민국 정부나 민족 문제 연구소 같은 친일파 연구 단체들도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분류하지 않는다. 당장 이완용같은 경우도 이동인이 활동하던 시절엔 친러파였던 것 등 개화기 초기의 친일 행적에 대해서는 평가를 신중하게 한다.[3] 실제로 김옥균, 서광범, 어윤중, 김홍집 등도 개화기 초기에 친일파로 활동했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보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